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면 2 비자금 관련 의혹에 휩싸인 중견기업 B사. 불시에 검찰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걱정 없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이미 관련문서를 깨끗이 이중삭제했다. ‘얼마든지 찾아라, 어디든지 뒤져봐라.’ B사의 회계담당자는 피식 웃음까지 지으며 호기를 부렸다. 컴퓨터를 압수당한 지 몇 달 후, 삭제문서에 담긴 내용을 검찰이 낱낱이 꿰고 있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 장면 3 C의 범행을 입증할 유일한 증거물은 카세트테이프였다. 그러나 지직거리는 잡음 때문에 녹음 내용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용의자는 범행시점보다 한참 전에 녹음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녹음내용은 곧 만천하에 밝혀졌고, 시점에 대한 의문도 맥없이 풀렸다.
▼ 장면 4 모 기업의 대표 사무실에 폭발물이 배달됐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이라는 책 가운데를 파낸 공간에 얌전히, 그러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숨기고 들어앉은 폭탄.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누가 책을 놓고 갔는지 본 사람도 없다. “거 참 희한한 놈일세.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유일한 단서는 책 옆면에서 발견된 낙서자국. 그곳에 적어둔 이름을 사인펜으로 짙게 덧칠해 지운 흔적이었다. 얼마 뒤 경찰은 범인 D의 정체를 파악해 검거했다.
▼ 장면5 은밀하게 수표를 위조한 E. 130장을 만들어 사설 도박장에서 흥청망청 써버렸다. 물론 이서(裏書)는 하지 않았다. 위조수표를 확인한 은행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미 수많은 경로를 거친 수표라 지문감정은 불가능했다.
도박장에서 범인의 윤곽을 잡는 일은 장안에서 왕서방 찾는 격. 그러나 경찰은 금세 수표의 출처를 찾아냈다. 단서는 위조수표 속에 있었다.
수사기관이 이러한 사건들의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분야 과학수사팀의 활약 덕분이었다.
내 몸 안에 CCTV가 있다
A가 꼬리를 밟힌 것은 1ng(나노그램·10억분의 1g) 남짓한 침 때문. 수사관은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 몇 개를 수거해, 그 위에 말라붙어 있던 침의 DNA를 모두 분석했다. 피해여성의 몸에서 나온 증거물과 일치하는 DNA를 찾아내 범인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B사를 조사하던 검찰수사관은 파일 수만개의 배열방식과 저장시기를 조사한 결과, 파일을 삭제한 흔적이 있음을 직감했다. 복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덮어쓰기’에 의한 삭제. 그러나 파일을 기계어로 읽어내어 이를 유니코드로 변환하는 전문기술로 완벽하게 복구해냈다. 그렇게 복구된 파일 내용을 토대로 수사는 급진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