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이인제 불가론에서 영남후보론까지

李會昌 격파 노리는 DJ의 ‘와일드 카드’

  • 박성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08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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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통령의 입장은 먼저 국정운영에 성공해 정권자체가 확고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쌓는 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당원과 국민 속에서 경쟁력을 쌓아온 예비후보가 극적인 경선을 통해 남북관계 등의 성과물을 집중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 인제(李仁濟)의원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8·30민주당 전당대회를 며칠 앞둔 지난 8월 어느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동교동계 핵심인사를 청와대에서 단독면담하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당내 뿌리가 약한 이의원이 경선에서 혹여라도 지나치게 부진한 성적을 거두어 차기 카드의 위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는 의중이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이의원이 1위에 등극할 경우 조기대권몰이로 인해 부작용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듯, ‘8월 전당대회는 당권 대권과 무관하다”고 공개적으로 강조했다. ‘대권론’을 앞세운 이의원의 과속질주에는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실제 경선결과 이의원은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를’ 2위를 차지했다.

    이 명쾌하지 않은 이의원의 위상이야말로 DJ의 차기구상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김대통령은 현재까지 남북정상회담을 시발로 하는 ‘한반도 정치’에 온 신경을 쏟을 뿐 차기 정권창출 구상은 되도록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야당에서는 이회창(李會昌)이라는 확고한 대표선수가 대권을 향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지금 김대통령은 과연 어떤 복안으로 그를 격파하려는 것일까? 이인제는 김대통령의 축복아래 민주당 대표선수로 출전할 확실한 카드인가? 아니면 김대통령이 주머니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여러 카드중 하나에 불과한가?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우선적으로 짚어봐야 할 것은 정치권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이인제 불가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권력투쟁의 소산 ‘이인제 불가론’



    ‘이인제 불가론’은 한마디로 이인제 최고위원으로는 다음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제 불가론’은 특히 지난 4·13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영남권을 싹쓸이한 뒤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영남권은 1997년 대선에서 투표자수가 무려 720만명(PK지역 430만, TK지역 290만)이었다. 호남권(330만)과 충청권(250만) 투표자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다. 그런 영남에서 철저히 거부당하고 있는 이위원으로는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총재를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수치가 뒷받침하고 있다. 97년 대선에서 국민신당 이인제후보는 전국적으로 18.1%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영남지역에서는 24.64%라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후보의 영남지역 지지율은 13.23%. 그러나 지난 4·13총선에서 이인제선대위원장 체제의 민주당은 영남권에서 13.06%밖에 얻지 못했다.

    민주당은 97년의 김대중 이인제후보표의 합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김대중후보의 득표율보다는 늘어나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적어도 영남에서는 이인제를 앞세워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그 원인을 ‘이인제 학습효과’로 설명한다. 영남 사람들이 97년 대선 때 이회창 이인제에게 표를 나눠주는 바람에 DJ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을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으며 “다시는 안 속는다”고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국당으로 출마한 영남권 정치거물들이 맥도 못춰보고 넉 아웃된 것도 “민국당을 찍으면 제2의 ‘이인제 사태’가 온다”는 한나라당 구호가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위원은 선대위원장이면서도 영남권에는 제대로 지원연설조차 하러 갈 수 없었다. 당소속 후보들이 역효과를 우려, 초청을 자제했던 것이다.

    실제 이최고위원은 각종 차기주자 여론조사에서 여권후보로는 유일하게 한나라당 이총재와 엇비슷한 지지율을 유지해오면서도 영남권에서는 유독 한자리수에 불과한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지난 8·30 최고위원 경선에서 이위원이 무려 13%포인트 뒤지는 2위에 그친 데에는 영남 대의원들의 비토가 한몫했다.

    그만큼 영남민심이 그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 대선에서 이인제가 얻었던 500만표의 최대 뭉치는 영남권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영남민심은 철저히 이인제를 떠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영남권에서 이인제를 찍은 사람들은 대개 젊은 층이다.

