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히딩크 감독이요? 아직도 미워요, 하하”

“내 뒤에 공 없다” 영원한 전성기 김병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2-07-19 1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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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를 즐기다니! ‘축구’와 ‘즐긴다’는 함께 쓸 수 없어
    •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스스로 감동할 만큼 훈련하라
    • 금주·금연은 프로 선수의 100가지 금기 중 하나일 뿐
    • 44세 7개월 17일, ‘신의손’ 기록 깨고 당당하게 은퇴하겠다
    “히딩크 감독이요? 아직도 미워요, 하하”
    ‘수원 삼성’ 이용수의 페널티킥은 골문 오른쪽을 향해 세차게 날아갔다. 그러나 ‘경남 FC’ 김병지의 손이 더 빨랐다. 몸을 날린 그의 펀칭에 공은 맥없이 골문 밖으로 나가떨어졌고, 잠시 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7월 8일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수원 대 경남전의 마지막 장면. 이번 시즌 홈 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수원이 경남에 0대 3 완패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경기 내내 쉴 새 없이 ‘날아다닌’ 골키퍼 김병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번졌다.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단연 김병지였다. 수원은 슈팅 17개를 쏟아내며 끊임없이 경남 골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단 한 골도 김병지를 뚫지 못했다. 경기 시작 5분 30초 만에 허용한 페널티 박스 바로 바깥에서의 프리킥부터 그랬다. 골문 왼쪽을 파고드는 에벨톤의 강슛을 쳐내고 1분 뒤, 이번에는 스테보가 골문으로 쇄도했다. 김병지는 또 한 번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지막 페널티킥을 막았을 때는 수원의 홈팬들마저 박수를 보냈을 정도로 김병지의 선방은 눈부셨다. 이날로 만 42세 3개월이 된 K리그 최고령 선수. 그는 여전히 가벼웠고, 날쌨다. 수원을 제물 삼아 개인 통산 무실점 경기 기록을 202경기로 늘렸고, 통산 588경기를 뛰어 K리그 최다 출장 기록도 이어갔다. 현역 선수 중 2위인 전남 최은성(41)의 476경기보다 100경기 넘게 더 뛴, 독보적인 기록이다.

    그를 만나러 경남 함안의 경남 FC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길, 머릿속에서는 내내 수원전의 장면들이 흘러다녔다. 김병지의 도약, 펀칭, 수비 리드, 그리고 분노. 이날 경기에서 수원이 얻은 가장 확실한 득점 기회는 종료 직전의 페널티킥이었다. 후반전이 끝나고 추가 시간마저 끝나갈 무렵, 경남 수비수 유호준이 위험 지역에서 무리한 태클을 한 게 화근이었다.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순간 김병지는 유호준을 호되게 꾸짖었다. 다른 선수들이 다가와 말려야 했을 정도로 그의 분노는 거셌다. 수원의 마지막 공격을 완벽하게 막은 후 김병지가 마침내 웃을 때까지, 그라운드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절대 하면 안 되는 실수

    승부는 일찌감치 결정된 터였다. 게다가 김병지는 이미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수비 실수로 인한 페널티킥 탓에 설령 한 골을 허용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 것인가. 대체 무엇이 김병지를 그토록 화나게 만든 건지 궁금했다.



    함안은 멀었다. 서울서 꼬박 5시간이 걸리는 그곳에서 김병지는 많게는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후배들과 같이 숙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가족들과는 한 달에 두세 번 보는 것이 전부인 일상에서, 그는 팀의 어린 선수들을 조카로 대했다. 거리낌 없이 김병지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서 친근함이 느껴졌다.

    ▼ 축구장에서는 후배들을 무섭게 대하시던데, 지금은 정말 삼촌 같네요.

    “원래 골키퍼는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동료 선수들을 혼내는 포지션이에요. 저는 20년 전 데뷔했을 때도 경기 중에는 선배들 이름을 그냥 불렀어요. 경기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려주면서 수비 위치를 잡아줘야 하는데 그라운드가 많이 시끄럽거든요. 고함을 계속 치니까 모르는 분들이 보면 화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죠.”

    경상도 억양이 선명한, 조금은 투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설명은 차분했다.

    “밖에서는 이렇게 작게 말하잖아요. 그런데 경기 한 번 하고 나면 목이 쉬어요. 하도 소리를 질러서.”

