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글쓰기로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온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흔히 ‘전투적 자유주의자’로 불린다. ‘강준만 현상’이란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과 그 글에 담긴 ‘도발적인’ 메시지(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를 둘러싼 ‘충격파’를 일컫는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마치 불온한 삐라처럼 지식인사회의 뒷골목에서 어슬렁거려 왔다.
우리 사회 ‘주류’의 언저리를 맴돌던 이 충격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장이 커졌고 마침내 학계 출판계 언론계 등 이른바 지식인사회의 몸통 한가운데를 꿰뚫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가 고발하는 ‘지식인의 위선’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올 들어 ‘당대비평’ ‘문화과학’ ‘문예중앙’ ‘문학과 사회’ ‘emerge 새천년’ 등 각종 계간지와 월간지들이 앞다퉈 ‘강준만 현상’을 분석하고 지식인들 사이에 ‘강준만식 글쓰기’의 미덕과 해악을 두고 불꽃 튀는 논쟁이 이는 것은 그가 10년 동안 벌여온 작업의 사회적 의미와 폭발성을 감안하면 뒤늦은 느낌마저 있다.
그가 일찍이 언론을 ‘카멜레온과 하이에나’로 규정하고 맹렬히 비난하지만 않았더라도 ‘강준만 현상’은 진작에 뒷골목에서 빠져나와 광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강교수는 그 동안 인터뷰 사절 방침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숱한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는 대신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 비쳐 왔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동아’ 인터뷰는 그의 첫 공식 인터뷰인 셈이다. ‘고립된 성채’에서 나와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 한가운데 선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사람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왜 분노를 잃었습니까!” 》
< 1부: 전사(戰士) 강준만 >
“아니, 진짜로 쳐들어오면 어떡합니까.”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강준만 교수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10월4일 오후 3시20분. 전북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 연구실. 강교수는 2시부터 시작한 한 시간 짜리 강의(국제커뮤니케이션)를 끝내고 연구실로 돌아와 한 학생과 상담을 막 마쳤다. 애초 인터뷰가 성사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평소 기자들에게 그 흔한 ‘전화 멘트’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 기피증을 보여온 강교수다. 신문방송학과 사무실에서 전화 받는 학생에 따르면 바로 얼마 전에도 일부 언론이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전주로 내려가기 며칠 전 그에게 팩스를 보냈다. ‘이번에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쳐들어갈 테니 가부간에 답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슬그머니 오기가 일었다. 무작정 찾아갈 결심을 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참 미치겠네요”
그에겐 놀랄 일이 한 가지 더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가 조금 전에 끝난 강의를 몰래 들었다고 하자 그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그는 강의시간에 국내 시사월간지들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강의 시작 10분 전 수강생으로 꾸미고 강의실 뒤쪽에 자리잡았던 기자는 하마터면 강교수를 몰라볼 뻔했다. 2시 정각이 되자 티셔츠 차림의 누군가가 들어와 교단에 섰는데, 그가 출석을 부르며 유인물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교수가 아닌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불청객을 연구실 안으로 들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기자는 강의 내용을 화제 삼아 그의 말문을 열려 했다. 그는 “강의를 듣고 있는 줄 알았다면 그런 얘기(시사월간지 비판)는 안 했을 것”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얼마 후 밖에 나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온 그는 담배를 물었다. 흐늘거리는 담배연기처럼 그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분 가까이 고민하던 그는 “참 미치겠네요”라는 말로 인터뷰에 응했다.
먼저 9월28일 방영된 MBC ‘100분 토론’에 대해 얘기하다가 몇 년 전 강교수가 모 방송사의 ‘인물초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일이 화제에 올랐다.
―‘100분 토론’이 끝난 후 그 프로그램 홈페이지의 ‘토론의 장’에 들어가 보니 하룻밤 새 1000건이 넘는 글이 올라와 있던데, ‘강준만 나와라’는 의견도 많더라고요. 예전에 TV에 한번 나가신 적이 있지요?
“그때 받은 항의가 ‘너 다시는 나가지 말라’였습니다. 그때 항의했던 독자들이 지금 제 발목을 잡는 거죠.”