    이들은 영남일반의 지역정서에도 불구하고 ‘DJ가 되면 또 어떻노?’하면서, 또는 ‘세대교체가 돼야지’ 하면서 ‘소신투표’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산에서는 이런 젊은이들이 ‘2대(大) 병신론’에 시달리고 있다. 첫째로는 ‘TK는 30년간 (정권) 해먹고 뺏겼는데 느그는 고작 5년 해먹고 빼앗겼느냐’는 비아냥이고, 둘째로는 ‘이인제를 찍으면 DJ가 당선된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찍어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느냐’는 힐난이다.

    부산의 다짐 “두 번은 안 속는다”

    부산 M여행사 구모부장(36)은 “과거 한때는 이인제씨에 대해 ‘싫다’와 ‘좋다’가 엇갈렸는데 이제는 그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우스워졌다”면서 “지난 대선 때 이인제를 찍었다는 사람들은 어디가서 함부로 말했다간 맞아죽을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제는 아예 잊어버릴 만도 하지만 DJ정부가 부산을 소홀히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될수록 ‘DJ집권에 일조한 이인제’를 원망하는 소리가 습관처럼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부산 항운노조 배양호(裵良鎬) 정책총간사는 “지금 상황에는 민주당에서 누굴 내놔도 부산에서는 안되겠지만 특히 이인제씨는 대선 당시 원죄 때문에 예서는 구의원도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부산 D대학에서 만난 김정열(金楨烈)교수의 말. “이인제 때문에 한나라당 또는 영남이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사실 지나친 말이다. 패인은 이인제 말고도 많았다. 문제는 이인제가 민주당에 합류해버린 점이다. 합류하지 않고 탈당해 있었다면 이총재의 독선 독주를 비판해 결별했다는 정당성을 확인하면서 이회창의 대안으로서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덜퍼덕 민주당에 입당해버리면서 영남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영남에서 일부 젊은 층과 함께 이인제를 지지했던, 민주계 정서를 가진 장년층도 90%이상은 돌아선 것 같다.”

    부산 동서대 박종호교수도 “민주당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감이 큰 데다가 이인제에 대해서는 특히 지난 대선패배의 원흉 이미지가 겹쳐서 거부감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강옥춘씨(37·부산 금정구 서동)는 “이인제씨는 부산·경남을 대변하기보다는 개인의 대권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면서 “전국적 구도에 어필하는 정책적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막연히 차기주자만 자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부산상공회의소 이중호(李重昊) 조사연구팀장은 부도율 1위, 실업률 1위 등 전국 최악인 부산경제가 민심을 악화시켰음을 지적한 뒤 “과연 누가 부산정서를 대변할 인물인지도 모르겠고 관심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충무동 공동어시장에서 도매상을 하고 있는 김종수씨(70·중구 영주동)는 “이인제는 배신자 아이가(아니냐)”면서 “이 지역(김해) 출신인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 취임 직후 어시장을 방문했을 때 단 한 명도 박수를 치지 않았을 정도로 정부여당에 대한 바닥민심이 차갑다”고 말했다.

    이동환 부산경실련사무처장은 “양당의 기반, 즉 민주당의 호남의존도와 한나라당의 영남의존도가 변하지 않는 한 이인제씨는 이곳 부산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처장은 “시민들이 이인제씨를 비난하는 명분은 ‘경선불복, 민주주의 위반’이지만 이는 실은 ‘DJ의 꼬붕이 된 것을 용서 못한다’는 ‘반 DJ정서’를 고상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시민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식의 인물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이게 부산정서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물론 부산의 ‘이인제 팬’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북구 구포동에서 약재도매상을 운영하는 김모씨(47)의 말. “말을 하진 않지만 이인제를 지지할 사람이 그래도 꽤 된다. 과거보다 예산이 더 많이 내려오는데도 부산경제가 워낙 침체되다보니 이 모든 것을 ‘이인제 비토론’으로 연결시키려는 한나라당 전략이 먹혀드는 것이다.”

