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중 대통령님. 새천년의 첫 가을입니다. 태풍 사오마이가 사납게 할퀴고 간 들녘 위로 고개 숙인 벼이삭들이 금빛 물결로 출렁거립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올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울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국민들의 가슴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때입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루한 의약 분쟁과 ‘제2의 경제위기’ 운운하는 풍설에 그러잖아도 생활에 지친 서민들의 어깨는 자꾸만 아래로 처집니다.
그러나 새천년 10월13일 저녁 6시에 노르웨이 오슬로로부터 지구촌에 타전된 대통령님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은 국내의 여러 뒤숭숭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을 환호와 감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진정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 언제 다시 있을는지요. 그날 대통령님의 담담한 표정을 TV 화면으로 보고 저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육지와 고립된 망망대해에서 거친 파도와, 악천후와, 상어떼에 맞서 고투하다가 드디어 포구로 귀환하는 어부의 지친 육신 말입니다. 그가 수확한 것이 거대하지만 앙상하게 뼈만 남은 고기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인은 인간 존재의 절체절명한 엄숙성을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께서 새천년의 첫 수상자이자 노벨상의 100회 수상자이며 지구촌 마지막 분단국의 지도자란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님은 결코 우리 사회의 주류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동안 우리 사회에는 기득권 계층이 강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대통령님은 모든 면에서 소수파에 속한 분입니다.
호남의 외딴 작은 섬 하의도 출신에 이데올로기적 정체성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이라는 의미는 참으로 각별합니다. 또한 야만적이리만큼 맹목적인 학맥 위주 사회에서의 이력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집권을 하고도 대통령님은 여전히 정파적으로 소수파의 수반입니다.
도무지 대통령님의 선택이 아닌 이 운명으로 인해 개혁 일정과 내정의 완수에 현재 악전고투하고 있음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님은 이제 국내에서의 그 모든 한계와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광활한 지구촌의 포구에 귀환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한 이래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항해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십여 년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저는 무엇보다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정의가 끝내 이기고야 만다는 살아 있는 교훈을 보여줄 수 있음에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민주화 운동의 말석에 참여하면서 80년대 이래 대통령님의 정치 여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보아온 사람으로서 저는 오늘 노벨평화상 수상의 벅찬 감격과 함께 진실로 대통령께서 이 찬란한 영광에 부응하는 성공적인 내정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충정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가슴 저미는 풍경들
저는 대통령님 일로 참으로 가슴이 아파 두 번 울었습니다. 87년 12월 19일 오전 10시. 당시 기독교회관 310호에 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엔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구심점이던 그 단체의 많은 분은 대통령님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고 사심없이 헌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고 구로구청에서 밤새 부정투표함을 두고 대치하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무자비한 강제진압으로 다수가 중상을 입거나 경찰서로 연행된 직후였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피로하고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재야의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노고를 위로한 후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방을 나서던 순간, 저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어버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그런 저의 등을 두어 번 말없이 두드린 뒤 “앞으로 내가 잘해나가겠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돌아서 나가던 대통령의 뒷모습이 얼마나 외롭고 슬프던지 그제서야 방안에 있던 몇 분이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날 오후 구로구청에서 연행된 후배를 면회하러 관악경찰서에 갔다가 처참하게 상처 입은 얼굴들을 보고 경찰서 앞 개천가에서 저는 목놓아 울었습니다.
74년 서울대 재학중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로 사형을 언도받고도 “영광입니다” 하고 말해 법정을 숙연하게 만들었던 고 김병곤 동지는 그 때 다섯 번째 징역을 살다가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어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30대의 시퍼런 청춘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92년 겨울. 대선 패배 직후 대통령께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재야의 어른이자 원로 시인인 고은 선생과 함께한 자리였는데 식사 후 헤어지기 전에 저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그 때도 대통령께서는 부드러운 말로 저를 위로했습니다. 귀가하는 차안에서 방성대곡으로 가까스로 자신을 달랬지만, 슬픔은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뒤 지금까지도 저는 그토록 깊은 슬픔에 잠긴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 개인의 경험이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는 모든 이가 공유한 슬픔이었으리라 봅니다.
김대중대통령님
‘국민의 정부’의 ‘역사적 시간’은 이제 냉전의 외로운 섬인 한반도를 세계화의 중심지로 변모시키는 중입니다. 세계사적 냉전 해체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있는 중입니다.
탈냉전, 민주화, 공정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점을 돌아 통일된 국가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추진해온 ‘산업화’의 속도만큼 빠르게 전진하리라고 봅니다.
이제 이 방향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이며 우리의 생존이자 역사적 당위가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학자와 국민의 여론이 평가하듯 국민의 정부 집권 전반기는 경제위기의 관리와 극복이라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금융, 재벌, 노동, 공공 4대부문의 구조조정을 진행중이며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에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는 중입니다.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틀을 잡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 ‘절반의 성공’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너무 거대한 ‘담론’에 머무를 뿐입니다.
국민이 등돌린 정치
국민들은 당장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 권위주의 정권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를 맨처음 궁지에 몰아넣은 세칭 옷로비 사건이 그렇습니다. 언뜻 그 사건은 정치의 본질과 동떨어진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민의 정부’에 대한 포괄적인 기대가 꺾였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반사적으로 실망과 배신도 정비례해서 커진 것이라고 봅니다.
한빛은행 대출외압 추문 역시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의 천문학적 금융스캔들에 비해 그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국민적 실망감에서는 독재정권 시절의 부패사건 후유증에 못지 않습니다. 호가호위하는 권력의 측근, 변함없는 청탁과 줄대기 풍조, 내 사람을 먼저 챙기는 패거리 의식 등 과거의 행태가 청산되지 않은 데 대한 실망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고 절망시키는 것은 구태의연한 정치의 실상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일산 신도시에서는 시장 보궐선거 투표율이 가까스로 20%를 넘겼습니다. 참으로 대의정치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후보의 면모가 신도시 성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컸습니다. 후보에게서 개혁적 국민정당을 추구하는 모습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집권당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정보화 세력과 시민사회의 영역을 포용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정당의 정체성과 계층적 지지기반이 상이한 민주당과 자민련의 지역적 연합으로 출발한 국민의 정부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정당은 정체성과 계층적 지지기반이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집권한 지 3년 가까이 되도록 그 한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13 총선 결과는 자민련과의 연대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심판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정국경색을 불러온 날치기 파동은 국민 정서를 무시한 채 구태를 버젓이 감행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국민들은 평생 민주화를 추구해온 세력이 집권했으니만큼 김대중 정부가 구태와 부패를 점진적으로 청산하고 과거와는 다른,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고 무차별적 냉소와 불신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염려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총재로 계시는 ‘새천년 민주당’은 너무 무기력합니다. 심지어 ‘집권야당’이라는 자탄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집권당이 이렇게 무기력한 것은 그 메커니즘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직자들이 대통령 한사람만 쳐다보는 구조에서는 정치개혁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가신그룹인 동교동 실세의 전횡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듣기에도 민망한 ‘권옥승’이니 ‘권옥상’이니 하는 말이 시중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신문에서는 인기영화 투캅스를 패러디한 ‘두 갑’의 쟁투를 희화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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