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관 거부, 그리고 데모. 속초 국제여객선 터미널 출국 수속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속초와 러시아 자루비노항을 오가는 동춘호의 주 고객인 따이공(보따리 무역상)들이 벌이는 시위다. 대체 동춘호 안팎에선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3박4일간 동춘호 따이공들과 함께 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니….
사흘 전인 12일에도 데모가 있었다. 바로 지난번 항차(航次)였다. 그날 나는 따이공으로 살아가는 친구를 만나러 속초 터미널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낮 12시쯤이면 입국하여 얼굴을 볼 수 있다기에 시간 맞추어 갔는데 저녁 7시가 넘어도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다. 따이공들이 세관의 통관대를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말이 데모지 구호를 외치거나 무얼 깨고 부수는 격렬 시위는 아니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통제구역 안에서의 무언의 저항이다.
그날(12일) 밤 8시 무렵까지는 대개의 따이공들이 곡물이며 물건 털리는 걸 감수하고 통관대를 통과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웃을 뿐 별수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하던 단 한 사람은 혼자가 되자 들고 왔던 술을 따서 마시고 사방에다 욕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세관 쪽에서는 공무집행 방해로 경찰을 부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동료들을 들여보내 데리고가도록 부탁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겨드랑이를 끌려 나가면서도 ×새끼를 찾았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좀 먹고 살자는 데 어째서 매번 죽이냐는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다리가 질질 끌린 채 세관 로비를 지나갔고, 목소리가 마당에서 점점 멀어질 때까지도 끈질기게 욕설을 사방에 퍼부어댔다.
그때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대체 동춘호 안팎에선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대체 따이공들은 어떤 애환을 품은 채 오늘도 배를 타는지 궁금했다. 당장 동춘호를 타보기로 했다.
늦어지는 스탠바이
선실에는 벌써 몇 군데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말띠’로 통하는 남자가 피 3점을 내고 주저없이 “고”를 했다. 초반이어서 ‘쓰리 고’ 확률이 높았다. 말띠는 “투 고”까지 불렀다. 나머지 선수들은 포기상태다. 내가 봐도 가망 없었다. 하지만 다음 선수가 비를 먹다가 쌌다. 선상의 화투는 비 띠를 쌍피로도 활용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 다음 선수가 흑싸리 쭉지를 때리고 넘긴 것이 다이아몬드고, 다시 히떡 패가 까진 것이 싸놓은 비였다. 일타 구피. 말띠는 투박한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내가 그 말띠한테 일찍 승선한 까닭을 물었다.
“우리야 뭐, 화투 치다가 내려가서 물건 넘기고, 자장면 하나 먹고 올라와 또 치고… 그 재미로 댕기지요. 아마추어니까.”
동춘 페리는 일주일에 세 번 한국의 속초항과 러시아의 자루비노항을 왕복하며 일요일 밤에만 속초에서 하루 정박하는 1만2000t급의 정기 국제여객선이다.
화투판 구경은 잠시고 나는 승선구 근처 창가에 서서 터미널 출구를 내려다보았다. 3시40분. 친구가 나타나야 했다. 나는 그쪽 길이 초행이므로 친구가 안내를 맞기로 했다.
“100명은 넘었나?”
“네… 겨우, 넘었습니다.”
승선구에 나와 있던 사무장이 사무사한테 현재 시각 승선인원을 물었다. 이미 예정된 출항 시각을 훨씬 넘기고 있어서 실무자들은 바빴다. 손에 들린 무전기에서는 연신 신호음이 삑삑거리고 소리 높은 음성들이 오갔다. 아마 사무장(이혁래씨)이 터미널 매표 담당자와 교신을 하는가 보다.
“인원, 적어도 할 수 없다. 응, 캡틴… 캡틴의 지시야. 늦어도 3시55분에는 스탠바이하여 4시에는… 응, 응….”
그게 마지노선이라는 거다. 4시를 넘기면 러시아 자루비노에 도착한 상인들이 중국 훈춘에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물었다.