    이석희(李奭熙)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사무처장은 “DJ가 정치를 잘 풀어갔다면 이인제불가론이 부각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가 이인제를 찍어줘서 이 모양이 됐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사 이인제 아닌 다른 후보를 민주당이 내놓더라도, DJ와의 관계가 독자적이고 완전 차별화되지 않는 한, 부산에서는 그저 DJ와 마찬가지로 배척될 것이라는 게 이처장의 주장이다.

    대구·경북에서 이인제에 대한 반응은 더욱 차갑다.

    경북대 캠퍼스에서 만난 K씨(37·공과대 박사과정)는 “정치인이 지조가 있어야 하는데 이인제씨는 철새처럼 이쪽저쪽에 붙은 것 때문에 싫다”고 말했다. K씨는 “세대교체란 것은 단지 나이가 젊은 사람으로 바꾼다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면서 “지난 대선 때 참신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그가 3김 못지 않은 구세대적 행태를 보여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개인택시기사 이성구씨(64)는 “이인제에 대해 욕도 많이 하는데, 대구는 인물이 아니라 당을 보고 찍기 때문에 민주당이 다른 누굴 내놔도 맥을 못출 것”이라고 했다.

    성철수(成喆壽) 민주당 경북도지부 조직부장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위원의 신한국당 탈당에 대해 ‘신의론’을 들어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면서 “이위원이 정치력을 발휘하고 당이 호남색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지난 번에 그를 찍었던 중도개혁층과 젊은 층도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 대구시지부의 김성호(金盛浩)홍보부장은 “이 곳에서 지난 대선 때 이인제를 찍은 사람들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자탄한다”고 말했다.

    신영국(申榮國) 한나라당의원(문경·예천)도 대구·경북이 예부터 의리를 중시하는 고장이라는 점을 상기시킨 뒤 “이인제는 배신자라는 딱지 때문에 과거 DJ가 얻었던 표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사람의 말을 듣다보면 영남에서 나타난 이인제 비토정서는 과학적 이유보다는 ‘반 DJ’라는 맹목적 거부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정치적 절망감을 분출할 ‘가학대상’을 이인제라는 구체적 인물에서 찾았다고나 할까?

    이인제 비토론을 강화하는 또다른 요소는 YS다. 이위원의 신한국당 탈당 및 민주당 입당을 놓고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있는 YS는 이위원에 대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정치적 아부지’였던 YS의 강력한 비토는 이위원에게 또다른 차원에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당내에서 이인제를 비토하는 사람들

    이인제 비토론은 지역적으로 영남권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비영남권에도 ‘경선불복’ 등을 이유로 이인제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이가 적지 않다. 비영남권에서의 이인제 비토는 ‘민주당 입당’보다는 ‘경선불복’과 ‘탈당’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H교수는 “이인제의원은 이 나라 기득권층(Establishment)의 강한 비토를 사고 있어(대통령 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경선불복과 탈당이라는 명분상의 문제 말고도 ‘안정’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DJ는 보수안정 이미지의 JP와 연대를 성사시켜 기득권층의 비토를 뚫고 나올 수 있었지만 이인제에게는 그와 같은 연대가 불가능하리라는 얘기다.

    민주당내에도, 비토까지는 아니라도 광범위한 지지유보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난 8·30경선에서 확인됐다.

    김중권(金重權) 김기재(金杞載) 등 영남권 후보들은 하나같이 이인제보다는 한화갑(韓和甲)최고위원과의 연대를 택했다. 게다가 한 최고위원이 56%를 득표한 반면 대권주자를 자처하는 이최고위원 득표율이 44%에 그친 것은,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회창 대항마’로서 이최고위원의 파괴력에 관해 아직 의구심을 가진 당원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동교동 신주류 가운데는 이최고위원에 대해 몇가지 이유를 들어 공공연히 ‘불가론’을 펴는 이도 있다. 대체적인 논지는 ▲이인제의 경선불복 딱지가 다음 대선에서 이회창의 병역비리보다 크게 먹힐 약점이라는 것과 ▲민주당 본류와 체질을 달리하고 개인적으로 튀는 성향의 이인제는 김대통령 임기말이나 집권 이후 김대중대통령을 위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할 사람이라는 것 등이다.

