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6끼 고기 먹고 만든 근육질 몸매
- 엄마는 ‘술친구’, 아빠는 ‘영양사’
-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남자에게 끌려
- “연기하면서 ‘빙의’돼 심리치료 받았어요”
- “목부터 발까지 다 부상이에요”
- 가장 잘 맞는 배우는 현빈, 조인성, 김명민
“아무거나요.”
“아, 우리 대학 다닐 때 정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어요. 호호호.”
330㎖들이 병맥주 두 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하지원(33·본명 전해림)은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건강미를 물씬 풍겼다. 또 어찌나 잘 웃던지 한물간 우스갯소리에도 까르르 숨이 넘어갔다.
한데 말하는 속도가 영 느리다. 딱 안단테다. 답도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면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돈다. 질문 내용을 음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답할 말을 찾는 듯도 하다. 그러고 나서야 찬찬히 답을 내놓는 말본새가 4차원 소녀처럼 천진해 보인다. 이런 모습 처음이다.
하지원 인터뷰는 이번이 두 번째다. 기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2년,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에서였다. 당시 그녀는 ‘학교2’ ‘비밀’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유망주였다. 김하늘, 류시원이 주연한 드라마 ‘비밀’에서 악역을 독하게 소화한 것이 좋은 반응을 얻었더랬다. 9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연예계를 통틀어 넘버원 배우다. 대표작인 영화 ‘해운대’는 2009년 1000만 관객을 불러들였고,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올해 상반기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8월4일 개봉하는 그녀의 신작 ‘7광구’도 올여름 가장 기대되는 영화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르는 ‘시크릿 가든’처럼 기발한 상상력이 가미된 판타지 액션물이다.
“액션을 즐겨요”
▼ 공상을 좋아하나요.
“꿈꾸는 걸 좋아해요. 꿈에선 뭐든 가능하잖아요. 독수리가 돼서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제가 한창 판타지에 빠져 있을 때 ‘시크릿 가든’ 대본을 받았어요. 대본을 보기도 전에 판타지 드라마라는 이야기만 듣고도 정말 하고 싶었어요. ‘7광구’도 판타지라 더 끌렸죠.”
영화 ‘7광구’는 1970년대에 실존한 제주도 남단 7광구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시추선 ‘이클립스’호에서 심해 괴생명체와 시추 대원들이 사투를 벌이는 액션 블록버스터다. 국내 최초로 아이맥스 3D로 제작된 이 영화는 순수 제작비만 100억원이 넘게 들었고, 이미 46개국에서 판권을 사갔다. 영화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이 제작과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에서 하지원은 대원 중 홍일점인 해저 장비 매니저 ‘차해준’으로 등장해 괴물과 싸운다. 이 작품을 위해 5년을 기다렸다.
“5년 전에 윤제균 감독님이 시놉시스만 나온 상태에서 출연 제의를 하셨는데 귀가 솔깃했어요. 도망칠 수 없는 공간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는 자체가 스릴 있잖아요. 이런 액션 블록버스터에 남자보다 더 강인한 여전사가 되어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설정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어요. 워낙 액션을 좋아해서 정말 괴물과 한번 싸워보고 싶었어요. 하하하.”
작품 속 하지원은 언제나 투사였다. 챔피언 벨트를 얻기 위해 강펀치를 날리는 복서(영화 ‘1번지의 기적’)이자, 긴 칼을 유려하게 휘두르는 조선시대 형사(영화 ‘형사-듀얼리스트’)였고, 사대부도 어쩌지 못하는 천하의 기생(드라마 ‘황진이’)이었으며, 와이어를 타고 액션을 하는 스턴트우먼(드라마 ‘시크릿 가든’)이었다. ‘7광구’에서도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여전사 캐릭터를 맡았다.
“액션을 좋아해요. 액션 신을 찍을 때 몸이 고되긴 하지만 저 스스로 즐기는 편이에요. 좋아하니까 부상을 감수하면서 신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할리우드에서는 여자, 남자를 떠나서 액션을 화려하게 하잖아요. 할리우드 배우들만 그렇게 하란 법이 있느냐,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7광구’를 찍어서 더 욕심내고 더 다양한 액션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 연기를 위해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면서요.
