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해결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보수정치가 비스마르크. 강한 이미지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측면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비스마르크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존재할 정도로 술과의 인연이 결코 만만치 않다.
- 비스마르크는 젊은 시절부터 샴페인과 같은 발포주에 독일식 흑맥주를 머그잔이나 스타인(뚜껑이 있는 독일식 큰 맥주잔)에 섞어 넣어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비스마르크는 이 칵테일을 워낙 좋아해 한번 입에 댔다 하면 갤런 단위(수천 cc)로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서는 이 칵테일에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비스마르크 칵테일’은 사실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블랙 벨벳(Black Velvet)’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블랙 벨벳’으로 널리 알려진 ‘칵테일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1832년 괴팅겐대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방탕한 생활로 이듬해인 1833년 제적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베를린 홈볼트대(1833~1835)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게 된 뒤에는 비교적 충실히 생활했다. 대학 졸업 후 비스마르크는 법관시보 시험에 합격하고 아헨과 포츠담에서 변호사 연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변호사로서의 길을 그만두고 한동안 두 여인과의 염문으로 젊은 시절의 일탈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1838년부터 당시 프로이센 융커계층의 의무인 1년간의 군대 복무를 마치고 예비군 장교가 된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쇤하우젠으로 돌아온다.
1847년 그가 32세가 되던 해에 평생의 반려가 되는 여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하고, 바로 그해 새롭게 결성된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의 권위를 적극 옹호하는 왕당파였던 비스마르크는 강한 보수 성향과 날카로운 언변을 통해 주목받는 정치가로 입지를 다진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진보 혁명의 여파로 혁명적 소요 사태인 베를린 3월 혁명이 발생한다. 혁명세력은 자유주의 개혁을 통한 민족주의를 추구했으며 왕으로부터 헌법 개정의 승인을 받고, 신내각을 구성하는 등 한동안 위세를 떨친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반혁명파 측에 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던 혁명파는 내분과 함께 봉건 제후들의 군사력에 의해 그해 말을 기점으로 쇠퇴해 힘을 잃고 만다.
1849년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하원의원에 선출된다. 당시 독일에서는 여러 지역으로 분리된 소국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전체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위상 및 독립을 제한할 수 있는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회의에 참가해서도 그런 방향으로 활동했다. 결국 회의에서의 통일 논의는 독일 내에서 가장 중요한 두 주축 세력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비스마르크 후원자 빌헬름 1세 등극
1851년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여해 1858년까지 활약했다. 이곳에서 그는 극우적인 색채를 점차 벗으면서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자세의 정치인으로 변한다. 그는 독일 통일 논의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영향력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프로이센의 역량 강화와 독일 내 기타 주들과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그의 독일 통일에 대한 생각도 점차 긍정적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러시아와 프랑스 등 인근 유력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도 힘을 쏟는다.
18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재위 1840~1861)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정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동생 빌헬름이 섭정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비스마르크를 러시아대사로 임명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의 가장 중요한 외교 대상국이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러시아대사 임명은 표면적으로는 승진이었지만 실상은 그 기간 프로이센의 내부 정치에서 멀어져 그로서는 손실이 더 컸다. 실제 1859년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급박한 정세 변화에서도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군의 일시적 약세를 프로이센이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 역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섭정으로 일하던 빌헬름은 병석에 있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61년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다. 그가 훗날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프로이센의 군국화를 바탕으로 독일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 빌헬름 1세(1797~1888·재위 1861~1888)다. 빌헬름 1세의 취임 이듬해인 1862년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서 파리대사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빌헬름 1세는 취임 초기부터 진보파가 장악한 의회와 종종 충돌했다. 그러다가 1862년 그가 군사력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하고 이를 뒷받침해줄 군비 확장 예산을 의회에 제출하자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알프레드 폰 룬(Albrecht von Roon·1803~1879) 등 왕의 측근 관료 들 중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룬은 대신 의회와 대결해 이 대립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로 당시 파리대사로 있던 강경파인 비스마르크를 빌헬름 1세에게 강력 추천했다. 룬은 이후 몰트케(Helmuth von Moltke·1800~1891)와 함께 비스마르크를 도와 프러시아를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빌헬름 1세는 룬의 제의를 받고 비스마르크의 강한 개성과 전권을 휘두를 가능성 때문에 한동안 임명을 망설인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반대가 점점 거세지자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의 독대를 통해 왕의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자세를 확인한 뒤 1862년 9월24일 비스마르크를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비스마르크는 9월30일 프로이센 의회 예산위원회에서 가진 취임 첫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그 유명한 철혈정책(鐵血政策)의 기조를 피력한다.
