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1-06-21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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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군통수자, 조제핀” 이었다. 누구보다도 프랑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매력적인 풍운아로 지금까지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그가 프랑스의 자랑이자 또 다른 상징물인 와인과 코냑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나폴레옹은 50여 차례 전쟁에 나설 때면 반드시 샹베르탱 와인을 챙겼고,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도 샹베르탱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대주가이거나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와인을 즐기면서 종종 물에 타서 마셨다. 코냑에서 나폴레옹급 역시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최소 6년 숙성된 오드비를 사용하는 중상위급 코냑을 일컫는다.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실제 나폴레옹은 군대가 험준한 지역을 돌파한 뒤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전설적인 명언과 함께 한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코르시카 섬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만으로 프랑스 지도층에 진입해 마침내 황제로서 일세를 풍미한 뒤, 결국은 머나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이런 그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앞의 명언과 함께 그의 영웅적 기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회화 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 유명한 그림이 비록 사실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상당한 허구가 가미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정치적 의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을 그린 사람은 신고전주의 작가로 나폴레옹 당시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대두 이후에는 곧 그의 열렬한 숭배자가 된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제1통령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이탈리아로 기습 진격해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일전을 계획한다. 1800년 5월 마침내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the Saint-Bernard Pass)을 넘은 나폴레옹군은 마렝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대승을 거둔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이 위업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시작부터 철저히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획하에 진행됐다. 다비드는 말을 탄 모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앉은 자세에서 장시간 모델이 돼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런 영웅적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개성의 표현’이라며 요청을 일축한다. 실제 알프스를 넘을 당시 나폴레옹은 그림처럼 악천후를 배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은 것이 아니라 먼저 군대가 험준한 지역을 돌파한 뒤 맑은 날씨에 안전하게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넘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나폴레옹은 노새가 아니라 준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 두 마리를 모델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그림 전면의 바위 돌에 그의 이름과 함께 새겨놓은 한니발(Hannibal·BC 247~183),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742~814)의 이름은 과거 알프스를 넘었던 역사적인 영웅들과 그를 동격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추가로 만든 세 작품을 포함해 모두 5개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림들은 1801년에서 1805년에 걸쳐 완성됐는데, 1804년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에 의해 공식적인 궁중화가로 임명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There is no such word as impossible in my dictionary)’라는 나폴레옹의 명언도 후세에 약간 변형된 것이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1813년 7월9일자로 그의 부하 장군인 르마루아(Lemarrois·1777~1836)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Ce n′est pas possible, m′ecrivez-vous; cela n′est pas francais’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장군이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는데 그런 말은 프랑스어가 아닐세’로 직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이 후세에 와서 앞서 말한, 보다 간결한 대중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불가능이란 말은 바보들의 사전에서나 발견되는 말이다(Impossible is a word found only in the dictionary of fools)’도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여전히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영웅 나폴레옹의 일생에 대해 먼저 간단히 알아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는 프랑스령인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변호사로서 지역 명망가였던 부친과 절제를 강조한 모친 사이에서 8명의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옛 조상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 형편은 그에게 당시 일반적인 코르시카 소년들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1779년 1월 만 10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의 한 종교학교에 등록했고, 곧이어 5월에는 브리엔 유년 군사학교에 입학해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학업 기간 내내 진한 코르시카 억양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지만 수학을 비롯한 지리, 역사 과목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4년 브리엔을 졸업한 나폴레옹은 당시 권위를 자랑하는 육군사관학교(Ecole Militaire)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사망에 따른 재정 문제 때문에 2년 과정을 1년으로 단축해 1785년 9월 이 학교를 졸업한다. 코르시카 출신으로는 첫 졸업생이었다.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졸업한 뒤 나폴레옹은 포병소위로 임관, 지방연대에 부임했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코르시카로 귀향한다. 코르시카에 머무는 동안 나폴레옹은 왕당파, 혁명파, 코르시카 국민군 사이의 복잡한 싸움에서 코르시카 국민군의 지도자 파올리(Pasquale Paoli·1725~1807)를 도왔다. 이때 프랑스 육군은 나폴레옹에 대해 무단이탈과 2중 군적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파리로 가서 상부를 설득해 오히려 대위로 진급한다.

    왕당파 봉기 진압 수훈…군사령관 임명

    1792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다시 돌아가게 되나 프랑스와의 결별을 결정한 파올리와 균열이 생기면서 179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한다. 나폴레옹은 1793년 툴롱 공략 작전에서 부상해가며 왕당파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이 때문에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일약 장군이 되고 곧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의 포병 책임자가 된다.