“제가 맡은 해준이의 직업과 취미를 몸에 익히려고 스킨스쿠버 다이빙과 오토바이 자격증을 땄어요. 운동도 쉬지 않았어요. 촬영하다 지치면 안 되니까 여러 가지 운동을 즐겼어요. 평소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못 견뎌요. 촬영이 없을 때도 직접 운동 스케줄을 짜서 그대로 실천해요. 오전에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오후엔 테니스를 치고 그 사이엔 수영을 해야겠다. 그런 식으로요. 계속 몸을 긴장시키면서 해준이 캐릭터가 되려고 쉼 없이 움직였어요. 고기를 하루에 6끼나 먹고요.”
▼ 그게 가능한가요.
“왜냐하면 제가 유일한 여자 대원이지만 남자보다 더 강해 보여야 하고 힘도 더 세야 하거든요. 몸이 왜소하면 안 되니까 몸무게도 일부러 3㎏을 늘렸어요. 근육을 키우려고요. 고기를 줄이면 근육이 빠지잖아요. 그래서 계속 먹었어요. 닭 가슴살도 먹고 스테이크도 먹고 단백질을 많이 섭취했어요.”
“엄살이 없어요”
영화 ‘7광구’에서 괴물과 싸우는 하지원.
“‘7광구’가 판타지 영화라 롤러코스터를 타듯 재밌게 찍으면 될 줄 알았는데 괴생물체와 사투, 마지막에 혈투까지 하면서 저도 모르게 해준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시크릿 가든’ 대본을 못 만졌어요. 제 마음이, 손이 가질 않더라고요. 다행히 초반 3일간 액션 신을 찍어 별탈은 없었지만…. 사실 저 심리치료 같은 것을 받았어요. 해준을 빨리 떠나보내기 위해서요. 길라임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해준이가 (가슴을 치며) 여기에…. 재미있게 찍을 줄만 알았는데 재미있는 영화만은 아니더라고요. 제가 떠나보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치료해주시는 분이 잘해주셔서 길라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어요. 이렇게 확 들어올 줄 몰랐어요. 저도 놀랐어요.”
▼ 그렇게 매번 힘들게 떠나보내나요.
“현재 촬영 중인 ‘코리아’라는 영화에서 탁구선수 현정화씨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처음엔 탁구가 안 됐어요. 제가 해본 것 중에 가장 힘들더라고요. 안 돼요. 왜냐하면 ‘시크릿 가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출연 제의를 받아 사실 힘들게 결정했거든요. 많이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데 탁구연습을 하며 조금씩 현정화 역할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었어요. 다행히 연습하는 뭔가가 있으면 (이전 캐릭터를) 떨쳐버리고 들어가기가 쉬운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면 더 많이 힘들어요.”
▼ 부상의 위험이 많지 않은가요.
“저 같은 경우는 액션을 많이 해서 목부터 발까지 다 부상이에요. 높은 데서 떨어지는 신을 하면 충격 때문에 목에서부터 등까지 근육이 다 굳어요. 그러면 병원에 가거나 경락마사지를 받아요. 근육을 풀고 다시 촬영장에 가는 거죠. 예전에는 몸을 혹사시켰어요. 아프면 아픈 대로 끙끙 앓았어요. 병원에도 안 가고.”
▼ 몸이 재산인데 그러면 되나요.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이제야 안 거죠. 지금은 몸이 아프면 빨리 치료받고 다음날 다시 촬영하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몸 컨디션이 안 좋을 땐 빨리 풀어야 다음날 가벼운 몸으로 촬영을 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7광구’할 때 바이크에 한 번 깔리고 나서 아차 했거든요.”
▼ 큰일 날 뻔했네요.
“좀 무서웠어요. 감독님이랑 저랑 약속한 게 욕심내다가 사고 나는 거니까 과욕을 안 부리기로 했어요. 어떤 장면에서는 제가 감독님에게 느낌이 안 좋으니 안 찍는 게 좋겠다고 해서 안 찍은 컷도 있고, 필요한 신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문제의 바이크 신에서 욕심이 났어요. 모니터링을 했는데 좀 더 달리면 멋있는 신이 나올 것 같았어요. 괴물이 쳐서 흔들거리며 달리는 신이었는데 앞이 막혀 있었던 거죠. 거기에 부딪히면서 바이크에 깔렸어요. 발목을 다쳐서 다음날 병원 가고 그랬어요.”
▼ 통증이 쉽게 가시던가요.
