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입력2011-11-23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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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와 노무현을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3선개헌과 유신 선포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하지만 그의 성공적인 경제정책은 한국이 선진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주춧돌이 됐다. 진보주의자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와 균형발전을 추구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노무현 시대는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이기획을 진행하면서 가졌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지식인의 범위를 어디까지 둘지였다. 오늘날 지식인이라면 흔히 교수, 작가, 그리고 언론인 등을 지칭한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 지식인은 대개 유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현대사회에서 정치가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보면 지식인이 정치를 겸업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페르난도 카르도소(Fernando Cardoso) 대통령이 그러하다. 하벨은 작가이기도 했고, 카르도소는 사회학자이기도 했다.

    지식인과 정치가는 사실 중첩되는 영역이 적지 않다. 지식인의 과제 중 하나가 지식 탐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데 있다면, 정치가 역시 자기 사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지식과 정치 또는 지식과 권력은 매우 긴밀히 관련돼 있다. 지식은 정치 또는 권력을 위해 봉사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권력과 정치를 혁신하는 문제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문제틀이 이 기획에서 다루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이제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우리 현대사에 큰 그늘을 드리운, 여전히 영향력이 지대한 두 명의 정치가를 다뤄보고자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로 그들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물론 지식인이 아니다. 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기 전에 군인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지식인적 성향이 두드러진, 각각 보수적·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들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

    문제적인 이 두 사람을 다루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정신에 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두 개의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우리 사회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나라 만들기’였다. 이 나라 만들기의 구체적인 목표가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사회적 민주화였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로 바꾸어 써도 좋은 이 시대정신을 대표한 정치가로는 박정희, 노무현,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에 우리 사회 산업화가 본궤도에 올랐으며,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민주화가 본격화됐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상징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화의 상징이다. 여러 점을 고려할 때 박정희의 정치적 맞수는 김대중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노무현을 살펴보려는 것은 더없이 극적인 노무현의 삶이 486세대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에게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박정희와 노무현은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박정희의 시대정신 대 노무현의 시대정신이 맞서왔으며, 지식사회 역시 이러한 구도에 대응해왔다. 서론은 이쯤하고, 곧바로 두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 그리고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박정희 시대와 모더니티

    그동안 나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해 두 번 글로 쓴 적이 있다. 하나는 근대성의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한 것이며(‘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1999), 다른 하나는 박정희의 시대정신을 다룬 것이다(‘격동! ‘박정희 시대’에 다시 서다’, 월간중앙, 2008). 여기서 박정희에 대한 논의는 이 두 글을 참조했다.

    주지하듯이 박정희는 산업화 시대를 열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한 정치가였다. 1961년 5·16쿠데타부터 그가 돌연 서거한 1979년까지 박정희 시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가 컸던, 경제적 모더니티가 격렬하게 진행된 시간이었다. 1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 기간에 우리 사회는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농업사회로부터 공업사회로 바뀌어갔다. 모더니티가 ‘멋진 신세계’라면 우리 역사에서는 박정희 시대에 와서야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신세계의 모험이 시작된 셈이다.

    지식사회 역시 박정희 시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어용’과 ‘재야’의 이분법이 등장한 것도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체제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당시 지식사회는 물론 현재의 지식사회를 가늠하는 중요한 이분법 중 하나다. 우리 지식사회를 주도하는 50대 지식인들 역시 박정희 시대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진보적 사회학자인 조희연 교수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운동과 시민운동을 이끌어왔다.

    최근 조희연은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판적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검토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포함해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 측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한다. 조희연의 이러한 양면적 평가는 박정희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진보적 지식인이 갖는 복합적 내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이는 박정희 시대가 그만큼 문제적인 시대였음을 뜻한다.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선생의 길을 걸었다. 이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군인이 돼 김종필, 이후락 등과 함께 1961년 5·16쿠데타를 감행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동안 5·16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쿠데타 주역들은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 등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 정치활동’이 쿠데타라면, 5·16은 명백히 쿠데타다. 문제는 쿠데타가 낳은 결과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3년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산업화를 향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박정희 시대는 우리 산업화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기였다. 구체적으로 1960년에 64%였던 농·어민이 1980년에는 31%로 감소했다. 또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췄다.

