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노무현의 후계자 문재인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민주주의 후퇴한다”

  • 조성식 기자│mairso2@donga.com

    입력2011-08-18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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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정부, 국민의 마음과 함께 가는 데 소홀한 면 있었다
    • 이명박 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일탈한 정부
    • 가난 때문에 잃은 것 많지만 강해지고 건강한 가치관 갖게 돼
    • 출산과 보육 지원이 가장 시급한 복지과제
    • 군대는 누구나 가게 하는 대신 복무기간 줄여야
    • 박근혜 인기는 신뢰성, 일관성, 진정성 인정받기 때문
    • 민주주의 철학 없고 서민생활 모르는 게 박근혜 한계
    • 노무현의 대결주의적 리더십 스타일 벗어나겠다
    노무현의 후계자 문재인

    ●1952년 경남 거제 출생<br> ●경남고, 경희대 법대 졸업<br> ●1980년 사법시험 합격<br> ●1982년 변호사 개업<br> ●1987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br> ●1995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br> ●2003~2007년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br> ●현 노무현재단 이사장

    서울-부산 무정차 KTX는 바람처럼 빨랐다. 2시간10분 만에 닿는 가까운 거리건만 그와의 심리적 거리는 멀게 느껴졌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질문지를 펴놓고 끼적거린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 국가지도자의 품격, 진보의 역량과 한계, 저항과 벽…. 그의 자서전 ‘운명’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먼 길 떠날 채비를 마친 모양이다. 통화 속 그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공손하고 차분한 말투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떠남은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그가 올라탄 운명의 기차는 어디로 달려가는 걸까.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문재인(59) 변호사는 의도적으로 서울과 거리를 두고 있다. 발걸음이 바빠진 요즘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에 올라가지만 인터뷰 장소만큼은 부산을 고집하는 편이다. 그의 사무실은 법원·검찰청 맞은편에 있다. 부산법조타운이라는 이 고층 건물 안내판에는 변호사 이름이 수두룩하다. 그는 인근 양산의 시골마을에 산다. 사무실까지 자동차로 50분 걸린다. 불편하지만 전원생활이 좋아서라고 한다. 서울 사람인 부인도 그런대로 적응하고 사는 모양이다. 서울시립합창단에서 활동했던 부인은 결혼 후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성악을 그만두었다. 자식들을 출가시킨 부부는 그곳에서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며 상추, 고추, 부추, 고구마, 방울토마토를 수확한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그가 과연 내년 대선에 나설지에 쏠려 있다. 그간의 언론 인터뷰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현재를 알면 미래가 보이고, 과거를 알면 현재가 보인다.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그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인터뷰 자리에 재단법인 아름다운봉하 사무국장인 김경수 전 청와대 비서관이 동석했다. 2009년 5월23일 새벽 문 변호사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고를 전화로 알린 사람이다. 문 변호사는 현재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다. 노무현을 빼놓고는 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다. 노무현은 그의 선배이자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내 머릿속에서 두 사람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오버랩된다. 그를 인터뷰하는 것은 어쩌면 죽은 노무현을 인터뷰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평가와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커다란 교집합을 형성한다. 그의 삶에 가장 큰 충격을 안긴 사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박연차 게이트 얘기부터 꺼냈다.



    박연차-노무현의 통화기록

    ▼ 노 전 대통령 사건에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언론을 통해 반격했다. 증거가 충분하다고.

    “권(양숙) 여사님이 정상문 비서관 통해 박연차 회장한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핵심은 대통령께서 박 회장한테 부탁해서 받게 된 거냐, 또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다. 그 점에 대해 증거가 없다는 거다. 박 회장과 노 대통령 말이 다르다. 그런데 박 회장 말이 맞다고 인정할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거다.”

    ▼ 뒷받침되는 증거가 없다는 얘긴가.

    “단적인 예로, 박연차 회장의 주장은 통화내용이다. 노 대통령이 전화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쪽에선 그런 통화 사실이 없다는 거고. 그러면 통화내용은 차치하고라도 통화 사실만큼은 증명돼야 하지 않나. 통화기록은 남게 돼 있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하는 내 말은 계속되는 그의 말에 묻혔다.

