- 카카오톡 성공 비결은 커뮤니케이션 니즈 충족과 타이밍
- 당장의 수익보다 사용자 만족이 우선
- 더 이상 이룰 꿈 없어 NHN 떠나
- 어린 시절부터 퀴즈 대회 기획한 ‘킹 오브 게임’
- 가족과 1년의 안식년 보내며 버킷 리스트 실천
- “콘텐츠 가진 사람 누구나 돈 버는 ‘오픈 플랫폼’ 만들겠다”
2월 말 이 앱(스마트폰용 응용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한 스마트폰 사용자가 800만명을 넘어섰다.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의 80%가 카카오톡을 이용한다. 활성화 측면에서도 단연 앞선다. 이용자의 90%가 1주일 안에 다시 ‘카카오톡’을 찾는다. 독보적인 기록이다.
지난해 3월 출시된 카카오톡의 강점은 무엇일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와 달리 무선 인터넷에서 무료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을 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나 유학 중인 장거리 연애 커플이 특히 이 서비스에 열광했다. 다자(多者) 간 채팅이 가능한 것도 차별화 포인트. 전화번호가 저장된 사람들과 자동으로 연결해주는 기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벤처 왕의 귀환
카카오톡이 더욱 관심을 모은 건 한게임·NHN 창업자 김범수(45) 카카오(kakao) 이사회 의장의 컴백작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IT(정보기술) 산업의 역사를 관통하는 산증인이다. 1990년대, 삼성 SDS에서 PC통신 ‘유니텔’을 개발했다. 퇴사 후 설립한 것이 국내 최대 게임포털 한게임이다. 2000년 한게임을 네이버컴과 합병하며 그는 NHN의 공동창업자가 됐다. 매출 1조원이 넘는 국내 최대 포털을 일군 그는 2007년 홀연히 회사를 떠났다. “100명의 ‘벤처 전사’를 키우겠다”는 꿈을 밝힌 채. 새로운 사업구상으로 두문불출한 지 3년. 그는 IT업계에 화려하게 복귀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3월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세븐벤처밸리 카카오 본사에서 김범수 의장을 만났다. 오렌지빛 니트 상의에 면 팬츠, 스니커즈…. 벤처기업 경영자답게 ‘권위’보다 ‘유연함’이 느껴지는 옷차림이다. 그의 새로운 트레이드마크는 자유로움의 상징인 콧수염. “잘 어울린다”는 인사에 그는 수줍게 웃었다.
“NHN에서 나온 후 수염을 길렀죠. 주변 반응이 좋았어요. 이제 하나의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샤이(shy)하다’던 지인의 전언과 달리, 그는 ‘열정적인 달변가’였다. 시장에 대한 통찰이 넘쳤고, 세상을 보는 ‘관(觀)’은 뚜렷했다. 꿈을 말할 때는 소년 같은 설렘마저 느껴졌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온몸으로 체득한 깨달음이기에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 ‘카카오톡’ 앱 다운로드 수가 800만건을 넘었습니다. 이렇게 인기 앱으로 자리 잡은 비결이 뭘까요?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용자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거죠. 휴대전화에서 SMS(문자메시지)와 전화 기능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면서 카카오톡이 SMS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강력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 거죠.”
▼ 사실 ‘카카오톡’도 미국의 ‘왓츠앱’(What’s APP)을 벤치마킹한 모델입니다. 원조를 뛰어넘기 위해 무엇을 차별화했습니까.
“사실 이 모델은 PC에서 사용하던 메신저와 유사해요. 전화번호부와 연동하는 기능을 왓츠앱이 새롭게 도입한 거죠. 저도 그 아이디어에 감동받았는데, 왓츠앱이 빠르게 퍼지던 단계라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하면 늦지 않았을까 고민했어요. 우리에게 천운이 따른 건, 왓츠앱이 유료화를 시작한 거죠. ‘이건 분명히 서비스 모델인데 다운로드 모델로 가네’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겠다 싶었어요. 카카오톡에는 세계 최초로 ‘그룹채팅’ 기능을 추가했고, 한쪽만 번호를 알아도 연결해주는 기능을 넣었습니다. 한 직원이 툭 던지듯 낸 아이디어였는데, 거기에 꽂혔죠. ‘왓츠앱’은 양쪽 모두 전화번호가 있는 사람들끼리 연동시켜주거든요. 한쪽만 번호를 알아도 연결해주는 기능은 포지티브한 면과 네거티브한 면이 모두 있죠.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해보니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더라고요.”