    이 가운데 ‘경선불복’ 문제는 특히 한나라당이 대(對) 이인제 제어전략으로 칼을 갈고 있는 타깃이다. 이회창총재의 한 측근은 “지난 대선 때는 이후보가 당선가능성이 없는 마이너 후보였기에 이 부분이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던 반면 민주당의 후보, 주요후보로 등장하게 되면 치밀한 검증을 받게 되어 커다란 감표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들이 지난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한 점도 정치신의와 기본적 룰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준이 엄격해졌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위원은 당 안팎에서 유포되고 있는 ‘이인제 불가론’에 적극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 이위원은 경선중이던 지난 8월19일 서울·경기북부 지역 합동연설회에서 ‘이인제 불가론’을 직접 거론하며 정면돌파 의지를 보였다.

    “그럼 이인제 말고 누구 또 있어?”

    이위원은 이른바‘제3후보론’과 마찬가지로‘이인제 불가론’ 역시 당내 일각에서 유력 대권주자인 자신을 흔들기 위해 제기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는 본래 ‘이인제만 상처내면 차기대선은 무혈입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측이 만들어낸 논리인데, 일부 당내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입지확보를 위해 이를 확산시키는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고 분개한다.

    이위원측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들며 “이회창에 대해 이인제만한 경쟁력을 보여주는 이가 누가 또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위원이 선대위원장으로 뛰었던 16대 총선에서도 민주당은 영남을 빼고는 전국에서 모두 한나라당을 이겼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총선 때 영남에서 민주당이 전멸한 것도 본질적으로 ‘반(反) 이인제’보다는 ‘반(反)김대중’정서 때문이라는 얘기다. 다음 대선은 DJ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전제로 치러지는 선거여서 지역대립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을 것이며 충청권은 JP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인제를 대표주자로 인식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여권의 예비주자군이 5~6명으로 분산돼 있는데도 이인제가 이회창을 이기는 판이라면 여권후보가 이인제로 압축되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셈법도 제시한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만 보고 ‘이인제는 안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권최고위원도, 현재 공식적으로는 이인제는 민주당의 여러 카드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인제 외에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다. 당안팎에 500만의 자기 표를 갖고 있는, 국민들로부터 검증된 인물은 이인제뿐이라는 것.

    박범진(朴範珍) 전의원은 “이인제가 이회창 대항마로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국민들의 평가를 당에서 외면하고 대안도 없이 자꾸 이인제를 상처내려는 것은 ‘이회창 대세론’ 확산에 일조하고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라는 미래를 짓밟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전의원은 YS정권시절 민주계의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주계는 어디까지나 YS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는데 자기들이 무슨 자생력이 있는 양 착각했다. 우리 당내 동교동계도 마찬가지다. 국민들 속에 뿌리박은 정치세력이 아니라 오직 DJ의 권력그늘 속에서 존재하는 것인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민주계도 현실적인 길을 모색했다면 오늘날 정치적 운명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즉 자기들은 뒤로 물러서서 DJ를 이길 후보에게 길을 내줬다면 오늘날 저렇게 지리멸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허망한 꿈을 꾸다가 결국 이회창에게 내쫓기는 망신을 당했다. 일부 민주계 중진은 자기가 집권해보겠다는 허망한 꿈을 꾸었다. 당내에서도 지지가 없는데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세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호가호위하다가 YS의 임기가 종을 치면서 잔치는 끝났다.”

    또한 이위원 측근들은 수치를 내세워 ‘이인제 불가론’을 반박한다.

