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과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모로 비교된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유감동 간통사건’에서 먼저 진상을 철저히 밝힌 후 정치적 융통성을 발휘해 수사를 적정선에서 중단시킨 것은 오늘날의 ‘X파일 사건’ 처리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 크다. 강력한 중앙집권제하에서 각부 대신의 재량권을 최대한 존중한 점은 대통령과 총리, 장관의 관계 설정을 곱씹어보게 한다. ‘국가에 필요한 자인가’를 유일한 인재 선발기준으로 삼은 것은 ‘코드 인사’의 문제점을 짚어보게 한다. ‘백성의 눈높이’와 ‘백성의 목소리’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민심과 동떨어진 ‘연정 파동’과 대조된다. 재상 허조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종의 국정 운영.
1427년(세종 9년) 8월17일에 황치신·김여달 등 5명의 ‘근각(根脚·조선시대 범죄자 기록표)’이 처음 확인됐을 때만 해도 이 사건은 그저 흔한 추문의 하나로 간주됐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녀가 쏟아낸 ‘간부(姦夫)’의 수가 불어났다. 그중에는 현직 재상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면서 조정은 긴장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 오른쪽의 사헌부 관청에 누가 들어가느냐가 세간의 큰 관심거리였다. ‘유감동 명부’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불려왔다. 자연히 그 건너편에 있는 이조(吏曹)에서도 누가 붙들려 가는지 주목하게 됐다.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는 내 직책(이조판서)상 조사 대상 인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자…
모두들 처음엔 딱 잡아떼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유감동 여인과 대질신문을 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그녀가 일시와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밀한 정황까지 소상히 설명하자, 피의자는 물론 조사관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제는 그녀가 여염집 정실부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가끔 한 명의 첩실을 두고 여러 사내가 다투거나, 기생 하나가 부자 형제와 관계를 해 문제가 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현직 관료의 정실부인이 수십명의 조신(朝臣)과 통간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처음엔 자신을 기생이라 속이기도 하고, 또 때론 아무개의 첩이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감현감 최중기의 아내라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조정의 많은 신료가 한 번 내지 수차례씩 그녀와 동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흘 후(20일)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등 9명의 명단이 추가로 공개됐다. 중앙군의 정예 당상관(정3품)들과 해주의 판관, 그리고 도성의 장인(匠人)과 상인 등 잡다한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 주로 무반계 인사들이었다. 숙부와 조카가 동시에 통간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열흘 후(30일) 또 새로운 명단이 확인됐다. 이번엔 과거에 갓 급제한 자로부터 의정부의 재상(宰相·종2품 이상의 관직자)에 이르기까지, 현직 관료에서부터 퇴임한 관료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신분의 이름이 나열됐다. 먼 지방으로 이미 파견 나간 수령도 많았다. 조사를 위해 그 수령들을 불러들일 것인지가 어전회의에서 제기됐다.
“이 여자를 더는 추국(推鞫)하지 마라. 이미 십수명의 간부가 나타났고, 또 재상까지 끼여 있으니 일의 대체(大體)가 벌써 다 이루어졌다.”(‘세종실록’ 9년 8월20일자, 이하는 ‘09/08/20’ 식으로 날짜만 표기함)
상(上)께서는 이 문제를 계속 수사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뒷사람의 감계(鑑戒·거울)”로 삼는 데서 얻는 이익보다 공직자의 도덕성이 실추됨으로써 오는 손실이 더 크다고 보신 것이다.
이조의 수장인 내 처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여러 재능 있고 덕망 높은 공직자가 이른바 ‘유감동 명부’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9월2일 새롭게 드러난 성달생의 경우 공조판서(정2품)이면서도 자신의 딸을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냄으로써 온 나라에서 “진신(縉紳·고위 관료)의 도리를 다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국만리 명나라 황제를 위해 가족을 궁녀로 보내야 하는 약소국의 처지가 개탄스러웠지만, “일이 외국과 관계돼 있어서 피할 수도 없는”(09/07/21) 연례행사였다.