▼ 긍정적인 부분으로는 어떤 게 있나요?
“편의성이죠. ‘사용자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장점이에요. 친구를 일일이 등록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줬죠. 아이폰, 갤럭시S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바뀌는 시점인데, 카카오톡 덕분에 계속 연결될 수 있었어요. 결국 진입장벽을 낮춰 편의성을 높이는 ‘선(先) 연결, 후(後) 처리’ 전략을 택했죠.”
▼ 번호를 한쪽만 알아도 연결해주는 기능은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습니다. 연인이 헤어졌는데, 한쪽이 번호를 갖고 있어 카카오톡 때문에 곤란해진다거나.
“연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차단하면 되는데….”
▼ 청와대에서도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로 카카오톡 금지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건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쪽만 전화번호를 가진 경우 ‘친구추천’에 뜨는 것이지 상대방에게 전화번호가 노출되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전화번호를 모른 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남자들이 카페에 앉아 있는 예쁜 아가씨를 보면, 전화번호 대신 ‘카톡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한대요. 전화번호 따기는 좀 어렵잖아요. ‘카톡 아이디’는 알려줘도 맘에 안 들면 차단하면 되니까요.”
▼ 메시지가 노출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카카오톡을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어요.
“사실 카카오톡이 어떤 앱보다 보안이 잘돼 있어요. 개인정보 얘기가 워낙 민감하게 나와서 초반부터 암호화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최근 누군가가 ‘카카오톡은 3G망에서 암호화를 안 하고 메시지를 보낸다’는 글을 올렸는데, 여기에 대해 저희가 설명했어요. 3G는 데이터망 자체가 암호화돼 있기 때문에, 메시지가 유출될 수 없습니다. SMS(문자메시지)도 암호화를 안 하거든요. 오히려 ‘이중 암호화’를 하면 시간이 걸리고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반대로 와이파이(Wifi·무선 인터넷)망은 공개된 망이기 때문에 모든 데이터를 암호화해서 내보내죠.”
小貪大失
사람들이 카카오에 대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어떻게 돈을 버는가’다. 앱이 무료인 데다가 광고조차 없기 때문이다. 현재 카카오톡의 유일한 수익원은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기프티콘’ 서비스다. 수익 창출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의도적으로 (수익 모델을) 안 넣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카카오가 꿈꾸는 세상이 워낙 크다보니까, 지금은 ‘사용자 풀을 넓히고 사용자에게 최대한 혜택을 주자’는 쪽입니다. 사용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광고를 넣는 건 지금 단계에서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수익은 트래픽이 늘고 사용자의 로열티가 높아지면 당연히 따라오겠죠. 수익모델을 만드는 건 고민이 아닙니다. 할 게 너무 많은데 뭘 선택할 것이냐가 문제죠.”
▼ 그렇다면 회사는 어떻게 운영되나요?
“아직은 투자 단계라고 보고 있어요. 안정성 강화를 위해 서버를 매달 100대씩 들여오고 있죠. 앱을 유료로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히 제가 예전에 돈을 벌어놓은 게 있어서 약간의 여유가 있어요. 시간을 길게 보고 비즈니스할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또 IT업계 여러분이 투자해주셔서 자금 문제는 별로 없어요. 과거 인터넷 회사를 할 때는 서버 장비가 굉장히 많이 필요했는데, 여기서는 트래픽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메시지 몇 줄, 작은 용량의 사진이 오가는 정도니까요. 인프라 구축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건 아니에요.”
1월 넥슨의 김정주 회장,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 등 14명이 카카오에 53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이는 국내 인터넷 대가들이 카카오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 김범수 의장의 얼굴 보고 투자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답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직원들의 영어이름을 부르며 격의 없이 소통한다.
‘네트워크 효과’
카카오톡은 해외에서도 인기다. 210개국에서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에서는 카카오톡의 영어 버전이 애플 앱스토어 앱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다. 과거 한국 IT서비스가 세계 시장에서 고전한 것을 생각하면,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다. 카카오톡이 해외 시장에서도 통한 이유는 뭘까.
