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br>●1945년 충남 아산 출생<br>●대전상고, 서울대 경제학과<br>●現 문화미래포럼 대표<br>●‘비명을 찾아서’ ‘소수를 위한 변명’ 등
젊었을 적에 내가 많이 들은 말은 ‘원칙주의자’였다. 실제로 나는 무슨 일에서건 원칙을 중시하고 원칙에 관한 한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 원칙을 따지는 성격은 타고난 듯하다. 아주 어릴 적에 식구들이 급해서 남의 고무신을 신고 나서면, 내가 따라가면서 ‘엄마 셩’, ‘고모 셩’하면서 남의 신을 신었음을 알렸다고 한다.
원칙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사람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둘레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츰 불완전한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이제는 나도 원칙을 지키는 일이 정말로 중요한 경우에만 원칙을 확인하고 어지간한 일에선 내 주장을 내세우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로 미뤄 짐작하면, 나에겐 아직 원칙주의자의 면모가 뚜렷한 모양이다.
원칙주의자로서 나 자신을 덜 들볶고 둘레 사람들을 덜 피곤하게 하는 방법은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지니는 것이다. 일을 미리 꾸미기보다 기회가 되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원칙만을 정하고 세부사항들에선 상황에 맞추어,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타협해서 일을 추진한다. 기회주의자가 뒤늦게 원칙주의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 차츰 원숙해져서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지니는 것이 낫다. 다분히 자기정당화의 성격을 지닌 얘기지만, 나는 그것이 그른 얘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게다가 큰 원칙만을 정하고 나머지는 상황과 기회에 맡기는 기회주의는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지닐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남보다 자유롭다. ‘질서가 없다면 자유가 없다’는 이론과 맥이 통하는 얘기다. 인과율의 엄격한 질서가 없다면, 우리는 우연과 혼돈에 부대낄 따름이지 자유의지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6·25전쟁으로 뿌리 뽑힌 채 떠돈 집안에서 자라나면서도, 내가 지식인이 된 것은 그런 느긋함과 자유로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요즈음 나는 연극 공연에 힘을 많이 쏟는다. 내가 주업인 문학과 거리가 있는 연극에 참여하게 된 것도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원칙주의자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노무현 정권 아래서 우파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문화미래포럼’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종북세력이 득세해서 “적화는 되고 통일은 안 되었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위험했던 그 시절에 좌경화가 가장 심각했던 곳은 문화예술 분야였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높이고 우리 사회가 이룬 일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나라 지키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젊은 사람들이 일하고 나는 ‘고문단’의 일원으로 뒤에서 돕기로 했었는데, 명망이 있는 사람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며 강청을 받은 내가 엉겁결에 대표가 되었다.
그런 일을 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난감했다. 그래도 문단에서 나 혼자 예술적 사회참여(artistic engagement)를 해온 터라, 단체의 대표를 맡은 것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연극 공연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대다수가 우리 사회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드러냈다. 특히 영화가 문제적이었으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을 찬양하며 북한군은 똑똑하고 군기가 엄정한 군대로 그리고 국군과 미군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군대로 묘사해서 반미 감정을 북돋웠다. 정부에서 영화 제작에 큰 자금을 지원해왔으므로, 대한민국을 폄하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정부에서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양상이었다. 실은 지금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예술 작품 속에 녹아든 이념은 쉽게 그리고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므로, 그런 작품들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독은 무척 심각하다.
그런 반국가적 작품들에 맞설 길은 당시나 지금이나 마땅치 않다. 편향된 예술 작품엔 올바른 예술 작품으로 맞서야 하는데,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한민국을 높이는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연극은 비교적 짧은 시일에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도 만들 수 있다.