1427년의 여름날 17세의 성달생의 딸이 자물쇠가 채워진 가마에 타고 건춘문을 출발할 때 부모 친척은 물론 구경하는 온 도성 사람들이 함께 울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09/07/20). 물론 할당된 공녀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조정의 고위 관료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두 차례나 누이를 공녀로 보낸 소경(少卿) 한확의 사례도 있었다. 어찌됐든 현직 재상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은 함께 끌려간 처녀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사면 이전의 죄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유감동 사건’ 연루자의 처벌 대상을 최소화하라는 주상 전하의 지시였다. 지지난해 극심한 가뭄이 들자 “혹시 형벌이 중도를 잃어 원통한 자의 탄식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07/06/23) 두렵다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셨는데, 그 사면 이전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쥐를 잡으려고 들었던 돌을 다시 내려놓는 것은 항아리가 깨질까 두려워서’라는 속담처럼, 상께서는 법규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지키고, 유능한 인재도 구해내신 것이다.
그런데 유감동의 조사과정을 보면서 내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단순한 색녀라면 욕정을 채우는 데 급급해야 하는데, 그녀는 동침한 상대의 이름과 관직까지 너무나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위 관료나 공신 가문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간통하면서 증거를 확보해두기까지 했다. 마치 무슨 보복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남편 불알을 끌어당겨 죽인 아내
사건이 마무리된 9월16일 이후에야 드러났지만, 그녀를 그 같은 ‘음부(淫婦)’로 만든 것은 기실 김여달이었다. 무안군수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갔다가 병을 치료(避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유감동을 집단 강간한 것이다. 조사결과 김여달은 어둔 밤에 무뢰배와 함께 거리를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을 핑계로 외진 구석으로 끌고가 저항하는 그녀를 위협해 밤새도록 희롱”(09/09/29)한 사실이 드러났다. 추측건대 그후부터 그녀는 작정하고 조정의 관료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녀자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자기 나름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 희생(?)당한 공직자들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지 50여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국가의 법제나 사회윤리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염집 부녀들의 성 윤리도 자리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관료들의 건전한 성 관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인들만 정조를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더러 강포한 짓을 자행”(09/09/04)하고 있으니, 풍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부부간의 큰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 말이 그것이다.
남편의 첩에게 똥과 오줌을 먹이다
사실 유감동 사건말고도 부녀자의 간통사건은 부지기수였다. 중과 간통하다 남편에게 들킨 영돈녕부사 이지(李枝)의 부인이 꾸짖는 남편을 그 자리에서 “불알을 끌어당겨 죽인” ‘이지 살인사건’(09/01/03), 친척을 포함한 뭇 남자와 간통한 사헌부 관리의 딸 동자(童子), 유부녀 금음동(金音同)과 양자부(楊自敷)의 연쇄 간통사건, 세자(나중의 문종)빈의 시녀와의 동성애사건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치정사건과 유감동 사건은 성격이 달랐다. 유감동 사건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때문에 주상께서도 기계적인 법 적용을 넘어서 정치적 재량권, 즉 ‘권도(權道)’를 발휘하신 것이다.
집현전 응교 권채의 ‘인간돼지사건’은 또 다른 사회문제였다. 이 사건은 형조판서가 우연히 발견했다. “모습은 사람 같은데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 비할 데 없는” 이상한 물체를 지고 가는 노비가 길을 가던 형조판서에게 발각돼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만약 그때 발견되지 않았으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형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권채는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그의 아내가 이를 질투해 덕금을 ‘인간 돼지’로 만들어버렸다. 즉 권채의 아내 정씨가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도망친 것을 붙잡아왔다”고 말하자, 권채는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에 가두라”고 했다.
정씨가 칼로 덕금의 목을 베려 하자 다른 여종 녹비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니 고통스럽게 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정씨는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해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다.” 하지만 덕금이 오줌과 똥 안의 구더기를 보고 먹으려 하지 않자 정씨는 “침으로 항문을 찔러 그 고통을 참지 못해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게 하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했다.”(09/08/24).