“한 번 다친 데는 다음에 액션하면 다시 아파요. 지금도 예전에 다친 꼬리뼈가 큰 충격을 받으면 또 아파요. ‘형사-듀얼리스트’라는 영화를 찍을 때 꼬리뼈를 다쳤죠.”
▼ 연기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나요.
“가리는 편이 아니에요. 엄살이 없어요. 좀 엄살을 부려야 되는데 그게 안돼요.”
▼ 노출 연기는 일부러 꺼리는 건가요.
“회사에서 걸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노출 연기가 필요한 대본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어요.”
▼ 노출이 필요한 역이 들어온다면 어쩔 건가요.
“시나리오가 정말 마음에 들면 고민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액션물도 액션이 좋아서 선택한 적은 없어요.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에 액션 신이 있어서 액션을 한 거죠.”
▼ 도전을 즐기나요.
“호기심이 되게 많아서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어요. 그 자체가 재미있고 설레요.”
“작품 고를 땐 시나리오만 봐요”
새로운 도전을 유쾌하게 맞이하는 모습에서 짐작했을 게다. 하지원은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배우다. 2002년 드라마 ‘햇빛사냥’에 출연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을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좋아하는 남학생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 옆모습만 보여주고 올 정도로 수줍음이 많다고도 했다. 그 사이 그녀를 변화시킨 건 무엇일까.
“배우로 살면서 긍정적인 성격으로 바뀌었어요. 해가 갈수록 더 쾌활해지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 유독 그래요.”
▼ 평소에는 어떤 성격인가요.
“과거에 집착한다든지 안 좋은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다든지 그러질 못해요.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못 살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바로 해야 하고 잠도 되게 잘 자요. 그냥 누우면 자요.”
▼ 건강한 성격이네요.
“예전에는 고민을 끌어안고 있고 작은 일에 연연하고 그랬는데 변한 거예요. 저 스스로 그런 성격을 고치려고 꾸준히 마인드컨트롤 한 것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 작품 고르는 안목이 뛰어난 걸로 유명한데 비결이 뭔가요.
“캐릭터에 빠져서 고르진 않아요. 캐릭터에 빠져서 내 역할만 보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 전체를 봐요. 나만 잘한다고 영화나 드라마가 잘되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내 옆에 친구도 있어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감독님도 계셔야 해요. 옆에 좋은 배우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있는 거니까요. 자기 역할만 보고 고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전체 시나리오를 보고 재밌다, 진정성이 있다, 가슴이 흔들린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선택해요. 그게 중요하죠.”
▼ 작품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건 습관인가요.
“데뷔 초에는 영화사에서 시키는 대로 배우고 연습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작품을 하다보니 누가 뭔가를 지시하기 전에 제가 알아서 준비하게 되더라고요.”
▼ 동료들이 성실한 배우라고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배우는 다 성실한 것 같아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는 게 좋으니까요. 불만을 갖기 시작하면 시간도 너무 아깝고 왜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도 없게 돼요. 어차피 자신이 좋아서 한 결정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죠.”
▼ 애정 신이 좀 약하다는 평도 있어요.
“앞으로 애정 신을 많이 해야겠네요. 애정 신에도 능한 배우가 되려면요. 근데 애정신은 미리 준비하기가 난감해요. 남자친구가 없어서 따로 연습할 수가 없거든요. 하하하.”
▼ 이참에 만들면 되겠네요.
“그것도 방법이네요.(웃음)”
그동안 하지원과 호흡을 맞춘 상대배우는 모두 톱스타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인성, 소지섭, 장근석이다. 남자배우들 사이에서 “하지원과 찍으면 잘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녀는 가장 편한 배우로 ‘진실게임’ ‘형사-듀얼리스트’ ‘7광구’를 함께 한 안성기를, 호흡이 가장 잘 맞는 배우로는 현빈, 조인성, 김명민을 꼽았다.
“‘시크릿 가든’ 할 때 (현)빈이랑 되게 잘 맞았어요. 촬영할 때도 무척 재미있었고요. ‘발리에서 생긴 일’을 같이 한 (조)인성이도 너무 잘 맞았어요. 그땐 저도 인성이도 어렸잖아요. 나중에 우리가 성숙해졌을 때 다시 한번 같이 하기로 했었죠. 언젠가는 같이 할 것 같아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할 때 김명민 선배님은 정말 연기를 잘하시더라고요. 극중에서 선배님이 나중에 말을 못하는 상황이어서 눈으로만 연기했는데 눈빛만 보고도 대사를 치는 것처럼 감정을 표현하셨어요. 정말 호흡이 잘 맞았어요.”
