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8월, 중국 정부의 탈북자 검거 및 강제북송 중단을 촉구하며 워싱턴 주미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시위를 벌인 탈북자 조진혜씨. 조씨는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보호를 받다가 2008년 3월 미국에 입국했다.
이 가운데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전자다. 일단 한국에 정착했다가 미국에 오는 경우는, 법적으로 엄격히 따지자면 한국 국민이 미국에 입국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들 가운데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학업이나 취업 목적으로 입국하는 이들도 드물지만 이따금 있다. 이러한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미국에 밀입국하게 된다.
얼마 전 필자가 살고 있는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 시에 탈북자 일가족 네 명이 도착했다. 필자는 우연히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을 만난 계기부터 말해둬야겠다. 로체스터 시에 거주하는 한인 수는 3000명 정도 된다. 이 도시에는 모두 네 개의 한인교회가 있는데, 한 한인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필자의 가족은 현지 미국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교회 목사님의 전화는 의외였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유학생에게서 필자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로체스터 시에 탈북자 일가족이 오는데 그들을 공항에서부터 마중하고자 하며, 필자가 이들에게 통역과 생활안내를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문득 이런 정보를 어디서 알게 됐고 어떻게 관여하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목사님은 ‘가톨릭패밀리센터’라는 난민지원센터에서 협력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에는 북한 외에도 많은 나라에서 난민이 입국하고 있고, 이들의 정착을 돕는 일은 전적으로 민간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이 정부 주도로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 난민센터에서는 난민이 입국하면 해당언어를 구사하는 공동체에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로체스터 시의 한인교회에 도움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사실 언어문제 외에도 미국의 평범한 시민이 탈북자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다른 제3세계 국가 출신 이민자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갖는 태도가 동남아국가 이주민에 대한 태도와는 꽤 다른 것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심지어 정착지원을 돕게 된 한인교회조차 한국 내 보통 교회가 탈북자를 접촉했을 때와는 다르게 반응한다. 한국의 교회들은 탈북자란 사실을 알게 되면 가정방문을 하고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하지만, 이곳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물어보긴 해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처럼 뜨겁지는(?) 않다고 할까.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나라’
일단 목사님의 요청에 따라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스무 살과 스물세 살의 두 아들을 둔 50대 초반의 장모씨 부부였다. 일단 난민지원센터에서 나온 자원봉사자와 함께 미리 준비해둔 임대주택으로 그들을 데려가 기본적인 생활안내를 해주었다. 2~3일 지난 후 한 자원봉사자가 생활비와 지원품을 가지고 장씨 가족을 찾았다. 그는 이후에도 그들을 만날 때마다 “미국은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또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 외에 사적인 요청을 하면, 예를 들어 근처에 있는 시장까지 차를 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거나 하면, 자신은 자원봉사자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고 한다. 식량배급표 전달이나 전화 설치 신청 같은 공식적인 지원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해외생활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특히 영어가 원활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런 간단한 일도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필자가 알고 지내던 한 교회에서 선뜻 장씨 가족을 위해 협력해주기로 했다. 교회 관계자들은 장씨 가족에게 고추장, 된장, 김치 등 한국인이라면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주었다. 장씨가 추가로 요청한 비타민 영양제도 챙겨줬고, 일요일에는 예배에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수 있도록 차량을 제공하는 교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필자는 며칠에 한 번씩 장씨 가족에게 들렀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숙지해야 할 주요 사항들을 설명해주고 대형 할인마트나 약국, 기타 상점에 데리고 가서 이용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때로는 인근에 있는 온타리오 호수에 함께 가서 그곳에 즐비한 별장과 요트를 즐기는 미국인들의 풍요로운 모습도 보여주고, 거꾸로 다운타운에 밀집한 빈곤의 현장도 안내했다. ‘이것이 미국입니다’라는 기분으로.
다음 페이지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난민지원 정책은 ‘기초적인 지원은 제공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난민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 탈북자들은 그 사회적 신분이 바로 확정되지만, 미국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꾸준히 관찰한다. 그 기간 적응에 실패해 문제를 야기할 경우에는 본국으로 추방한다는 원칙도 세워두고 있다.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들 역시 대체로 중국 등지에서 상당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어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내는 역량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미국의 난민지원 정책은 현금성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일정금액 이상의 돈을 사용하려면 스스로 노동을 해야만 한다. 한국 정부가 탈북자에게 정착금을 지급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
박필립 전 시러큐스 한인회장은 탈북자들의 미국 정착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경험을 갖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뉴욕 주 시러큐스 시의 난민센터에는 이미 15명 남짓의 탈북자가 난민으로 입국한 바 있다. 박 전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