이 사건은 주상께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나는 권채를 안존(安存·안온하고 얌전함)하고 세밀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는가. 아마도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 같으니 끝까지 조사하라”(09/08/20). 권근의 조카로 가학(家學)을 전수한 덕에 학문적 식견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사로서 당신의 지우(知遇·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아서 잘 대접하는 것)를 입은 권채가 그럴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
법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법 제시
실제로 의금부에서 다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권채는 여종 덕금이 학대받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권채가 집현전 일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의 아내가 덕금을 학대했다는 진술이 남자 종과 또 다른 여종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권채와 그의 아내 사이에 진술이 엇갈리고, 결정적으로 여종 녹비와 덕금, 그리고 권채의 말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세 사람을 대질할 수도 없었다. 종이 주인을 고소하거나 그와 관련해 당국이 조사할 수 없게 만든 ‘부민고소금지법(剖民告訴禁止法)’ 때문이었다. 이 법은 사실 7년 전인 1420년(재위2) 내가 건의해 제정됐다. “근자에 들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일을 엿보다가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견되면” 참람하게 고소하는 일이 잦은 것을 보고, 나는 “아전이나 백성으로서 그 고을의 수령이나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의 죄를 논해서는 안 되며,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아랫사람은 보통의 죄보다 더 중하게 처벌받게 하는”(02/09/13) 법을 제안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대명률’에 의거해 “노비가 주인을 고발할 경우 거짓과 참을 묻지 않고 그 노비를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는”(03/12/26) 법규도 추가해 만들었다.
법이 이렇다 보니 의금부 관원들도 난처하게 됐다. 법조문이 사건의 진상을 가리는 것을 막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상께서 새로운 법 해석을 내놓으셨다. “권채의 일은 비록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노비가 스스로 고소(告訴)한 것이 아니고 국가에서 알고 추핵(推劾)한 것이니”(09/08/27) 이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탁월한 해석이었다. 기존 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잘잘못을 가려낼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이틀 후 보고된 수사결과에 따르면 권채가 덕금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은 “이 사람은 다만 글은 배웠어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합니다”라면서 권채의 몰염치를 비판했다. 권채를 그의 종들과 대질한 결과 애초에 형조에서 조사한 것처럼 덕금의 학대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형조판서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권채는 직첩(職牒·임명 사령서)을 회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됐으며, 그의 아내는 속전(贖錢·곤장 맞는 대신 내는 돈)을 내고 풀려났다(09/09/03).
이 판결에 대해 많은 사람이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고 말했다. 권채에 대한 처벌은 그렇다 치고, 그의 아내는 좀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신사(知申事) 정흠지나 내 생각은 달랐다. 다행히 여종 덕금이 아직 살아 있고, 역모와 관련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사대부집 부인을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국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권채의 문재(文才)를 아끼는 주상의 배려도 작용했다(권채는 곧 석방돼 집현전으로 복귀했다).
관리의 재량권과 백성의 고소권
나는 오히려 권채를 처벌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정 관원이 계집종을 학대했다고 해서 직첩을 회수하고 귀양을 보내면 “그로부터 강상(綱常·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의 문란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주상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계집종일지라도 이미 첩이 됐으면 마땅히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이며, 그 아내 또한 마땅히 가장의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인데, 그의 잔인 포학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09/09/04).
주상은 바로 그런 분이셨다. 상께서는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에 대해서도 마음 아파하셨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人君之職 代天理物)이다.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해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덕금이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셨다. 상께서는 모든 백성을 고르게 다스리려 하셨다. “진실로 차별 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09/08/29)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셨기에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으셨다. 즉 사회 기강을 위해 이미 제정된 법을 존중하되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펴주는 정치의 도리”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수령이 부민의 전답을 오판했는데도 그것을 고소하는 통로조차 막아버리면 장차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이 법을 다시 논의해보라고 하셨다(13/01/19).
