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궁 재판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1월 19일 개봉
- 재판 전에 ‘사법부 테러’ 정의한 사법부
- “정봉주 무죄를 구걸할 게 아니라 국민이 사법부를 처벌해야 한다”
- FTA ISD? “판사들이 헌법만 지키면 문제없다”
- “법원장 이상 선거로 뽑자”
사건 발생 직후 장관급인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긴급 확대 간부회의가 열렸다. 당시 한 언론은 참석자들이 “사법부의 권위가 무너진 결과다” “사법 불복사태가 이어지는 것 아니냐”며 침통해했다고 전했다. 당시 검찰총장은 사건 직후 관할 검찰청 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검장이 직접 수사본부장을 맡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김 씨는 대법원에서 흉기상해 등 혐의로 4년형이 확정되면서 2011년 1월 만기 출소했다.
2012년 1월 19일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부러진 화살’이 개봉한다. 석궁 사건 이후 재판부와 김 씨에 대해 다뤘다. 이 영화는 정식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시사회에 초대된 관객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것. 한 관객은 “김 씨의 ‘석궁 재판’은 한국 사법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라고 평했다. 몇몇 관객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도가니’처럼 이 영화가 현실 변화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한편 법조계에서도 ‘부러진 화살’은 논란이 되고 있다. 영화 개봉 한 달 전 서울지방법원에서 대책회의가 열렸고, 영화 개봉 1주일을 앞두고 대법원은 석궁 재판 관련 판결문을 정리한 자료를 각급 법원 공보판사에게 발송했다.
기자는 당사자인 김 씨를 지난해 12월 말과 1월 초, 두 차례 만났다.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였던 김 씨는 1995년 대입 본고사 수학과목 채점위원으로 참가했다가 수학 문제 1개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김 씨는 “문제의 가정이 틀렸으므로 수험생 전체에게 15점 만점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출제한 교수와 학교는 “오류 여부 논쟁으로 채점을 무작정 미룰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후 김 씨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으며 부교수 승진에서 실패하고 이듬해 조교수 재임용에도 탈락했다. 김 씨의 이야기는 1997년 초 세계적인 과학지 ‘사이언스(Science)’지에 ‘올바른 답에 대한 비싼 대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96년 말 뉴질랜드로 이민 간 후 미국에서 생활한 김 씨는 2005년 3월 귀국해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김 씨는 적극적으로 재판에 응하며 재판 기록을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하고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입시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으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고, 서울고법 민사2부 박 판사 역시 항소를 기각했다.
항소 판결이 나고 나흘 뒤 김 씨는 박 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갔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 씨는 퇴근하던 박 판사 아파트 1층 계단에서 그에게 70㎝ 길이의 검은 철제 석궁을 겨누며 다가갔다. 박 판사는 가방을 들어 가로막으며 실랑이가 벌어졌고 두 사람 간격이 1m 내외로 엉켜 있을 때 석궁에 장착됐던 화살 한 발이 튀어나갔다. 둘은 몸싸움을 벌였고 김 씨는 운전기사와 경비원에게 제압당했다.
화살을 뽑았다? 튕겨나갔다?
김명호 전 교수가 사건 당시 사용한 석궁.
당시 화살을 최초 수거한 경비원은 경찰 조사에서 “화살이 부러진 채 끝이 뭉뚝했다”고 진술했다. 김 씨는 “박 판사 몸에 철갑을 두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몸에 맞은 석궁의 끝이 뭉뚝해지겠느냐”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송파소방서의 구급활동일지에 ‘활이 복부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고 함’이라고 적혀 있는 것 역시 박 판사의 진술과 불일치한다. 박 판사가 왜 처음에 ‘화살이 배를 맞고 튕겨졌다’고 말했다가 후에 ‘화살이 배에 박혀 손으로 뽑았다’고 했을까?