“속력을 더 높이면 안돼요?”
“20노트 풀로 그래요. 자루비노까지 열여덟 시간, 항상 풀이죠.”
터미널 출구에서는 여전히 커다란 빈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한두 명씩 느릿느릿 나타나곤 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바쁠 것 없다는 걸음걸이다. 캡틴(선장)이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다는 55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그만인가 하면 나타나고 그만인가 하면 또 꾸역꾸역 나타났다.
“몇 명인가?”
“백 이십, 칠팔 명….”
“그럼 아직도 칠팔십 명이 안 나갔다는 계산인가?”
사무장과 사무사는 배 위에서도 훤히 꿰고 있었다. 관광객 몇 명, 따이공 몇 명, 그리고 배를 못타고 있는 사람 몇 명 등. 4시가 지나도 선장의 스탠바이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무선전화 앞에서 사무장만 쩔쩔 맬 뿐이다. 한 관광객이 늦어지는 출항에 대해 항의하자 사무장은 “저 분들은 배타는 게 직업입니다. 우린 매일 보니까 식구 같은데, 어찌 시간 됐다고 그냥 떠나겠어요” 하고 응대했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스탠바이! 올 스탠바이-”
4시10분.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이제 승강 사다리를 들어올리려고 난간을 접었다. 그때 터미널 출구에서 허겁지겁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난간은 다시 펴졌다. 폈던 난간을 접고 사다리를 한참 들어올렸을 때 또 고함소리부터 앞세우고 누군가 나타났다. 둘이다. 올라가던 사다리는 다시 내려와 시멘트 바닥에 긴 모가지를 박았다.
따이공들은 대개 선실에 자기 고정 자리를 정해두고 선반에 사물함까지 마련해놓았다. 갈아입을 겉옷이며 속옷, 세면도구, 화투장, 바둑판, 소주에 안주, 컵라면 따위들을 배 안에 두는 것이다. 배가 곧 집이며 한살림이 거기 있다.
2001년 광복절 오후에 출항한 동춘호에는 166명의 승객이 탔다. 이중 순수 관광객은 60명 정도일 것으로 실무자들은 파악했다. 그렇다면 따이공은 100여 명이며, 결국 통관거부로 인해 50명 정도가 승선하지 못한 것이다. 안내를 하기로 한 내 친구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배는 항구를 빠져나와 망망한 바다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짙은 구름이 낮게 내려와 펄럭이고 있어서 동해의 낙조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날씨였다.
“안내실에서 말씀 드립니다. 소무역 사장님들은 잠시후 회의가 있을 예정이오니 316호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선상 안내방송이었다. 내가 배낭을 내려놓고 고스톱 판을 구경하고 있는 큰 선실이 바로 316호실이었고, 따이공들은 스스로 자율위원회를 결성해 임원이며 회장을 뽑아놓고 있었다. 회의의 형식은 없었다. 선실 입구 쪽에 한 사나이가 나타나 주목을 요구했다.
“요즘, 에, 세관에서 우리를 계속 때려잡은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자율위원회장이었다. 그는 바로 며칠전 술에 취해 사방에다 욕설을 해대던 그 사나이다.
“문제는 비아그라였습니다. 속초 세관이 비아그라 공장이라는 소문이 났대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곡물은 단 한톨도 엑스레이를 통과시키지 않겠답니다.”
“그거야 핑계지. 약 안 가져왔다고 언제 곡물 왕창 내보내준 적 있냐고. 글코, 세관도 못 찾게 숨겨오는 약을 우리더러 우짜라꼬?”
회장의 말에 누군가 이유를 단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말했다.
“이건 주객이 전도된 거라구. 곡물이 안되니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댔을 거라구….”
“아, 거 말이시. 약 적발된 사람은 말이시. 영원히 배 탈 자격을 박탈하라고 당국에 건의하자 말이시….”