“애플과 구글이 만들어준 글로벌 마켓이 존재해서죠. 애플과 안드로이드 앱스토어에 앱을 올리면 전세계에 유통되니까 글로벌화하기 정말 쉬워졌어요. 저희는 해외 쪽 담당자가 아직 1명도 없어요. 한국 사용자 숫자가 워낙 빨리 늘어나서요. 한게임이 해외 시장을 개척할 때는 그 나라에 가서 회사를 세우고 사람을 모으고 마케팅을 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수한 서비스와 콘텐츠가 있으면 해외로 쉽게 뻗어나갈 기회가 생긴 거죠.”
카카오톡의 등장 후 유사한 서비스가 쏟아졌다. 다음의 ‘마이피플’. 네이버의 ‘네이버톡’, SK커뮤니케이션즈의 ‘네이트온UC’…. 대부분 국내 대표 포털 사이트가 만든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다. 이들은 PC 연동, 무료 음성 통화 서비스 등 저마다 차별화된 기능을 내세우며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카카오톡에 미치지 못한다.
▼ 후발주자 중 가장 위협적인 서비스는 뭔가요.
“아직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못 받고 있어요. 카카오톡은 3월 말 10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연말에는 2000만명까지 갈 거 같아요. 그 정도 볼륨을 갖게 되면,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선점된 기술이나 서비스를 으레 사용하는 것)’는 단순히 기능 추가로 쫓아올 정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용자 수가 700만명 대 900만명이라면 위협적이겠죠. 메신저는 생각보다 기능을 차별화할 게 많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 수가 몇이냐’죠. 메신저가 한 번 자리 잡으면 옮기기 쉽지 않거든요. 물론 저희도 ‘100가지 기능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기능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얘기를 잠시 접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의 ‘창업자 DNA’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서다. 김 의장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남3녀 중 셋째다. 사업가인 부친과 어머니는 자유방임형 교육가였다. 아들이 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맡겼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제게 뭘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어요. 개구쟁이처럼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공부도 알아서 했어요. 어린 시절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면서 문제해결능력을 키운 것 같아요. 어린아이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는 데, 요즘 부모는 그걸 못 기다리죠. 정답을 알려주고 그것만 하게 해요. 서울대 교수인 동기가 하는 말이, ‘요즘 학생들은 아는 건 많지만 문제해결능력은 없다’고 하더군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아이들이 혼자 헤쳐나가도록 기회를 줘야 합니다. ‘창업자 DNA’의 키는 문제해결능력이에요.”
무엇이든 ‘게임화’하기
▼ 어린 시절부터 ‘게임 마니아’였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게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재밌게 하는 걸 좋아했어요. 반에서 퀴즈 대회를 열고 1등 한 친구에게는 상품을 줬어요. 백과사전을 뒤져 직접 퀴즈를 만들고 노트나 연필을 포장해 상품을 준비했죠.”
공학자를 꿈꿨던 그는 재수 끝에 198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한의대를 가라”는 부모의 권유를 물리치고 택한 길이다. 대학 시절 그는 ‘킹 오브 게임(king of game)’으로 불렸다. 술자리에서 계속 게임을 하며 술을 마셔서 붙은 별명이다. 그는 무엇이든 ‘게임화’하는 자신의 특기를 훗날 비즈니스에 적용했다.
서울대 대학원(산업공학)을 졸업한 그는 1992년 삼성 SDS에 입사했다. PC통신 ‘유니텔’ 개발과 운영을 맡았다. 그가 창업의 모티프를 얻은 계기는 유니텔에서 한 이벤트를 진행하면서다.
“이건희 회장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취임 기념으로, 제가 88문제를 가장 빨리 푼 사람에게 노트북을 주는 이벤트를 기획했어요. 신문에 나올 정도로 이 이벤트에 사람이 몰렸죠. 이렇게 간단한 게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 흩어져 있던 여러 아이디어가 하나로 결집돼 떠올랐어요.”