    “박 회장이 사용한 전화들은 뻔하지 않나. 다 뒤져보면 통화 사실이 나오게 돼 있다. 그런데 통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통화 안 했다는 것 아닌가.”

    ▼ 당시 (변호인으로서) 관련 기록들을 확인했나.

    “대통령 소환조사 때 입회했는데 그때 확인한 거다. 언론보도에도 그런 게 없지 않았나.”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통화기록에 대해 “보존기간 1년이 지나 폐기돼 확보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인터뷰가 끝난 후 경찰에 확인해봤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기관은 통화기록을 1년치까지 조회할 수 있다. 서버 용량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통상 1년이 지나면 통화기록을 없앤다. 하지만 더 보존하는 통신사도 있다. 의무조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휴대전화 통화기록은 당사자가 지우지 않는 한 몇 년이 지나서도 확인할 수 있다. 휴대전화기를 압수해 분석하면 설사 지웠더라도 추적이 가능하다. 컴퓨터에서 메일이나 문서를 지우더라도 하드디스크에 기록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문 변호사의 얘기다.

    “이인규 변호사의 말도 전체적으로 증거가 있다는 거지, 노 대통령이 지시했는지에 대한 증거가 있다는 건 아니다. 박 회장 진술 말고 달리 증거가 없다는 건 그쪽도 인정할 거다. 당시 검찰은 ‘남편으로서 모를 수 있느냐’고 했다. 그거는 법이 아니지 않은가.”

    이 전 중수부장에 따르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2007년 6월 말 100만달러를 전달하기 전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아 대통령 부부와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권양숙 여사가 “아이들 집이라도 사줘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직원들을 동원해 100만달러를 환전해 측근을 시켜 청와대에 전달했으며 이후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이 어떻게 했나”

    문 변호사는 이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 자리에서 그런 대화가 있었다는 건 박 회장 말일 뿐이다. 대통령 전화를 받았다는데 통화기록이 없다.”

    ▼ 박 회장이 약점이 잡혀서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했다고 보는가.

    “그렇다. 그는 장기간 수사로 압박을 받았다. 딸들까지 소환조사를 당했다. 가정이 풍비박산됐다. 검찰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였다.”

    ▼ 사건 이후 박 회장 측과 얘기를 나눈 적은 없나.

    “없다.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사건이 다 끝나면 모를까. 자신의 문제로 재판을 받고 있으니 우리가 접촉할 수도 없다.”

    ▼ 뇌물사건에서 유력한 증거가 공여자의 진술이다. (노 전 대통령이 죽지 않았다면) 검찰은 법정에서 그걸 무기로 내세웠을 거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 사건들 중에 무죄가 선고된 게 많다. 서로 말이 다를 경우엔 줬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 법정으로 갔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건가? 그 점에서 노 대통령의 자살은 뜻밖이었다. 그 때문에 더 의혹을 산 면도 있고.

    “언론에 종사하는 분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 시절을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말하면.”

    그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당시 검찰과 언론이 어떻게 했나. 견딜 수 없게 만들지 않았나. 엄청난 모욕을 가하지 않았나. 기정사실화하면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기자님도 그런 선입관에 갇혀 있는 게 아니냐”고날카롭게 반문했다.

    ▼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냐만, 그래도 당당하게 싸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 점은 우리도 아쉽다. 좀 더 참고 견디셨으면 끝내 진실이 밝혀졌을 거라 생각하기에. 대통령은 굉장히 강인한 분이다. 법정싸움에서는 자신했다. 그런데 당신 자신의 고통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과 당신을 도왔던 주변사람들이 다 표적이 돼 조사를 받고 기소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이었다. 그런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유서에도 담겨 있지만. 게다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서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터에 그 사건으로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가치가 깡그리 부정되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게 더 참담했을 거다. 퇴임 후 진보적 민주주의 연구에 여생을 바치려 했다. 그런 걸 하려면 도덕적 권위가 필요하다. 그 사건으로 도덕적 권위가 깡그리 무너져 그 일이 불가능해졌다. 그런 점들이 그분을 그런 극단적 선택으로….”

