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주의는 단순히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중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제3의 길’을 말한다. 한상진, 김우창, 정운찬, 최장집 교수 등은 그런 의미에서 ‘중도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에 앞서 이렇게 사설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소 모호한 ‘중도주의’라는 이념이야말로 현재 한국 지식사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조사는 없으나,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이념에 대한 의식조사를 한다면,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중도주의에 자신을 포함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이념은 위험한 것이며, 직접 드러내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중도주의적 자기정체성을 갖는 지식인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한편에서 중도주의란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절충하는 이념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회주의로 매도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중도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중도주의란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중간에 놓여 있는 이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간’이란 단순히 가운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것은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결합시키려는 이른바 ‘제3의 길’을 말한다. 최근 서구에서 쓰는 ‘적극적 중도(Active middle)’나 ‘급진적 중도(Radical middle)’는 바로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소박한 절충주의를 넘어 생산적 종합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과거 ‘제3의 길’ 프로그램이나 구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최근의 ‘제3의 길’이 이런 생산적 종합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중도주의 역시 탈이념을 표방하는 막연한 중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중도주의임을 밝혀둔다.
중도주의란 무엇인가
국내에서 중도주의의 역사는 일천한 수준이다. 이념적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김규식, 그리고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했던 조봉암 같은 중도주의의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에 비해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중도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주요 흐름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아무래도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6월 민주항쟁으로 열린 정치공간 속에서 ‘민주-반민주’의 구도가 서서히 ‘진보-중도-보수’로 변화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민주적 조합주의를 비롯해 서구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국내 지식인들의 활발한 논의는 중도주의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인들이 중도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까. 중도주의가 여전히 모호한 만큼 중도주의 지식인을 분류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중도주의는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까지, 그리고 자유주의에서 케인스주의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이에 필자는 자유주의, 민주적 조합주의, 케인스주의, 최근 ‘제3의 길’로서의 신사회민주주의 등을 우리사회에서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이념으로 보고, 이런 이념에 기초해 지적 활동을 벌여온 네 명의 지식인을 선정했다. 필자의 독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주변 사회학 전공 교수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참조했음을 밝혀 둔다.
한상진 교수는 현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러 주요 직책, 즉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등을 지냈거나 현재 맡고 있다. 한국지식인의 이념성향을 분석한 일본 가나가와대 윤건차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최장집 교수, 한상진 교수, 황태연 교수(동국대)를 꼽았지만, 현재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에서는 한교수가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교수는 아태평화재단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비교적 뚜렷해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사회학 전공자로서 한교수의 변신은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80년대까지 적어도 후학들에게는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교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이나 푸코의 사회이론은 진보적 경향의 흐름이었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교수의 학문적 성향이 한국 사회학의 주류인 보수주의와 친화성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눈카마스, 이제는 그만’
한교수는 1945년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났다. 197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에는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1979년 미국 남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이후 한교수는 귀국하지 않고 독일 빌레펠트대로 가서 1981년까지 연구교수를 지냈다. 그러다 1981년 귀국해 모교 사회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까지 그가 발표한 책은 적지 않은데,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1987), ‘한국사회와 관료적 권위주의’(1988), ‘중민 이론의 탐색’(1991) 등이 주요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는 ‘한국, 제3의 길을 찾아서’(1992), ‘눈카마스, 이제는 그만’(1992) 등의 시사평론집을 출간했으며, ‘제3세계 정치체제와 관료적 권위주의’(1984)에서 최근 ‘현대사회와 인권’(1998)에 이르기까지 사회학계의 관심을 불러모은 책들을 펴냈다.
필자는 학부시절부터 한교수를 지켜보았는데, 매우 경이로운 학자라는 인상을 품어왔다. 이 경이로움은 이중적인 것인데, 그 하나가 서구 사회이론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런 사회이론의 한국적 적용을 부단히 모색해 왔다는 점이다. 서양학문을 다루는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구 사회이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비해, 한교수는 최근 동양사상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서구 이론의 한국적 수용을 줄기차게 모색해왔다. 이런 한교수의 성향은 서구 학문의 일방적 추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비서구 사회에 살고 있는 사회과학자의 성실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교수의 지적 이력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학창시절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교수는 서울대 재학시 학생운동에 관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석사학위 논문도 학생운동에 관한 것이었으며, 운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그의 사회학적 지향을 실현가능한 이념의 모색으로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함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의 개인적 체험이 그의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유신독재 체제가 등장하기 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면서 저도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굉장히 많은 걸 면역시켜 줬다고 생각해요. 저는 체험을 통해 항상 주변과 가장자리에서 무엇인가 일어나서 움직이는 힘 못지않게, 사회의 중간에 있는 집단들이 특히 우리사회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것이 어떤 곤혹인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개인적 체험이 한교수에게는 적잖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시사평론집 제목이기도 한 ‘눈카마스’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만’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남미 군사정권의 반민주적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렬한 옹호는 한교수 사회학의 기본 저류(底流)다. 진보주의나 보수주의에 대비되는 중도주의의 주요 이념 가운데 하나가 자유주의라면, 이 글에서 다뤄지는 중도주의 사회과학자 가운데 한교수는 가장 자유주의에 가까운 이론가라 할 수 있다.