    생활수준과 생활양식 역시 크게 변했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979년에는 1597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더불어 급속한 경제성장은 아파트·텔레비전 등으로 대표되는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급했고, 팝뮤직·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국가와 혁명과 나’

    개인적 경험을 돌아봐도 박정희 시대는 나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차지한다. 1960년대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시골에서 자랐지만, 도시로 이주해 온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모더니티의 세례를 받았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제철을 구경하며, 지하철 1호선을 타보기도 했다. 동시에 어린 나이였지만 긴급조치와 남북 대립, 민주화운동 등을 목격하면서 당시 암울한 정치 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시대의 이러한 체험은 나의 사회적, 개인적 정체성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저작 ‘국가와 혁명과 나’는 그의 시대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이 책은 1963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고를 박상길이 정리한 것이다. 박상길에 따르면, 이 책은 박정희의 저작 가운데 철학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서기 직전에 씌어진 만큼 이 책은 박정희의 정치철학과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5·16쿠데타에 대해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혁명이며, 국가의 재건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 이념의 연장선상에 1960년대의 조국 근대화 전략이 놓여 있다. 박정희는 가난이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말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를 강조한다. 자립경제 건설은 “혁명을 통한 민족국가의 일대 개혁과 중흥 창업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하는 문제의 전부이며, 그 관건”임을 주장한다. 자립경제에 대한 그의 열망은 앞서 지적했듯 19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는 경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주목할 것은 이 책에서 박정희가 자신의 주요 이념의 하나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쑨원(孫文)의 중국, 메이지유신의 일본, 케말 파샤의 터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등 민족주의가 두드러진 외국 사례들을 비교하고 있다. ‘퇴폐한 민족 동의와 국민 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데타의 공약은 5·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현재의 시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경제적 산업화에 권위주의 정치가 불가피한지의 문제다. 이는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개발독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이 인권과 정치적 자유보다 중요한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대 당대의 시선에서 보면 박정희식 발전 모델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6·25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사회안정에 대한 희망을, 보릿고개의 암울한 현실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을 낳았으며, 이러한 희망과 열망은 위로부터의 국가적 동원을 통한 산업화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개인적 체험을 돌아봐도 1970년에야 흑백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던 나는 1979년 대학에 입학할 때는 이미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두루 누리고 있었다.

    문제는 경제성장에 성공했다고 해서 박정희식 모델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식 모델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있다. 1969년의 3선 개헌에서 1972년의 10월 유신에 이르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 특히 유신체제의 암울한 독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지를 입증한다.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박정희식 모델은 경제적 산업화를 위해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희생시켰으며, 이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모델은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물리적 폭력에 기반을 둔 정치적 지배를 획책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침묵의 사회는 박정희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요컨대 박정희 시대는 그 명암이 뚜렷한 시대였다.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고도성장을 가져온 산업화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정경유착이 관행이 되고 인권탄압이 가해진 권위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에 뿌리내린 성장지상주의와 군사문화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 심층의식의 일단을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1978년 호남선 복선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그동안 학술 토론을 비롯해 정치 비사(秘史), 개인 회고, 소설화 또는 영화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조명돼왔다.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元祖)’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풍경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1979년에 사망했으나 역사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 있으며 또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전사회학적 관점에서 박정희 체제는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또는 ‘개발독재’ 체제다. 개발독재는 경제적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결합돼 있다는 의미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고, 3선 개헌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으며, 나아가 1인지배의 유신체제를 만든 독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모색했고,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으며, 의료보험을 포함한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두 얼굴을 가진 박정희였기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에 열광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의 시대를 완강히 부정한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듯 박정희 체제에 명암이 뚜렷함에도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다. 왜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걸까?