그후 2년간 계속된 토론과 숙의 끝에 상께서는 “부민이나 아전의 무리가 자기의 위에 있는 관리를 고소할 수 없게 한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만약 자기의 원억(寃抑=寃屈·누명을 써서 마음에 맺히다)함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원억한 것을 풀 수 없어서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될 것이다. 그런데 그 고소로 인해 문득 오판의 죄를 처단한다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능범(陵犯)하는” 결과를 빚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황희, 맹사성 등의 동의를 얻은 다음 상께서는 내게 물으셨다. “자기의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만을 수리해 바른 대로 판결해줄 뿐이고, 관리의 오판을 처벌하는 일은 없게 해 존비(尊卑)의 분수를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하되, 관리의 재량권도 존중하는 절충안을 내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애초의 내 뜻과는 달랐다. 하지만 수년 동안 논의하면서 주상이 강조하시는 “아랫사람들의 뜻을 통하게 하는(通下情)” 정치의 도리(13/01/19)도 “상하의 분별(上下之分)”(10/07/13)이라는 나라의 기강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신이 원한 바는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하지 말아서 상하의 구분을 전일(專一)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지를 반포하신다면 거의 중용(中庸)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15/10/ 24)라고 말씀드렸다.
백성의 눈높이에서 정치 시작
솔직히 나는 주상과 달리 백성을 믿지 않는다. 상께서는 노상 “백성이 비록 어리석어 보이나 실로 신명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에서 시작되고,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된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03/09/07)고 해 백성의 눈높이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사를 결정하려 하셨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 백성은 대부분 신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공동의 삶이나 나라의 발전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앞의 ‘유감동 사건’만 해도 개인 차원의 ‘보복’ 탓에 얼마나 많은 유능한 공직자가 ‘희생’될 뻔했는가. 궁궐 안의 신문고를 마구 두들겨 호소한 민원도 태반은 거짓된 것이었다. 도성 안의 대로를 자꾸 침범해 집을 짓는 간특한 백성은(09/11/17)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참람하게 격고(擊鼓)하는 무리를 처벌하는 게 어떠냐고 여쭈어보았다. 하지만 상께서는 중국의 예를 들어 반대하셨다. 즉 “옛날 원나라에서 소송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소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중서성(中書省)을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뜻(下情)이 주달(奏達)되지 못해 마침내 대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명나라의 “태종 황제는 바로 대궐 안에 들어와 격고하게 하고 황제가 모두 친히 재결한다”(14/12/03)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대궐 안으로 뛰어들어와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신민에게 “황제가 잠깐 사이에 한마디 말로 재결”할 경우 잘못된 판결이 내려질 수도 있다. “어질고 착한 사람을 가려 맡겨서 그 시비를 가리게 한 다음 다시 대신과 더불어 그 옳고 그름을 재결하는 우리 조정의 방식”이 더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옆에 있던 신개도 “지존(至尊)으로서 친히 세세한 일을 재결하시는 것보다는 유사(有司·담당자)에게 맡기시는”(14/12/03) 것이 낫다고 말했다. 주상께서는 결국 우리의 말을 받아들여서 ‘망령된 고발과 잘못된 판결(妄告誤決)’은 율문에 따라 처벌케 하셨다.
지방 수령의 임기 논란
그렇다고 늘 주상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일치했다. ‘수령구임(久任)법’이 그랬다. 내가 이조판서가 된 지 1년 후인 1423년(재위 5년) 종래 30개월의 수령 임기를 60개월(육기제)로 늘리는 개혁이 단행됐다. 나는 전라도 완산의 판관으로 나갔을 때(1399) 수령의 잦은 교체가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태조 대왕께서 “2~3개월에 한 번씩 갈리던 고려말의 혼조”를 막기 위해 수령의 임기를 30개월로 정했지만 여전히 “구임하려는 본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창업과 내우외환의 와중에 필요한 인재를 임기가 만료되기도 전에 끌어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수성(守成)하는 즈음에 이르러 “예부터 내려온 양법(良法)”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이 주상과 내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당우(唐虞) 때처럼 9년을 임기로 하기에는 너무 길고, 송나라나 국초(國初)의 30개월은 너무 짧은 느낌이 있었다. 따라서 “그 중간인 5주년”, 즉 60개월을 근무하게 하는 것이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05/06/05).