여기저기서 잠시 몇 가지 발언이 나온다. 회장이 정리에 들어갔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눈치를 보며 다음날을 기약합시다. 세관측에서는 가방을 두 개만 올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곡물은 기본외 20킬로까지는 봐주겠다고 약속받았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기본이 60kg이다. 거기서 한 톨도 더 안되는 줄 알았는데, 20kg을 더하면 80kg…. 따이공들은 수긍하는 눈치다. 회장은 이 약속에 마무리 못질을 했다.
“그러니까, 가방 두 개에 20킬로… 앞으로 2∼3주간은 이대로 나가는 겁니다. 됐습니까?”
돈 안되는 돈벌이
따이공들은 박수를 친다. 회의는 이로써 끝이다.
곡물 80kg면 적자는 면하는 걸까. 나는 말띠라 불리는 따이공한테 물었다. 그는 광도 못 팔고 판에서 죽어 있었다.
“이거(따이공), 해볼라 그러쇼? 내가 계산 해드리리까?”
그는 심심한데 잘 됐다는 표정으로 큰 몸집을 일으켜 사물함에서 전자계산기와 볼펜을 찾아왔다. 사이 시간에 배는 얼마나 탔느냐고 물으니 이번이 꼭 10항차째라고 했다.
“이거, 한번 보시라고….”
그는 큰 덩치를 구부려 바닥에 널브러졌던 스포츠신문을 끌어당기더니 한 가지한 가지 적고 계산을 했다. 고추가 마진이 좋기는 한데 20kg 이상은 통관이 안된다는 거다. 그래서 기본 60kg에는 찹쌀과 흑미를 같은 비율로 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차고 들어올 수 있는 20kg에서 고추와 찹쌀을 반반으로 잡고 계산을 했다. 중국쪽 원가는 인민폐고 한국의 판매가는 원화여서 계산법이 복잡했다. 하여간 그의 계산기에 찍힌 숫자는 22만원이었다.
“여기에다 참기름 한 통 들어주면 1만5000원 플러스, 또 발렌타인 두 병이면 1만4000원 플러스, 그리고 디스 담배 한 보루 3000원…. 이러면 에, 25만2000원. 이게 기본이에요.”
일반인은 왕복 선박요금이 26만5000원이다. 결국 80kg을 차고 들어와도 배 삯이 안된다는 계산이다. 말띠 따이공과 나는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깡통 맥주를 몇 개 샀다.
“적자가 뻔한데 이것만 가져갈 겁니까?”
“내 덩치를 보쇼. 몸무게만큼은 들고 나가야지 원. 일단 차고 나가다 뺏기더라도 95킬로는 돼야 덩칫값을 하는 거 아니겠소.”
“약속된 거 같은데, 그게 통과됩니까?”
“봐 달라고 통사정해야지 뭐. 내가 불쌍하게 생겼잖아요? 덩치는 이만한 게 해 먹을 짓이 없어서 이짓 하는데, 지네(세관원)들이 봐도 불쌍해 보일 거 아닙니까?”
지난 9항차 동안 털리기도 하고 더 차고 나가기도 해서 결국 돈을 번 것도 없지만 적자가 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배에서 먹고 자고, 감옥에서 사는 것처럼 시간만 보내고 있다고.
“나는 이나마 혼자 입이라도 먹고 자고 고스톱이라도 치니 다행인 거요. 속초에는 지금 명태가 안 잡힌 후로는 학생들의 40% 가량이 공납금을 못 내고 있어요. 이나마 배를 타보려고 해도 밑천 없어 못 타는 사람이 수두룩해요. 원, 정치를 ×으로 하는 것인지… 이거, 먹고 살 수가 있어야지.”
그는 맥주 한모금을 마셔서 그런지 혈색이 돌았다. 전에는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일까.
“아, 옛 시절은 항상 좋았던 법이지요. 나도 그땐 대위, 공수대위였으니까 끗발 좋았지. 청와대에도 있었고 일해재단에도 있었지만, 거, 부산 모방송국 파견대장으로 나가 있을 때가 재미는 좋았지. 연예인들하고 놀고, 문주란이한테 노래도 시키고….”