    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한나라당의 지역감정을 앞세운 견제 속에서도 이인제는 영남지역에서 25%인 179만표를 얻었다는 얘기다. 이인제는 최소한 지난 대선에서 DJ가 이곳서 받았던 13%보다는 많은 표를 얻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위원의 한 측근은 “지금 영남에서 이인제를 폄하하는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이인제 위원을 소신껏 지지했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다”면서 “이 위원이 힘있는 여당후보가 되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영 민주당 제5사무부총장은 “차기 대선에서 이인제가 당의 후보가 되면 반 DJ정서보다는 후보 자체에 대한 정서가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면서 “그때는 더 이상 호남당 DJ당이 아니며 그림 자체도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위원측은 YS의 비토에 관해서도 역시 ‘이인제가 막상 대권후보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YS는 철저히 당선될 사람 쪽에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것이고 이 경우 현재의 막무가내식 비토와 달리 이회창과 이인제를 놓고 현실적인 득실을 여러모로 따진 끝에 결국 이인제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위원측에서는 이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자연스럽게 YS와 관계를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위원은 추석연휴기간인 9월11일 은밀히 상도동을 방문, 장시간 밀담을 나눴다. YS가 최근 고건 정몽준 이홍구 등 잠재적 대권주자로 불리는 이들과 이런저런 명분으로 상도동 면담을 가져온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위원과의 전격면담은, 그간 이위원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면박을 줘온 YS와의 관계에 비춰볼 때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대목.

    상도동 대변인 격인 박종웅의원(朴鍾雄·한나라당)은 “이인제가 완전히 민주당을 장악, DJ당 내지 호남당이 아닌 전혀 새로운 당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YS의 향후 태도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면서 “그렇지만 저 당과 DJ의 체질상 이인제가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된다 해도 호남과 DJ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아직 전제조건이 달려 있기는 하나 상도동과의 관계개선은 이인제의 콤플렉스라 할 수 있는 ‘경선불복’ ‘탈당’전력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강도를 완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이위원측의 기대다.

    하지만 이위원측의 바람처럼 ‘이인제 불가론’은 때가 되면 자연히 꺼질 거품에 불과한 것일까? 이위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 시각을 가진 인사들은 이위원이 ‘이인제 불가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은 내편’이라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 비토그룹에 파고들어 전국적 차원의 정치력과 비전을 보여주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산에서 만난 김동호씨(47·북구 구포동)의 말. “지난 총선 때 이인제선대위원장이 부산에 안 온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와서 사람들을 설득했어야죠. 이곳에서부터 발판을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죠. 자기가 뛰어서 뚫어야지 누가 대신 뛰어주겠습니까?”

    김영환의원(金榮煥·민주당)도 그동안 이최고위원이 영남의 벽을 뚫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이위원은 1등 여부가 아니라 영남대의원들을 설득해서 ‘이인제로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어야 한다. 그런데 ‘영남공략방안’에 대한 설득없이 대권론만 제기, 공허한 주장이 돼버렸다. 지난 총선 때도 영남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야 한다. 충청에서 몇석을 가져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렵더라도 ‘적지’를 뚫었어야 한다. 지금 우리 당이 무력감에 빠진 이유는 영남의 결집, 영남의 응고성 때문이다. 최고위원의 등수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당내 영향력은 대선승리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당내정치의 중요성과 호남불가론

    이위원캠프는 지난 경선을 자체 평가하면서 ‘일단 당내정치에 역량을 집중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위원측은 이를 위해 경선 당시 주력군 구실을 했던 충청권 및 국민신당 출신 의원 말고도 현역의원 다수를 ‘포섭’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기로 했다.