2007년 2월 송파경찰서 강력2팀은 65㎏ 상당의 돼지고기, 당시 박 판사의 옷차림 등으로 석궁 화력 실험을 했다. 석궁 화살이 발사됐을 때, 박 판사의 진술과 같이 복부에 박히면서 2㎝가량의 상처를 입히는 경우를 찾기 위해 경우의 수를 따져봤으나 결국 적합한 상황을 찾지 못했다. 화살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석궁을 쐈을 때 화살은 목표물을 관통하지 못했고, 완전 장전된 상황에서는 모두 목표물이 깊이 9㎝ 이상 관통했기 때문.
“단순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화살이 발사됐을 뿐입니다. 저는 화살을 쏠 생각도 없었고 쏘지도 않았습니다.”
김명호 전 교수가 직접 석궁 화살촉을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상처를 본 사람은 박 판사니 박 판사가 잘 알겠지요. 확실한 건 박 판사 진술에도 나왔듯이 그가 실랑이 이후 8층 집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구급차를 탔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박 판사(현 의정부지법원장)는 답변을 거절했다. 의정부지법 공보처측은 “박 법원장이 충격이 큰 상태이기 때문에 당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미 사실관계가 대법원에서 밝혀졌고 확정까지 된 사건인데 이제와 다시 ‘화살에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부러진 화살이 사라졌다
‘부러진 화살’의 행방도 묘연하다. 김 전 교수에 따르면 그는 범행 현장에 10개 남짓한 석궁 화살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중 3개는 허리춤에 차고 나머지는 아파트 앞 화단에 올려뒀다. 허리춤에 찬 3개 화살 중 1개를 석궁에 장착했다. 현장에서 그가 소지하고 있던 화살과 화단에 올려놓은 화살 전체를 경찰이 압수해갔다.
당시 아파트 경비원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에 직접 사용됐던 화살은 화살촉이 뭉툭하고 뒷부분이 부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화살 3개와 화단에서 발견한 화살 6개를 증거물로 제출했는데, 이 9개의 화살 중에는 끝이 뭉툭하고 뒷부분이 부러진 화살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실시한 유전자분석감정서에 따르면 경찰이 당시 현장에서 수거했다고 주장하는 화살 3개는 혈흔 음성 반응을 보이며 유전자형이 검출되지 않았다. 김 전 교수는 “제가 박 판사를 공격해서 그 사람이 상해를 입었다면 화살에 피가 묻어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물었다.
▼ 부러진 화살은 어디로 간 건가요?
“처음 박 판사한테 부러진 화살을 받은 사람은 경비원이에요. 근데 그 사람이 그 중요한 화살을 분실했겠어요? 화살 등 증거물은 경찰이 받아서 검찰로 넘겼겠죠. 부러진 화살의 행방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 가져간 석궁 화살이 9개인 건 확실한가요?
“제가 화살 몇 개를 가져갔는지는 정확히 기억을 못 해요. 10개 남짓이었어요.”
김 씨는 “원래 화살이 10개 있었는데 경찰이나 검찰이 부러진 화살을 제외해버리고 ‘본래 김명호가 가졌던 화살이 9개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
“정말 부러진 화살이 사라진 거라면 현장에서 발견된 화살이 2개여야 하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화살은 멀쩡한 3개입니다.”
▼ 국과수 유전자 감식 결과 피가 묻지 않은 화살들도 증거로 인정됐죠?
“네, 검사 쪽에서 피도 안 묻은 화살을 증거로 제출했고 판사가 인정했어요.”
1심 재판을 맡은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형사부는 “부러진 화살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부러진 화살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 증거가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 없고, 압수된 화살 9개는 범행 현장에서 압수된 것이므로 다른 증거와 종합해서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역시 “수사기관이 범행현장에서 증거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피고인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물을 수사기관이 일부러 폐기 또는 은닉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를 증거조작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유일하게 피가 안 묻은 와이셔츠
영화 ‘부러진 화살’중. 김명호 전 교수 역은 배우 안성기 씨가 맡았다.
