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전총리는 박정희 정권 시절 보건사회부장관(1975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1978년)을 역임했다. 국무총리 재임기간은 박 전대통령 사망 직후인 1979년 12월부터 5공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인 1980년 5월까지 약 6개월이다. 인터뷰는 11월9일 오전 상공회의소 건물 12층에 있는 한일협력위원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인터뷰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기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나이 든 사람이 특별한 병이 없으면 건강이 좋다고 얘기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예부터 ‘노인 건강 못 믿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건강해 보여도 언제 슬쩍 가버릴지 모르지요. 특별한 병이 없더라도 모든 육체적 기능이 후퇴해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건강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요.”
―운동은 좀 하십니까?
“노령에 든 사람들끼리 OB클럽을 만들어 골프를 치는데, 여름·겨울엔 하지 말자, 날씨 좋을 때만 하자, 그러다 보니 생각한 만큼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지금 회장직을 두 개 갖고 있다. 하나는 박정희기념사업회 회장이고 또 하나는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이다. 그밖에 전직 정부 수반들의 모임인 ‘OB 서미트(summit)’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수상이다.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관계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민간 차원에서 양국간 현안에 대해 토의하고 협력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박정희기념사업회 얘기를 하지요. 회장이신데, 어떤 동기에서 맡으셨습니까.
“지난해 4월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 청와대로 갔습니다. 단 둘이 저녁을 먹으며 얘기했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기념사업회 얘기를 꺼냈습니다. 대통령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완벽한 지도자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 그렇지만 큰 공이 있으면 비록 과가 있더라도 후세에 알려야 하고, 젊은 사람들이 배워나가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그런 분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정적으로서 처음 만났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적 관계였다. 나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그에게 혜택을 입은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생각엔 박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정신을 갖게 하고, 사기를 북돋워준 공이 크다. 빈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분명한 공이다. 내가 핍박을 받은 처지인 만큼 내가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박대통령의 과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하게 될 거다’, 이런 얘기를 해요.
내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러자 ‘기념사업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요. 그래서 ‘나는 박대통령이 그런 일을 하는데 참여했던 사람인 만큼 기꺼이 맡겠다’고 즉석에서 답변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어요.”
―기념관 건립의 뜻을 설명하신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얘기에 100% 찬성합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인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기념관을 만들어 박정희라는 사람 개인을 숭배하고 참배하고 분향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시 박대통령이 지도자로서 책임지고 이끈 것은 사실이지만 혼자 한 건 아니지요. 모든 공무원 근로자 산업가 농민… 우리 국민 모두가 뭉쳐 해낸 것이지 박정희 개인이 해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박대통령의 공은 바로 그런 것을 지도하고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 기리자
어쨌든 세계가 인정하듯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단시일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경제도약을 한 건 사실 아닙니까. 후진국으로서 이처럼 급속하게 경제개발에 성공한 예가 없어요. 대표적 성공사례지요. 어째서 한국만 그렇게 됐냐, 이 점이 전세계적으로 연구대상입니다. 기념관은 바로 ‘한강의 기적’의 경위와 과정을 전세계에 알려주는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연구기관도 되고 토의기관도 되고, 또 각종 사료를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도서관 또는 전시실 기능도 갖게 됩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기념관이라는 명칭 때문에 박 전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거부감이나 반감이 큰 것 같습니다. 지난해 김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의사를 밝힌 후 역사학회나 교수들, 각종 사회·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지난 9월엔 247개 단체들이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했어요. 그런 움직임을, 기념관 건립의 취지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반대하는 사람 중엔 기념관 건립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누구나 과도 있고 공도 있다, 그러니 그 과를 중시해 ‘나는 기념관에 반대한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자기 신념에 따라 반대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김대통령처럼 과도 인정하지만 공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겁니다. 신문들이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산업발전을 이룬 공을 생각해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수가 넘은 것으로, 심지어 70%까지도 나타났다 말이에요.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의견은 존중해줘야죠. 다원사회니까요.”
―여론조사 비율로만 따질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국고에서 기념관 건립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쟁점입니다. 이를테면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박 전대통령 추종자나 찬양론자들이 그의 고향에 세우는 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하거든요.
“여러 나라의 예를 다 살펴봤어요.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관련 도서를 볼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은 공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선 정부가 도와주고 있어요. 기념관을 세운 단체에 관리비를 지원하는 것이지요. 국가재산을 맡긴 것이니까요. 미국을 보면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꼭 고향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 중 중요한 대통령은, 예를 들어 링컨이라든가 워싱턴이라든가 루즈벨트 같은 사람들은 수도에 기념관이 있어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사람이지만 파리 한가운데에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고향에만 기념관을 세워야 합니까.”
―기념관 건립 논쟁은 박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것입니다. 반대론자들은 박 전대통령을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인물로 보죠.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건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심지어 반역사적 행위로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우선 빈곤탈출부터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가 제일이다, 잘 살고 봐야겠다, 잘 살기 위해선 자유를 일부 유보하자, 급한 일부터 먼저 하자,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 자유 유보가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선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지요. 중국과 미국도 그 점에 대한 의견이 달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은 산업화하는 것이 곧 인권향상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달라요. 자유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와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하버드 경제학자들이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후진국 중에서 자유민주주의부터 내세워 경제가 제대로 발전한 나라가 없다고. 공공연히 학설로 내세우고 있어요. 어쨌든 박대통령이 그렇게 한 것을 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중국식으로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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