    김병지는 자신의 별명을 ‘날미존’이라고 했다. ‘날아다니는 미친 존재감’이라는 뜻이다. 축구장 안에서 그는 확실히 그랬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슈팅을 막아낼 때도, 후배를 호되게 꾸짖을 때도. 그 뚜렷한 존재감 때문에 그의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던 걸까.

    ▼ 이번 수원전에서의 모습을 말씀드린 겁니다. 유호준 선수를 혼낼 때 정말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거든요.

    “아.” 김병지는 빙긋 웃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났죠.”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웃음이었다.

    “일단 유호준 선수는 지금 우리 팀에서 정말 잘해주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후배고요. 그런데 그날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집중력을 잃고 어이없는 반칙을 하더라고요. 그게 페널티킥으로 이어져서 실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니 화가 난 거죠.”

    김병지는 “호준이는 예전에 다른 경기에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내준 적이 있다. 축구를 하다보면 자책골을 넣는 것처럼 불가항력으로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런 건 이해하고 다독여준다. 하지만 긴장하지 않는 바람에 저지르는 실수는 따끔하게 혼내야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승리가 확정적인 경기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이기려고만 경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요. 관중에게 열정을 보여줘야 하고, 감동도 줘야 합니다. 그냥 동네 운동장에서 경기하듯 축구를 한다면 사람들이 왜 돈을 내고 축구장에 오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알고 있다. 골키퍼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1948년 런던 올림픽에 국가대표팀 골키퍼로 출전했던 고(故) 홍덕영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1969년 ‘신동아’에 기고한 ‘골키퍼의 고독과 영광’이라는 글에서 “누구나 시합 도중 3, 4회는 실수를 한다. 골키퍼는 한 번도 안 된다. (나는) 그런 골키퍼 자리를 10년이나 했으니 다른 선수보다 더 많이 늙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김병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수는 여러 번 실축을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으면 영웅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골키퍼는 페널티킥 잘 막아내고, 결정적인 선방을 계속 해도, 까딱 잘못해 골을 먹으면 그냥 ‘죽일 놈’이 되는 겁니다. 어떤 순간이든, 종료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말고 뛰어야 해요.”

    “골키퍼가 실수를 하면 팀의 사기가 저하돼 경기 흐름이 달라지고, 승패가 뒤바뀔 수도 있다”고 말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씨익 웃었다.

    “제가 그런 적 있잖아요. 드리블하면서 하프라인까지 나가다가…. 차라리 볼을 잡다가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는 거라면 모를까, 그때 그런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실수였던 거죠.”

    칼스버그컵의 추억

    어떻게 이 얘기를 꺼낼까 망설이던 참이었다. 2001년 1월 홍콩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그가 하프라인 부근까지 공을 몰고 나가다가 상대 선수에게 빼앗겨 위험천만한 상황을 초래했던 일. 김병지는 이 ‘사건’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 내내 벤치를 지켜야 했다. 마침 김병지를 만난 날은 2002년 월드컵 개최 10주년을 기념해 당시 대표팀 선수들과 K리그 올스타가 친선 경기를 벌인 뒤 닷새가 지난 때였다. 히딩크 감독이 내한해 다시 감독을 맡았다. 그를 만난 소회가 궁금했다. 당대 최고의 골키퍼였던 김병지를 대표팀에 선발해놓고 월드컵 본선에는 한 번도 출전시키지 않은 감독. 전 국민이 흥분에 들떴던 2002년을 아픈 기억으로 남게 한 히딩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그런데 김병지가 먼저 11년 전 그 사건을 들춰낸 것이다.

    ▼ 오랜만에 히딩크 감독을 만났는데 말씀은 좀 하셨나요.

    “잠깐 인사는 했는데 이야기는 뭐…. 사실 지금도 미워요. 하하.”

    그는 이가 다 드러날 만큼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 2002년 얘기는 안 해보셨고요?

    “이제 와서 할 얘기는 없지만, 오랜만에 뵈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납디다.”

    김병지에 따르면 파라과이전에서의 드리블은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공을 잡고 바로 차려 했는데 스텝이 꼬이면서 계속 몰고 나가게 된 것뿐이라고. 갑자기 공을 빼앗겼을 때는 그도 당황했다.

