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소장파의 양대축으로 통하는 남경필(위 사진 가운데), 원희룡 의원(아래).
종말이 예고된 최병렬 체제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남 의원은 곧 다가올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대표 만들기’를 위해 앞장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언론을 통해 박 의원이 대표 경선 출마를 포기할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왔다.
박 의원은 최병렬 대표에게 화가 나 있었다. 박 의원은 최 대표측이 자신을 겨냥해 ‘2002년 한나라당에 복당할 당시 거액의 수수료를 받았다’는 의혹을 흘리며 흔들어대고 있다고 의심했다. 박 의원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선에 나서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남 의원은 몸이 달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남 의원은 박 의원에게 강권하다시피 출마를 거듭 권유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박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국 박 대표는 출마했고, 당 대표가 되어 17대 총선 때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을 구해냈다.
올해 1월4일, 4대 입법 처리를 둘러싼 여야 쟁투 국면이 가까스로 봉합된 뒤 맞은 신년 벽두였다. 당내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고 박근혜 대표와 소장파간 갈등곡선도 동반 상승해 있었다.
그날 남경필 의원은 김덕룡 원내 대표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국회 운영위원회의 아프리카 의회 시찰단 일행으로 출국하는 길이었지만 단순한 외유로 보이지는 않았다. 4대 입법 처리를 두고 시종일관 강경노선을 걸어온 박 대표와 명확한 선을 긋는 세리머니처럼 보였다. 그는 전날 기자와 만나 “박 대표에게 더는 미련이 없다”고 했다. 원내수석부대표로서 4대 입법의 여야 합의 통과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좌절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표현대로 “100번 가까이 만나” 설득했지만 박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럴 줄은 몰랐다. 돌아오는 대로 당직을 내놓고 소장파를 규합해 본격 비주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과 10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남 의원과 박 대표는 극과극을 오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 대표는 별로 변한 게 없는데 박 대표를 중심에 두고 소장파가 양극을 오간 셈이다.
세 번의 선택, 세 번의 결별
이 사례는 한나라당 소장파의 이력과 현재 상황을 압축해 보여준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의원이 주축이 된 소장파는 그리 길지 않은 정치 이력을 통해 세 번 선택하고 세 번 좌절했다. 박 대표는 소장파의 세 번째 선택이자 좌절이었다.
잦은 선택은 큰 비용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들을 향해 ‘기회주의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 ‘배신을 밥 먹듯 한다’는 당내 비난이 쇄도했다. 그들은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 했다. 정병국 의원의 말이다.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 총재 앞에서도 우리는 제 목소리를 냈다. 공천을 앞두고 최병렬 대표를 몰아내기 위한 봉기에 나섰다. 지금 막강한 권위를 지닌 박 대표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대드는 우리를 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로선 억울한 일이다.”
계보가 사그라진 한나라당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며 명맥을 이어온 소장파. 그들의 출발점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역사는 미래연대가 꾸려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해 초기 구성원은 김영선, 남경필, 권오을 의원이다. 김부겸, 권영진, 김성식, 고진화, 박종운, 정태근 등 유명짜한 원외 인사들도 미래연대 식구였다.
맹아를 틔운 소장 모임은 2000년 16대 총선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한다. 원희룡, 오세훈, 김부겸, 오경훈, 박종희씨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 가세하면서부터다. ‘386의 원내 대거 진입’으로 총선 결과가 특징지어지던 바로 그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