“만약 석궁을 맞았다면 안에서부터 피가 배어 나와서 조끼까지 피가 묻을 텐데 왜 와이셔츠만 멀쩡합니까? 그런데 대법원은 이 옷가지도 증거로 채택했어요. ‘왜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느냐’는 제 지적에는 ‘혈흔이 사라졌다’ ‘모르겠다’ 하고는 끝이에요. 현대과학에서는 아무리 피가 묻은 옷을 빨았어도 혈흔을 찾아내거든요. 만약 정말 빨아서 피가 안 묻은 거라면 왜 몸싸움할 때 생긴 팔꿈치 쪽 혈흔은 발견됐겠어요?”
김 씨는 “내 생각에는 경찰들이 박 판사의 진술을 듣고 옷에 증거를 조작하다가 와이셔츠만 빼먹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는 “조끼, 속옷 등에 묻은 피도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당시 증거물의 사진을 보면 속옷, 내복, 조끼 등에 묻은 피 위치가 제각기 다르다. 크게는 약 20㎝까지 차이가 난다. 국과수 분석 결과 옷가지에 묻은 피가 모두 동일인의 혈흔임은 밝혀졌지만 그 혈흔의 주인공이 박 판사인지는 검증하지 못했다. 김 씨 변호인 측은 재판부에 박 판사 DNA와 옷가지에서 발견된 DNA가 동일인의 것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박 판사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적절하지 않다”며 기각했다.
사건 직후 병원에 이송된 박홍우 판사.
“나는 석궁을 쏘지 않았다”
그에게 ‘석궁 사건’을 벌인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나한테 ‘왜 석궁을 가져갔느냐’고 따지는 사람만 보면 화딱지가 난다”며 “내가 석궁을 들고 간 이유는 두 가지로 법 안 지키는 판사들에게 경고하고, 국민에게 ‘법을 안 지키는 판사들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 왜 하필 박홍우 판사였어요?
“그 사람 하나에 대한 증오라기보다는 나랑 마주친 사람이니까. 박홍우 판사가 운이 나빴죠. 개인적 원한은 없어요.”
▼ 처음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맡은 판사는 누구죠?
“이상훈 당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현 대법원 대법관)예요. 최근 정봉주 전 국회의원 판결로 유명세를 탔죠. 이 판사는 내 사건을 맡은 후 4개월 동안 정말 아무 일도 안 했어요. 10월에 사건을 접수하고 2월에 정기 인사로 떠났죠. 원래 재판 접수되면 한두 달 안에 기일을 잡아야 하는데도요. 후임으로 온 조관행 부장판사는 내 사건 열어보지도 않고 재배당했어요. 근데 판사 20여 명 중 성대 출신이 단 한 명 있는데 내 사건을 성대 출신 강영호 부장판사에게 맡긴 거예요. 그것도 강 판사는 건설 전문이에요. 제 사건은 노동사건인데 왜 건설 전문 판사에게 맡기죠? 제가 항의를 했더니 결국 노동 담당 박 판사한테 보내주더라고요.”
▼ 박 판사와 첫 대면은 어땠나요.