    “그날 전반전이 끝난 뒤 바로 교체됐어요. 다음 대표팀 선발 때 탈락했고요.”

    그러나 김병지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당시 그는 명실상부한 K리그 간판 골키퍼였기 때문이다. 실점률 0점대를 유지했고, 2001년 FA컵 4강전에서는 울산의 페널티킥 2개를 모두 선방하기도 했다. 김병지를 다시 대표팀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뜨거웠다. 결국 히딩크는 2001년 10월 김병지를 다시 불렀다.

    ▼ 그런데 정작 그때는 부상 때문에 제대로 훈련을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무렵 허리가 안 좋았거든요. 나아졌다 다시 아프다를 반복했어요. 제가 2008년에 디스크 파열로 수술을 했는데, 그 문제가 이미 그 무렵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대표팀에 소집된 뒤 통증이 심해져서 거의 아무것도 못했어요.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이 보기엔 리그에서 훨훨 날던 선수가 훈련을 안 하고 있으니 오해가 생겼겠죠. 저도 굳이 설명을 안 했고. 그렇게 ‘기싸움’이랄까, 서로 뭔가 엇갈리는 일이 반복됐던 것 같아요.”

    2002년 당시 국가대표팀 골키퍼 코치를 맡았던 김현태 코치는 월드컵이 끝난 뒤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온 직후 어떤 골키퍼가 괜찮은지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국가대표팀 코치들이 적어낸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1등 김병지, 2등 이운재, 3등 김용대였다”고 한 적이 있다.

    칼스버그컵에서의 드리블과 허리 부상이 없었다면 2002년 김병지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그는 “2002 월드컵은 꿈같은 축제였다. 다른 생각은 굳이 하지 않으려 한다”며, “다만 그때 좀 더 경륜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할 때는 있다”고 했다.

    “지금의 저라면 파라과이전이 끝나자마자 감독님을 찾아뵙고 미안하다고 했을 겁니다. 다음 날 또 미안하다고 하고…. 그랬으면 될 일이에요. 그런데 그때 김병지는 그냥 김병지였거든요. 내 실력과 기량에 대한 확신이 넘쳐서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여겼어요.”

    그 무렵의 김병지라면 그럴 만도 했다. 실력도 인기도, 리그 안에 비교 대상이 없는 최정상이었다. 김병지가 K리그 골키퍼로서는 사상 최초로 필드골을 넣었던 1998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를 보자. 스포츠면 헤드라인이 “넣고 막고…김병지의 날, 종료 직전 헤딩 결승골…승부차기 선방”이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병지가 뛰고 있던 울산 현대는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공격에 가담한 골키퍼 김병지의 헤딩 결승골로 2대 1로 이긴 뒤 승부차기에서도 김병지의 선방으로 4대 1로 승리했다.” 북 치고 장구도 치고, 게임 전체를 혼자서 지배한 셈이다.

    골 넣는 골키퍼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우리 팀의 상대는 포항이었어요. 1차전 원정에서 2대 3으로 진 상태였죠. 2차전에서 지거나 비기면 바로 탈락이고, 이긴다 해도 두 골 이상 차이를 벌리지 못하면 승부차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잘 안 풀렸어요. 1대 1로 비기고 있던 후반 45분, 미드필드 정면에서 우리 팀이 마침내 프리킥을 얻었죠. 시간상으로 볼 때 마지막 공격 기회였어요.”

    김병지는 골문을 비우고 최전방까지 올라갔다. 지금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키퍼가 공격에 가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 골을 직접 넣겠다는 마음으로 가신 건가요?

    “그럼 축구선수가 거기까지 뛰어갈 때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타박하듯 말을 던지면서도,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그래도 정말 저한테 공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는 듯했다. 지금껏 수없이 되새겨봤지만 그때마다 짜릿했던 바로 그 경기. 김병지는 마치 느린 영상을 보고 설명하듯,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복기했다.

    “김현석 선배가 감아 올린 공이 문전으로 향하는 순간, 껑충 뛰어올라 머리를 갖다 댔어요. 그때 영상을 보면 아마 제가 가장 먼저 떴다가 제일 늦게 내려올 겁니다. 그 시절 피지컬(체력)이 정말 좋았거든요. 상무에서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을 열심히 한 덕에 점프력과 체공력이 최고였어요. 그러니까 포항 수비수들을 제치고 헤딩을 차지할 수 있었죠.”