    1794년 당시의 실권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milien Robespierre·1758~1794)가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27일 국민공회 내 온건파가 일으킨 쿠데타로 공포정치를 시행한 혁명정부를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혁명 과정이 보수화됐다) 쿠데타로 실각하자 그의 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2주 만에 풀려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795년 반동 쿠테타 군의 지도자 중 하나인 파울 바라스(Paul Barras·1755~1829)에 의해 발탁돼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국민공회(國民公會)에 대한 왕당파의 봉기를 포병을 이용해 진압하는 수훈을 세운다. 이 전공으로 부와 명성과 권력을 한꺼번에 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파견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796년 3월9일 바라스의 옛 정부이자 당시 사교계의 꽃이었던 조제핀(Josephine de Beauharnais)과 결혼한다.

    결혼한 지 불과 이틀 후 이탈리아로 떠난 나폴레옹은 1797년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면서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한층 더 높아져 일부에서는 독재자의 출현 가능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출병했다. 그의 목적은 이집트를 장악함으로써 당시 프랑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인도 루트를 차단하는 것. 또 이를 통해 인도 무슬림군과 연합해 영국을 협공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영국 해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전투는 여의치 않았고, 프랑스 본국의 정세도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쿠데타를 일으켜 3명의 통령(consul)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자신은 원로원으로부터 임기 10년의 제1통령으로 임명된다. 3명의 통령이 있다고 하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돼 그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다.

    권력의 정상에 선 나폴레옹은 내정을 개혁하는 한편 1800년에는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당시 이탈리아는 그가 이집트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다시 오스트리아군의 지배를 받았다. 일부에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작전 계획에 우려를 표명했으나 앞서 말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대로, 결국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화려한 업적과 나날이 치솟는 인기를 바탕으로 1802년 종신 통령을 거쳐 1804년 12월2일에는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해 나폴레옹 1세가 됐다. 조제핀은 자연히 황비가 되었다. 이때 평소 나폴레옹 예찬자였던 베토벤이 그의 즉위 소식을 듣고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804년 황제 즉위 후 ‘나폴레옹 세상’

    이듬해인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결성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치른다. 비록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 패배해 제해권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6주 후인 12월에는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황제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프랑스 육군의 위상을 유럽에 떨쳤다. 나폴레옹은 곧 샤를마뉴 대제에서부터 거의 1000년간 이어져온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해체시키고,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이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과 결성한 제4차 대프랑스 동맹도 격파했다. 1807년에는 폴란드에 진격하고, 이어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스페인 통치권도 확보했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역시 성공적으로 방어한 나폴레옹은 1810년 오랜 연인이었던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혼인했다. 이 일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관계였던 교회와 거리가 더욱 멀어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이때까지 유럽은 그야말로 나폴레옹 세상이었다. 그가 존재 자체가 프랑스의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812년 6월23일 주위의 거듭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러시아 원정이 그가 몰락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군은 모스크바까지 점령했지만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도주한 러시아군의 전술과 동토의 혹한에 시달리면서 원정 실패를 인정하고 비참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승을 구가하던 프랑스군의 이런 쇠퇴를 목격한 주변국들은 제6차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해 1813년에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크게 격파했다. 1814년에 들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3월31일에는 마침내 동맹군에 의해 파리가 함락된다. 전쟁 패배와 부하 장군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나폴레옹은 4월16일 퐁텐블로 조약 체결과 함께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815년 2월26일 엘바 섬을 탈출하고 3월에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면서 재기에 실패하고 만다. 그 뒤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결국 1821년 5월5일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인으로 지금까지 독살설 등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으나 공식 사인은 위암이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군통수자, 조제핀”(France, Arm′ee, Te^te d’arm′ee, Jos′ephine)이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이 누구보다도 프랑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그만큼 시대의 영웅으로서 또 매력적인 풍운아로서 지금까지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그가 프랑스의 자랑이자 또 다른 상징물인 와인과 코냑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50여 차례 전투에서도 꼭 챙긴 샹베르탱 와인

