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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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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년 6월28일, 압록강 건넌 지 나흘 만에 연암(燕岩)의 마두는 천산(千山)산맥을 향해 달렸다. 통원보에서 장맛비에 발이 묶인 동안에도 연암의 눈과 귀는 청나라의 문물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고, 연산관에서 마운령·청석령·낭자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 고지를 넘어 마침내 일망무제 1200리 요동평원과 맞닥뜨렸을 때의 감격은 울음을 자극할 만했다. 허세욱 교수는 2006년 11월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펑청(鳳城)시에서 랴오양(遼陽)까지 주로 지방버스를 타고 연암의 뒤를 밟았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허세욱 교수가 뒤쫓을 연암 박지원의 연행도.

연암은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산맥에 막히고 강에 막히고 제왕과 사대(事大)에 가린 반도를 벗어나 대평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마운령, 청석령을 넘어 요동평원의 망망대해에서 요양(현대 표기법으론 ‘랴오양’)땅 ‘백탑’이라는 등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뿐만 아니다. 도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실학의 번영을 누리는 도시 성경(盛京)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거기에는 우리 겨레의 영욕(榮辱)이 서려 있다.

1780년 6월28일부터 7월9일까지 연암의 의식세계 지축을 흔들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요양의 백탑, 그 현신(現身)이었다. 그 표현조차 백탑의 의인화였다. “白塔現身謁矣”, 곧 “백탑이 몸을 드러내면서 알현하고 있습니다”이다. 그것은 연암이 7월8일, 정사(正使)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한 10여 리를 가서 막 산기슭을 돌아설 때, 마두인 태복이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정 진사와 연암께 아뢰는 말이었다. 한낱 하인의 말치고 시적이다. 백탑은 연암에게는 물론 요동평원을 오가는 모든 조선 사절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다. 연암의 그날 일기에 따르면 연암은 당장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손을 이마에 대고 감격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好哭場, 可以哭矣!”(울 만한 자리로구나! 한바탕 울어보자!)

첫째는 통원보(通遠堡)에서 연산관, 연산관에서 마운령·청석령·낭자산에 이르기까지 이틀이나 해발 1000m 고지를 넘으면서 고초를 겪다가 이제 비로소 일망무제 1200리 요동평원을 만난 감격이었다. 박목월이 ‘나그네’에서 읊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 같은 벌판은 어림없고, 이육사가 ‘광야’에서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하는 벌판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난생 처음 하늘과 땅이 맞붙어 우주의 공간을 나눌 수 없게 장엄한 광경을 보고 감격한 것이다.



감격의 순간이요, 해방의 현장

둘째, 연암은 자기의 위치에서 눈물과 정(情), 진(眞)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다시 간추려보았다. 당시 조선의 산악적인 지세와 국제적인 폐쇄성에서 막 탈출하는 격정은 눈물을 자아내게 했고, 눈물은 참과 정의 발로임을 강조하면서도 눈물은 단지 슬픔의 소산이 아니라 칠정(七情)이 사무칠 때면 울 수 있다고 했다. 그 지정(至情)에 이르렀을 때 웃고 우는 구분조차 무의미하다는 ‘칠정개곡(七情開哭)’론을 개진했음은 주목할 만하다. 연암은 울음의 자연발로, 곧 울음은 천둥소리라고 하면서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태 밖에서 이 천지의 광명을 처음으로 만날 때, 그 어둡고 비좁았던 어머니의 태반을 상기했을지 모른다. 동시에 조선반도를 뒤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셋째로 연암은 요동벌에서 산해관까지 1200리에 뻗은 창망한 들판, 곧 지평선의 시간적·공간적 영원의 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한 가지 낙으로 영입한 것이다. 그는 7월8일자 일기에 그러한 지점을 제시해놓았다.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곳, 황해도 장연의 금모래톱, 그리고 요동벌에서 바라보는 산해관…. 하늘 끝과 땅 끝이 풀로 붙인 듯 분간할 수 없는 곳, 천만년의 비바람이 만들어낸 창망이라 했다. 창망은 바로 영원한 시공(時空)의 얼굴이었다.

이러한 포인트는 ‘열하일기’ 군데군데에 산재한다. 7월15일 도착한 북진묘(北鎭廟)에서 다시 요동벌을 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끝도 가도 없어 해와 달이 지고 뜨고 비바람이 불고 개는 변화가 모두 모두 이 벌에서 벌어진다’고 전제하면서 강남이고 산동이고 세상 모든 땅덩이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겠지만, 다만 시력이 미치지 못한 것만 안타깝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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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연재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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