    김병지의 머리에 맞은 공은 정확히 포항 골문을 갈랐고, 그는 무작정 뛰었다. 고재욱 당시 울산 감독의 품에 안기고, 중계 카메라를 보면서 주먹을 내지르고서야 비로소 ‘내가 골을 넣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열광하는 관중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울산 종합운동장 좌석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육상 트랙에까지 앉아 있던 홈팬들이 모두 자신만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중에는 그의 아내도 있었다.

    “마침 집사람 생일이었어요. 전날 농담처럼 ‘생일 선물로 골이나 한 골 넣어봐’ 했는데,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제가 골을 넣은 거죠. 만약 드라마 대본이라면 ‘에이, 현실성 없다’ 했을 스토리가 실제로 펼쳐진 겁니다.”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차전과 2차전의 골득실이 같았기 때문에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김병지는 포항팀 선수 두 명의 킥을 막아냈다. 또 한 번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꽁지머리 X세대

    ▼ 그때 처음으로 골키퍼가 축구 경기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듬해 김병지 선수는 농구, 야구, 배구 스타들을 제치고 우리나라 구기 종목 전체 선수 가운데 최고 연봉을 받았죠.

    “뒷말이 많았어요. 어떻게 골키퍼가 최고 연봉을 받느냐고. 그렇게 된 데는 배경이 좀 있죠.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브라질 클럽팀에서 저를 스카우트 하겠다는 제의가 계속 왔거든요. 저도 해외 리그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요. 그런데 구단에서 놓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선수가 구단의 뜻을 어기고 해외에 진출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죠. 구단이 아쉬워하는 저를 달래느라고 연봉을 올려준 겁니다.”

    세계적으로 공격형 골키퍼가 각광받던 시대였다. 100m를 11.6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과 헤딩 능력까지 갖춘 그는 CNN 뉴스에 소개될 만큼 화제였다.

    ▼ 그때 해외에 나갔다면 지금 축구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일단 제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그리고 아마 영어도 굉장히 잘하게 됐겠죠.”

    그는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1990년대 중반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유명했던, ‘X세대의 대명사’ 김병지다웠다.

    ▼ 지금도 염색을 하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화려한 스타일이었던 게 기억납니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하나로 묶고 다니는 이른바 ‘꽁지머리’ 스타일을 유행시켰죠.

    “염색이 흔하지 않던 시대라 더 튀었을 거예요. ‘나를 좀 알아봐달라’ 이런 메시지였죠. 지명도는 높아졌지만, 처음엔 저를 비행 청소년쯤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어요. 그런데 열심히 뛰고 또 점점 실력도 괜찮아 보이니까 나중에는 ‘관중에게 볼거리를 선사하는 진정한 프로’ 같은 이미지로 제 머리가 미화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 내용이 방송사 스포츠 뉴스에도 나왔고요.”

    그러던 중 2002년이 왔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 직전까지, 사람들은 당연히 김병지가 대한민국의 주전 골키퍼로 출장할 것이라고 여겼다.

    “선수단 분위기도 그랬어요. 저는 가족들에게 경기 입장권을 미리 다 보낸 상태였고, 운재는 아무한테도 안 보냈을 정도죠. 그런데 폴란드전 하는 날 아침, 갑자기 운재가 출장한다고 발표된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가족들이 놀라겠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생각해보면 감독님 마음속에는 계속 운재가 있었는데, 우리가 몰랐던 거 같아요.”

    히딩크 감독은 순위 경쟁이 모두 끝난 뒤 친선경기처럼 치러진 터키와의 3·4위전에조차 김병지를 출장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출전 기회를 기대했지만 끝내 얻지 못한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다시 K리그가 개막했다. 그사이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월드컵에서 활약한 젊은 선수들이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면서 김병지의 설자리는 좁아져 있었다. 복귀 초반, 그는 다소 흔들리는 듯 보였다.

    시련과 부활

    ▼ 2003 K리그 개막전에서 네 골을 실점하고, 세 경기 연속 실점을 기록하며 주전 명단에서 빠졌지요.