1998년 그는 삼성SDS를 퇴사해 한게임을 세웠다. 퇴사 당시 그가 가진 것은 500만원의 마이너스 통장과 사업 아이디어가 전부였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직장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그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입사 후 5년 정도 지나자 비전이 보이지 않았어요. ‘10년 후 내 모습이 저래도 될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죠. 또 IT기업에 있다보니 인터넷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게 잘 보였어요. 그래서 덜 망설이고 나올 수 있었죠. 남이 ‘잘될 거 같은데’ 생각할 때 저는 ‘무조건 되지’ 하고 뛰어들었어요. 회사가 언제 수익을 낼지 감이 안 잡혀서, 일단 1억2000만원을 빌려 80평(264㎡)짜리 PC방을 차렸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PC방일 거예요. 최고 사양의 컴퓨터에 인터넷을 연결했죠.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안 되고 게임만 할 수 있는 PC방이 많았거든요. 다행히 PC방이 잘되어서 초기 한게임의 돈줄이 됐어요.”
한게임은 바둑, 오목, 장기, 고스톱 등 다양한 게임을 온라인에 옮겨와 인기를 모았다. ‘인류가 수백년간 해온 게임은 온라인에서도 통한다’는 그의 가설이 맞아떨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혼자서 혹은 모르는 사람들과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원래 취지는 세대 차이 없이 온 세대가 머무르는 ‘게임 동산’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마치 디즈니랜드 같은. 그런데 사람들이 고스톱과 포커만 많이 해서 아쉬움이 남죠.”
“이해진 NHN 의장 자주 연락”
2000년 한게임은 이해진 NHN 이사회 의장이 이끌던 네이버컴과 전격적으로 합병한다. 두 회사의 합병은 ‘검색과 게임’이라는 양대 축을 구축하며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김범수 의장과 이해진 의장은 서울대 86학번 동기이자, 삼성SDS 입사 동기다. 이해진 의장이 ‘치밀한 전략가’라면, 김범수 의장은 ‘승부사 기질의 사업가’에 가깝다. 두 사람은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NHN을 국내 최고 인터넷 기업으로 키웠다.
▼ NHN 대표로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업적은 무엇인가요?
“글로벌 시장 진출이었어요. 제가 가장 먼저 얘기했죠. 한게임재팬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100번 정도 오간 것 같아요. 한게임재팬이 일본에 있는 한국 회사 중 가장 클 거예요. 삼성재팬도 영업과 마케팅 조직이 있을 뿐이지, 일본에서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한국 회사가 거의 없어요. NHN재팬에서는 게임 매출 비중이 더 높습니다.”
▼ 중국과 미국 시장에서는 고전하셨죠?
“중국에서는 그곳의 1위 게임회사에 1000억원을 투자해 50%의 지분을 산 뒤 저희가 운영해왔죠. 하지만 매각 쪽으로 가닥을 잡았어요. 중국에 나간 성과는 아웃소싱 회사를 만들어 비용을 크게 절감했다는 점이에요. 미국에서도 어려운 점이 많았죠. 하드웨어와 달리, IT 서비스는 해외에서 성공하기 어려워요. 그 나라 문화를 서비스에 녹여내야 하니까요. 구글이나 야후도 한국 시장에서 1등을 하지 못했잖아요.”
2007년 8월 그는 돌연 NHN USA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를 둘러싸고 분분한 소문이 돌았다. NHN 내부에서 ‘게임 인맥’이 ‘검색 인맥’에 밀렸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혹자는 “김범수 의장이 이해진 의장에 대한 애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저도 그런 얘기 들었는데,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에요.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더 이상 열정이 생기지 않았어요. 제가 ‘밸류’를 줄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해진 의장에게는 미안했죠. 게임 쪽부터 해서 NHN을 제가 다 총괄하고 있었는데, 미국에 갔고 결국 NHN을 떠난다고 했으니까. 이해진 의장 입장에서는 ‘때가 왔나보다’ 하는 느낌이었을까요. 제가 떠난다니 ‘창업자가 퇴직한다는 말이 맞느냐’는 반응이었어요.”
▼ 이해진 의장과는 연락하세요?
“그럼요.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봐요. 이해진 의장이 싱가포르와 일본을 왔다갔다 해서 자주는 못 보지만. SDS 입사동기로 만나 그때부터 신뢰가 있었으니까. 친해요. 요즘은 카카오톡과 네이버가 시너지 낼 만한 게 있는지, 그런 걸 얘기하죠.”