그러나 육기제가 모두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 젊은 신료는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공론’(“혁파하려는 자가 10명 중 8, 9명”), ‘조종의 법제’(태조 때 이미 30개월로 정했음), 그리고 ‘수령의 가정문제’가 그것이다. 가장 주된 이유는 역시 세 번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의 신장 등 13인은 임기가 너무 긴 탓에 지방 관리들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고 상소했다. 즉 “각 도의 수령이 모두 합해 330여 명인데, 그 중에 아비는 남쪽에 있고 자식은 북쪽에 있어서 오랫동안 봉양하지 못한 자도 있으며, 아들이 크고 딸이 장성했어도 혼기를 놓친 자도”(07/06/27)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지방으로 내려가기를 꺼리는, 내려가더라도 곧 다시 올라오려는 관료들의 사사로운 동기가 그것이다. 용안(龍顔)에서 멀어지면 어심(御心)에서도 잊힐지 모른다는 관료들의 불안심리가 똬리 틀고 있었다. 거의 ‘말싸움’에 가까웠던 1440년(재위 22) 3월의 어전회의는 그 같은 불안심리를 잘 보여주었다.
그날 회의는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주상과 신료들이 모두 좌정해 있는데, 호조참판 고약해가 자리에 앉기를 피하면서 “소인”이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주상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전회의에서는 ‘소신’이 아닌 ‘소인’이라는 말 자체가 격에 맞지 않았다.
“큰 소리로 말하라.”
상께서 꾸짖듯이 말씀하셨다.
“소인이 오랫동안 천안(天顔)을 뵙지 못했으므로 일을 아뢰고자 했사오나 하지 못했습니다.”
고약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해로울 것이 없으니 우선 말하라.”
주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약해는 기다렸다는 듯 아뢰었다.
“소인의 충성이 부족해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신이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전하를 위해 말하려 하겠습니까.”
여전히 소인이라는 말을 고집했다.
“사사로운 동기로 법령 고쳐서야”
결국 육기법을 혁파하자는 말이었다. 고약해의 말은 계속됐다.
“육기의 법을 시행하면서부터 나라의 재물을 훔친 수령이 많아졌습니다. 또한 인신(人臣)이 6년 동안이나 밖에 있어, 조회에 참여할 수 없게 되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어찌 억울함이 없겠습니까.”
갑자기 옥음(玉音)이 높아졌다.
“신하는 군부에게 감히 망령되게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 수령으로서 범장(犯贓)한 자가 누구냐?”
성난 옥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약해가 불만을 터뜨렸다.
“경은 내 말을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감히 말하는가. 경은 끝까지 들으라.”
자제하시려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말씀을 이으셨다.
“외방의 수령을 열두어 고을째 지낸 자도 혹 있다. 경은 겨우 한 고을을 지내고서 그 싫어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된 것인가.”
고약해의 언성도 높아졌다.
세종조 재상 허조의 시문집인 ‘경암문집’.(고려대 도서관 소장)
그는 나아가 작심한 듯 말했다.
“신이 처음 육기의 법을 혁파할 것을 청했으나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셨고, 두 번째 청해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실로 유감이옵니다. 전하께오서 만약 성명(聖明)하지 않으시다면 신이 어찌 감히 조정에 벼슬하겠나이까.”
거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고약해의 말은 계속됐다.
“대간과 재상들이 다 좌우에 있사온데, 신이 어찌 감히 한 몸의 사정(私情)을 함부로 주상 앞에 진술하겠나이까. 이제 비단 불윤(不允)하실 뿐 아니옵고 도리어 신더러 그르다 하시오니, 신은 실로 실망했습니다.”
‘실망했다’면서 고약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상께서도 적잖이 당황하신 듯했다. “알아들었으니 다시 자리에 앉으라”고 하명하셨다(22/03/18).
