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최불암(70)은 가장 한국적인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아련한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는다. 23년간 방영된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 회장은 좋은 아버지의 기준으로 통한다. ‘파~’하는 그의 웃음을 보며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그러나 연기자 최불암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때 시청률 70%를 기록했던 실화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 그가 입었던 ‘바바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완성도 높은 드라마로 꼽히는 ‘그대 그리고 나’의 캡틴 박을 추억하는 사람도 많다. 그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다.

최불암은 요즘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개국 드라마 ‘천상의 화원’ 촬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곰배령 사람들의 가족성장기를 다룬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은 자식과 의절하고 사는, 무뚝뚝하고 고집 세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버지를 그려낸다. 낙엽 소리가 좋던 11월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 ‘천상의 화원’에서 강한 아버지 역할을 맡으신 것 같은데….

“무뚝뚝한 시골남자예요. 근데 한국의 아버지들이 사실은 강하지 않아요. 마음이 따뜻하지. 이 드라마는 아름다운 얘기를 그립니다. 부모자식 간의 아름다운 소통을 얘기해요. ‘천상의 화원’은 일반적이지 않아서 좋아. 요즘은 무슨 막장, 자극적인 드라마가 대센데, 우리 드라마는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되새기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해봅시다’ 하고 덤벼들었죠.”

▼ 하긴 요즘 드라마들이 죄다 막장으로만 가고 있어서….

“자꾸 자극적인 것만 내놓는데, 이런 양질의 드라마도 필요합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해주는 드라마. 작가도 연출가도 아주 잘 만났어요. 연출가(이종한 PD)는 전원일기에 들어와 살아도 되는 사람이에요. (제작사 대표인) 이장수, 이 양반은 엉터리 드라마를 못 만드는 사람입니다. 트릭을 안 부리지.”

▼ 팀이 잘 꾸려졌네요. 기대가 됩니다.

“잘 꾸렸죠. 서로 잘 맞아요. 그래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라고 해요. 그냥 조용히 표현하는 게 좋아.”(웃음)

▼ 동아일보와는 인연이 깊으시죠.

“뭐, 옛날에 김상만 회장님 계실 때엔 저희 큰집 같았죠. 제가 또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설립하신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동아방송에도 나왔었고. 어떤 의미에선 선배네 집 같은 곳입니다. 또 고(故)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님하고도 술 많이 먹었어요. 김 회장님은 술만 먹으면 절 불러냈어요. 낭만이 있었지요.”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 선생님은 우리나라 방송 사상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드라마 2편에 모두 출연하셨어요. ‘전원일기’가 1980년부터 2002년까지, ‘수사반장’이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방송됐죠.

“네, 그 기록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 그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겁니다.

“왜요? 우리 채널A에서 깨야죠. ‘천상의 화원’으로.”(웃음)

▼ 젊을 때부터 60~70대의 연기를 하셨어요.

“그렇죠, 30대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 만나면 지금도 ‘어이, 김 회장. 지금 한 80살 되지 않으셨소?’ 그럽니다.”

▼ 수사반장 얘기를 해보죠. 한때는 시청률이 70%를 넘기도 했다는데….

“처음엔 좀 어려웠어요. 자리 잡는 데 한 3~4개월 걸렸죠. 그땐 광고부란 게 없었으니까, 연기자하고 치안본부 사람들이 같이 다니면서 스폰서를 찾았지. 연기자 앞세우고 치안본부에서 ‘빽’ 쓰고. 하여간 한창때는 시청자가 많았어요. 택시도 잡을 수가 없었다니까. 그런데 그게 동아일보 사설 덕도 많이 봤어요. 동아일보에서 ‘안방의 보안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줬거든. 유신정권이라 무서울 땐데, 나중에 들으니까 박정희 대통령도 한 편도 안 빼고 봤다는 거예요.”

▼ 재밌는 일화도 많았겠어요.

“재밌는 일이 많았어요. 담배 때문에 육영수 여사한테 전화를 다 받았으니까. 하루는 ‘부속실에서 전화가 왔다’고 집사람이 그래. 청와대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속으로 ‘부속? 부속이 뭐지?’ 그러면서 전화를 받았어요. 일요일, 수사반장 방영이 막 끝났을 땐데, 내가 받으니까 ‘영부인 전화십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기다리는데 누가 웃으면서 ‘나, 육영수예요’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죠. 군인 자세로 말이야.”