“프러시아는 상황에 대처할 힘을 집중해 유지해야만 합니다. 빈 협약에 의한 프러시아의 현재 국경은 건전한 국가 경영을 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큰 문제들은 말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해결될 것입니다(The great questions of the time will not be resolved by speeches and majority decisions-that was the great mistake of 1848 and 1849-but by iron and blood).”
철혈 재상의 강경 정책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왕의 확고한 신임을 확신한 비스마르크는 다음 목표를 독일 통일로 잡았다. 1860년대 이전의 독일은 여러 개의 주가 느슨하게 결합된 하나의 연방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단일 국가로서의 강력한 정책을 전혀 추진할 수 없었다. 이런 독일을 통일 국가로 만들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기본 정책은 프러시아의 강한 군사력과 함께 외교력을 동원해 프러시아의 주도 아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상태에서 다른 지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지는 국가는 의회 중심의 자유 국가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 국가여야 했다.
1863년 당시 덴마크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7세가 사망하자, 그의 관할 아래 있었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두 지역에 대한 영토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와중을 틈타 오스트리아와 정략적 연합을 한 뒤 덴마크를 패퇴시키고 1865년 8월 협정을 통해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했다.
그러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일시적인 동맹 관계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논의 과정에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장자 역할을 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의도를 오래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주도의 대독일주의 통일을 반대하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상태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실현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기로 결심했다.
1866년 6월 몰래 주변국들과의 외교 협상을 마무리 지은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 대한 양국 간의 협정을 오스트리아가 어기려 한다는 점을 내세워 홀슈타인으로 군대를 출병함으로써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 연방의회를 열어 프로이센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회의에 참여한 독일 내 소국가 대다수를 자기편으로 전쟁에 가담시켰다. 비스마르크 역시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있던 베네치아 지역에 대한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를 원군으로 끌어들인다.
전쟁의 결과는 주변국들의 예상과 달리 순식간에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프러시아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향후 독일 통일 문제에 오스트리아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이전의 독일 연방체를 해체하고 대신 프러시아가 마음대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연합체인 북독일연방을 결성한 뒤 빌헬름 1세를 대통령, 자신을 총리(Chancellor)로 내세운다.
이 같은 비스마르크의 전공(戰功)은 프러시아 내에서 그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1866년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가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해 의회를 장악한다.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1862년 이후부터 예산 승인 없이 사용한 경비에 대해 사후승인을 받는 안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킨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의 승리는 인근 강대국인 프랑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1808~1873·재위 1852~1870)는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독일의 부상을 유럽 전체의 힘의 균형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와의 일전을 벼르고 있었던 비스마르크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남부 독일을 포함한 전 독일의 통일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프러시아가 주도하는 독일 통일을 이룬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비스마르크는 치밀한 사전 공작을 통해 프랑스와 대립 긴장 관계를 점점 높이면서 마침내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를 계기로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자극한다.
프랑스군 대파한 몰트케 장군
참다 못한 프랑스가 1870년 7월19일 전쟁을 선포했으나, 몰트케 장군 지휘하의 프러시아군과 독일 연합이 일방적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서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사실상 승부를 결정했다. 9월 초,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하고 프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파리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계속 프러시아군에 저항했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이듬해에는 파리까지 함락되는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주변국들의 개입 가능성을 염려해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로 하고 1871년 5월10일 알자스-로렌 지방의 양도 및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을 받고 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1871년 초 보불전쟁의 끝이 임박한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 마침내 통일 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1월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독일 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제2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제국령(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비스마르크 역시 프러시아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한 채 독일제국 총리가 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이런 지위는 1890년까지 이어진다.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한 정책과 노련한 외교 수완으로 수백 년 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 숙원을 이룬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는 오히려 적극적인 평화 애호론자로 바뀌었다. 우선 외교적으로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의 강력한 힘과 위상을 배경으로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유럽 전체의 평화 유지를 위해 균형 외교를 펼치는 데 전력투구했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소외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대해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을 우군으로 해 기타 모든 유럽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화 정책을 펼친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해외 식민지 개척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는 해외 식민지 개척 비용 및 각종 부담을 고려할 때 지나친 식민지 확장 정책은 국익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그도 1880년대 초반 들어 국민 여론이 식민지 개척 찬성 쪽으로 기울자 마지못해 정책을 전환했다. 그 결과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토고랜드(지금의 가나와 토고), 카메룬, 독일령 동아프리카(지금의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등을 차지했다.