    외부에서 각계 전문가를 영입하는 일에도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위원측은 또한 지역구도를 뛰어넘는 선거전략 구사를 위해 통일, 정보화혁명 등 범국민적 이슈를 선점하는 한편 ‘가볍다’는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게 ‘덕치(德治)’ 이미지 구축에도 역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이위원측은 이와 함께 ‘호남불가론’의 확산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당내 최대 세력기반은 호남일지 몰라도 호남출신을 내세워서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게 호남불가론의 요지다. 호남출신인 권노갑최고위원도 이와 관련, 이위원측과 같은 견해다. 한위원이 동교동계 대표로 최고위원에 나간 것까지는 인정하더라도 대권은 안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호남이라는 소수지역에 기반을 둔 후보로는 현실의 지역구도상 누굴 내세워도 승산이 없다는 얘기다. 지난 대선 때와 같은 완벽한 DJP구도에다가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는 호남인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만에 하나 한최고위원이 당세만 믿고 ‘오버’하거나 호남출신의 다른 인물이 욕심을 낸다면 당의 분열만 초래되고 정권재창출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지난 경선에서 한최고위원을 지지한 김홍일(金弘一)의원도 ‘호남후보로는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인제 불가론’의 논리적 연장선상에는 ‘영남후보론’이 있다. 영남출신 후보만이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영남정서’에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내세우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꺾을 수 있다는 가설이다.

    노무현(盧武鉉) 캠프에서 부산지역 상주비서로 일하는 최인호씨는 현재의 부산정서를 ‘무대표 정서’라고 요약한다. 부산 경남은 차기와 관련, 선호하는 후보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지난 총선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도 37%를 얻는 등 나름대로 선전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예를 보건대 다음 대선에서 부산경남의 정서를 대변할 후보를 민주당이 내놓는다면 이회창에게 갈 표를 상당수 끌어올 수 있다는 논리다.

    “부산·경남·울산의 인구는 800만이고 유권자는 550만이다. 투표율을 75%로 가정할 경우 400만명이 투표하고 이인제가 이 가운데 10%를 득표하면 40만표다. 반면 민주당에서 이 지역에 어필할 후보를 내놔서 35%를 얻는다면 140만표다. 100만표 차이다. 이는 그냥 두면 그대로 이회창에게 갈 표다. 게다가 수도권의 영남출신표도 같은 흐름을 탈 것이다. 따라서 다음 대선후보는 누가 영남표를 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영남후보론

    최고위원경선에서 2위인 이인제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한 김중권(金重權)최고위원측도 “아직은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다”고 하면서도 영남주자론에 공감을 표시한다.

    반면 영남의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다른 시각을 보인다. 이석희 한나라당 부산시지부사무처장은 “부산에서 노무현씨가 올렸다는 37%의 득표율은 실체가 없는 허구”라고 반박했다. 지난 총선에서는 노무현후보가 여당후보에 대한 기대가 있는 북·강서을의 낙후된 농촌인접지역에서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그런 득표율이 나온 것일 뿐 그게 부산 일반의 정서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노장관의 한 측근은 “노무현은 부산의 어떤 선거에서도, DJ가 총재로 있는 당으로 나오면서도, 항상 36%이상 얻었다”고 반박했다. 더욱이 다음 대선은 DJ의 울타리를 벗어나 후보자신이 주체요, 변수가 되는 선거이기 때문에 ‘DJ당’ 소속이라서 받는 불이익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다.

    민주당 경북도지부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노무현이든 김중권이든 영남후보를 내면 분명 해당지역에서 득표율은 올라갈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그 후보가 과연 전국적 설득력을 가진 인물이냐가 고려돼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당의 대권후보는 무엇보다 김대중대통령의 의중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게 현실이다. 김대통령은 차기후보와 관련, 당 저변에 흐르고 있는 백가쟁명식 정권창출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김대통령은 먼저 정권 자체가 국정운영에 성공해 확고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김대통령이 차기와 관련하여 고려하는 첫째 요소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이를 위해 레임덕을 최대한 억제하고 남북문제 진전을 지렛대 삼아 금년 말까지 금융 기업 공공 노사 등 4대 부문 개혁을 마무리한 뒤 서서히 차기후계군의 경쟁과 검증을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대권논의는 2002년 1월 전당대회 한두 달 전부터 하면 된다”는 김대통령의 언급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이토록 느긋한 자세를 보이는 데에는 청와대측이 파악하고 있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잠재적 주자군에 대한 이총재의 비교우위가 그리 확고하지 못하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최근 모 여론조사 기관이 내부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회창 이인제 등 5명의 예비주자를 대상으로 한 대권지지도 조사에서는 이회창총재가 이인제위원을 2% 앞섰으나 단둘의 맞대결 구도에서는 이인제위원이 2~3%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차기 대권도전이 사실상 확정된 이총재가 아직 ‘One of Them’에 불과한 이인제를 따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들이 이총재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이총재 지지율은 한나라당 텃밭인 영남에서도 40%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수년간 정치지도자 위치에 있어왔지만 반DJ정서에 의존하는 외에 자신의 고정표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이인제위원이 당내경선을 앞두고 ‘대권론’을 쳐들고 다닌 시점도 이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무렵이다.