“첫 번째 기일에 갔더니 박 판사가 딱 이러는 거예요. ‘아니, 원고는 수학을 전공해서 논리적일 텐데 왜 청구취지를 두 개로 했습니까?’ 제가 당시에 사건 제목은 ‘교수 지위 확인’이지만 청구취지는 ‘교수 지위를 확인한다’랑 ‘재임용 거부 결정을 무효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했어요.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박 판사 말이 맞죠. 그런데 당시 양승태 대법관(현재 대법원장)이 2006년 판례로 두 가지를 명확하게 갈라놨어요. 재임용 거부 결정이 무효라고 해서 교수 지위 확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그걸 보고 분석해서 청구취지 두 개를 썼어요. 근데 박 판사는 제 말을 안 듣는 거예요. 결국 청구취지를 ‘교수 지위를 확인한다’ 하나로 썼어요. 그랑 얘기를 하면 할수록 결국 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그렇다고 재임용 거부 결정이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다’는 식의 판결을 내서 나를 물먹이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는 두 번째 재판부터 변론에 대한 녹음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두 번째 재판 날, 박 판사가 ‘녹음기 있느냐’고 물으면서 녹음하지 말라는 거예요. 변론 녹음 신청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법적으로 보장되는데 기각했어요. 이유를 물으니, 제가 재판 과정을 인터넷 제 사이트에 올리고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죠.”
그는 “모든 재판 당사자가 변론 녹음을 신청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재판권은 국민의 권리이기 때문에 재판에 대해 명확히 알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우리나라는 판결문조차 공개 안 하는데 법률 소비자인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지적하며 “모든 재판을 녹음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막말 판사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다하다 안 돼서 국민저항권 행사한 것”
결국 서울고법 민사2부는 김 씨의 교수 지위 확인 관련 항소를 기각했다. 항소심 판결문은 “입학고사 문제 오류를 지적한 것이 원고의 재임용거부결정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원고는 대학교원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과 자질을 지니지 못한 이상 재임용거부결정이 부당하다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박 판사는 김 씨가 △필수 이수과목에 전혀 출석하지 않은 학생에게 학점을 부여했고 △교수회의에 대부분 불참했으며 △수업시간에 동료교수를 공연히 비방했다는 근거를 들어 △비록 김 씨가 학문연구능력 및 실적영역에서 A등급의 평점을 받았다 할지라도 성균관대의 재임용 거부 결정은 학교에 주어진 재량권의 범위 내에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결했다. 김 씨는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교수는 수업과 연구로 말한다. 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폭행 사건에 연루된 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사항으로 ‘품위 유지 기준에 현저하게 미달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내가 사법부와 싸우며 깨달은 것은, 판사들은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분개했다. 그는 2005년 소송을 시작하면서 관련법을 샅샅이 공부했다. 그는 “우리나라 법은 95% 정도가 법전에 명확하게 나와 있는데, 판사들은 이 법을 지키지 않고 판례를 만들어 법을 뒤집는다”고 말했다.
김명호 전 교수는 2005년부터 석궁 사건 직전까지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원래 법률해석 변경을 하려면 전원합의체를 거쳐야 하는데 1987년에는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않았어요. 불법으로 변경된 판례 때문에 재임용 소송을 한 교수 400여 명이 억울하게 당한 겁니다.”
아무리 김 씨가 억울했더라도, 석궁을 들고 간 것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김 씨는 당당했다.
▼ 법을 지켜야 한다고 계속 말하지만 김 전 교수 역시 레저용으로 구입한 석궁으로 사람을 겨눴으니 법을 어긴 것 아닙니까?
“제가 석궁을 들고 가기까지 안 한 게 없어요.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나름 분석해서 인터넷에도 올리고 정부 기관에 진정서, 탄원서도 숱하게 보냈어요. 모든 합법적 구제수단을 다 사용했는데도 방법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헌법 37조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국가가 부당하게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4·19혁명같이 국민이 저항할 수 있는 거예요.”
▼ 국가가 석궁 테러를 생각하게 할 만큼 권리를 침해했나요?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침해했죠. 사람들은 죽이고 총칼로 위협하는 것만 권리 침해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잔인한 건 노예생활을 하라는 거예요. 모든 걸 빼앗고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었잖아요.”
김 씨는 성균관대를 떠난 뒤 미국에서 생활했다. 몇 차례 대학 부설 연구소에 연구직으로 취직했고 회사에서도 일해봤다. 그는 미국 생활에 대해 ‘노예 생활’이라고 거듭 말했다.