    “정확한 스코어는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축구계 안팎에서 제가 곧 은퇴할 거라는 소문이 돈다는 말은 들었죠. 그전에도 컨디션의 ‘업 다운’은 늘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월드컵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히딩크 감독이요? 아직도 미워요, 하하”

    K리그를 은퇴해도 아들이 데뷔전을 치를 때까지 은퇴식은 열지 않겠다고 말하는 김병지가 큰아들 태백이를 상징하는 사자가 그려진 오른팔 문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그러나 김병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꽁지머리를 짧게 자르고, 이운재가 골키퍼로 뛰던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무실점 승리를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그는 진정한 K리그의 ‘레전드’가 된다. 바로 그 경기부터 2007년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193경기 연속 선발 출장 기록을 세운 것. 2003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막다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이 찢어지는 바람에 교체된 것을 제외하면 출장 경기 전체를 풀타임으로 소화하는 또 다른 기록도 세웠다. 2004년 개막전부터 다시 시작된 무교체 연속 출전 기록은 2007년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153경기 동안 지속됐다.

    우리나라 축구팀은 보통 1군에 골키퍼 포지션 선수를 3명 남짓 둔다. 그중 한 명이 지속적으로 출전 기회를 잡는다는 건 실력과 체력 면에서 독보적이라는 뜻이 된다.

    ▼ 거의 4년 동안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해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풀타임을 뛰었다는 말씀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네. 제가 했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이 기록을 깰 사람은 나오기 힘들 겁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해요. 153경기 무교체 출전 기록을 세운 날 입은 유니폼과 축구화, 축구공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 그 긴 시간 동안 손가락이 찢어진 걸 제외하면 부상을 당하거나 컨디션 난조를 겪은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아픈 날도 있고, 쉬고 싶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훈련했어요. 2002년의 일로 제가 좌절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 김병지다. 그런 걸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한다’.”

    그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2008년 국가대표로 소집됐다가 디스크 파열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훈련에 들어가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K리그 통산 출장 기록도 471경기에서 멈췄다. 이때 김병지의 나이는 서른여덟 살. 이제는 정말 은퇴할 때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를 치료한 의료진이 따로 가족을 불러 “더 이상 선수 생활은 힘들 것 같다”고 귀띔했다는 얘기도 훗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있었다. 소속팀 FC 서울에 “팀을 떠나겠다”고 말한 뒤 재활 훈련으로 몸을 만들며 자신을 필요로 할 팀을 찾았다. 그때 조광래 감독이 이끌던 경남 FC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이름 갖고 축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라운드에 있는 다른 어떤 골키퍼보다도 잘 뛸 자신이 있을 때까지만 선수를 할 거고요. 조광래 감독님은 마흔네 살까지 현역 골키퍼로 활동한 신의손 코치를 데리고 계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를 믿은 거 같아요. 병지라면 잘할 거라고 하셨고, 저도 감독님을 위해 더욱 최선을 다했죠.”

    2009년 시즌 김병지는 경남 FC에 입단하면서 등 번호 ‘29번’을 받았다. 29게임을 더 출장해 K리그 통산 출장 기록 500경기를 달성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해 11월 1일, 전북전에서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우며 완전한 부활을 알렸다. 7월 13일 현재 그의 통산 기록은 202경기 무실점, 588경기 출장. 여전히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볼을 쳐내고, 수비진을 완벽하게 리드하는 그를 향해 ‘이름으로 축구한다’고 말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김병지를 국가대표로 선발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김병지는 이 질문에 “그냥 웃지요”라고 답했다.

    “제가 정성룡 골키퍼보다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내가 최고의 골키퍼라는 건 선수로 뛰는 한 버릴 수 없는 자존심이에요. 하지만 축구는 미래를 보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위해 국가대표는 정성룡 선수한테 양보하는 거지요.”