“주원이 때문에 설레고, 욕하고, 아프고…”
▼ 여배우로 살면서 좋은 점은 뭔가요.
“과거로도 갈 수 있고 판타지 세상에도 살 수 있고 그런 게 너무 재밌어요. 괴물도 만나잖아요. 기회가 있으면 외계인과도 싸울 수 있고요. 과거로 가서 황진이도 됐다가 길라임이라는 스턴트우먼이 돼서 멋진 왕자님 같은 사람과 사랑도 하고요.”
▼ 단점은 뭔가요.
“배우가 되기 전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삶이 노출돼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항상 조심해야 하고 개인적인 생활에 자유가 없는 것. 그런 게 조금 힘들긴 하죠.”
▼ 그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나요.
“운동도 하고, 쉴 때는 여행도 가고 그러면서 푸는 거죠.”
▼ 연기하는 데 사랑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여러 배우가 말하던데 하지원씨는 어떤가요.
“저 같은 경우는 작품에서 막 (사랑을) 해요. 그냥 즐겨요. 이 신은 내가 경험했으니까 요렇게 해야겠다가 아니고요. 예전에는 내 삶과 연기가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즐기기 시작하니까 삶이 됐어요. 그게 재산이에요. 사실 1년 중에 하지원으로 사는 시간보다 작품 안에서 사는 시간이 더 많아요. 차해준으로 살다가 길라임이 됐고, 지금은 현정화로 살고 있잖아요. 굳이 어떤 사랑 경험을 꺼내서 이렇게 연기해야지가 아니고 그냥 내가 이 사랑을 하는 거예요”
▼ 그럼 진짜 사랑하는 느낌이 드나요.
“예.”
▼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씨와 연기할 때도 설레고 그랬나요.
“그렇죠. 상대의 눈빛을 보면서 설렘을 느끼고 상대가 아프게 할 땐 진짜 아프고, 끝나면 허전하고 그랬어요.”
▼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에 후유증이 덜했겠네요.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죠. 해피엔딩이 아니면 아픔이 깊숙이 배 오래가요. 해피엔딩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예쁘게 살 것 같은 거죠. 난 나왔지만.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 힘들고 지칠 때도 있을 텐데요.
“배역이 힘든 일을 겪으면 진짜 힘들어요. 그걸 그냥 느끼다가 좋아하는 언니나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고 하다 보면 풀려요. 단순해요. 물론 처음부터 된 건 아니고 그것도 역시 마인드컨트롤의 힘이죠.”
▼ 매너리즘에 빠져본 적 있나요.
“행복한 고민이긴 한데 어떤 역을 맡으면 그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요. 몸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그 사람이 돼야 하니까요.”
▼ 그럼 상대 배우를 향한 사랑의 감정도 작품 들어가기 전부터 갖고 있겠네요.
“드라마 같은 경우는 영화랑 다르게 첫 만남부터 흘러가니까 감정도 그대로 따라가요. 그러다 상대가 상처를 주면 연기를 하지 않을 때도 그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럴까 하고 혼자 생각해요. 현빈이 아니라 극중 캐릭터인 김주원을 생각하는 거죠. 코디들한테도 옷 갈아입으면서 ‘어떻게 김주원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니?’ 하고 흉봤어요. ‘그땐 정말 로맨틱하지 않니?’ 하고 감탄할 때도 있었고요. 웃기죠?”
▼ 실제로 김주원 같은 남자가 쫓아다니면 어쩔래요.
“길라임 같겠죠.”
“엄마 아빠와 노는 게 좋아요”
하지원은 1997년 KBS 청소년드라마 ‘신세대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로 데뷔했다. 본격적인 연기생활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1999년, 드라마 ‘학교2’에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그 사이 숱하게 오디션을 치렀지만 고배를 마시기 일쑤였다. 믿을 건 실력밖에 없었다. 휴학과 동시에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수영, 승마, 골프 등 닥치는 대로 운동을 익혔다. 배우에게 필요한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 붐이 일고 있는데 본 적 있나요.