“사이언스지에 내 사연이 실리면서 나는 수학계에서 유명해졌어요.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학자를 누가 귀하게 다루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저 좋은 먹잇감이었죠. 같은 경력, 능력을 가진 수학자들에 비해 절반이 안 되는 월급을 줘가면서 일을 시켰습니다. 제 연구 성과물은 무단으로 자기들 이름으로 발표하고요. 10년쯤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성대 사건을 해결짓지 않고서는 내가 인간다운 삶을 못 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2005년 소송을 시작한 겁니다.
▼ 그래도 김 전 교수라는 개인이 박 판사 개인의 신체에 위해를 입혔거나, 아니면 입히려고 한 것은 명백한 법 위반 아닙니까.
“내가 언제 박 판사한테 위해를 입혔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살을 쏘지도 않았고 맞히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몸싸움하다가 찰과상 정도 생겼는데, 그건 사과를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 그게 4년 징역 살 거리가 됩니까?”
▼ 그럼 석궁 사건 재판이 무죄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당연히 무죄예요.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가방 안에서 전문요리사용 회칼 1개와 노끈이 발견됐습니다. 사건 두 달 전부터 박 판사의 아파트 부근을 7회 정도 방문해 박 판사 집 위치와 귀가 시간을 확인했다는 진술도 있고요.
“더는 할 필요가 없는 얘기예요. 위협적이었겠죠. 그날 위협하기 위해 석궁을 들고 간 거 맞아요. 칼은 제가 이사를 준비 중이었는데 집에 보관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 가방 안에 넣어뒀던 거고요. 사건 당일에는 제 가방에 칼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핵심적인 건 제게 살의가 있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판사들은 계속 이런 자극적인 부분만 부각하면서 실제 사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증거들은 왜 조작됐는지는 희석시켰어요. 그러면서 대법원은 박 판사의 진술이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 피해자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진술에 일관성이 없을 수 있다’고 판결하더군요. 이거야 말로 제 식구 감싸기 아닙니까?”
▼ 분명히 박 판사에 대한 살의가 없었던 건가요?
“죽일 마음이 있었으면 제가 왜 석궁을 들고 가까이 갔겠어요. 멀리서 심장을 향해서 한 발 쏘고 가까이 가서 또 한 발 쐈겠지. 가까이 갔다가 박 판사가 활대를 잡고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사가 된 거죠.”
“허위사실인지 몰랐다면 정봉주 무죄”
그는 “법은 수학처럼 명확하다”고 거듭 말했다. 문제는 법에 입각해 판결하지 않는 판사들에게 있다는 것. 그는 “사법부가 법을 어기고 기만하게 된 데는 국민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책임은 국민에게 있어요. 정봉주 전 의원 사건 보면 웃겨요. 왜 국민이 선처를 바라야 하는 건가요? 국민이 이미 무죄로 판결했으면 법원은 따라가야 돼요. 재판권은 국민에게 있는 거고 재판관은 국민의 종으로서 선고만 내리는 거예요.”
그는 “정 전 의원 사건에 대해 비판을 할 거면 제대로 하자”며 “정 전 의원은 명백한 무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허위사실 유포죄가 성립하려면 먼저 검찰이 그 내용이 허위사실임을 입증해야 하고, 유포자 스스로가 허위라는 걸 알면서도 유포했어야 합니다. 즉, 고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비록 허위사실이라고 해도, 정 전 의원이 정말 BBK 실제 소유자가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었으면 죄가 성립하지 않아요.”
그는 오히려 이 판결을 내린 이상훈 대법관이 법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정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서울 고등법원 선고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 나왔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21조’에 따르면 항소심 및 상고심은 기록을 송부받은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선고해야 한다. 이런 선고 시간 끌기가 가능했던 것은 ‘훈시규정’ 때문이다. 훈시규정이란 법에 정해진 기간 내에 노력은 해야 하지만, 그 기간을 지나서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판례를 보면 ‘훈시규정’이라는 말이 숱하게 등장해요. 사실 우리나라는 성문법 국가이기 때문에 훈시규정보다 소송촉진법이 우선입니다. 판사들이 훈시규정을 남발하는 건 사건을 질질 끌어서 돈 없고 억울한 서민을 지치게 만들고 결국 제멋대로 판결하려는 의도 아닙니까.”