    ▼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구분해 평가한다면?

    “구분해 말하기가 어렵다. 그분이 정치를 한 건 세속적인 출세나 성공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해오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한 거다. 정치를 시작할 때의 초심이 대통령 퇴임하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주 보기 드문 예다. 국회의원 처음 출마할 때 캐치프레이즈인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평생의 꿈이었다.”

    얘기는 다시 노무현으로 돌아간다.

    ▼ 문 변호사를 두고 노무현을 계승하되 노무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당연하다. 노 대통령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재임한 분이다(웃음). 2013년부터는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훨씬 업그레이드 돼야겠지. 우리 역사가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는가.”

    ▼ 노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발전한 거다. 2002년은 1987년 체제 속에 있었다.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시작됐다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개혁을 추진한 것이 참여정부와 노 대통령의 시대적 과제였다. 노 대통령은 그걸 실천한 분이다. 2013년 이후엔 그런 민주화 차원을 넘어 복지나 평화 면에서 업그레이드된 국가가 돼야 한다. 그게 이 시대의 과제다.”

    노무현의 아쉬움

    ▼ 개혁을 하려면 집권세력이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나. 참여정부 5년을 돌이켜보면.

    “모순되는 이야기다.”

    ▼ 초기에 이상만 내세웠다가 실패한 게 아닌가.

    “많은 분이 모순된 생각을 한다. 민주주의를 하라고 말하면서, 대통령도 헌법과 법률에 정한 대로만 권력을 행사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제왕적 대통령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국정원과 검찰, 국세청 등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해 밀어붙여야 하는데,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과거 권위주의체제에서처럼 모든 일이 획일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처리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각이다. 이제는 국민과 소통하는 시대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다수의 의견을 좇는 거지만, 그 과정에 소수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배려하고 가급적 반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상생과 통합의 민주주의다. 이제 그런 시절이 왔다.”

    ▼ 노 대통령도 그런 철학을 갖지 않았나.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다고 했다. 통합과 상생, 특히 통합은 노 대통령이 평생 추구해온 정치목표 중 하나였다. 대통령 출마할 때의 구호도 개혁과 통합이었다. 참여정부의 국정과제 중에서 통합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우리 사회의 강한 대결주의적 풍토 때문에 그 부분에 다가가지 못한 거다. 후대인 우리의 과제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됐다. 약속시간을 20분 넘기고 있었다. 노무현의 아바타가 아닌 문재인 고유의 캐릭터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노무현의 그 강렬했던 승부수가 그에게선 보이지 않는다. 때가 무르익지 않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전혀 다른 승부수를 던질지도 모르고.

    ▼ 나중에 국가를 통치하는 자리에 오르면 노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국정철학을 답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의 후계자 문재인
    “한편으로는 리더십 스타일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정치문화의 문제다. 참여정부는 통합을 말하면서도 대결주의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비쳤다. 노 대통령은 그걸 늘 아쉬워했다. 이제는 그 리더십 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문화도 바뀌어야 하고. 서로 적대시하고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기존 정치가 그런 데서 벗어나지 못하니 나같이 정치 바깥에 있는 사람이 관심의 대상이 된 거다.”

    ▼ 어쨌든 때가 되면 나서는 건 분명한가?

    “원론적인 얘기 외에 더 할 얘기가 없다.”

    노무현, 죽은 후 새로 평가받아

    ▼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대해 미처 준비를 못했던 건 아닌가. 갖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중엔 우군진영에서조차 비판을 받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인간 노무현 평가와 다르지 않을까.