    이런 상황에 다음 대선에서 세대교체와 3김청산 등을 요구하는 ‘바꿔’열풍과 ‘21세기형 북풍’이랄 수 있는 남북관계 진전, DJ와 김정일의 노벨상 공동수상, 그리고 월드컵 바람까지 불 경우 이총재의 입지는 더욱 불리해진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여권의 비선라인에서는 최근 이와 같은 여건들을 검토한 끝에 차기 대선구도와 관련한 비밀보고서를 작성, 핵심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내년 8월까지 영남세력의 독자화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한화갑최고위원이 9월6일 ‘한나라당 양분론’ ‘제3세력 대두론’을 제기한 것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총재가 아직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영남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여권이 바라는 최상의 대선구도라 할 수 있다. 특히 민주산악회 재건 등으로 차기대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적극 준비하고 있는 YS측 움직임과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끄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이총재의 핵심측근은 “영남분열을 노리는 여권이 음모를 꾸미겠지만 이미 야권분열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영남사람들의 피해의식과 반여정서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여당이 이인제로도 확실한 승산이 안 보이고 달리 마땅한 주자도 내놓기 어려우니까 판 자체를 다시 짜보려 온갖 수단을 동원하려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부산의 중진 박관용(朴寬用)의원도 “민주당은 영남권에서 제3의 정치세력이 나오길 희망하겠지만 영남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이롭게 하는 그런 당은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이 썩 내키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의 영남권 의원들이나 비주류들이 탈당해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박의원은 “다만 이총재가 끝내 지도력 흡인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내부에서 다른 ‘대안론’이 힘을 받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바짝 엎드려서 달릴 때다”

    김대통령의 차기구도 관리와 관련한 둘째 핵심요소는 40년 정치인생의 산물인 동교동계를 임기후까지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고, 셋째 요소는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와 대결할 경우 승산이 높은 후보를 양성하는 일이다. ‘유지계승’과 ‘대선승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한화갑 이인제의 양대세력이 상호견제케 하는 세력균형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최고위원 경선결과는 이와 같은 DJ의 바람이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우선 동교동계의 차세대 간판으로 한화갑의원을 직접 만나 최고위원에 출마케 했다. 한위원이 1위를 한 것은 임기중반 이후 생길 수 있는 레임덕을 막고 당을 무난하게 관리·통제하려는 김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위원과 연대한 김중권 전청와대비서실장이 2위와 큰 차이가 없는 3위에 당선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다가 임명직 최고위원에 자리잡은 권노갑위원 역시 막후조정자 역할을 부여받고 있고 그의 지원에 힘입어 이인제위원이 ‘대권주자형 최고위원’으로 운신하고 있다. 결국 민주당의 그림은 철저히 김대통령의 구상대로 그려진 셈이다.