“문주란씨도?”
“연예인들은 신분증을 안 가지고 다닌다고. 얼굴이 명함이니까. 우리도 다 알지. 하지만 심심하니까 부하가 잡아왔더라고…. 진짜 문주란이면 ‘동숙의 노래’를 불러보라니까 그냥 부르데. 한 20번은 시켰지. 심심하니까.”
왕년이 좋았다면 현재는 고달프다는 이야기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만난 최현대(가명·45)씨 경우도 그랬다.
“저는 전주 현대자동차 조립라인의 반장이었어요. 거긴 상용자동차 생산공장이죠. 월급만 200만원 되고, 연말에는 보너스가 한 400만∼500만원 나왔으니 돈 아쉬운 줄은 몰랐죠. 거기다 아내가 식당을 운영했으니까. 하여간 좋은 시절이었어요. 그때가 천국이었지. 하지만 아이엠에프 바람을 맞고 감원으로 쫓겨나자 상황은 돌변합디다….”
그는 가족을 떠나 몇 군데 공사판을 전전하다 형이 살고 있는 속초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배타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돈은 좀 벌려요?”
내 질문에 최현대씨는 웃기부터 한다.
“작년 7월에 100만원 밑천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도 100만원입니다. 따이공 해서 무슨 떼돈이 벌릴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고 왕창 까질 것도 없고… 그럭저럭 연명만 하지요. 그나마 형이 속초에 있으니 비자 경신할 때 버티는데, 배에서 내려 보름 동안 생돈 쓰며 놀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때 밑천 다 털어먹어요. 늘 보던 사람이 한동안 안 보이면, 음, 끝났구나… 그리 생각하지요.”
“까질 거 없다지만, 나는 지난 두 번의 항차에서만 30만원 날렸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양길수(40·서울 효창동)씨였다. 그 말에 최씨는 갸웃한다.
“뭘로 그렇게 까졌어요?”
“발렌타인 네 병 차고 나가다 두 병 뺏기고, 고추 25킬로 털렸다고. 지난 항차에서 그거 보충하려고 또 그렇게 찼는데, 다 뺏겼어….”
“저승사자한테 계속 걸렸구먼.”
“미치겠어.”
양길수씨는 동포여성과의 결혼 관계로 중국을 드나들다 따이공이 된 경우다. 그의 아내는 불법체류로 한국의 식당에서 6년 일하던 사람이고, 식당에 드나들다 알게 된 양씨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였다. 정식 결혼을 위해 중국에 돌아간 그녀는 서류상 모든 절차가 끝이 났지만 한국으로의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불법체류 경력자는 3년간 한국 입국을 거부한다는 조치 때문이다.
“중국의 처가에 있으면 돈이 안 든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협소한 집에서 여러 달씩 눌러 있을 수도 없고, 속초에 내려 서울 오가자니 경비만 깨지고… 요샌 마땅히 내릴 곳도 없어요.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돈만 안 깨지면 그럭저럭 배에서 지내다 한국에서 보자면 한국서 내리고 중국서 보자면 중국서 내리고… 그랬으면 좋은데, 요샌 워낙 때려잡으니까, 어째야 할지 마땅히 쉴 곳이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린다.
사위는 칠흑이었다. 별빛도, 달빛 한점도 없다. 선수에 헤드라이트도 없다. 온통 어둠뿐인 적막한 밤을 헤치며 동춘호는 외로움을 견디고 있다. 먼바다를 다녀온 배에는 알지 못할 연민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아마도 그건 외로운 항해의 흔적이리라. 속초항을 벗어나고부터 더불어 바다에 함께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섬도, 조업하는 선박도 없었고 갈매기조차 날지 않았다. 고독한 밤이 가고 새아침이 밝아도 달라진 건 없었다.