    “준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갖고 있던 정치적인 지향점과 개혁 목표에 저항하는 세력이 강고했다. 현실을 좇아 타협하면 개혁이 불가능하다. 노 대통령이 추구했던 개혁은 무슨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탈(脫)권위주의와 권력기관 개혁 등 당연히 해야 하는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했을 뿐이다. 어느 한 부분만 개혁하고 나머지 분야는 미루고 할 성질이 아니었다. 현실의 벽 탓에 민심을 얻지 못하고 정권 재창출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결국 옳은 방향이었다는 걸 국민이 새롭게 평가하고 있지 않나. 복지 확대나 평화 구축,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 역사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지 않나.”

    ▼ 뜻이나 방향 얘기가 아니다. 어떤 저항에 부딪히고 현실의 벽 때문에 진척이 안 될 때 많은 사람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완전히 뜻한 대로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라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개혁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거나 속도가 빨랐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주류세력이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참 불행한 일이었다.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

    ▼ 문 변호사의 삶에서 노무현은 어떤 의미인가.

    “내 삶을 규정지은 분이다.”

    단호하다. 그리고 선명하다. 그는 “노 대통령을 만난 것이 삶의 가장 큰 변곡점”이라고 덧붙였다.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그 다음에 재야 민주화운동 같이 하고 급기야 청와대까지 따라갔다. 그분 떠난 후에는 노무현재단을 맡았다. 그분을 만남으로써 내 삶이 그렇게 흘러왔다.”

    ▼ 두 사람이 매사 생각이 일치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 사람이 다른데.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의식, 법률가로서의 사명감은 거의 같았다. 그러나 성격이나 기질은 많이 달랐다. 노 대통령은 성격이 강하고 옳은 길이라 여기면 강하게 돌파한다. 나는 그에 비해 조심스럽고 부드럽다고 할까.”

    ▼ 책을 보니 노 대통령과 견해가 달랐던 적이 몇 번 있더라. 재신임 국민투표와 대연정 제안, 검사와의 대화… 이런 건 반대하지 않았나.

    “대연정은 시종일관 반대했다. 재신임도 만류했다. 검사와의 대화는 괜찮은 아이디어지만 조금 더 조율했어야 했다. 급하지 않게.”

    ▼ 검찰을 너무 몰랐던 게 아닌가.

    “대통령은 오히려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진솔하게 부딪칠 건 부딪치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검사들도 그 정도는 생각할 거라는 기대로 만난 거다.”

    ▼ 뜻이야 어쨌든 방법 면에서 아마추어적이었다. 대연정만 해도 지지층을 비롯한 많은 국민은 국정 운영에 자신이 없으니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무책임한 자세라고.

    “대통령의 뜻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국회의원들의 기득권이 문제였다. 그걸 깨트리기 위해 충격적인 방법을 쓴 거다. 당정청 모임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얘기한 건데 그게 언론에 새나가는 바람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의 진정성을 설명하는 데 급급하게 됐다. 논란만 일으키고 해프닝으로 끝났다. 지지층에 큰 실망을 안겨준 채.”

    ▼ 문 변호사의 원칙주의가 참여정부의 걸림돌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대통령이 원칙주의자인데 보좌하는 사람도 원칙주의자니.

    “대통령은 때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하지만 참모는 그야말로 원칙대로 해야 한다. 내가 민정수석을 지냈는데 민정수석이 정치적이면 큰일 난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원칙을 지키지 못해 생기는 거다. 원칙주의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노무현의 후계자 문재인

    문재인은 변호사를 천직으로 여긴다.

    ▼ 너무 원칙을 고집하다가 적당히 타협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 돌이켜보면 원칙주의를 지나치게 내세웠던 것이 후회되지는 않나.

    “원칙을 제대로 못 지킨 것이 후회될지언정 지나친 원칙주의를 후회한 적은 없다.”

    그의 단호한 표정에 유난히 원칙을 강조했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겹친다. 그는 영락없는 노무현의 분신이다. 판박이다.

    ▼ 참여정부의 정책이나 사회적 갈등을 빚은 사안 중에서 아쉬운 것 몇 가지를 꼽는다면?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은 옳았고 역사발전 방향에도 부합했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과 함께 가는 데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 언론환경이 아주 안 좋고 정치권의 보수적인 풍토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던 게 사실이지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민심과 함께하는 정치를 했어야 했다.”