    나폴레옹의 술 중에서 먼저 부르고뉴 지방의 유명한 명품 와인 샹베르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샹베르탱(Chambertin)은 지역-마을-포도밭 순으로 등급 체계가 나누어져 있는 부르고뉴 AOC(고급와인산지)에서 코드드뉘(Co^te de Nuits) 지역, 주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마을에 속해 있는 특등급(그랑크뤼) 포도밭의 이름이다. 주브레 샹베르탱 마을에는 무려 9개의 그랑크뤼 포도밭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샹베르탱이 가장 유명하다. 나머지 8개의 그랑크뤼 포도밭도 샤르므-샹베르탱(Charmes-Chambertin), 샤펠-샹베르탱(Chapelle-Chambertin) 등에서와 같이 이름에 모두 샹베르탱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명성이 샹베르탱에는 미치지 못하고 유일하게 샹베르탱 클로드베즈(Chambertin-Clos de Be^ze) 와인만이 샹베르탱에 필적할 만한 품질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샹베르탱 포도밭이 조성된 것은 12세기에 들어서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7세기부터 베즈(Be^ze)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수도원 소유로 클로드베즈 포도밭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베르탱(Bertin)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바로 옆에 포도밭을 만들면 똑같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이 포도밭을 베르탱의 밭(Champs de Bertin)이라고 부르게 되고 이 말이 축약돼 오늘날 샹베르탱(Chambertin)이 됐다.

    샹베르탱은 피노누아 포도를 주품종으로 만든 적포도주로, 강하고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 샹베르탱은 특히 예로부터 ‘와인 중의 왕(King of Wines)’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같은 부르고뉴 AOC에서 샹베르탱에 견줄 만한 와인은 로마네 콩티(Romane^e-Conti)와 몽하세(Montrachet) 정도다. 그러나 아쉽게도 샹베르탱 역시 부르고뉴 지방의 다른 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소유자에 의해 밭이 분할돼 현재 샹베르탱의 이름하에 무려 23명의 소유자가 존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똑같은 샹베르탱 상표의 와인이라도 생산자에 따라 그 품질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 샹베르탱의 명성에 못 미치는 와인이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폴레옹이 이 샹베르탱 와인을 당시 어떤 경로로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이 와인을 무척이나 즐겨 마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50여 차례 각종 전쟁에 나서면서도 절대 잊지 않고 이 와인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 때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나서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크렘린 궁에서 샹베르탱을 마셨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에서 패주할 때는 코사크(15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있었던 군사 집단으로 구성원의 출신 국가는 다양했다) 기병들에게 샹베르탱의 저장고가 노획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나폴레옹의 샹베르탱 와인 사랑을 화제로 삼아 일부 호사가들은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재기에 실패한 이유도 전투 전날 샹베르탱 와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이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폴레옹은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주가이거나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샹베르탱 와인을 즐기면서 종종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독특한 취향의 음주법이라 하겠다.

    샹베르탱 이외에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은 와인에는 유명한 샴페인 모에 샹동(Mo‥et ·Chandon)이 있다. 1743년 에페르네 마을에서 클로드 모에(Claude Mo‥et)가 창립한 이 회사는 19세기 들어 나폴레옹과의 인연으로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1792년 창업자 클로드 모에가 사망한 이후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된 손자 장-레미 모에(Jean-Remy Mo‥et)는 1802년 에페르네의 시장이 된다. 그리고 1804년 새롭게 지은 회사 게스트하우스에서 나폴레옹과 그 일행들을 샴페인과 함께 성대히 대접할 기회를 갖는다. 나폴레옹은 그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당시 제정되어 지금까지 큰 명예로 간주되는 레종 도뇌르(Lesion d’Honneur) 훈장을 수여한다. 이후 이 회사의 샴페인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 사교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알

    모에 샹동사 역시 나폴레옹과의 이런 추억을 기리기 위해 1860년대에 출시돼 지금까지 판매량이 가장 높은 베스트셀러 샴페인 중 하나인 브뤼(Brut) 제품에 임페리알(Imperial)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한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알’이 바로 그것이다.

    나폴레옹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술은 코냑이다. 코냑은 귀족적인 고급 술의 대명사로 오늘날 전 세계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주 중의 명주다. 그런데 코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브랜디와 코냑의 상관관계와 그 차이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브랜디(Brandy)는 한마디로 포도로 만든 증류주를 말한다. 세상의 모든 술은 기본적으로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곡물로 만든 발효주가 맥주이고 이를 증류한 것이 위스키라면, 포도로 만든 발효주는 와인이며 이를 증류한 것이 바로 브랜디인 것이다. 물론 브랜디란 명칭은 포도로 만든 증류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로 만든 증류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칼바도스(Calvados)로 대표되는 애플브랜디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포도로 만든 브랜디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냥 브랜디라고 할 때는 보통 포도 브랜디를 자동적으로 의미한다.