경제 정책 측면에서 그는 1870년대의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독일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관세 정책을 펼쳤고, 정치적으로는 귀족계급인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사회적으로는 1871년부터 가톨릭 세력이 정치세력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는 이름의 가톨릭 억압 정책을 펼치기도 하고,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78년 반사회주의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노력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계속 강해져 그의 목적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1880년대 당시 세계 최초가 되는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해 의료(1883), 사고(1884), 양로 및 장애(1889) 보험을 도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집권 말기는 순탄하지 못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1831~1888)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후두암으로 취임 99일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왕의 장남인 당시 29세의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1859~1941)가 새로운 왕으로 취임한다.
75세에 총리직 해임…한탄 속 회고록 집필
보불전쟁 당시 파리의 참상을 그린 장루이 에르네스트 메쇄에의 작품 ‘파리 함락(1870~1871), 우의’.
이후 비스마르크는 한탄 속에 회고록 등을 집필하며 만년을 보낸다. 1897년 빌헬름 2세와 생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독선적, 단견적 정책을 경고하며 자신의 사후에 독일의 안전을 위협하는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8년 10월 근대 독일이 낳은 영웅 비스마르크는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죽기 전 그는 유언을 통해 현역 황제를 제치고 과거 그를 믿고 후원해주었던 빌헬름 1세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남기게 함으로써 마지막까지 빌헬름 2세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빌헬름 1세 황제의 진정한 충복이 여기 잠들다(Here lies a true servant of the Emperor Wilhelm I).”
실제 비스마르크 사후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이지만 신중하지 못한 대외 정책들은 결과적으로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대독 포위망을 만들게 했다. 빌헬름 2세 자신도 전쟁 패배와 함께 퇴위하면서 국외로 망명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워진 독일 제2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중요한 문제 해결은 말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마침내 독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보수정치가 비스마르크는 그의 연설 내용 때문에 그 후 역사적으로 철혈 재상 또는 철의 재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런 강한 이미지 때문에 보통 그의 개인적이면서 인간적인 측면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술과 같은, 사람을 적당히 느슨하게 만드는 기호품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엄격한 인물과는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비스마르크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존재할 정도로 술과의 인연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정치외교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전인 젊은 시절부터 샴페인과 같은 발포주에 독일식 흑맥주(schwarzbier, black beer)를 머그잔이나 스타인(뚜껑이 있는 독일식 큰 맥주잔)에 섞어 넣어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비스마르크는 이 칵테일을 워낙 좋아해 한번 입에 댔다 하면 갤런 단위(수천 cc)로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서는 이 칵테일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비스마르크 칵테일’은 사실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블랙 벨벳(Black Velvet)’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칵테일 블랙 벨벳에 샴페인과 같은 발포주를 사용하는 것은 비스마르크 칵테일과 같으나 독일식 흑맥주가 아니라 스타우트(stout) 계열의 흑맥주를 사용한다. 스타우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유명한 국민주인 기네스 맥주를 사용하는 것을 정통중에 정통으로 친다. 스타우트와 독일식 흑맥주 쉬바르츠비어는 짙은 검은색을 띠는 흑맥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제조공법과 맛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우선 쉬바르츠비어는 우리나라 맥주처럼 하면(下面)발효를 시키는 전형적인 라거(Lager) 맥주의 일종으로 상쾌한 맛이 나면서 초콜릿이나 커피향이 느껴지는 맥주다. 반면 기네스와 같은 스타우트 맥주는 상면(上面)발효를 통해 만들어지는 에일(Ale) 계통의 맥주로, 독일식 흑맥주에 비해 쓴맛이 더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스타우트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국산 스타우트 맥주는 실제 스타우트라기보다는 라거 공법으로 만들어진 흑맥주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블랙 벨벳은 1861년 영국 런던의 유명한 사교클럽이었던 브룩스 클럽(Brooks′s Club)의 한 바텐더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었던 앨버트공(Albert, Prince Cohort·1819~1861)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추도하며 고안한 것으로, 당시 조문객들이 착용했던 완장의 색깔과 유사하게 칵테일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비록 그 외관은 거의 비슷하지만 칵테일의 탄생 설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블랙 벨벳과 비스마르크 칵테일은 전혀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제조 방법도 조금은 달라 전형적인 블랙 벨벳은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길고 가는 샴페인 잔(champagne flute)을 사용한다. 그리고 찬 스타우트 맥주를 반 정도 먼저 채운 다음 그 위로 조심스럽게 샴페인을 채워 비중이 다른 두 술이 층을 이루게 하는 일종의 푸스카페(pousse-cafe′)식 칵테일로 만들어 서빙한다. 그런데 샴페인과 기네스 맥주 모두 기본적으로 거품이 있는 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비중 차이를 이용한다고 해도 깔끔하게 분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한 가지 요령은 기네스 맥주를 먼저 따른 다음 바스푼을 뒤로 엎어 잔 옆에 갖다 댄 다음 숟가락을 통해 샴페인을 조심스럽게 흘려주는 것이다.