    “노동자 권리 더 보호돼야”

    우리는 논란이 됐던 참여정부의 몇 가지 정책과 사건을 두고 논쟁적인 대화를 했다.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일련의 부동산 정책, 언론 관계, 민주노총과 전교조, 노동계의 잦은 파업과 공권력의 약화…. 그는 일부 사안에 대해선 실정(失政)을 시인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실책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예컨대 그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로 민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DTI(Debt to Income·총부채상환비율)와 LTV(Loan to Value Ratio·주택담보인정비율) 규제를 잘한 것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버틴 힘이 됐다”며 긴 안목에서 평가해줄것을 주문했다. 파업 문제에 대해선 지금의 한진중공업 사태를 거론하며 “아직까지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를 벌이던 농민 2명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을 물어 허준영 경찰청장을 퇴진시킨 것도 논란을 일으켰다. 퇴진 과정에 당시 민정수석이던 문 변호사께서 직접 관여한 걸로 아는데.

    “설령 그 집회가 적법하지 않았다고 해도 농민들이 생존권 차원에서 벌인 일인데 무슨 군사작전 하듯이 밀어붙여 고귀한 생명을 잃게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런 식의 경찰권 행사는 당연히 비난받아야 한다. 일선 경찰이 벌인 일을 총수가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시민사회에서는 경찰청장이 책임을 져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라 봤다. 대통령은 청장한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라고 두둔했지만.”

    ▼ 그렇다면 대통령보다는 민정수석의 뜻이 반영된 조치였나.

    “그 얘긴 복잡해서 이 자리에서 다 설명을 못한다.”

    문재인

    그는 올해로 변호사 한 지 딱 30년째다. 그가 사법시험(2차)에 합격한 것은 1980년 경희대 복학생 대표로 학내시위에 앞장설 때였다. 그해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 20만명의 대학생이 집결해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구속된 지 20여 일이 지났을 때 면회 온 애인(지금의 부인)이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전했다. 육사 1기 출신인 김점곤 경희대 대학원장이 힘을 써서 재판 없이 풀려났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부산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단독 개업이 아니라 선배 변호사와의 동업이었다. 그 선배가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다. 판사를 거친 노 변호사는 부산에서 1978년에 개업했다. 두 사람은 그때 처음 만난 사이였다. 노 변호사는 원래 문 변호사의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뒷날 참여정부 민정수석)씨와 동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씨가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그러자 박씨는 문 변호사를 노 변호사에게 소개했다.

    “변호사는 천직”

    ▼ 변호사라는 직업의 보람을 말한다면?

    “돈만 관계없으면 좋은 직업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 돈을 받고 해서 좀 그렇긴 한데. 직업이니 안 받을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돈과 관계없이 자기 능력의 일부를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회의 공공선을 위하는 데 쓸 수 있으니 참 좋다. 그런 면에서 보람 있다.”

    ▼ 돈은 좀 모았나.

    “뭐, 조금.”

    ▼ 별로 돈 안 되는 변호사 활동을 많이 한 게 아닌가.

    “그래도 뭐 가난하게 살았겠나. 충분히 생활하면서 했으면 된 거지.”

    ▼ 변호사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는지.

    “변호사의 좋은 점이 자유롭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일에 법률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복지사업이든 자신의 법률지식을 얼마든지 좋은 일에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변호사를 천직으로 여긴다. 한계를 느낀 적은 없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판사를 지망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는 대학 시절의 시위전력을 문제 삼아 판사로 임용하지 않았다. 변호사 세계에서 재조(在曹) 경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위상이나 수입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판사를 지망한 것은 당연한 코스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잘된 일로 생각한다. 변호사 일이 나한테 잘 맞는다. 보람도 느끼고.”

    이미지를 보면 판사가 적성에 맞을 것 같다. “검사 쪽은 아닌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는 “연수원 시절 검사 실무수습 성적이 1등이었다”고 응수했다.