▼ 뭐라고 하시던가요?

“드라마 잘 봤다고, 그때 무슨 가난범죄를 다뤘을 거예요. 나는 속으로 ‘뭔가 큰 죄를 지었구나’ 했지. 근데 육 여사께서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요. 담배를 좀 줄여주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내가 매 회 딱 네 대를 피웠거든요. 그게 다 설정이었죠.”

▼ 그런 설정도 합니까?

“당연히 하지, 일단 시체를 보고 딱 돌아서면서 한 대 태웁니다. ‘너의 복수를 해주마’ 하면서, 그리고 중간에 바쁠 때 한 대 피우고, 클라이맥스에 가서 한 대 피웁니다. 마지막은 범인을 다 잡고 생각하면서 한 대를 피우죠. 담배가 일종의 희로애락의 상징인 겁니다. 사랑도, 분노도, 즐거움도…. 하여간 내가 ‘네 대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육 여사께서 ‘아유~ 그러면 한두 대로 줄이세요’ 그러는 거예요. ‘최불암씨가 담배를 네 대 태우시면 저 양반(박정희 전 대통령)도 따라서 네 대를 태워요. 그런데 국민이 다 따라 피우면, 건강에 좋을 리가 있겠어요?’ 그러시는 거예요.”

▼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그때는 잘 몰랐지. 속으로 ‘이젠 담배까지, 씨발~ 담배도 못 피우게 해?’ 뭐 이런 상스러운 생각만 했죠.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 양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 여사께서는 이미 1970년대에 금연운동을 한 거예요.”

▼ 그만큼 드라마가 영향력이 있었다는 증거겠죠.

“전원일기 때도 그랬어요. 우리가 (손을 들어 보이며) 수박을 한 통 탁 치면, 전국에서 수박 몇 만 개가 날아간다고 그랬으니까.”

얼어 죽은 아이

▼ 수사반장 하면서 범죄자도 많이 만나셨죠.

“많이 만났죠. 최중락(전 총경)이란 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최중락씨하고는 형이요, 아우요 하고 지냈죠. 집에도 가고. 그땐 다들 가난하게 살 땝니다. 최중락씨가 그때 남산에, 박 대통령이 선물로 준 7평인지 14평인지 하는 아파트에 살았어요, 응접실도 없고 방 하나만 있는. 한번은 정초에 수사반장팀이 인사를 갔는데,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출감한 사람들, 도와준 사람들이 이 양반 집에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귤 2개 사오는 사람, 맥주 한 병 안고 오는 사람, 담배 한 갑을 포장해서 가져오는 사람, 감동이 컸죠. 그런데 그 집에서 차라고 나오는 게 그냥 노리끼리한 보리물이에요. 그걸 한잔씩 얻어먹던 생각이 나요. 냉장고를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런 시절이었어요.”

▼ 훌륭한 분이네요.

“그 양반은 훌륭하죠. 지금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세요.”

▼ 수사반장 같이 했던 연기자, 형사들과 모임을 오래 해오신 걸로 아는데….

“최중락씨 쓰러진 뒤로는 잘 못 모이죠. 어른이 있어야지. 그분 대신 내가 해야 되는데, 내 말발은 잘 안 먹혀요.”(웃음)

▼ 잊지 못할 사건도 많았겠어요. 선생님의 책을 보니 아파트 계단에서 얼어 죽은 아이의 얘기는 정말 마음이 아프던데요.

최불암은 2007년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일종의 자서전이다. 이 책의 상당부분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드라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에 할애돼 있다. 책에는 수사반장을 만들며 보고 겪은 안타까운 사연도 많이 소개돼 있는데, 특히 추위에 떨다 얼어 죽은 아이의 얘기, 등록금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강도에게 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얘기 등이 가슴 아프게 그려져 있다.

“내가 현장에 갔더니 죽은 아이를 얇은 비닐로 덮어 놨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고 최중락씨가 화가 났지. ‘어린애가 얼어 죽었는데, 담요 한 장 덮어줄 사람도 없냐’고 악을 썼지. 사람이 죽으면 가마니라도 덮어주는 게 우리네 문화잖아.”