▼ NHN의 지분은 갖고 계세요?
“1% 정도 갖고 있어요. 갖고 있던 지분의 반 정도는 판 거 같아요. 새로운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서.”
▼ NHN 등 국내 대형 포털이 모바일에서는 부진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 노코멘트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포털을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워요. 그쪽도 많이 고민하고 있을 텐데. NHN은 ‘느리지만 확실히 한다’고 얘기하잖아요. 모바일까지 잘 적응하면 몇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거예요.”
비즈니스는 시장에서 찾아야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밑바닥으로 돌아왔다. 2007년 말 그는 아이위랩을 세워 한국과 미국에서 인터넷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초기엔 성과가 없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소셜 북마크 서비스 ‘부루.’ 많은 사람이 북마크한 웹사이트를 공유하는 서비스인데, 미국에서 시작한 탓에 마케팅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네티즌의 추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위지아 서비스도 선보였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수백 건의 아이디어를 검토하면서 3년 만에 나온 성공 아이템이 바로 카카오톡이다.
“제 최고의 실패는 ‘부루’였어요. 머릿속에서 괜찮겠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시작한 게 잘못이었어요. 그때 비즈니스 아이템은 내 머릿속이 아니라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카카오톡을 만들 때는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느냐’를 가장 먼저 살펴봤어요. 스마트폰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라는 결론을 내리고 여기에 최적화된 앱을 만든 거죠.”
▼ 카카오의 이전 회사명인 ‘아이위랩’의 뜻이 ‘이노베이션 위드 인터넷(Innovation with Internet)’이라고 들었습니다. 혁신이란 뭘까요?
“제게 혁신은 갑자기 ‘점프 업’ 하는 게 아니라, 흩어져 있던 생각이 퍼즐조각 맞추듯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신기술, 새로운 니즈, 시대의 변화…. 이런 요인이 무질서 속에서 한순간 결합하며 스파크가 일어나는 거죠. 그런 스파크는 한 분야에 대해 계속 몰입하고 고민해온 사람에게만 생깁니다.”
카카오는 현재 3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그중 50%가 개발자다. 이번 공채를 통해 60명 넘는 직원을 선발할 계획이다. 모바일 인터넷 전화(m-VoiP) 개발을 담당할 엔지니어 등 다양한 분야의 직원이 새 식구로 합류한다. 카카오는 어떤 인재상을 찾고 있을까.
“열정이 있는 사람이요. ‘열정 없이는 위대한 일이 이뤄질 수 없다(Nothing great achieved without passion)’는 말을 좋아합니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절실하냐’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나타나죠.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열심히 하는 게 바로 행복이에요. 돌이켜보니, 제가 충분히 놀아도 되는데 다시 돌아온 건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새 사업을 구상하면서 그는 ‘인생 2막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음악에 빠져들기도 했다. 미셸과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이 쓴 ‘생각의 탄생’은 그가 사물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건 가족과 보낸 1년의 안식년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100가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 뒤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아이들과 탁구를 치고 자전거도 함께 탔다. 네 식구가 팀을 나눠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즐겼다. 딸과 소통하기 위해 아이돌 빅뱅의 노래를 섭렵한 것은 기본. 가족과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며 재충전의 시간도 가졌다.
“회사를 다니며 기러기 아빠로 살았어요. 아이들은 5년간 미국에 있었고, 저는 2년간 미국에서 가족과 지냈죠. 2009년 더 이상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싫어 아이들에게 ‘1년간 학교를 쉬게 해줄 테니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당시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딸이 중학교 3학년이었죠. 네 식구가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예전에는 아이들과 소통한다며 잔소리만 했는데, 팩트만 얘기하는 건 소통이 아니더라고요.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게 진정한 소통이죠. 그 수준까지 가는데 꽤 시간이 걸렸어요.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가족이 진짜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 아이들도 공대를 지망하나요?
“아들은 경영·경제 쪽에 관심이 많고 딸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여름 방학 때 모바일 앱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경험도 쌓고 아이들의 내공도 확인해볼 겸.”
유연성과 포용력
1년간의 치열한 휴식은 그에게 에너지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사했다. 그 때문일까. 카카오는 5년간 근무한 직원에게 3개월간 유급휴가를 준다. 내년이면 이 제도의 첫 수혜자가 생긴다.