    “(검사가 돼도) 열심히 했을 거다. 다만 판사가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변호사를 해보니 이게 더 맞더라.”

    학창 시절 그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재미있고 성적도 좋았다. 한때 역사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지금도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 좌우 논쟁이 극심하다.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나?

    “사회에 보수적인 생각과 진보적인 생각이 공존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가 생긴 이래 쭉 그래왔을 거다. 다른 나라들도 그렇고. 우리의 현대사를 보더라도 어떤 때는 보수적 정권이 들어서서 성장에 더 집중하고 어떤 때는 진보적 정권이 들어서서 복지나 분배에 더 신경 썼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나가면서 나라가 탄탄하게 발전하는 것이다. 역사 발전도 그렇고. 다만 양쪽이 서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하는 게 문제다. 그게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이념 차이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는 오랜 권위주의 체제를 겪으면서 민주와 반(反)민주의 대립구도가 단단하게 형성됐다. 민주화 세력이 보기엔 독재권력은 당연히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독재권력 쪽에선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이니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뿌리 깊은 사고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다. 한쪽은 민주화 세력의 정신을 계승했고, 반대쪽은 독재세력의 잔재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이런 적대적이고도 대결적인 풍토를 바꿔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상생하면서 경쟁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도시락 뚜껑을 그릇으로

    ▼ 그런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어떤 가치지향성을 갖고 있다고 보나?

    “이명박 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일탈한 정부다.”

    ▼ 일탈했다?

    “그렇다. 우리는 세계에서 드물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평가받는다. 그렇게 자부할 만하고. 역대 정부는 지속적으로 성장을 이루면서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확대해왔다. 산업화의 과실이 많은 국민에게 고루 배분되도록 하고 복지를 확대해왔다. 또 우리가 분단국가이므로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북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 이 정부는 그런 노력을 안 하나?

    “딱 거꾸로다. 마음가짐은 어떤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후퇴했고 복지 후퇴했다. 남북평화 다 깨트렸다. 수도권과 지방 간의 균형발전? 후퇴시켰다. 시대정신, 역사발전 방향에 역행하는 정부다. 상생의 자세가 전혀 안 돼 있다. 친북좌파니 종북세력이니 하면서. 한마디로 같이 못하겠다는 것 아닌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타도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거다. 대선에서 그렇게 크게 이겼으면 여유를 갖고 정치해도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아 어려움을 자초했다.”

    ▼ 뭐 한 가지라도 점수 줄 만한 부분이 없을까.

    “뭐가 있을까.”

    ▼ 대통령이 하여간 열심히는 하지 않는가.

    “그게 오히려 함정 같다.”

    ▼ 국가 비즈니스 면에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지 않나?

    “경제도 못한다. 진정한 보수라면 시장주의일 텐데―난 시장근본주의에 반대하지만―이 정부가 시장주의 하나? 오히려 더 개입해 관치경제 하지 않나. 경제성적도 안 좋고.”

    그는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초등학교 때 매월 내는 사친회비를 제때 못 내기도 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 급식을 받았다. 그런데 급식을 나눠주는 그릇이 없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도시락 싸온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을 빌려 그릇으로 써먹었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도시락 뚜껑을 빌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일까.

    “가난 때문에 잃은 것도 많다. 해보고 싶지만 돈 때문에 못한 게 많으니. 그런 건 때가 지나면 못한다. 나중에 자라서 돈 생겼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건 아쉽다. 그렇지만 가난 때문에 나는 강해졌다. 비교적 건강한 가치관도 갖게 되고.”

    관념적 페미니스트

    그는 전면무상급식에 찬성한다.