▼ 그렇죠.

“나중에 비닐을 벗기고 보니까, (몸을 웅크린 시늉을 하며) 이렇~게 웅크렸는데, 손하고 코가 붙어 있더라고. 아유~, 정말 처참했지. 애가 우는 소리를 아파트 사람들이 듣긴 들었는데, 내 집 아이가 아니니까 무관심하게 버려놓은 거지. 그래서 이제 얼어 죽은 거지. 가난이란 게 그렇게 끔찍했어요.”

그런 기억 때문일까. 최불암은 현재 어린이재단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전원일기’와 정주영 회장

▼ 그런 게 수사반장에 나가면 사회적인 반향이 컸겠네요.

“난리가 났죠. 반향이 크니까 문교부 장관이나 (방송국) 사장이 방송을 중단시키고 그랬지. 두 번 중단됐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사회정의가 반듯하게 섰으니 수사도 필요없다’면서 중단시킨 적도 있어요.”

▼ 전두환 정권 때 얘기 같은데요.

“그런 얘기는 내 입으로 못 하고….(웃음) 아마 사장이 대통령 비위 맞춘다고 그랬겠지.”

▼ 수사반장은 인기가 좋아서 악역에도 지원자가 많았겠어요.

“잘만 하면 금방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악역을 하다 성공한 사람도 많아요.”

수사반장에서 악역을 가장 많이 맡은 사람은 탤런트 이계인씨다. 그는 수사반장에 악역으로 출연하면서 사형 20회, 무기징역만 30여 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수사반장 때 항상 바바리를 입으셨는데….

“맞아요. 근데 어떤 신문에서 내가 콜롬보를 흉내 낸다고, 사대주의라고 쓴 일이 있어요. 콜롬보는 수사반장보다 한참 뒤에 한국에 소개됐는데 말이지. 그래서 내가 그 신문사로 항의하러 가고 그랬다니까. 당시 바바리는 용도가 많았어요, 형사들한테. 이불로도 쓰고, 깔고 자고 그랬으니까. 특히 잠복근무할 때 좋지.”

▼ 멋을 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군요.

“다용도로 쓰는 거지.”

▼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님과도 인연이 깊으셨죠.

“정 회장님은 전원일기에 출연도 할 뻔 했어요.”

▼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그때 80 몇 년인가 그래요. 한 20분 정도를 비워놨지. 정 회장님이 옛날에는 농사를 이렇게 지었다고 얘기해주는 장면이었어요, 농부로 나와서. 본인이 하고 싶어했거든. 근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말렸다는 거야.”

▼ 좋은 장면이 됐을 텐데….

“‘오야붕(우두머리)’이 어딜 나가서 주책을 떠느냐, 뭐 그랬겠지. 나중에 회장님도 ‘회의를 했는데 나더러 나가지 말라고 해서 못 나갔다’고 그러시더라고. 자기는 아버지 생각하면서 얘기하려고 했다는데, 그분이 농사에 대해 아주 해박하시거든요. 유명한 일화도 있잖아요. 부산인가, 대전인가? 대통령이 방문하는데, 미 8군사령관이 전전긍긍하더래요. 명색이 대통령이 왔는데, 걷는 길에 잔디라도 깔아야 하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잔디가 어디 있어? 그것도 2월에. 그런데 정주영씨가 그 얘길 듣고, ‘내가 하면 얼마 주겠냐’고 그러더래요. 그러곤 어떻게 했냐면, 이제 막 난 보리 싹을 시골에서 떠다가 잔디처럼 심은 거예요.”

▼ 아~ 비슷하니까.

“잔디보다 더 근사하지. 그걸 3일 만에 해냈다는 거 아니야. 농사를 안 지어본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거죠. 2월에 보리 싹이 난다는 걸 안다는 게. 배를 가져다 물을 막아서 아산방조제 만든 것도 다 농사법을 활용한 거예요. 물길에다가 지푸라기를 던져놓으면 그것들이 이물질처럼 쌓여서 자연스레 물길을 막는 원리지.”

▼ 청운동 정 회장님 자택에도 여러 번 가셨죠?