세면도 하는 둥 마는 둥이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지난 저녁, 식당에서는 79명이 식사를 했다. 166명의 승객 중 관광객이 60명임을 감안하면 식당에서 밥을 먹은 따이공은 몇 안된다는 계산이다. 아침도 그랬다. 컵라면이나 다른 무엇으로 대충 때우고 하선 준비를 하는 거였다.
동동걸음하는 사람들
자루비노항은 퍽이나 한가로웠다. 말이 러시아 땅이지 두만강 하구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작은 포구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으므로 따이공들은 바빴다. 자루비노에서 러시아 입국 수속을 마치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훈춘시까지는 2시간 가량이 걸린다. 러시아의 출국과 중국의 입국 수속을 해야 하고 곡물을 사서 다시 출국과 입국 수속을 두 나라에 걸쳐 한 후 배를 다시 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그래서 배에서 내린 따이공들은 후줄그레한 항구를 뛰듯이 빠져나간다. 하지만 바쁜 건 따이공 마음일 뿐 러시아쪽 사람들은 느긋하다.
“쟤네들은 우리가 동동걸음 치는 걸 이해 못해요. 시간만 때우면 되는 게 사회주의 국가니까 종일 담배나 물고 느릿느릿 만고강산이죠.”
절차랄 것도 없는 러시아 입국 수속에서 30분이 소요되었다. 러시아 비자는 단순한 통과비자다. 배에서 내려 대기한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하고 단체로 출국한다. 그런데도 느린 동작으로 일일이 여권의 글씨들을 모조리 읽고 인물의 관상을 훑어보는 것이다.
자루비노 버스에 자율회장과 같이 앉았다. 우리들이 탄 두번째 버스는 서울 근교를 운행하던 고물차였다. 세곡동과 상대원 사이의 버스 정류장 안내판이 운전석 앞 유리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버스가 호박넝쿨을 감고 있는 항구 언덕배기의 오래된 목조 가옥을 돌아들자 눈앞에 초원이 펼쳐졌다. 비포장 도로다. 시야엔 집도 절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국 국경까지 이런 식입니다. 여기가 연해주죠. 여기 살던 조선족을 몽땅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광활한 이 지역이 이렇게 버려져 있지요.”
“여기는 언제부터 다녔습니까?”
“동춘호가 작년 5월28일에 첫 출항을 했는데, 그날부터 쭈욱이죠.”
“그전에도 배를 탔어요?”
“한 7년? 인천서 쭉 타다가 이쪽 항로가 새로 생긴다기에 왔다가는, 지금까지 못 빠져나가고 있죠.”
이야기가 따이공 쪽으로 흘러왔다. 우리는 자연히 따이공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이 바닥 이름이 ‘신관장’이란다. 47세라고 했다. 서울 경동시장 근처에서 태권도 체육관을 하다가 ‘역마살’이 발동해 배를 탔단다. 따이공의 어원을 물어보자 중국말로는 ‘짐 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영어의 포터(porter)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지난 일요일, 세관에서 꼬장 한판 벌이던데, 이유가 뭐였어요?”
“아, 그거?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그걸 봤군요.”
“어땠어요 그날?”
“한 2주째 계속 (세관이) 죽이고 있어요. 그날 88킬로 차고 들어갔는데 44킬로 털렸어요. 고추를 좀더 찼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죽이자는 겁니다. 심했어요. 우선 따이공이 살아야 동춘항운도 살고 세관원들도 자리 보존을 하는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쪽의 곡물상들과 그 식구들, 중국쪽 곡물상들 그 식솔들…, 그 물량은 미미하다고는 하지만 러시아와 한국 사이의 국제운송 관계로 맺어지고 있는 국가관의 이해관계, 뭐 이런 것들이 얽혀 있어요. 따이공이 배 안 타면 동춘호 운항정지할 거고, 세관 문 닫을 거고, 중국 동부를 여행하는 백두산 관광객이나 흑룡강쪽 여행객들도 인천항구나 공항으로 편중될 거고, 이게 뻔한데도 우릴 죽이려 드니 답답할 노릇이죠.”