    브랜디는 이론적으로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브랜디의 대명사로서 또는 흔히 브랜디와 동의어로까지 혼용되고 있는 코냑은 실은 유명한 프랑스의 브랜디 산지를 일컫는 말로, 그 지방에서 나는 브랜디만을 코냑으로 지칭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코냑은 브랜디이지만 모든 브랜디가 다 코냑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코냑 지방은 지리적으로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보르도 지방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코냑이란 술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술의 등급 체제다. 궁극적으로는 위스키에 12년산, 21년산, 30년산 등과 같이 숙성 연도를 표시하는 것이지만 일견 용어가 생소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등급의 코냑’이라고 하면 마치 100년 이상을 숙성시킨 가장 오래된 코냑 등급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아마도 나폴레옹이 무의식중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최고 권위’라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이 스스로 대관한 후 황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



    코냑에서 ‘나폴레옹급’은 중간 수준

    그러나 실제 코냑에서 나폴레옹급은 전체 등급 중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코냑 등급은 VS, VSOP, Napoleon, XO, Extra 등의 순으로 체계화돼 있다.

    ① VS는 ‘very special’의 약자로 예전의 별 3개에 해당하는 등급인데 최소 3년 숙성의 오드비(코냑의 개별 원액들)들을 함유하고 있다.

    ② VSOP는 ‘very special(또는 superior) old pale’ 의 약자로 최소 5, 6년 숙성된 오드비를 함유하고 있다. 이 용어는 1817년 뒷날 영국 국왕 조지 4세가 되는 당시 섭정왕자(prince regent)가 최대 코냑 회사인 헤네시(Hennessy)사에 코냑을 주문하면서 특별히 ‘very special old pale’ 한 것을 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③나폴레옹(Napole′on)은 흔히 100년 숙성 제품이니 또는 적어도 코냑의 최상위 등급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폴레옹 등급은 최소 6년 숙성된 오드비를 사용하는 VSOP보다 조금 상위 등급의 코냑을 일컫는 용어다.

    ④XO는 1870년에 처음 사용됐다. XO는 ‘extra old’의 약자로 알려져 있지만 ‘extraordinary’의 약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단순히 옛날 헤네시 사의 직원들이 코냑통을 배에 선적하기 전에 표시한 기호였다는 설도 있다. XO는 보통 최소 15년 이상 된 오드비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⑤최근에는 웬만한 회사에서는 XO보다 상위 등급으로 Extra 라는 등급을 소개하고 있다.

    ⑥그리고 각 코냑 회사의 제품 중 최상위 제품으로는 각 회사가 자랑하는 최장기 숙성 오드비들만을 배합한 등급이 있다. 이들 제품들을 따로 전체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레미 마르탱사의 루이 13세, 헤네시사의 리처드 헤네시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런 코냑 등급에서 사용되는 나폴레옹이라는 용어 이외에도 개별 코냑 회사 차원에서 나폴레옹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자사의 코냑을 ‘나폴레옹의 코냑(The Cognac of Napoleon)’이라면서 대외 홍보에 적극 활용하는 회사가 있다. 헤네시(Hennessy), 레미 마르탱(Re′my Martin), 마르텔(Martell), 카뮈(Camus) 사와 더불어 세계 5대 코냑 회사를 형성하고 있는 쿠보와지에(Courvoisier) 사가 바로 그곳이다.

    쿠보와지에 사는 코냑 마을과 함께 코냑 지역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쟈흐냑(Jarnac) 마을의 샤항트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회사 역사에 의하면 19세기 초 에마뉘엘 쿠보와지에(Emmanuel Courvoisier)가 동업자 갈로아(Louis Gallois)와 함께 파리 근교 베시(Bersy)에 와인 회사를 창업했다. 그런데 1811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방문해 이 회사의 코냑을 맛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이를 인연으로 나폴레옹이 1815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될 때 특별히 이 회사의 코냑을 몇 통 배에 싣고 가게 된다. 그리고 항해 중에 나폴레옹이 동행하던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 술을 대접하자, 술맛에 반한 그들이 이 코냑을 ‘나폴레옹의 코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쿠보와지에 사는 회사의 모든 제품에서 나폴레옹과의 이런 인연을 적극 선전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생전에 샴페인에 관해 언급하면서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으며 패배했을 때도 필요로 한다(In victory you deserve champagne, in defeat you need it)”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분도 개인적 성취의 순간이나 아니면 좌절의 순간에 나폴레옹의 추억이 스며 있는 술을 한 잔 하면서 그의 영웅적 기백을 되새겨보는 것도 또 다른 현대적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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