내가 올린 첫 연극은 북한 핵무기의 위협을 다룬 ‘그라운드 제로’였다. 졸작 희곡 ‘그라운드 제로’에 바탕을 두고 정일성씨가 각색해서 연출했다. 고맙게도,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돈 걱정을 덜었다. 이 작품이 2007년 여름에 공연되자, 철없는 젊은이들이 ‘통일 되면 북한 핵무기는 우리 것이 되잖아요’라는 얘기를 하던 시절에 나라 걱정을 하던 분들이 뜨겁게 격려해줬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희곡이 연극에서 제대로 구현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이 연출한 작품은, 연출자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아쉬운 대목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인 ‘아, 나의 조국!’에선 내가 직접 연출을 맡았다. 그러나 연극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은 터라, 스태프의 도움 덕분에 작품을 올릴 수 있었다.
‘아, 나의 조국!’은 2006년 조창호 중위의 장례가 ‘향군장(葬)’으로 치러진다는 신문 보도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가슴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면서, 입에선 “영웅을 이렇게 대접하다니”하는 탄식이 나왔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연희전문 1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군대에 지원해서 장교로 임관했고, 이어 9사단에 배속되어 관측장교로 복무했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에 9사단은 궤멸되었고, 많은 국군 장병이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도 포로가 되어 북한군에 인계되었다. 그는 북한군 8사단에 편입되었는데,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 그 죄목으로 북한 군사법정에서 13년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1994년에 무려 43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중국을 통해서 귀환했다. 그는 북한을 탈출해서 돌아온 첫 국군 포로였다. 이처럼 조창호 중위는 진정한 영웅이었지만, 당시 집권한 좌파 정권은 그런 영웅에 걸맞은 장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초라한 대접을 보고 내가 느낀 분노와 부끄러움에서 이 작품이 나왔다.
‘아, 나의 조국!’은 ‘전우야 잘 있거라’ ‘외나무 다리’ ‘전선 야곡’ ‘단장의 미아리 고개’ ‘꿈에 본 내 고향’ ‘꽃 중의 꽃’ ‘굳세어라 금순아’ 등처럼 6·25 전후에 널리 불렸던 대중가요를 대사로 쓰는 악극이다. 1950년대에 인기 높았던 여성 악극을 본떠서, 출연 배우를 모두 ‘문미포 여성 악극단’ 소속 여배우로 캐스팅했다.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2010년 3월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뒤 지방 공연과 호주에서 공연했으며 2011년 2월에는 제1기갑여단을 찾아 위문 공연을 했다. 앞으로 해외 공연에 주력할 생각이다.
지금은 영어 연극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을 준비하고 있다. 6·25전쟁에서 가장 영웅적 전투로 평가되는 ‘장진호 전투’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1950년 11월 북한으로 진격한 아군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했다. 당시 흥남에 상륙해서 황초령을 넘어 장진으로 올라갔던 미군 해병 제1사단은 압도적으로 많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어도 오히려 중공군에게 훨씬 큰 손실을 입히면서 흥남으로 물러났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는 미국 사람들에겐 6·25 전쟁을 상징하는 싸움이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미군 해병대 위문 공연을 염두에 두고 구상되었다. 지금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해병대는 유사시 한반도에 맨 먼저 투입될 부대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부대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그들의 존재조차 모른다. 요즈음은 우리가 미국의 도움 덕분에 북한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나는 그런 사정이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웠고 그런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씻으려고 이 작품을 시작했다.
이 작품도 이미 나온 노래들을 이용한 악극이다. 배우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아, 나의 조국!’과 같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삼성그룹, 그리고 SK그룹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2011년에 첫 공연을 할 예정이다. 여건이 마련된다면, 해마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를 찾아 위문 공연을 하고 싶다.
예술적 사회참여로서 하는 연극 활동이므로, 나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널리 선양하는 작품들을 만든다. 그동안 북한은 예술 작품을 통한 선전선동(agitprop)에 주력해왔고 우리 사회 안에서도 좌파 세력들이 북한을 대신해서 대한민국을 흔드는 활동을 효과적으로 해왔다. 나는 대한민국을 위한 선전선동 활동으로 연극을 하는 셈이다. 더러 ‘예술가가 선전선동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물음도 받지만, 나라가 위급하면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들을 나라를 지키는 도구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