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 장관은 기억력이 비상하다. 3년 전 필자가 사설을 쓰다 확인할 일이 생겨 통화한 적이 있다. 천 장관은 “4월 초파일, 절에 가던 길에 황 위원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필자도 통화한 기억은 나지만, 뇌의 메모리 칩 용량이 작은 탓인지 통화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력을 과시하려는 걸까. 인터뷰어를 감동시키려는 걸까.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국회의원에게 가장 곤혹스런 질문은 ‘저 누군지 기억하시죠?’라고 한다. 천 장관은 그런 면에서는 다른 국회의원보다 고통이 덜할 것 같다. 그는 필자의 첫 저서 ‘법에 사는 사람들’(이영근·김충식·황호택 공저)을 읽은 이야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천 장관은 세 번째 법무부 장관이다. 강금실 변호사와 국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요즘 도청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김승규 원장이 전임이다. 노 대통령이 검찰을 개혁하기 위해 보수적인 김승규 장관을 국정원으로 빼고 천 장관을 등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천 장관은 발탁 배경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답하지 않고, “노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법무부 장관 시켜주리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저 스스로 ‘장관 시켜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내심 하고 싶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죠. 다만 평소에 법무부 장관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해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고 할까요. 노 대통령께서 임명 직전에 오퍼(제의)를 하셨습니다.”
도청 수사과정 투명하게 공개
마침 필자와 인터뷰하는 날,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에서도 도청이 있었고, 휴대전화도 도청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부의 도청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김대중 정부의 도청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만만찮은 수사가 될 것 같은데요.
“정보기관이 권한을 남용해 개인의 사생활과 통신을 들여다보고 정치적 약점을 잡은 행위는 민주 법치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어떤 의혹도 남기지 않고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수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의 신뢰를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규명해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책도 함께 마련돼야 하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측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비자금 수사에 이어 ‘DJ 두 번 죽이기’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점이 염려됩니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조사를 통해 드러난 일이라 숨길 방법도 없습니다. 은폐하려 하면 파장이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고려 없이 진실대로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의 안기부장과 국정원장 소환 조사도 불가피하겠군요.
“법무부 장관이 답변할 사안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도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