―어떤 항의였어요?
“촌스럽고 우악스럽고. TV에는 전혀 적합지 않으니까 TV에 얼씬거릴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역효과가 난다는 거죠.”
―특별히 사투리를 쓰시는 건 아닌데.
“전라도 억양보다는, 제가 봐도 말할 때 차분하지 못하고 얼굴 근육이 움직이면서….”
―녹화해서 보셨어요?
“몇 번 봤죠. 그 전에도 TV에 여러 번 나간 적 있었거든요. 보면 전혀 안 어울려요. 예를 들어 ‘100분 토론’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없어서 안 나가는 거죠. 역효과 난다고 그러고. 활자 매체 체질로 갈 수밖에 없는 핑계가 되죠. 그게 얼마나 비극인데요.”
―‘100분 토론’을 보면서 저도 새삼 느꼈는데, 글 잘 쓰는 것과 토론 잘 하는 것은 별개 문제인 듯싶습니다.
“기대 수준이 높아서 그렇지 제가 보기엔 잘한 것 같던데요. 그리고 토론의 룰을 안 지켰다고 하는데, 룰이라는 건 상대적인 겁니다. 수준 이하의 발언이 나오는데 (룰을 지키는 게) 쉽지 않지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였어요. 오히려 진지해 보이잖아요? 능수능란하게 너스레 떨어가며 말발로 제압해달라는 이야기인데, 그건 엔터테인먼트죠.”
―사회자가 ‘왜 안티조선을 하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고 주문했는데, 그걸 차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던데요.
“그런 점도 있고, 또 많은 분들이 TV에서 그 문제를 거론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양면성이 있다고 봐요. 조선일보 홍보해주는 효과도 있거든요.”
배낭 메고 자전거 출퇴근
우리 나이로 올해 45세인 그가 교수가 된 것은 1989년이다. 그로부터 11년 동안 그는 단행본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비롯해 모두 75종(편역·공저 포함)의 책을 펴냈다. 1998년 5월 창간호가 나온 월간 ‘인물과 사상’ 시리즈(2000년 10월 현재 통권 30호)를 합하면 지난 11년 동안 연평균 10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낸 셈이다. 1998년 이후 월간 ‘인물과 사상’에 실은 글들을 재편집해 단행본으로 묶어낸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저술 활동이 국내 출판계에서 하나의 신화를 만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독서량 또한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글들을 보면 그가 국내에서 출간되는 웬만한 단행본과 각종 정기간행물을 샅샅이 훑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준만 교수를 떠올릴 때 사람들이 갖게 되는 궁금증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쓸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강의 준비는 언제 하고… 게다가 강연회도 많이 다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질이 떨어지죠. 요즘엔 강연은 안 해요.”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시는지?
“잠은 원없이 자요. 다만 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모두 그쪽 활동에 바치지요. 서울에 있으면 사실 이렇게 못 하죠. 만날 사람도 많고 참여해야 될 자리도 많을 테고. 서울에 있으면서 이렇게 미친 척할 수 있겠습니까. 지방에 있으니까 가능한 거죠.?p> ―주말에는 좀 쉬시나요?
“쉬지 못하죠.”
―취미생활은 거의 못하실 것 같은데요?
“등산하고 자전거를 타는데, 출퇴근을 자전거로 합니다. 아내는 자기 차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배낭 메고 자전거 타고 다니고.”
―건강은 어떻게 유지합니까?
“일주일에 산에 두 번씩 다녀요.”
―한 달에 원고를 얼마나 쓰세요?
“세어 보질 않아서 모르겠어요.”
―책 내는 속도나 양으로 보면 몇백 장은 쓰실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쓰죠.”
―상당히 많은 책을 읽으시는 것 같은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속독을 하게 되죠. 가벼운 책은 하루에 몇 권씩 읽을 수 있고. 요즘 파시즘과 관련된 책을 원서로 보는데 그건 한 이틀 걸리겠더라고요. 어저께도 그 책을 보다가 새벽 4, 5시경에 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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