“여러 번 갔죠. 드라마를 하면 그 팀을 다 불러서 밥을 먹이곤 하셨어요. 그런데 정 회장님도, 사모님(변중석)도 그렇게 소탈하고 검소해요. 처음엔 식모인 줄 알았으니까. 사극을 좋아하셨는데, 드라마팀이 가면 복요리를 해서 대접을 하시곤 했어요, 복사시미. 그리고 그 집에는 그림도 한 점 없어, 화장실에는 타일이 다 떨어져 있고. 그런데도 정 회장님은 그게 좋다고 온탕, 냉탕을 왔다 갔다 하셨어요. 소파는 손잡이 천이 다 떨어져 있는데, ‘그런 게 뭐 중요하냐’ 하셨으니까.”

▼ 대단한 분이네요.

“그리고 아주 솔직한 분이에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대통령선거 나오셨을 때, 신문에 ‘잠을 4시간만 자면서 사업을 일궜다’고 나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침에 만나서 얘길 했죠. 그런 기사가 나왔다고. 그랬더니 ‘누가 그래요? 내가 4시간만 잤다고’ 그러시는 거야. 그래서 ‘신문에 그렇게 났다’고 했죠. 그러니까 ‘이거 봐요, 나는 기운이 센 사람인데 하루에 7~8시간 안 자면 일을 못해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곤 사무실을 나가면서 나를 부르더니 귀에다 대고 ‘앞으로 잠 조금만 자고 일한다는 놈 있으면 그놈은 분명 병자 아니면 사기꾼이니까, 그런 놈하고는 장사하면 큰일 나’ 그러시는 겁니다. 근데 살아보니까 그분 말이 맞아요.”(웃음)

▼ 정치도 정 회장님 권유로 하셨잖아요?

최불암은 1992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당시 정주영 회장이 이끌던 국민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4년 후인 1996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30대 신예 정치인이었던 김민석 전 민주당 의원에게 패배했다.

“권유가 아니라 그 양반이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지. 가서 좀 도와드리고 있는데 신문에 확 나버렸지. ‘가서 앉아만 있어라’ 그래서 갔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최불암씨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거예요. 박수를 치는데 또 안 올라갈 수가 있나? 올라가서 한마디 하니까, 아유~. 신문에 ‘최불암 정치 시작한다’고 났지, 뭐.”

▼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원래 있으셨어요?

“전혀 없었지.”

▼ 1996년에는 지역구에 나가서 떨어지셨어요.

“당연히 떨어지는 걸로 각오하고 있었어요, 민심이 그렇더라고. 그 친구(김민석 전 의원)가 ‘최불암은 무대로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고 그러더라고, 자기는 국회로 가고.”(웃음)

▼ 선생님을 일부러 안 찍은 사람들도 있었겠어요. 무대에서 보려고.

“누구는 그러더라고. 난 당신 안 찍었다고.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그랬지.”

▼ 정치 그만둔 건 후회 안 하세요?

“나는 어른이 시키면 말을 잘 들어요, 남의 말을. (1996년 총선을 앞두고도) 내가 정치를 그만한다고 했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나를 설득하는 거예요. ‘국민들이 당신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면 그것도 반역이라고. 그 말 듣고는 또 그런 줄 알고 나갔다 떨어졌지. 원래 연예계 사람들이 말을 잘 들어요.”(웃음)

▼ 드라마 ‘영웅시대’에선 정 회장님 역할을 맡으셨는데, 말투나 행동이 비슷해서 화제가 됐어요.

‘영웅시대’는 2004년 7월5일부터 2005년 3월1일까지 방송된, 대한민국의 경제사를 그렸던 MBC의 월화 드라마다. 최불암은 이 드라마에서 정주영 회장(극중 천태산)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일부러 비슷하게 했어요. (정 회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러니까 이거 봐요’, 이렇게. 여자 목소리로, ‘잠 4시간 잔다는 사람하곤 장사도 하지 말아요. 병자 아니면 전부 사기꾼이야’, 이렇게.”

