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양건 北 통일전선부장 “국제관광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도와달라”
-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에도 “금강산 내줄테니 조선에 투자해달라”고 제안
- “외국인이 금강산에 왜 가겠는가. 꿩 먹고, 알 먹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2월16일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이 ‘신동아’의 안테나에 포착된 때는 2월 하순이다. 김 통전부장은 현대그룹과 맺은 금강산 관광 관련 계약이 잘못됐다면서 국제관광단지로 금강산 지구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김 통전부장과 박 회장이 만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잔치 때다. 북한의 대남총책이 생일잔치가 끝난 뒤 77세의 노인을 따로 불러 김 위원장의 뜻을 전한 것이다.
박 회장은 한국GM(옛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 창업주의 부인으로 한국계 미국인. 북한에서 최고 영예로 여기는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문선명 통일교 총재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방북도 주선했다. 문 총재는 1991년, 김 회장은 1992년 김일성을 만났다. 금강산국제그룹은 현대그룹보다 먼저 북한과 금강산 관광 관련 계약을 맺은 곳이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성사된 후 북한은 박 회장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현대그룹과 손을 잡는다. 북한이 옛 파트너에게 손을 다시 내민 꼴이다.
박 회장은 김 통전부장에게 “알아보긴 하겠는데, 원산공항을 열지 않으면 외국인이 오지 않는다. 원산공항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산공항은 북한의 군사기지다. 한 대북소식통은 “북한이 금강산국제그룹과의 계약을 파기한 것은 현대그룹이 부른 액수가 워낙 커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옛 파트너를 다시 찾는다? 북한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게다가 박 회장은 북한이 국제관광단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최근 행태는 구걸에 가깝다”
북한은 4월8일 “현대그룹이 가진 금강산 관광 사업 독점권 효력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현대그룹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면서 1998년 체결한 남북경제협력합의서의 내용도 어긴 것이다. 북한은 억지 논리로 맞서고 있다. ‘노동신문’은 4월19일자에서 “남조선 당국은 그 무슨 합의 위반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조치 철회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다. 남조선 보수당국은 합의위반과 조치철회를 운운할 체면도 자격도 없다. 금강산 관광이 그 누구의 돈줄이 된다고 보고 그것을 자르기 위한 반공화국 책동의 일환이다”라고 논평했다.
북한 명승지개발총국은 “군사적으로 예민한 지역을 남측 관광을 위해 통째로 내주었다. 국제관례 운운하고 있지만 어느 일방이 합의서를 몇 개월만 리행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것이 일반적 관례다. 남조선 당국이 금강산 관광을 파탄시키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이 현대의 독점권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화국 민법 96조에는 당사자가 정해진 기간 안에 계약을 리행하지 않을 경우 상대편 당사자는 계약을 취소할 수 있으며 입은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밝혀져 있다. 우리의 조치는 사업당사자 간 및 북남 당국 간 합의에 위반되는 것이 없다”고 4월16일 발표한 상보에서 주장했다.
현대그룹이 독점권의 대가로 약속한 돈을 아직껏 완납하지 않았다는 게 북한 당국이 계약 파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이 독점권을 갖는 조건으로 당초에 북한에 주기로 한 돈은 9억4200만달러다. 당초 주기로 한 돈의 절반가량인 4억6000만달러가 북한으로 건너갔다. 현대그룹은 돈을 완납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관련해 2001년 계약 갱신을 통해 북한이 양해한 사안으로 그 같은 논리는 사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4월29일 “금강산을 국제관광특구로 만들겠다”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또한 현대그룹의 독점권을 뒷받침하던 ‘금강산 관광 특구 지정 정령’의 효력을 없앤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속내는 ‘금강산을 현대그룹이 아닌 다른 곳에도 팔아’ 달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최근 행태는 구걸에 가깝다”면서 “자연자원을 팔아 정권을 유지할 돈을 챙기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2월16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 대화하고 있다.
북한과 이집트는 오래된 동맹이다. 카이로 압딘 궁전에는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유화가 걸려 있다. 이집트 군사박물관엔 북한 작가들이 이집트-이스라엘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무바라크가 시민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후원자이던 그가 실각하면서 북한 이집트 관계가 소원해질 소지가 큰 것으로 내다본다. 소식통은 “오라스콤이 투자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안다. 주주가 존재하는 회사에서 돈이 되는 않는 곳에 투자를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현대그룹의 독점권을 취소하면서도 현대그룹과의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4월13일 친북 인사로 분류되는 J씨를 만나 현대그룹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현대아산과의 관계는 신의에 기초한 것이다. 장군님께서 정주영 회장, 정몽헌 회장, 현정은 회장을 얼마나 자주 만나주셨나. 우리는 현대아산과 맺은 관계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현대그룹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한다.” 4월22일 민주조선 논평에서도 “우리는 앞으로도 현대와의 신의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그간 보인 행태와 내놓은 주장을 살펴보면 북한의 의도는 ‘정권이 바뀌거나 대북 기조가 변경되면 현대그룹과 일을 계속하겠다’ ‘그럼에도 독점권을 취소하고 외국 관광객을 유치해 돈을 벌겠다’ ‘남측 관광객은 상황이 바뀌어 관광이 재개되면 현대가 계속 맡는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태도는 한마디로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북한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나 금강산이 의미가 있지, 외국인들이 금강산이 어느 곳에 붙어있는지 알기나 하겠는가. 물건의 가치도 모르면서 비싸게 팔겠다고 나선 꼴이다. 수요가 없는 상품이 팔리겠는가”라고 말했다.
지난해 금강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400명(한국계 외국인 제외)에 그치는 것으로 현대그룹은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싱가포르·중국인 등이 북한을 찾았다. 북한은 유럽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유럽인들도 금강산을 찾기는 한다. 북한 관광은 유럽에서 오지(奧地) 관광으로 취급받는다. 북한을 신기하게 여기는 모험심 많은 이들이나 찾는 곳이다. 금강산은 인도네시아 발리처럼 서구인의 입맛에 맞는 관광지가 아니다. 따라서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구상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한다. 7월1일부터 중국인의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도 금강산은 매력적인 관광지가 아니다.
“원산공항도 열기로 했다”
박경윤 회장은 4월15일 김일성 생일 때 북한을 다시 찾았다. 북한 통일전선부 관료가 평양의 박 회장 집을 찾아왔다. 박 회장은 평양에 요리사가 딸린 집을 갖고 있다. 김일성이 선물한 것이다. 북한 관료가 박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산공항 문을 열기로 했다. 결심이 섰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군사적 요충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젖히는 해’로 선포했다. 강성대국은커녕 국제사회에서 왕따로 추락한 게 북한의 현실이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자존심 세기로는 소문났던 북한이 전(全)방위로 구걸에 나선 것을 보면 내부 사정이 난처하고 딱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