“‘위대한 탄생’을 몇 번 봤고, 배우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 번 봤어요. 지방에서 촬영하느라 TV를 못 보고 있어요.”
▼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 제의를 하면 수락할 건가요.
“제가 심사할 정도가 안돼요. 오히려 저보다 늦게 데뷔한 신인연기자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을 때가 많은걸요.”
1남3녀 중 둘째인 그녀에겐 같은 길을 걷는 동생이 있다. 막냇동생인 전태수(27)다. 동생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현답(賢答)을 내놓는다.
“본인이 정말 느끼지 않고서는 변할 수 없어요.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는 좋은 뜻으로 한 충고가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제가 연기를 대신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 스스로 부딪치면서 깨닫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저도 그랬죠. 정말 궁금한 게 있거나 누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어요.”
▼ 동생이 도움을 청한 적이 있나요.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요. 저와 상의를 많이 해요. 얘기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느끼는 것 같아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우면산이 내다보이는 빌라. 그녀와 가족이 사는 보금자리다. 6살 위인 언니는 오래전에 시집을 가, 그녀가 장녀 노릇을 하고 있다.
▼ 집에서 살가운 딸인가요.
“그럼요. 엄마 아빠랑 소주도 자주 마시고 주말엔 항상 부모님 모시고 외식하고 그래요. 엄마 아빠와 노는 걸 좋아해요. 근데 엄마 아빠와 너무 놀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습관이 된다나.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랑 못 논대요.”
▼ 결혼하려면 독립해야겠네요.
“하하하. 요 근래에는 주말이면 제가 아는 맛집에 모시고 가서 맛있는 것 먹고 같이 골프 치고 그래요. 이 나이에도 엄마 아빠가 다 챙겨주세요. 제가 촬영장에 갈 때마다 아빠가 도시락 가방을 갖고 나와 배웅을 하세요.”
▼ 도시락 가방이요?
“아이스박스에 제가 좋아하는 과일 같은 것을 싸주시거든요. 촬영장에 가서 먹으라고. 아빠가 가끔 제 옷도 들어주세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셔도 도시락 가방만큼은 직접 챙기세요.”
▼ 아버지가 참 자상하시네요.
“배우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예민했어요. 아빠에게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조차 안 할 때도 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아빠에게 애교를 많이 부려요. 아빠도 저에게 더 살갑게 대해주시고요. 전보다 더 친해졌어요. 그 느낌이 되게 좋더라고요.”
▼ 어머니가 부녀 사이를 질투하진 않나요.
“엄마와는 소주 한잔씩 자주 해요. 엄만 배웅을 안 해주세요. 왜냐하면 잠옷 입고 계셔서(웃음). 제가 볼 땐 늘 잠옷 차림이세요. 제가 나가면 아빠를 불러요. ‘지원이 나간대’ 하고요. 아빠가 더 부지런하세요.”
▼ 술을 잘하나요.
“그냥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한 잔씩 하는 거예요. 엄마와 비밀이 없어요. 재미있어요.”
▼ 주량이 어느 정도인가요.
“많이 마실 땐 소주 한 병 정도 마셔요. 한 병 마시면 취해요.”
▼ 술버릇이 있나요.
“원래 잘 웃는데 웃음이 더 많아져요. 말수가 많아지는 건 아니고요.”
아침형 인간
드라마나 영화 촬영은 밤샘 작업이 많다. 대부분의 배우가 아침잠이 많은 이유다. 베테랑 연예 담당 기자는 섭외 전화를 할 때도 이를 염두에 두고 점심시간이 지나 벨을 누른다. 섭외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 중에는 아침형 인간이 많다. 소문난 ‘모범생’ 배우 하지원은 어떨까.
“좀 일찍 일어나요. 아침이 좋아서요. 일이 없을 때도 7시나 8시엔 일어나요. 해 뜨는 장면을 보고 싶을 때는 알람을 맞춰놓고 자요. 촬영이 있을 땐 외출하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운동을 해요. ‘7광구’ 찍기 전, 운동 말고는 스케줄이 없을 때도 새벽 5시에 일어났어요. 아침에 영화를 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땐 아침마다 영화를 한 편씩 봤는데 느낌이 색달랐어요. 커피도 한잔하죠.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아침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 다 열고 공기를 마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음악적 취향은 잡식이다. 클래식, 인디음악, 팝송, 애니메이션 OST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한때는 미국 록밴드 ‘마룬 5’의 음악에 심취한 적도 있다. 선곡의 기준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바뀐다.