    남보다 한 발 더

    허튼 자신감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 나이 마흔셋에 “최고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그리고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는 오늘도 달리고 날아오르고 땅 위로 꼬꾸라진다. 김병지는 “축구는 남보다 한 발 더 뛰어야 이기는 스포츠다. 이기려면 많은 땀을 흘려야 하고, 때로는 구토가 날 때까지 훈련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한테 박수를 쳐주고 싶은 때가 온다. 스스로에게 감동을 받게 되는 순간, 그때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늘 이렇게 운동했다.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체육특기자의 길을 선택해야 했던 중학교 때, 골키퍼로 뛰고 싶어 결손 가정 출신들이 다니는 부산 소년의 집(현 알로이시오고)으로 전학 간 고등학교 때, 대학 진학과 실업팀 입단에 모두 실패하고 아마추어 축구단이 있는 금성산전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퇴근 후 홀로 축구 연습에 매달렸던 스무 살 때, 그리고 국군체육부대(상무)를 찾아가 테스트를 받은 끝에 마침내 입단했을 때, 그는 늘 절박했다. 남보다 한 발 더 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두 발 더 뛰려고 노력했다.

    ▼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었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축구를 한 건가요.

    “가끔 이런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을 해요. 중학교 때 축구부에 들어가면서부터 계속 축구만 생각했으니까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마산공고 1학년 때, 딱 한 번 해봤습니다. 키가 163cm 이후로 안 컸어요. 점프를 해도 손이 크로스바에 닿지 않으니 도무지 골키퍼를 할 수가 없었죠.”

    일반 학생으로 돌아가 선반 기능사와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 등을 따며 취업을 준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말이 되자 거짓말처럼 키가 크기 시작했다. 현재 김병지의 키는 아침에 재면 182.5cm, 저녁 때는 181.5cm다. 공식 프로필의 184cm는 축구화를 신고 잰 키라고 한다.

    “골키퍼치고는 작은 체격이죠. 하지만 저한테는 이만큼 자란 게 꿈같은 일이었어요.”

    고3 때 골키퍼를 뽑는 학교팀을 수소문한 끝에 부산 소년의 집에 전학했지만, 뒤늦게 운동을 시작해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이지 못한 그를 뽑으려는 대학팀이나 실업팀은 없었다. 창원공단의 한 공장에서 낮에는 엘리베이터를 검사하고 밤에는 홀로 체력 훈련을 하며 축구선수의 꿈을 꾸던 그에게 상무는 최고의 학교이자 기회의 공간이 됐다.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운 엘리트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축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됐어요. 개인 시간에는 웨이트 훈련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체력과 근력을 키웠고요.”

    주전 골키퍼로 각종 경기에 출장해 승리를 거두면서 실력에 대한 자신감도 얻었다. 그리고 제대를 앞두고 벌인 프로팀 울산 현대와의 연습 경기에서 행운이 찾아왔다. 김병지의 플레이를 눈여겨본 차범근 당시 현대 감독이 그를 9순위로 지명한 것이다. 프로축구 드래프트에서 5순위까지만 정식 선수로 인정받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후보 중에서도 후보인 처지였지만, 상관없었다. 고교 졸업 후 실업팀 입단조차 좌절돼 아마추어 축구단에서 혼자 공을 차던 시절을 생각하면 성공도 이만한 성공이 없었다. 김병지는 아직도 1992년 7월 17일, 제대 이튿날 울산 현대 구장을 찾아가던 순간,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일 만큼 꿈과 희망에 부풀었던 걸 다 기억한다.

    “당시 현대 팀에는 한국 축구 골키퍼의 계보를 잇는 선배 두 분이 계셨어요. 조병득 코치님과 최인영 선배님이죠. 기술적으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던 저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정말 빠르게 두 선배의 가르침을 빨아들인 것 같아요.”

    꿈은 이루어진다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머지않아 출전 기회가 왔다. 그해 9월 6일 유공과의 후기리그 개막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 것. 0-1로 패했지만 꿈만 같았다. 이후 남은 경기 중 꼭 절반인 10경기를 선발 출장하며 그는 순식간에 주전 골키퍼가 된다. 그 뒤부터는 출세가도였다. 그의 연봉은 첫해 960만 원에서 2년차 때 2160만 원, 3년차 2760만 원, 4년차 4200만 원을 거쳐 순식간에 억대로, 스스로 느끼기에도 ‘무섭게’ 치솟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국가대표 마크도 달았다. 축구선수의 꿈 하나만 품고 오랫동안 변방을 헤매던 그는 그렇게 한국 축구의 중심 선수가 됐다.

    김병지는 “나는 지금까지 축구를 해오면서 세운 목표 일곱 가지를 다 이뤘다”고 했다. 모두 처음엔 주위 사람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허황돼 보였지만, 최소한 3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노력한 끝에 이룬 것이라고 했다.