    이러한 상황은 최근 우리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양극화가 강화되고 적지 않은 국민이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면, 이러한 삶의 불안정성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바로 그곳에 강력한 리더십으로 상징화한 박정희가 존재한다. 박정희식 모델이 옳아서라기보다는 현재의 곤궁(困窮)이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과의 만남

    더불어 주목할 것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정치적 독법(讀法)이다. 박정희 시대는 32년 전에 마감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는 최근 정치세력들의 정당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왔다. 박정희 시대의 평가에 대해 과도한 이분법이 강조되는 것도, 박정희 시대의 과거사에 대한 규명이 논란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과잉 정치화한 역사 해석은 현재를 과거에 지나치게 묶어두게 한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역사의 해석에서 반드시 합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보는 눈은 복수(複數)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열린 토론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리더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박정희 시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적절한 역사 해석이 아닐 것이다. 30여 년에 달하는 세월이 그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더욱 객관적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박정희 시대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같은 나이의 아버지 삶을 떠올릴 때가 없지 않다. 지금 내 나이의 아버지는 1970년대 중반을 사셨다. 당시 일찍 퇴근하시는 날이면 아버지와 더러 교외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적잖이 들었는데, 물론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때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해오신 아버지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근대화를 성취하려는 박정희의 시대정신에 크게 공감하셨다.

    아버지와 박정희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나누지 않은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고,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을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나로서는 아버지와 박정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 그때 아버지의 심사를 이해하고, 그 험난한 시절을 살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설령 소망적 사고라 하더라도 박정희 시대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함께 갔어야 했다. 세계 역사를 둘러봐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포함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동시에 추구된 후발 산업화의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빵은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빵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산업화 과정 안에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민주화의 가치가 배태되고, 사회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바로 이러한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대선 과정이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한 축을 이룬 김병준, 김용익, 성경륭 교수와 비교적 가까웠던 터라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연설 기초위원으로 참여했고, 정권이 출범한 후에는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내가 받은 인상에 따르면, 노무현은 더없이 인간적인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자기정체성이 분명하고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2009년 7월1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안장식.

    노무현은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다음,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냈다.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한 그는 1980년대에 인권변호사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민주화의 공간 속에서 제13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제15대 국회의원과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노무현의 삶에서 극적인 전환은 2002년에 이루어졌다. 그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됐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극적으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3년 2월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의 거대한 실험실을 이뤘다. 2004년 탄핵과 열린우리당의 출범, 4대 개혁입법 추진과 대연정 제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지방선거·대선의 잇단 패배, 그리고 2008년 퇴임과 2009년 비극적 서거로 이어진 그의 삶과 시대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인권변호사라는 자신의 삶이 웅변하듯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였다. 이러한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노무현 정부가 내건 국정 목표인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에 집약돼 있다. 이 국정 목표는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참여민주주의와 균형발전으로 구체화하고자 했으며, 또한 우리 사회가 놓여 있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geo-politics) 및 지경학(geo-economics)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지방분권과 지역주의 극복

    현재의 시점에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면, 노무현 시대에는 이 세 가지 국정 영역에서 성공과 좌절이 공존했다. 먼저 참여민주주의 영역에서 노무현 정부는 권력기관의 민주화와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 구축을 모색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때, 권력기관의 민주화를 과감히 시도한 노무현과 노무현 정부의 용기는 비록 세세한 문제가 없지 않았다 하더라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거버넌스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집권 초기 화물연대 파업에서 시작해 새만금방조제 건설 논란, 천성산 터널공사 논란 등 상당한 갈등비용을 지불했지만, 동시에 국민참여수석실 및 시민사회수석실 설치, 국민대통합연석회의 추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노무현 정부는 작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주목할 것은 노무현 정부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시민사회의 구조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성장해왔으며, 이러한 변화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욕구를 증대시켰다. 비록 서투른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고 이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 공공기관 이전 등 획기적인 균형발전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 균형발전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지역주의 극복과 밀접히 연관돼 있었는데, 지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사회적으로 중앙 대 지방, 지방 대 지방의 불균형 발전이 해소돼야 했다.