술집 주인이던 어머니

▼ 살아오신 얘기를 좀 해보죠. 부친께서 아주 대단한 분이셨다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아요. 여섯 살 땐가 만나서 한 1~2년 있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소리도 한두 번밖에 못 해봤고. 아버지 영정 들었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어머니는 독립심이 강하고 인정이 많고 또 멋스러운 분이었어요. 술도 한잔 하실 줄 아는 여자였고….”

▼ 여장부 스타일이셨나 봐요.

“예술가들을 이해하고 또 오랫동안 교유하고 그랬죠. 판단력이 좋은 분이었어요. 내가 수사반장 하는데 그걸 보시더니 ‘야, 너 사람들 손에 쇠고랑 채우지 마라’‘권총 들지 말고 선글라스 쓰지 마라. 그게 다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셨어요. 내가 그래서 지금도 선글라스를 못 써요. 이미지가 나쁘다 이거지. 병원에서는 노안 때문에 쓰는 게 좋다고 하는데….”

장소 : 63빌딩 ‘워킹 온더 클라우드’

▼ 어머니께서 명동에서 술집을 운영하신 걸로 압니다.

“명동에 있는 은성이라는 주점이었어요. 변영로 선생 같은 시인도 많이 오시던 곳이고 기자들도 많았고. 아주 기자들 판이었지, 뭐.”

주점 ‘은성’은 1950~60년대를 대표한 명동의 주점이다. 최불암의 모친인 이명숙씨가 운영했다. 김수영,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천상병 같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지금도 명동에는 ‘은성주점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 가족 중에 독립운동가가 많은 걸로 아는데요.

“네, 아버님 형제들이 다 했죠. 아버지는 상해에서 돈을 버셨어요. 작은아버지가 독립군이었고. 해방이 되고 나서 아버지는 말을 타고 만주에서부터 오셨어요.”

▼ 만주에서 말을 타고?

“네, 말을 타고. 말안장에다 금품을 넣어가지고. 그 돈으로 신문사(인천일보)를 차리고 영화사(건설영화사)를 만들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여자도 하나 데리고 오시고….”

▼ 여자요?

“중국 여자인데, 아주 예쁘더라고, 내가 지금 생각해도.”

▼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나죠.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려왔나 그랬으니까. 그런데 2~3일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보내더라고, 우리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거든. 그러니까 아버지가 놀래서 여자를 다시 중국으로 보냈어요.”

▼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나요?

“여자를 보냈다고 소문을 내고는 수소문해서 어머니를 찾아 오셨죠. 그리고 한 2년인가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제작하신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셨죠.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가 6·25가 터졌는데, 인민군이 우리 집을 들어와서는 ‘최희철’(최불암씨의 부친) 어디 갔냐고 찾고 그랬어요. 우리 큰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는 다 잡혀 들어갔고요, 동생 때문에.”

▼ 하여간 힘든 시절을 보내셨네요.

“어릴 땐 말이죠. 어머니가 나를 두고 일을 가셔야 하는데, 나를 맡길 곳이 없으니까, 나가시면서 방문을 딱 걸어 잠그고 나가셨어요. 그건 참 엄청난 기억이지.”

▼ 하루 종일 혼자 방 안에서 뭐하셨어요?

“그게 한옥방이었어요, 미닫이가 있고 창호지를 바른. 난 어머니가 가시면 창살 밑에 구멍을 뚫고 바깥세상을 봐요. 밖에 있는 애들이 나에게로 와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놀아줘요. 자식을 그렇게 가둬두고 나가야 하는 어머니 마음은 또 어땠겠어요.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머니가 무슨 출판사에서 ‘시다바리(보조)’를 하셨어요. 청소하고 백지 고르고 그런 거. 그런데 무서운 건 공습경보야. 웽~ 하면서 등화관제가 될 때, 정말 무서웠지. 어머니는 방 안에다 요강 갖다놓고, 뭐 먹을 거 다 만들어놓고 그러고 나가셨어요. 그럼 나는 혼자서 노는 거야. 어머니 역할도 하고 아버지 역할도 하고, 그런 기억 때문에 내가 연기자가 된 것 같아요.”

▼ 그게 몇 살 때인가요?

“대여섯 살쯤 됐을 거예요.”

▼ 그때 일이 다 기억이 나세요?

“아~ 그럼. 지루했던 기억, 무서웠던 기억, 하루 종일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던 기억 같은 게….”