같지만 다른 블랙 벨벳과 비스마르크 칵테일
그런데 블랙 벨벳에는 재미있는 변형 칵테일이 하나 존재한다. 블랙 벨벳의 주재료인 샴페인은 실제 상당한 고가의 술이다. 이 때문에 샴페인을 사용한 칵테일의 가격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른바 ‘가난한 사람들의 블랙 벨벳(Poorman′s Black Velvet)’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이 고안된 것이다. 이 칵테일에는 서양에서는 샴페인 대신 사과술(cider)이나 배즙으로 만든 술(perry)을 사용하여 특히 젊은 층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술들을 쉽게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대신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저렴한 국산 샴페인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흑맥주와의 비중 차이가 어떤지는 시험해보아야 할 것이다. 국산 샴페인은 최근 명칭에 대한 국제규약 때문에 샴페인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못하고 스파클링 와인(발포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비스마르크 칵테일이든 블랙 벨벳이든 간에 맥주가 들어가는 이런 칵테일들은 칵테일 분류학상으로는 모두 맥주 칵테일(Beer Cocktail) 범주에 속한다. 실제 칵테일에 맥주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기 때문에 같이 혼합되는 술이 무엇이든 간에 이들 칵테일을 한꺼번에 모아 특별히 분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맥주 칵테일 안에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술이 하나 들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나라 술꾼들의 대명사가 된 폭탄주가 그것이다.
한국 맥주에 소주 섞은 칵테일, Poktanju
폭탄주의 탄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사실 이 술은 우리나라에서 창작 고안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만 마시는 음주 형태는 더욱 아니다. 이 술은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라는 이름으로 서양 국가에서 오래전부터 음용돼 온, 앞서 말한 대로 맥주 칵테일의 일종이다. 폭탄주는 원래 그 정의상 맥주가 들어 있는 큰 잔에 위스키가 들어 있는 작은 잔을 넣어 단숨에 마시는 음주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위스키 대신에 보드카, 데킬라, 소주를 넣으면 각각 보드카, 데킬라, 소주 폭탄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 인터넷 백과사전(Wikipedia)을 보면, 맥주 칵테일 내에 ‘Poktanju’ 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새롭게 등재해 그 내용을 ‘한국 맥주에 소주를 섞은 칵테일’로 소개하고 있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보통 마시는 폭탄주는 이미 보일러메이커라는 이름으로 등재돼 있어 차별화를 위해 소주를 섞은 것을 특별히 폭탄주로 지칭해 등재해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따지자면 잘못된 정의로 볼 수도 있으나 술의 세계에서 그 정도는 애교로 보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독일 통일의 영웅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붙인 ‘칵테일 비스마르크’와 국제 사전에까지 그 이름이 등재된 우리나라의 맥주 칵테일 ‘폭탄주’를 볼 때, 문득 ‘우리도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인물의 이름을 붙인 칵테일 하나쯤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술자리에서 가벼운 일상사와 더불어 간간이 고담준론이 꽃을 피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애주가로서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