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경<br>●1974년 서울 출생<br>●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국립음악원·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br>●성균관대학교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 수료, 소프라노<br>●오페라 ‘리골레토’ 등 공연
그곳은 유학시절 학교수업과 레슨 사이의 자투리 시간을 죽이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그곳의 반대편은 항상 관광객들이 웅성대고 있었지만 그곳만은 늘 조용했다. 또 여름에는 그늘져 시원했고 겨울에는 햇볕이 들어와 따뜻했다. 그곳에서 나 역시 처음에는 관광객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혹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의 칼에 죽는 모습을 떠올리며 비감해졌고, 그들을 기념하는 웅장한 성당이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 같은 걸출한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져 바티칸의 보물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며 역사의 반전과 보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는 그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으니까.
대리석 기둥의 받침대는 넓어서 편하게 앉아 책을 읽기에 좋았고, 돌기둥에 등을 기대고 광장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거나 사색에 빠지기에도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20대의 화창한 날을 보냈다. 서투른 노래는 내일이 있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멋진 남자는 눈앞의 광장에 수없이 널려 있어서 언제나 골라잡으면 될 것 같았고, 불확실한 미래는 내가 펼치는 그럴듯한 상상 때문에 불안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때는 한없는 공상에 빠지면서 어떤 때는 한없는 망상에 젖으면서 20대가 주는 가능성의 희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다섯 번째 기둥 밑에서 나는 ‘혼자 놀기의 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남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한 시절 그곳에서 나는 세상물정 모른 채 참으로 행복했다.
지금 나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일을 하고,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피곤해지는 생활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되풀이’ 삶을 살고 있다. 목표는 생활 앞에서, 열정은 현실 앞에서 날개를 접고 시간만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이때, 나는 다섯 번째 기둥 밑을 자주 그리워한다. 그곳에 가고 싶다. 잠시나마 세상과 현실의 톱니바퀴를 이탈해서 혼자 놀며 생각에 잠기고 싶다. 나에게 비타민이 되고 활력소가 될 그 기둥 밑에서 나를 평온하게 돌아보고 싶다.
교외의 한적한 별장같이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본인의 이동경로와 겹치는 곳에 편안한 사색공간을 마련해서 생각만 하면 바로 갈 수 있는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라고 추천하고 싶다. 지금 나의 장소는 어디? 쉿! 비밀이다. 나만의 장소이므로….
감동할 줄 아는 아이의 마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으쓱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할 대표로 뽑혀 서울 시내의 다른 초등학교로 가던 길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가던 중 파고다공원의 입구를 지날 때 나는 정말 순수하게 감동했다.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그 장소를 내가 지나가다니!(하지만 알고 보니 33인은 태화관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나는 교과서에 나오고, 선생님께 배웠던 바로 그 장소를 지나간 내 자신이 정말 한없이 대단하고 뿌듯하게 여겨져서 그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 변두리 촌놈인 내가 종로에 나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로마 바티칸 광장.
1년에 두세 번 파고다공원의 정문, ‘삼일문’이라 적힌 한글 현판이 선명하게 보이는 카페로 약속을 잡는 것은 과거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날의 그 감동할 줄 아는 아이가 그리워서다.
그런 순간은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난생 처음 영화관에 갔던 날일 수도 있고, 대학입학의 순간일 수도 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고 시시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절절했던 순간! 그곳을 다시 찾아서 맑고 순수했던 동심의 나를 찾아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추천하고 싶다. 단, 지나치면 감동이 희석되니 너무 자주 찾지는 말 것!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기쁨의 시간
어릴 적 나의 꿈은 하루라도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관심을 듬뿍 받으며 살아보는 것이었다. 차녀였던 나는 부모님은 언제나 언니만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후에는 남동생만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1남3녀의 형제와 이모, 삼촌 등 여러 식구가 항상 바글대는 가운데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쏟기가 어려웠고 거기에 대항해서 나는 의도적인 장난과 말썽으로 이목을 끌며 자랐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운 오리새끼라 생각하며 자란 탓이었을까? 다 자란 후에도 부모님과 참으로 오랫동안 서먹한 관계가 지속됐다. 셋이 있으면 늘 무언가 허전했고 딱히 할 말이 없어 눈치를 보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공통의 주제를 찾기가 어려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어색했고, 서로 선호하는 TV채널이 달라서 무엇을 볼 것인지 정하기도 어려웠고, 함께 어딘가를 가는 것도 불편하기만 했다. 운동을 해도 서로 다른 체력 탓에, 식사를 해도 서로 달라진 입맛 탓에, 쇼핑을 해도 서로 다른 취향 탓에 어긋나기만 했다.
그러다 부모님께 연극 공연티켓을 전하기 위해 극장 입구에 갔다가, 정해져 있던 이후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함께 공연을 관람하게 됐다. 연극은 일반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상투적인 것이었지만 부모님이 몹시 즐겁게 보았기 때문에 나 역시 덩달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며칠 동안은 부모님의 기쁨과 내가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기쁨이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약효는 무한하지 않아서 사흘 정도가 지난 후에는 다시 이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왔지만 부모님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함께하는 작은 기쁨이 가족의 행복을 창조한다는 것을,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때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참으로 뒤늦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에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취향에 구애하지 않는 가족영화, 가족연극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