방에 갇힌 어린 시절

최불암은 서라벌예술대학과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연출을 전공할 생각이었고 연기자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최불암은 “해본 적이 없어서 연기를 못했고 연출을 공부하는 나를 써주는 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노인 역을 맡은 것도 연기를 하던 친구들이 서로 안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 억울하지 않아요? 남들처럼 멋진 역할을 못해서.

“억울할 건 없는데, 사랑 얘기하는 드라마는 하고 싶었지. 예쁜 여자하고.”

▼ 못해보셨나요?

“한두 번 했나? 못했나? 영화에서는 한 번 했고.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

▼ 그래도 미모의 여배우와 결혼하셨잖아요.

최불암의 부인은 탤런트 김민자씨다. 1963년 KBS 3기 공채 탤런트 출신인 김씨는 ‘야망의 세월’‘보고 또 보고’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고 방송대상 TV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최불암은 결혼 전 김민자씨와 가까워질 생각으로 김민자씨가 소속돼 있던 KBS로 이적했을 정도로 공을 들인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중앙정보부가 제작하던 ‘실화극장’이란 프로에 내가 짬짬이 출연할 땐데, 친구하고 앉아서는 만날 ‘장가를 가야겠는데, 나이가 30이 다 됐는데, 여자가 없으니까 죽겠다’ 그러고 있었지. 친구가 나더러 ‘야, 어떤 여자를 구하냐?’ 그래. 그래서 ‘눈도 크고 키도 크고 그런 여자가 나는 좋다’ 그랬더니 ‘정동마님’이라는 드라마가 있다는 거야. 거기에 나오는 배우가 딱 그렇다고. 내가 그 말을 듣고 빵집에 가서 보니까 진짜 눈이 부리부리한 게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를 찍었지. 근데 내가 장가를 가는데 다섯 가지 결격사유가 있더라고. 홀어머니에 어머니가 술장사 하지, 외아들인데다 직업은 연극배우지. 또…하여튼 다섯 가지야. 최고로 조건이 나쁜 놈이지. 그러니까 처가에서는 깜짝 놀랐지. 아니,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딸을 줄 수가 있겠냔 말이에요, 솔직히.”

▼ 반대가 심했겠어요.

“그렇지. 아~ 재산도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진짜 아무것도 없는, 불알 두 쪽 찬 놈인데. 결혼해서 지금까지 사는 거 보면 두 사람 다 신통한 거야.”

▼ 김민자 선생님이 대단하시네요.

“내가 늘 고마워하지.”

▼ 그때는 선생님보다 김민자 선생님이 훨씬 유명하던 때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 뭘 열심히 하셨어요.

“글쎄, 그건 여자한테 물어봐야 될 걸. 내가 뭐 알겠습니까?”(웃음)

▼ 납치라도 하신 건가요?

“하여간 부지런했지.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고. 그리고 집사람이 동정심이 강했지, 우리 집사람이. 사람들은 아주 차다고 그러는데, 나에게는 제일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 불쌍한 모습을 많이 보이셨나 봐요.

“자기가 나를 버리면 내가 어떻게 될까. 나를 많이 걱정했다고 해요.”

▼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인생 마지막 작품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천상의 화원’ 이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어요.”(웃음)

▼ 오래도록 시청자 곁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배우는 자고로 훌륭한 인간상, 한국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사명감이죠. 그런 게 뚜렷하게 표현됐으면 좋겠어요. 전원일기를 하면서 ‘우리 아버지 같아요’‘우리 오빠 같아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역할이 제가 생각하는 배우의 상과 제일 가까운 유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능력보다도 하나의 우상이 되어주고 큰 나무가 되어 가족들을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인간상 말이죠. 이번 작품에서 맡은 역할도, 자기는 한 번도 잘한 일이 없지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죠. 이런 대사가 나옵디다. ‘말을 해라, 그러니까 표현을 해라. 난 표현 못하고 산 게 한이다’ 이런 대사가. 자식한테 야단을 치고 싶어도 그냥 마음에 두고 사는 거지. 또 ‘나 같은 아버지 되지 마라’ 그런 대사가 나오는데, 내 마음에 딱 와 닿더라고. 저도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