▼ 지난 호 ‘핫스타’ 백지영씨가 하지원씨의 팬이더군요.
“저도 언니 팬이에요. 언니가 드라마 ‘황진이’와 ‘시크릿 가든’에서 제 테마곡을 불렀는데 정말 멋졌어요. 노래에 진이와 라임이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더라고요. 언니와 호흡이 잘 맞아요. 다음에도 언니가 제 작품의 OST를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 ‘그 여자’는 원래 백지영씨의 정규앨범에 실으려던 노래인데 하지원씨 테마곡으로 썼답니다.
“전 몰랐어요. 정말 감사할 뿐이에요.”
▼ 원래 꿈이 연기자였나요.
“어릴 때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어요. 지금도 우주에 꼭 가고 싶어요. 죽기 전에는 꼭 가볼 것 같아요. 꿈이 되게 많았어요. 의사도 되고 싶었고, 외교관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죠. 배우가 돼야지 생각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예요. 배우 하길 잘했어요. 적성에 잘 맞아요.”
그녀도 어느덧 서른세 살. 한 번쯤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만한 나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여자 하지원보다 배우로서의 삶에 더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인 듯하다.
“2012년, 2013년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큰 계획은 세워두고 있지만 미래를 시시콜콜 설계하진 않아요.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지 뒷일을 고민하지 못해요. 단순해서 하나밖에 못하거든요.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곧 개봉하는 ‘7광구’가 잘됐으면 하는 생각과 현재 찍고 있는 영화 ‘코리아’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향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현재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지만 그녀에게도 애틋한 첫사랑이 있었다. 고교 시절 가끔 만나던 두 살 연상의 남학생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첫사랑이었다. 9년 전 기자에게 그녀는 이성에 대한 취향을 이렇게 말했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느낌이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양아치보다는 고독한 반항아가 좋다”고. 지금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을까.
“이상형이 만날 바뀌긴 하지만 착한 사람이 좋아요.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내 이상형이다’한 적은 없고, 착했던 것 같아요. 많지는 않지만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되게 착하고 나랑 비슷한 점도 많고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자기 일에 열정적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매력 있는 것 같아요. 게으른 사람은 안 좋아하거든요. 뭔가 열정적이고 긍정적이고 그런 사람이 좋아요.”
▼ 마지막 사랑을 한 게 언제예요.
“되게 오래됐어요. 5년도 넘었어요. 쉽게 사랑에 빠져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싶은데 여배우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자제하고 그래요.”
▼ 모범생 같은 생활이 갑갑하지 않나요.
“그럴 땐 저 혼자 여행을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실행에 옮기진 못했어요. 회사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 착한 배우네요.
“네. 전 참 말을 잘 들어요(웃음). 혼자 여행을 가면 외국으로 가겠죠. 외국에선 제가 배우인지 모를 테니까요. 그러면 새로운 친구도 한 번 만나볼 수 있고.”
▼ 일탈을 해본 적은 있나요.
“없는 것 같아요. 꿈을 많이 꾸는데 그런 걸로 (갑갑함을) 해소하는 것 같아요. 스킨스쿠버를 좋아하는 이유가 물속에 들어가면 우주공간에 제가 누워 있는 느낌이에요. 거기서 엄마 배 속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도 느끼죠. 그 안은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빛과 색이 가득해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가 다 풀려요.”
▼ 그동안 한 역할 중에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을 꼽는다면….
“모든 작품에 제 모습이 조금씩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역할을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에 얽매이지 않아요. 작품이 좋으면 배역의 인생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 닮고 싶은 배우는 누군가요.
“메릴 스트립이요. 그녀처럼 50, 60세가 돼도 향기가 있는 배우이고 싶어요. 대본을 받을 때마다 맨 앞에 항상 쓰는 말도 ‘향기가 있는 사람이 되자’예요. 나이가 60, 70세가 되어도 멜빵바지가 어울리고, 여자답고, 그때까지 멜로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는 다시 ‘코리아’ 촬영이 한창인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부터 촬영이 있다니 달리는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잤을 게다. 그런데도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여배우의 삶을 이야기하던 그녀가 시야에 아른거린다. 그녀를 생각하면 어느 현자(賢者)의 말이 떠오른다.
“실력 있는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