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 박 따지아나 씨(왼쪽)와 이 알렉세이 씨.
“아이들? 당연히 보고 싶죠. 하지만 너무도 고생했던 아픈 기억 탓에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조상의 고향인 한국에 정착하고 싶죠. 더 이상 유랑은 싫어요.”
박 씨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한국말이 서툴긴 해도 고려인 중에선 ‘유창한’ 편이기 때문. 국내 체류 고려인 중 열에 아홉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여긴다. 한국어라곤 단어 몇 개 아는 수준이거나 전혀 모르는 이도 많다. 고려인이 할 줄 아는 말은 대개 러시아어뿐. 강제이주로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이후 고려말 교습을 금지당한 탓이다.
‘국경 너머, 차별 너머’
고려인은 1863년 구한말 폭정과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 마을을 이룬 한인들의 후손. 일제 강점기였던 20세기 초반엔 망국의 한을 딛고 연해주를 독립운동 전초기지로 삼으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집단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18만여 명이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2만5000여 명이 숨지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교육 수준이 높고 강인하며 성실했던 이들은 한때 구소련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91년 구소련 붕괴 후엔 다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전역에 흩어져 살며 아직도 유랑을 거듭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다. 720여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 중에서도 지난한 역정을 지닌 이들의 수는 현재 50만 명을 헤아린다.
유랑이 멈추지 않는 건 CIS의 신생독립국들이 저마다 자민족 우선정책을 펼치는 탓에, 토착어가 서툴고 러시아어밖에 모르는 고려인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직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 게다가 물가마저 치솟아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고려인이 러시아행과 한국행을 택했다. 이렇듯, 수난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같은 민족임에도 고려인들이 한국 땅에서 영영 ‘이방인’에 속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에 온 뒤부터 자신이 ‘아기’가 된 기분이 든다고들 해요. 조선족과 달리 한국말을 못하니 불이익을 당해도 항변할 수 없고, 몸이 아파도 병원조차 혼자 못 찾아가죠. 언어 장벽으로 인해 주민세나 벌금 납부 방법조차 잘 모릅니다.”
땟골삼거리에 자리한 고려인 한글야학 ‘너머’의 김승력(46) 대표는 “비자 연장 등 체류 문제, 임금체불과 차별대우 등 노동 문제, 의료 문제, 주거 문제 등이 고려인들의 공통된 애로사항”이라고 말한다.
‘너머’는 고려인 동포 지원 시민모임. 명칭은 ‘국경 너머, 차별 너머’라는 뜻을 함축한 것. 2011년 5월 고려인을 위한 ‘사랑방’ 형태로 문을 연 이래, 땟골 고려인 규모가 한층 커진 지금까지 정부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힘겹게 모국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의 고충을 해소하려 애쓰고 있다.
김 대표를 포함한 상근자 4명과 자원활동가 10여 명이 힘을 보태는 ‘너머’의 주된 활동은 한글야학 운영, 출입국사무소 제출서류 지원과 비자, 월세계약, 은행 업무 등 생활민원 해결을 위한 통·번역 지원, ‘별별상담소’ 운영을 통한 노동문제 상담, 긴급 의료지원 및 구호, 모국 탐방여행 및 문화체험 운영 등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땟골에 고려인 쪽방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2004년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 개정 무렵부터다. 2007년 재중동포와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방문취업제’가 시행되면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땟골로 모여드는 고려인이 급격히 늘었다. 대부분 성인 혼자나 부부가 일자리를 찾아온 경우다. 낮밤 2교대로 일하는 고려인 중 상당수는 월세를 아끼려 2~3명이 쪽방 하나를 공동으로 쓰기도 한다.

오후 8시 이후면 땟골삼거리에서 출퇴근하는 고려인들이 승합차에 타고 내리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왼쪽) 고려인 한글야학 ‘너머’에서 면학에 몰두하는 고려인들.(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