    김대통령은, 경선을 치르며 권노갑 당시 상임고문과 한화갑후보가 권고문의 이인제 지원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했을 때 침묵을 지켰다. 차기 민주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동교동 내부의 미묘한 갈등은 본질적으로 ‘동교동 유지’와 ‘대선승리’라는 두 축의 갈등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 쪽 편을 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인사는 “김대통령은 후계구도가 확정될 때까지는 특정인이 역할을 독점케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이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분할통치라는 김대통령 특유의 용인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인제불가론’이 아니라 ‘이인제 1등 불가론’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임기가 2년 반이나 남은 시점에 특정 대권주자가 ‘1등’으로 나서면 힘이 너무 쏠리고 국정운영이 안 되며 본인도 사방에서 견제받아 상처를 입고 말 것이다. 굳이 대권주자 1등 자리를 확인하려 서둘다가는 상처를 입게 된다. 지금은 내부에서 권력투쟁하거나 소모전을 펼 때가 아니다. 바싹 엎드려서 대권예비후보 중 상대적으로 앞서 달리다가 경선이라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1위로 올라서는, ‘아름다운 승부’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관심을 모으고 폭발력도 극대화할 수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이회창과 차기 경쟁력을 비교할 때 경제와 남북문제에 관한 식견이 중요해질 것”이라면서 “민주당 후보는 지금 그 경쟁력을 축적하는 일에 주력할 때”라고 말했다. 결정적 시기에 여권이 그동안의 성과물을 후보에게 몰아주면 일거에 후보의 무게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경쟁억지 전략이 반드시 성공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집권당 사상 처음으로 경선 구성된 당지도부인 최고위원들이 언제까지나 차기를 향한 경쟁을 인위적으로 억제당하고 있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최고위원 진영은 차기후보 가시화가 지연되는 데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레임덕은 안에서부터

    모 최고위원의 핵심측근은 “자꾸 레임덕을 걱정하는데 레임덕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 온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앨 고어 부통령이 일찌감치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부각됐지만 고어 때문에 클린턴대통령의 레임덕이 왔느냐는 식이다. 레임덕을 의식해 적절한 차기주자를 부각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임기말이 다가오면 필연적으로 관계 경제계 등에서 ‘다음은 누가 대통령이냐’를 살피게 돼 있으며 여당의 다음주자가 보이지 않으면 이회창총재 쪽에 확 붙어버릴 거라는 우려도 한다. 이른바 ‘대세론’의 위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측근의 말.

    “레임덕의 억제와 관리만 중요한가? 대통령이 관리하기 좋은 구도를 갖추었다고 해서 정권재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후보군이 여럿 생기면 솔직히 당내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한나라당 이회창총재에 맞서야 할 시기인데, 민심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선결과에 발목을 잡혀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진정 강한 여당이 뭔가. 호남색과 뿌리를 두텁게 한다고 강한 여당이 되나. 강한 여당은 정권창출 가능성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지금 그런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당이 무력해지고 밖에서도 집권당을 우습게 아는 거다.”

    또다른 최고위원은 “특정한 2인자를 좀처럼 키우지 않는 것은 김대통령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차기를 뛸 가능성이 있는 인사는 대표 총리 주요장관직 등에서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것 같다. YS만 해도 이회창 이수성 이홍구 김덕룡 최형우 등 차기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주요 포스트에 앉혀 검증받게 하고 국민에게 무게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당직마저도 전당대회 이후에도 철저히 동교동 가신들 위주로 유지했고 대표도 ‘관리형’인 서영훈 대표를 유임시켰다. 자꾸 레임덕을 걱정하는데, 정치학자들 중에는 임기말 레임덕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걱정하거나 인위적으로 막으려 애쓰기보다 적절히 활용·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소리들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국정운영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게 되면 차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김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으면 손해라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대통령이 현재까지 차기주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한마디로 “당과 국민에 헌신하고 이를 통해 당원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다. 과연 누가 이 기준에 합당하다고 인정받게 될지는 아직 의문부호로 남아 있다.

    다만 김대통령의 기준을 따르더라도 정부와 당의 관계, 대야관계, 정책관계에서 당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 몫을 해내는 것이 차기에 도전하려는 예비주자들 앞에 놓인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김대통령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그들의 문제해결 능력, 정치력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평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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