    ▼ 처음 목표는 아마 상무 입단이었을 테고, 두 번째 목표는 프로팀에 들어가는 것이었겠죠?

    “네. 둘 다 정말 제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죠. 이 두 개를 이루고 나자 ‘아 꿈은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거구나’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어떻게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알게 됐습니다. 이후 점점 더 큰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이뤄나갔죠.”

    ▼ 세 번째 목표는 국가대표가 되는 거였나요?

    “아니요. 2억 원을 버는 거였어요.”

    그는 수줍은 듯 웃어 보였다. 월급 80만원을 받는 고졸 축구선수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그 목표는 생각보다 무척 빨리 현실이 됐다. 그 다음엔 소속팀의 주전 선수가 되겠다는 꿈,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 월드컵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차례로 이뤄나갔다. 돌아보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꾸준히 최선만 다한다면.

    ▼ 술·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도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몸에 밴 습관이겠죠?

    “금연, 금주는 축구선수가 지켜야 할 100가지 금기 가운데 일부일 뿐이에요. 제가 2009년부터 경남에서 뛰고 있는데,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마산 시내에조차 한 번도 안 갔습니다. 무엇이든 조심하고 삼가는 거죠.”

    그는 7월 5일 트위터에 “프로에서 롱런하는 법, 나는 키퍼니깐 일단 공을 잘 잡아야 하고, 나이가 있으니깐 시간과 세월도 잡아야 하고, 공인이니깐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잡아야 하고, 체력이 받쳐주어야 하니깐 체중과 민첩성도 잡아야 하고, 선수니깐 감독님과 구단 관계자의 마음도 잡아야 한다 ㅎ”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프로에 데뷔한 뒤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씩 꿈을 이루어왔다. 체중 78kg을 20년째 유지하는 비결도 이처럼 철저한 자기 관리라고 했다.

    그의 축구 선수로서 일곱 번째 목표는 K리그에 가능한 한 많은 기록과 이야기를 남기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해준 팬들과 그를 살게 해준 ‘축구’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K리그 최고령 필드골 희망”

    “올해는 가능하면 K리그 최고령 필드골 기록을 세우고 싶어요. 감독님께 우리 팀이 2대 0으로 이기고 있을 때 페널티킥 상황이 오면 키커로 나서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감독님이 ‘그래라’ 하시더군요.”

    마지막 목표는 신의손 부산 아이파크 코치가 세운 K리그 최고령 골키퍼 기록, 44세 7개월 17일을 깨는 것이다. 그 뒤엔 미련 없이 은퇴하고 싶다고 했다.

    ▼ 2년 후에도 체력과 실력이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선수생활을 좀 더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이제는 가족과 같이 살고 싶어요. 축구를 하는 세 아들도 돌봐주고, 경기도 남양주에 지어놓은 유소년전용축구장에서 골키퍼 유망주들도 가르치며, 또 다른 삶을 살아야죠.”

    김병지는 “나도 이제 선수 말고 사람으로 좀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씨익 웃었다. 그라운드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금주·금연·금욕적인 생활을 계속해왔다는 얘기를 들으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일 거다. 하지만 선수는 할 수 있다”고 답한 걸 되풀이한 것이다. 물론 그전에라도 자신이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느껴지면 후회 없이 그라운드를 떠나겠다고 했다. 같은 팀에서 훈련하는 골키퍼 조카들에게도 곧잘 “너희가 빨리 커서 나를 좀 밀어내라. 이렇게 잘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고 했다. 멋진 후배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박수를 쳐주며 기꺼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김병지는 분명 앞으로 2년 4개월을 더 뛸 것 같다. 스스로 정한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입시에 실패하고, 실업팀에서 탈락하고, 허리 디스크가 부서져도 포기하지 않은, 20년간 ‘사람’의 삶을 기꺼이 미뤄둘 수 있었을 만큼 ‘선수’의 삶을 사랑하는 김병지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사인을 한 장 받았다. 그는 ‘김 병 지’ 이름 석 자 밑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내 뒤에 공은 없다”고 적었다. 골키퍼로서 그의 좌우명이라고 했다.

    김병지, 그의 뒤에 공은 없다. 그리고 그의 앞에 불가능은 없는 듯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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