그날 고약해의 태도는 내가 보아도 도를 넘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군신간의 대화가 아니었다. 국왕의 말 도중에 끼어들어 불만을 터뜨리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한 것은 분명 ‘불경(不敬)’의 선을 넘어선 태도였다. 하지만 상께서 노여워하시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었다. “고약해가 오늘 한 말은 틀림없이 후일을 의식하고 한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신하된 자는 진실로 험하고 편한 것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고약해는 다시 외직에 나가게 될 것을 꺼려 육기제 자체를 혁파하려 한다는 말씀이셨다.
“법령은 후세에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따라서 큰 폐해가 없다면 마땅히 준봉(遵奉)해 시행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만약 한 몸의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서둘러 뜯어고치려 한다면 그 고치는 것이 끝이 없을 것이다”(22/03/18).
사사로운 동기로 제도를 바꾸려 했을 때 어떤 폐해가 있는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하지만 고약해를 처벌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헌납 김길통이 말했듯이 고약해의 무례를 이유로 처벌한다면, 앞으로 누가 감히 진언(進言)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주상께서도 이 점을 의식하고 계셨는지 “내가 그를 탄핵하려고 하는데, 혹시 사람들이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나더러 간(諫)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까 염려된다”(22/03/18)고 말씀하셨다.
결국 ‘불경한 태도’만을 벌하기로 했다. “임금으로서 남의 속마음을 억측해서는 안 된다”(22/03/18)는 판단에 따라 고약해의 ‘사사로운 마음’ 부분은 문제삼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상께서는 마지막으로 황희 등의 의견을 들으신 다음 고약해를 파면했다(고약해는 다음해 5월에 다시 임용됐다).
정사를 대신에게 위임
상께서는 이처럼 대의에 맞고 백성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다 불가하다고 하는 것도 홀로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제하고 행”(26/07/23)하셨다. 그리고 관리들의 사사로운 언행에 대해서는 용안을 붉히면서까지 꾸짖으셨다. 결국 수령육기제는 이 같은 당신의 굳은 의지와 나의 적극적인 보좌 때문인지 점차 “관리들이 법 받들기를 삼갔으며” 급기야 “중외(中外·조정과 민간)가 다 편안하고 백성이 직업에 안심”(07/06/27) 하게 됐다.
‘어떤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나와 주상의 생각은 같았다. 앞에서 비록 상께서는 하정이 상달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나라 황제의 친정(親政)방식을 거론하셨지만, 기본적으로 당신은 위임정치를 선호하셨다.
즉위한 다음 해였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술상을 마련해 여섯 순배쯤 돌아갈 무렵 참찬 김점은 “앞으로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법도에 따라 정사를 하셔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명나라 영락제처럼 모든 정사를 친히 재결하는 방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중국의 제도는 본받을 것도 있고 본받지 못할 것도 있다”고 반대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김점은 얼굴에 노기를 띤 채로 “황제가 친히 죄수를 끌어내 자상히 심문하는 것을 신이 직접 보았습니다. 전하께서도 본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자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관(官)을 두어 직무를 분담했기 때문에 각기 맡은 바가 있사온데, 만약 임금이 친히 죄수를 결제하고 대소를 가리지 않는다면, 관을 두어서 무엇하오리까”라고 반박했다(01/01/11).