중민론, 그리고 ‘제3의 길’
한국 사회학계에서 한교수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소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이다. 아르헨티나 정치학자 오도넬이 제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의 기본 가정은, 기존의 민중정치가 사회불안을 조성하기 때문에 산업화가 심화되기 위해서는 민간 기술관료와 국내자본가, 국제자본가 세력이 쿠데타 동맹을 형성해 권위주의 체제를 성립시킨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 모델에 입각해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을 한국식 관료적 권위주의의 성립으로 분석해 학계 안팎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한교수는 한완상 교수(현 교육부총리·당시 서울대 교수),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와 중산층 논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중도주의 지식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인데, 한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교수는 이른바 중민론을 제창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중심의 변혁론과는 다른 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다. 중민론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다. 즉, 한국사회는 정당의 대표성과 신뢰성이 약하고 대의정치를 특징짓는 게임의 규칙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권과 사회운동의 역할분담 및 다양한 세력들 간의 민주적 연대가 매우 중요하다. 중민이라는 이름의 중산층은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개혁성향이 높기 때문에 민주주의 개혁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민론은 그 시각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아는 한 사회과학계에서 그 반향이 크지 않았다. 그것은 중민론이 기반한 중도주의 이념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우리 학문의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 학문은 절충주의보다는 확실한 견해를 선호하며, 특히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중산층을 중시하는 한교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한교수는 왕성한 학문적 활동에도 다소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교수의 매력은 이런 외로움을 이겨내면서 놀라운 열정으로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이론의 한국적 적합성을 탐구해 왔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서유럽 ‘제3의 길’에 대한 소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교수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주목할 것의 하나는 서구 사회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수용인데, 푸코 이외에도 하버마스와 기든스 이론을 국내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이 최근 다시 주목받은 이유는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와 그의 사부(師父)인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사회민주주의 갱신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제창했기 때문이다.
한교수는 세계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든스의 ‘제3의 길’을 박찬욱 교수(서울대)와 함께 번역하고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제3의 길’의 목표가 기존의 좌파와 우파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에 있는 한, 한교수의 사회학과 일맥상통한다. 더욱이 ‘제3의 길’은 ‘제1의 길’(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제2의 길’(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론’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한국 중산층의 이중성
한교수는 일찍이 그의 사회평론집 제목을 ‘한국, 제3의 길을 찾아서’라 붙인 바 있다. 한교수가 염두에 두었던 길이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라는 점에서 기든스의 ‘제3의 길’과 다소 다르지만,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장점을 적극 결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교수는 한국식 중도주의 사회학자의 전형이다. 그가 겪어온 삶과 사상적 여정은 보수적 사회학자의 길 내지 진보적 사회학자의 길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을 보여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양 학문으로서의 사회학과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한국현실간의 끝없는 긴장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이라 할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난 20년간 한교수는 언제나 진지하게 대면해 왔다. 한교수는 동년배 사회학자 가운데 하버마스와 푸코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이론에 가장 정통해 있으면서, 또한 현실 정치에 가장 깊게 발을 들여놓은 사회학자다. 아마도 이것은 1940년대에 태어난 이 땅의 사회학자가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이런 긴장을 잘 견뎌왔다고 해서 한교수의 사회학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주장처럼 과연 한국의 중산층이 그렇게 개혁지향적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히려 한국 중산층은 개혁지향적이면서도 보수지향적인 양면성을 보여왔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지향적인 성격이 더 두드러지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또 비서구사회 절충주의 지식인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과연 서구의 이론과 동양의 현실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중국의 이택후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의식을 짓눌렀던 이 질문에 대해 한교수는 여전히 대답을 유보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우리 후학의 몫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김우창 교수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 김우창 교수와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을 중도주의 지식인으로 분류해도 되느냐?”고 묻자 김교수는 웃으면서 “내가 중도주의에 속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필자가 김교수를 만나지 않은 이유는 다소 엉뚱하다. 