    “우리 때도 급식 받으면서 창피했다. 딱 표가 나니까. 아마도 우리 세대에서 급식 받았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느꼈을 거다. 참여정부 때 방학 중 결식아동에 대해 급식을 실시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난 뒤 점검해보니 전달률이 굉장히 낮더라. 10~20%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보니 표가 나니까 아이들이 차라리 안 받고 굶는 쪽을 선택한 거다. 급식 받는 학생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전달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한 거다. 돈 있는 집안 아이들까지 급식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는 언뜻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선별급식하면 학생들의 자존심이 상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급식 받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구분된다. 사는 동네와 아파트 평수에 따라 갈라지는 세태에서 먹는 것으로 아이들을 구별한다는 건 굉장히 가혹한 일이다. 그런 걸 막기 위해서라도 전면무상급식이 바람직하다.”

    ▼ 과잉복지니 복지 포퓰리즘이니 하는 비판이 있지 않나. 참여정부도 그런 평가를 들었고.

    “우리 복지는 아직 까마득하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의 복지도 멀었다. 복지 포퓰리즘은 말이 안 된다. 다만 복지를 늘리더라도 재정형편에 맞게 조절할 필요는 있다. 전면무상급식이 복지 포퓰리즘이라면 노인들에게 전철도 무료로 타게 하면 안 되지. 돈 있는 노인들을 왜 무료로 타게 해주나. 부유층을 제외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가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거나 가리지 않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다. 의무교육이란 것도 무상 아닌가. 모든 아이의 교육비가 무상이다. 그걸 생각하면 무상급식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 시급히 실시해야 할 복지정책을 꼽는다면?

    “지금 국가 차원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출산 아닌가. 이런 추세라면 노동인구가 줄어든다. 저출산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출산과 육아 부담이다. 출산과 육아, 보육에 대한 부담을 덜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 우리 사회의 남녀평등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아직도 멀었다. 가부장제는 많이 약해졌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 사회적 역할은 아직 미미하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데 여성이 훨씬 많다. 같은 노동을 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처우가 훨씬 열악한 거다.”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졌다.

    ▼ 집안에서 얼마나 잘하기에 그런 소리를 듣나.

    “그런 얘기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실천으로는 못 미치고 그냥 관념으로만.”

    그가 처음으로 허허 웃었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집사람은 늘 그렇게 얘기한다. 완전히 이중인격자라고. 밖에 나가면 남녀평등이고 집에 들어오면 가부장이라고.”

    ▼ 진정한 페미니스트 소리를 들으려면 아내한테 인정받아야 하지 않나.

    “가부장 소리를 들을 만한 게,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가족한테 강요하게 되니….”

    노무현의 후계자 문재인

    7월29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자서전 북콘서트에서 인사말하는 문재인 변호사(가운데).

    다산 정약용이 롤모델

    ▼ 문 변호사께선 아이들도 자유방임으로 키웠다던데.

    “뭐 1등 하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아이들도 공유해주길 바라긴 했다.”

    ▼ 그런 면에서 자식농사는 잘 지은 것 같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잘 자라줬는데.”

    그는 아들, 딸 하나씩을 뒀다.

    “둘 다 공부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류대학도 못 나왔고.”

    아들은 디자인을 전공했다. 미디어아트 전공인데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라고 한다. 딸은 직장생활 하다가 결혼 후 애 낳고 주부가 됐다.

    ▼ 지방에 사는 걸 고집하고, 책에서도 서울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뭐가 문제인가.

    “20년 전 부산 인구가 400만이었다. 지금은 350만이 안 된다. 부산만 그런 게 아니다. 서울과 경기 빼고 전국이 다 그렇다. 수도권의 흡인력이 너무 커 사람과 돈이 전부 그리로 몰린다. 수도권은 과밀이고 지방은 피폐다. 이게 바뀌어야 한다.”

    ▼ 현실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참여정부 때 수도권의 과밀집중을 억제하고 지방과의 상생발전을 위해 행정수도와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걸 추진했다. 공공기관이 옮겨가면 관련된 업체들이 따라서 옮길 것으로 봤다. 지방에 혁신도시 만든 것도 그런 차원이다. 구체적인 정책 이전에 중앙과 지방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겠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겐 이보다 절실한 문제가 없다. 중앙에서는 말로는 공감하면서도 절박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책벌레라고 할 만큼 독서광이다.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