그는 최근 FTA(자유무역협정) 관련 과감한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창원지방법원 이정렬 부장판사에 대해서도 거세게 비판했다. 이 판사는 박 판사가 주심을 맡았던 김 씨 항소심에서 배석판사를 맡았다.
“실제 한미 FTA에 문제가 많아도 판사들이 판결만 제대로 하면 대중이 우려하는 상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헌법 119조에 ‘대한민국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돼있어요. FTA 등 조약은 국내법과 효력이 동일하기 때문에 헌법보다 아래예요. 만약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 때문에 한국 사람이 부당한 소송에 걸리면, 대한민국 판사들이 헌법 제119조를 근거로 법령 위헌소송을 해서 해당 법을 폐기하거나 고칠 수 있어요. 판사들이 일단 법리를 얘기하고 논리 싸움을 한 다음에 비판을 해야지. 무조건 페이스북에 글 쓰고 인기 끌려고 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이에 대해 이 부장판사와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그는 “석궁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만 밝혔다.
검사장 이상 선출직으로 바꿔야
어느새 사법부에 맞서는 전사가 된 김 씨. 하지만 ‘성대 입시문제 사건’ 이전에는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던 온건한 가장이었다. 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학교 앞 슈퍼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 날도 많았다.
▼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 데모도 안 했고 잘 몰랐어요. 원래는 신문에서도 스포츠랑 만화만 봤어요. 학교에서 쫓겨나고 소송에 번번이 지면서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알게 된 거죠. 주변 상황이 개판이니까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온 거죠(웃음).”
▼ 영화 ‘부러진 화살’ 보셨나요?
“네, 봤죠. 좋았어요. 제가 석궁을 들고 간 이유가 국민에게 ‘사법부도 법을 위반한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거잖아요. 그런데 실제 석궁 사건 이후에도 국민은 사법부가 법을 위반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요. 기껏 ‘1995년 성균관대 입시문제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만 드러났지. 영화를 통해서 드디어 제 의도가 알려졌어요. 우리나라 사법부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 영화를 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으면 좋겠나요?
“현실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에 정의는 없어요. 정의는 국민이 만들어야 돼요. 법을 안 지키는 사법부는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사법부는 정의와 관계없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요. 이제는 국민이 행동해야 해요.”
▼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돼요. 법을 바꿔서 대법관,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검사장 등을 국민 선거로 뽑을 수 있게 한다는 국회의원을 뽑아야 합니다. 그들만 선거로 뽑아도 정말 많이 바뀔 거예요. 진정한 국민의 종으로서, 제 역할을 할 거예요. 절대 정봉주 전 의원 건 같은 판결이 안 나오죠. 왜 시시콜콜한 지방 시·구의원들도 다 선거로 뽑는데 그 중요한 사법부를 자기들끼리 뽑게 놔둡니까? 이 영화를 보고 ‘김명호가 억울하다’ ‘화살이 맞았나, 안 맞았나’ 같은 논란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에 호소하지 않고 선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영화를 계기로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 검사장 이상을 선거로 뽑는 게 가능한가요?
“간단하게는 법원조직법만 개정하면 검사장급, 검찰총장 등은 선거로 바꿀 수 있어요. 물론 헌법은 바꾸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하위조직부터 변화가 시작되면 사법부도 지금처럼 법을 기만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국민이 언제까지 사법부의 노예로 살 건지 결정해야 돼요. 자신도 제2의 정봉주, 김명호처럼 사법부의 피해자가 안 될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