    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되는 일련의 과정이 물론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균형발전이 수도권의 퇴행적 발전을 낳고, 결국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반대 논리가 제기됐으며, 이는 정치적 논란을 넘어서 법적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국토 균형발전이 ‘정권적 과제’가 아니라 ‘국가적 과제’라는 점에서 행정수도 이전 논란 등의 이슈들이 과잉 정치화되고 제동이 걸린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여하튼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이러한 과정은 국민적 공감대 확보를 포함한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진보주의자 노무현의 FTA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동북아 정책이다. 동북아 시대 구상의 목표는 미국 중심의 외교정책에서 동북아 중심의 외교정책으로 전환을 모색하려는 데 있었으며, ‘동북아 균형자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여전히 냉전과 탈냉전이 교차하는 동북아의 현실에서 동북아 시대의 구상은 상당히 신선한 문제의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북한의 핵실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적지 않은 시련에 직면했으며, 특히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은 대북 포용정책의 한계를 드러나게 했다.

    동북아 시대론과 연관해 검토해볼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추진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시각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고려한 일종의 선진통상국가 전략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목표는 ‘제1차 개방’인 개항(1876)과 ‘제2차 개방’인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1960~70년대)를 이은 ‘제3차 개방’을 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데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논란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자유무역협정의 결과가 농어민과 자영업자 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적 공감대를 이뤄야 했음에도 노무현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요컨대 노무현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시대와 세계화 시대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막간에 놓여 있었으며, 그렇기에 민주화와 세계화가 충돌하는 긴장과 모순들에 내내 대면해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보수의 시대가 절정에 다다른 한가운데에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야 했던 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조건 또는 숙명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무현과 노무현 정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집권 당대에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는 노무현이 대통령을 퇴임한 다음에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미완의 저작이다. 노무현은 2008년 10월 참모진과 가까운 학자들에게 진보주의 연구모임을 제안하고 비공개 연구 카페를 열었는데, 여기에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올리고 이를 직접 토론하기도 했다. ‘진보의 미래’는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부가 노무현이 직접 작성한 원고라면, 제2부는 그가 남긴 육성 기록으로 이뤄져 있다.

    “진보주의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미래의 역사는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의 목차를 보면 노무현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원고로 남긴 제1부의 경우,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자’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 ‘보수의 주장, 진보의 주장’ ‘진보란 무엇인가, 보수란 무엇인가’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어지는 제2부는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제1부의 내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정치철학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 핵심은 국가의 역할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노무현이 고민했던 것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였다. 그에 따르면, 격렬한 산업화를 지나오면서 비상식과 반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됐으며, 그 결과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반칙으로서의 특권이 횡행하는 사회가 됐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꿈은 상식과 원칙이 바로 서는 사회였다.

    5년의 국정운영 경험은 상식과 원칙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노무현으로 하여금 재발견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장과 분배, 감세와 복지를 둘러싼 논쟁, 민영화, 탈규제, 노동의 유연화, 개방, 작은 정부, 이런 논쟁이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라고 지적하고, 결국 “국가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을 지배하는 문제이자 정치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의제”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노무현의 마지막 선물

    노무현이 제시하는 진보의 미래는 새로운 분배와 재분배 정책의 수립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분배인 노동영역과 정부의 분배인 복지영역에 국가가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노동시장정책과 복지정책의 재구성이야말로 진보의 시대정신이 감당해야 할 과제임을 노무현은 힘주어 강조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완성하지 못한 채 노무현은 2009년 5월 돌연 이승을 떠났다는 점이다.