“신이 친히 뵈오니, 황제는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수 없이 놀라와 6부의 장관이 정사를 아뢰다 착오가 생기면, 즉시 금의(錦衣)의 위관(衛官·황제호위관)을 시켜 모자를 벗기고 끌어내립니다.” 김점의 국왕 친정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전하께서 온갖 정사를 친히 통찰하셔야 하옵고 신하에게 맡기시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지지 않고 “그렇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하며,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대신을 선택해 육조의 장으로 삼았다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워 성취토록 하실 것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해 신하의 할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황제처럼 6부 장관을 끌어내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신을 우대하고 작은 허물을 포용하는 것은 임금의 넓으신 도량이거늘, 이제 말 한마디의 착오로 대신을 욕보이며 조금도 두남두지(가엽게 여겨 도와줌) 않는다면 너무도 부당하다”(01/01/11)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끝까지 논의를 지켜보시던 상께서 나를 보고 빙긋이 웃으셨다. “대신에게 오로지 위임하고” 유능한 관료를 뽑아 맡길 때 국가가 번창한다는 것이 당신의 변함없는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공직자 권위 실추는 국가 신뢰도에 타격
사실 유능한 관료를 보호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범죄사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공직자의 목숨은 도마 위의 생선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평소 공직자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고 또 그들의 도움을 바란다. 요행히 그것이 수용되면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원망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느 공직자가 작은 뇌물사건에라도 연루되면 평소 좋아하던 모습을 싹 바꾸어버리곤 한다.
백성은 그렇다 치고 동료나 상관들의 태도는 어떤가. 그들은 혹여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두려워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 1408년 ‘목인해의 난’과 관련해 “종친 조대림(趙大臨)을 모해(謀害)한 허조를 잡아 가두라”는 태종 임금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가 그랬다. 의금부 관원의 모진 고문보다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바로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나는 조직 내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돼 있었다.
그때 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동료들의 진실한 한마디 말이었다. “허조의 원래 의도는 이랬다”는 말 한마디가 나를 살릴 수도 있었고 죽일 수도 있었다. 공자께서도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힌다(人能弘道)”(‘논어’ 위령공편)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좋은 사람이 있을 때 하늘의 도도 드러날 수 있듯이 훌륭한 공직자가 있을 때 비로소 좋은 정치도 가능한 법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현실적으로 한 명의 유능한 관료를 키우고 선발하기까지 들어간 비용은 도대체 얼마인가. 그리고 공직자의 권위가 실추되면 국가의 신뢰도는 어떻게 되며 국가를 믿을 수 없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국가가 붕괴된’ 고려 말의 혼돈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르며 살아야 했던가.
나는 사헌부 관료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하루는 잡단(雜端·지평, 정5품)으로서 일을 마치고 어둑어둑할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무리의 응방인(鷹房人·매 사냥을 주관하는 응방 소속의 관원)들과 마주쳤다. 마침 주상이 아끼시던 매를 잡아오는지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사헌부 소속 아전을 시켜 그들의 종을 잡아 가두었다. 같은 정5품 관직이라지만 내시부 소속의 응방인이 감히 사헌부 관리를 능멸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으신 태종 임금께서 나를 부르셨다.
“저희 사헌부는 왕명을 받들고 다니는데 이들 무리가 저희를 능멸했기 때문에 가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추궁하는 임금께 나는 강한 어조로 항변했다. 같은 사헌부의 전순 역시 “허조가 국가의 기강을 떨침으로써 왕명을 높였으니 그를 용서해줄 것”을 아뢰었다. “허조라는 한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옵니다. 왕명을 띤 사헌부 관원을 무시한 것은 곧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 만큼 오히려 응인을 벌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태종실록 01/01/25).
그날 태종께서는 나와 응방인을 다 같이 처벌하셨다. “응방인은 곧 내가 패를 준 자이니, 오히려 경들이 과인을 무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곧 부르셨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얻었다”면서 이조정랑으로 승진시켜주셨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태종 임금의 믿음을 얻게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국왕 개인’이 아닌 ‘왕명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우선성이며, 국가야말로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이 아니었을까.