“직원들이 이 휴가 제도를 가장 좋아해요. 사람에게는 삶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카카오의 또 다른 독특한 기업문화는 직원들끼리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른다는 점이다. ‘계급장 떼고’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다. 김 의장은 회사에서 브라이언으로 불린다.
“직책이 붙기 시작하면 토론할 때 불편하잖아요. 조직이 발전하려면 사람들이 언제나 토론하고 충돌하고 부딪쳐야 합니다. 물론 충돌에는 서로간의 신뢰가 전제돼야 하죠. 충돌 끝에는 답을 내야 하고요. 답을 내면 모두 거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김 의장은 유연성과 포용력을 갖춘 리더다. 방향이 정해지면 과감히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행여 자신의 선택이 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없을까.
“제게 승부사적 기질이 있어요. ‘틀린 길을 선택했더라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경솔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단 결정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요.”
카카오 이외에 그가 만든 또 하나의 벤처회사가 있다. 아이패드와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포도트리’다. 3월 말, 영어 학습 앱 ‘슈퍼 0.99’ 시리즈와 한영 버전 위인만화 전집 ‘WHO?’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가 모바일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터넷 비즈니스에서는 불법 복제 때문에 디지털 콘텐츠가 성장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모바일에서는 불법 복제가 어려워 콘텐츠가 빛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바일 콘텐츠가 수익을 내려면 압도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그래서 택한 것이 영어교육 콘텐츠죠. 영어에 접근하는 방식을 차별화했는데, 저희 아이들이 카드로 단어 외우는 걸 보며 힌트를 얻었어요. 앱에서 특히 ‘워드 챌린지’가 재밌어요. 단어 세계대회에 참가할 수 있죠.”
그는 카카오와 포도트리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최고경영자는 따로 있다. 카카오는 김 의장의 대학후배인 이제범 대표가, 포도트리는 NHN 마케팅센터장 출신인 이진수 대표가 이끈다. ‘100명의 벤처사업가’를 만들겠다는 목표의 첫걸음을 뗀 셈이다.
“저는 이사회에서 결정할 정도의 일만 하려고 합니다. 1년 사업계획을 잡고, 큰 방향을 제시하는 거죠. 카카오에서 제가 한 일은 ‘모바일에 주력하자’는 목표를 정한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게 더 많은데 속도조절을 해야 할 것 같아 다른 회사 만드는 건 미루고 있어요.”
창업자 DNA
PC통신에서 인터넷, 모바일까지. 네트워크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김 의장은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충실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한국 IT산업 토양에서 그는 끝없는 도전으로 ‘창업자 DNA’를 전파하는 중이다. 성공한 창업가가 계속 탄생하기 위해서 한국의 산업 여건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창업이 성공하려면 사람과 아이템, 자본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본이 끊겨 있어요. 제가 한게임 창업에 실패했다면 신용불량자가 돼 재기할 수 없었겠죠. 몇 번의 시도 끝에 창업이 성공을 거두는 건데, 한국에서는 개인이 짊어질 실패 리스크가 너무 커요. 반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아이디어만 괜찮다 싶으면 돈이 들어와요. 투자자도 여러 사람이 만든 펀드로 투자하는데 ‘10개 중 1,2개만 성공한다’는 걸 감안하니까 데미지가 크지 않죠. 다행히 모바일 세상이 열리면서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기업가에게도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카카오의 꿈은 아이디어나 지적 콘텐츠를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돈을 벌게 만드는 겁니다. ‘오픈 플랫폼’인 카카오톡을 통해 이용자가 좋은 글이나 사진, 영상을 사고팔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어요.”
김범수 의장은 남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위치에서 다시 모험을 떠났다. 그를 설레게 한 건 ‘달콤한 안정’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도전’이었다. 그 원대한 꿈의 크기야말로 김 의장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큰 것을 꿈꿔야 자신도 변하고, 사소한 것을 물리칠 수 있는 도량과 배려도 생깁니다. 그래야 세상을 크게 보는 안목도생겨요. 제가 좋아하는 일본 CF 중 ‘꿈으로 끝내지 않고, 꿈을 끝내지 않고’라는 카피가 있어요. 그 말처럼 후회 없이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