    노무현의 예기치 않은 서거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왜 죽음을 선택해야 했고,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노무현의 영결식이 있던 날 나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썼다. 노무현의 삶과 시대정신을 마무리하면서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고 싶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외신 보도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몰이사냥으로 간주했을 일들을 견뎌내지 못했고, 바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불법 정치자금을 유용한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죽은 권력’에 대한 ‘살아 있는 권력’의 공격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가 꿈꿨던 ‘사람 사는 세상’을 돌연 하직하게 했다.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행정가로서 노무현은 좌절하고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권위주의를 지향한 중산층과 서민의 벗으로서 ‘인간 노무현’과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시대정신 노무현’은 살아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육신을 내던짐으로써 우리 안의 노무현을, 다시 말해 ‘노무현적 가치와 정신’을 재발견하게 하는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고 떠났다. (…) 그렇다. 노무현 시대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죽음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비로소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이 기획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지난 1년 동안 이 기획은 우리 역사에서의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살펴봤다. 신라시대 원효와 최치원부터 광복 이후 현재적 지식인들까지 그들의 사상적, 정치적 모험을 주목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시대정신 모색에서 교훈을 얻고자 했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 지식인들의 시대정신 탐구는 대단히 치열했다. 비록 시대적 구속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구속을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꿈꿨으며,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헌신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을 모색하고자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우리로서의 민족의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들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시대정신 탐구의 최전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민족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나와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 땅의 지식인들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찾고자 했다. 골품제에 맞서 싸운 최치원, 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한 김부식과 일연, 유교적 개혁을 꿈꾼 정몽주·정도전·이황·이이, 그 유교사회를 혁신하고자 했던 박지원·박제가·정약전·정약용·이건창·최제우, 근대적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색한 서재필·신채호·이광수, 존재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 원효와 경허, 현대적 산업주의와 민주주의, 인간주의와 생명주의를 추구한 함석헌·장일순·황순원·이영희, 그리고 박정희와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시대정신 탐구의 최전선에서 고투해 왔다.

    시대적 한계에 맞서고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이들의 사상적 모험이 주는 중요한 함의는 시대정신 탐구에서의 방법과 방향이다. 예를 들어, 정도전과 이이의 유교적 개혁론과 박지원과 정약용의 실학파 개혁론은 조선 사회라는 시대적 조건에 갇혀 있었지만, 현실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국가와 사회, 권력과 국민(백성)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함으로써 여전히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안겨주고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 우리 사회 미래를 이끌 새로운 시대정신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될 수도 있다. 함석헌과 노무현의 민주주의, 박정희의 산업주의, 이영희의 민족주의, 장일순의 생명주의, 황순원의 인간주의 역시 모두 소중한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우리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위한 가치를 주조하고 그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지난 1년간 진행된 우리 역사의 시대정신 탐구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생산적인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기 위해서 지식인은 회의적 접근을 통해 자기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야 한다. 무릇 모든 존재가 자기 껍데기를 스스로 깨고 나올 때 성숙해지듯이 자기 사회의 현재를 냉철히 평가하고 성찰하는 것은 시대정신 탐구의 일차적 조건이다. 자신이 선 자리를 정확히 인식할 때 가야 할 길의 방향이 보이는 법이다.

    둘째, 대안 모색에 치열해야 한다. 시대가 주는 구조적 강제가 클수록, 그 경로의존성이 견고할수록 새로운 대안의 모색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부재하다면 회의와 반성은 결국 자기 부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더 나은 삶을 향한 진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진화를 위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비전의 모색은 시대정신 탐구에서 또 하나의 조건이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김호기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셋째, 개혁과 혁신이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혁과 혁신이 불가피하다. 경우에 따라서 그 개혁과 혁신은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것일 수도 있고, 변화를 중시하는 진보적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역사가 개혁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거부할 경우 그 사회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기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개혁과 혁신의 프로그램들을 구체화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시대에 맞서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중대한 책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1917년 경북 선산 태생. 1979년 서거.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졸업. 1961년 5·16쿠데타 주역. 1972년 10월유신 단행.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재임.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음.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저서가 있음.

    노무현은 누구인가

    1946년 경남 김해 태생. 2009년 서거. 부산상고 졸업.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 등을 거쳐 2003년 대통령에 취임. 2009년 서거. 집권 당시 숱한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던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함께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정부로 평가되고 있음. ‘진보의 미래’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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