김교수는 필자를 모르겠지만, 필자는 오랜 독자로서 그에 대해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1979년 대학교 1학년 때 종로 2가 양우당 책방에서 제목이 왠지 멋있게 생각되어 샀던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사회 분위기가 우울했던 유신정권 시절 감수성이 예민했던 열아홉살의 필자는 김교수의 책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책에서 다룬 한용운, 윤동주, 김수영, 신동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궁핍한 시대를 견뎌냈던 고독한 정신의 광채였으며, 지식인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필자는 김우창 교수 하면 이 책이 먼저 떠오르고, 김교수가 자신의 학문을 이런 정신사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정신주의가 이성주의와 동일한 의미라면, 필자가 보기에 김교수는 진정한 정신주의자, 또는 고독한 이성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인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따라서 그만큼 소중하다 할 것이다.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김우창 교수는 1937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 1954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1958년 졸업했다.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김교수는 1961년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서울대 등에서 가르치다 1968년 다시 하버드대에 유학, 1975년 문학을 전공, 철학과 경제사를 부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4년부터 고려대 영문학과에 자리를 잡았으며, 현재는 고려대 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그는 1965년 ‘청맥’지에 ‘엘리어트의 예’로 등단한 뒤, 1976년부터 ‘세계의 문학’을 편집하며,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 ‘지상의 척도’(1981), ‘문학의 비평’(1984), ‘시인의 보석’(1992) 등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한국 문학평론을 대표하는 저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 책들은 백낙청(서울대), 염무웅(영남대)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파’ 그룹이나 김병익, 김현 선생 등을 중심으로 한 ‘문지파’ 그룹과 구별되는, 김우창 교수 특유의 ‘이성주의 문학론’(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을 대변한다.
김교수 저작들이 여타의 문학평론가들과는 달리 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게도 크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문학평론을 넘어 사회비평으로 자신의 발언을 확장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1992), ‘법 없는 길’(1992), 그리고 ‘정치와 삶의 세계’(2000)등은 바로 이런 사회 에세이를 대표하는 저작들로 동시대 사회문제에 대한 폭넓고 섬세한 진단과 처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고려대의 젊은 교수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전공을 불문하고 김교수의 학문에 심취해 학부부터 그를 따르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에도 이른바 ‘김우창 사단’이 없다는 것을 보면, 그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이례적인 학자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김교수의 지적 여정을 간단히 압축한다면 그것은 ‘이성적 사회’를 향한 열망이다. 이 이성이야말로 그의 문학비평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다. 김교수에 따르면 소외, 공동체 파괴, 환경오염 등과 같은 현대사회의 부정적 결과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 생활세계 식민화의 결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이성을 배제한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성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의 만남
필자는 처음부터 인문학을 대표하는 중도주의자를 한 명 고른다면 그 사람은 의당 김우창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서구적 전통에서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이념은 자유주의이며, 이런 자유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왔던 대표적인 지식인이 김교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 사회에서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의 하나가 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의 빈곤’이라 할 수 있는데, 우파와 좌파 사이의 치열한 이념 대립 속에서 정작 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언제나 과소평가되어 왔다. 더욱이 자유주의를 자유만 일방적으로 특권화하려는 사이비 자유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유주의 하면 곧바로 개인주의 내지 무정부주의를 연상하는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물론 김교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자유주의 전통에 앞서 이성주의를 결합시키고 그 실현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른바 ‘이성적 자유주의자’다. 일찍이 1970년대 후반 김교수는, ‘인간역사의 방향은 민주주의이며 비민주적 통치체제는 미신과 신화 그리고 다른 권위적 상징들의 제도적인 조작에 기초해 있을 뿐’이라는 서늘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 사고가 당시의 민중민족문학론이나 운동권의 체제비판 논리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운동의 기반이 된 좌파적 이념과 그의 이성적 자유주의 이념이 일치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김교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와 그의 스승인 미학자 아도르노다. 아마도 하버마스와 아도르노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김교수의 사상적 거처가 있을 것 같다.
김교수가 이런 이성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1960년대 미국 유학생활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1959년에 시작된 그의 유학생활은 1961년에서 1967년 사이 국내 활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68년부터 1975년까지 길게 이어졌다. 미국 현대사에서 1960년대는 매우 이례적인 시기로 반전운동을 비롯해 인권, 평화, 여성운동이 활발했으며, 또 서유럽에서는 ‘68운동’ 이후 ‘뉴레프트(New Left)’ 사상의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