인재를 귀히 여기고 정당히 대우해야
내가 10여 년 동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인사의 원칙도 바로 이 점이었다. 황희 등이 여기저기서 뽑아 올린 인재를 정밀하게 검증해보면 허물이 없는 인물은 없었다. 당장 정승인 황희 자신부터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그가 ‘국가에 필요한 공직자인가’를 따져보면 다른 결론이 나오곤 했다. 내가 낭관(郎官)들과 함께 “평론에 평론을 거듭”하고, “마침내 중의(衆議)에 합한”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중시한 인선의 원칙(21/12/28)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인사 원칙 때문에 나를 비난하는 말도 많았다. 주상께서 한번은 “경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를 임용한다고 하더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진실로 그 말씀과 같사옵니다. 만일 그 사람이 현명한 자라면 비록 신의 친척이라 할지라도 구애하지 않고 임용하고(如其賢也 雖親戚 臣不避嫌) 있사옵니다”(21/12/28)라고 말씀드렸다. 태종임금께서도 바로 이 점을 인정하셨는지 상왕으로 계실 때 주상께 “이 사람은 곧 나의 주춧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춧돌도 다듬고 아껴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돌도 방치하거나 잘게 쪼개 쓴다면 결코 그 구실을 할 수 없다. 반면 버려진 돌도 귀하게 여기고 다듬는 석공을 만나면 궁궐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인재를 귀하게 여기고 정당한 대우를 할 때 훌륭한 인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대우는 하지 않으면서 훌륭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씨 뿌리지 않고 열매가 맺히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429년(재위 11) 정월에 관리들의 지나친 시험단속을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 전날 성균관 입학시험을 목도한 나는 과시(科試)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시험 단속관들은 유생들을 마치 범죄 용의자 다루듯했다. 물론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을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비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동당(東堂·과거의 2차 시험(覆試))은 금령이 다소 엄하고, 감시(監試·성균관의 입학시험)는 다소 너그러운데, 어제는 책을 끼고 들어가는 것(挾書)을 너무 심하게 단속했다”(11/01/18). 몸수색까지 서슴지 않는 성균관 아전의 무례에 대한 나의 지적이었다.
선비란 자존심과 명예를 먹고 사는 존재다. 그들의 사기를 꺾기란 쉬워도 기개 있는 선비를 길러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선비들의 사기가 살아 있지 않으면 국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간쟁하고, 부패나 유혹으로부터 꿋꿋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관료를 찾기 힘들게 된다. 시험감독관은 바로 그 점을 놓치고 있었다.
상께서 문병차 사람을 보내오셨다. 동교(東郊·지금의 용두동)에 거동해 매 사냥을 구경하시고 환궁하는 길이라 했다. 나는 그에게 도승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한식경이나 지났을까 도승지 김돈이 급히 달려왔다. 주상께서 “허의정이 너를 보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아뢸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속히 가서 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늘 끝까지 신하 의견 경청
7월5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국무회의 도중 잠시 티타임을 갖고 국무위원들과 환담하고 있다.
“예전에 정명도(程明道·송나라의 정호) 선생도 죽을 때 자제들과 더불어 국사를 말하지 아니했다 합니다. 내가 포의(布衣·벼슬 없는 선비)로서 주상의 은혜를 입어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고,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마음에 한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살아서 다시 용안을 뵙지 못할 것 같아서 그대에게 나의 회포를 말해 올리려 합니다.”
점점 말하기조차 힘들어졌다. 하지만 말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지금 신하들은 다퉈가며 태평성대라고 말하나,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야인이 있고 동쪽으로 섬오랑캐가 있습니다. 만약 양쪽에서 일시에 난리가 나면 나라는 곧 위태로워집니다. 원컨대 이 말씀을 아뢰어서 변경을 더욱 튼튼히 하게 하소서”(21/12/25).
이제 숨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때로 역린(逆鱗·임금의 분노)을 자초하면서까지 주상의 뜻에 반대한 적도 많았다. 모두들 “가(可)하다”고 하는데도 내 주장을 관철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상께서는 “허조는 고집불통이야”(15/10/23)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상께서는 늘 끝까지 내 의견을 경청하셨고, 내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그 정책을 시행하셨다. 그야말로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다(諫行言聽)”(21/12/ 28).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번도 이 나라의 객(客)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국가 일을 내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自以國家之事爲己任)” 살아왔다.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 지금 나는 감히 “태평한 시대에 나서 호연히 홀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나의 조상들에게 있지 않았고, 또한 “나의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21/12/28). 그것은 바로 주상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