신관장은 열 받은 듯 소리 높여 말을 잇는다.
“아이엠에프 이후 대통령도 따이공을 직업으로 인정했어요. 그러자면 수익을 최소 공공근로자만큼은 보장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안되니 먹고는 살아야 하므로 비아그라다, 로렉스다, 그런 위험한 물건에도 손을 대는 겁니다.”
“정부에서는 자국 농민보호도 해야 하는 입장 아니겠어요?”
“아니오. 우리는 도리어 정부의 물가억제 정책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봐요. 왜냐 하면 우리가 들고오는 농산물은 전부 국내 생산량이 절대 부족한 곡물들입니다. 참깨나 찹쌀 같은 건 국내 생산이 소비량의 10% 미만일 것이고 고추 역시 40% 미만일 겁니다. 수효부족으로 값이 천정부지로 뛴다고 해서 그게 농민들 몫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까? 천만에 말씀, 값이 뛸 때는 그 물건이 이미 농민들 손을 떠났을 땝니다. 이런 현상은 대형 무역업자들의 떼돈벌이 기회일 뿐입니다.”
초원의 수풀 속에 작은 마을 하나가 엎드려 있다. 낡은 손수레에 시커먼 때 얼룩이 잔뜩 엉긴 우유통을 싣고 가던 배불뚝이 남자가 버스를 쳐다보며 소처럼 웃었다. 인적은 드물었다. 허물어지고 있는 벽돌집들, 수풀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는 빈 트럭 몇 대…. 한 시간 만에 나타난 마을치고는 너무 맥빠진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 빈 길을 그만큼 달리자 국경초소다. 철망으로 길을 막은 저편에는 벽돌 원두막 하나가 나른하게 졸고 있었다. 그 그늘에 모여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네 명의 병사들. 뒤꼭지로 올려 쓴 모자와 목에서 세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친 군복 윗도리, 오뉴월인데도 무릎까지 차는 해어지고 헐렁한 장화, 초소의 러시아 병사들은 이제 막 목장에서 소똥을 치우다가 비상호출로 달려온 듯했다.
훈춘시. 나로선 외국 도시가 처음이다. 한국어 간판들, 초라한 상점들,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 1970년대 서울 변두리 동네거나 어느 지방 도시의 사진을 보는 기분이다. 아니 시간을 역류해 그 시절로 되돌아간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입국장에서 바로 되돌아 출국 준비를 하는 따이공들과 헤어져 훈춘 시내로 들어왔다. 조선족 택시 운전사는 따이공들이 중국에서 머물 때 주로 숙박한다는 국제무역을 알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만난 부사장 김영성씨의 설명에 의하면, 국제무역은 한국의 오피스텔 개념으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동춘호 개항 후 사무실과 상점 용도로 쓰이던 10층짜리 이 건물을 사들여 처음에는 3층에만 객실 12실을 들여 오픈한 후, 현재는 7층까지 공사를 완공하였고 8층 이상은 지금도 객실 공사를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1박 요금이 인민폐 70원(한화 약 1만1300원). 식사 한끼가 제공된다. 한국의 허름한 장급여관 시설 정도지만 냉장고는 없다. 나는 다음 항차 배를 타려면 2박을 해야 한다.
국제무역 건물 주위로는 무역상사 간판을 단 올망졸망한 점포들이 모여 있다. 구경 삼아 ‘대양무역’이라는 한 점포로 들어가자 좋은 햇고추가 있다며 자루에서 한 줌 꺼내 보인다. 한국 고추와 외양이 비슷한 것이 때깔이 아주 그만이다. 값을 물었더니 1kg에 18원(한화 3000원 정도)이란다. 1근이면 얼만가? 대충 계산해도 2000원이 못된다. 참 싸다. 그런데 이 값도 실은 바가지란다. 국제무역 건물 6층에 번듯한 사무실을 내고 있는 진용무역의 진사장은 1kg에 10원이면 산지에서 최상품으로 골라 살 수 있단다.
“10원짜리 고추가 한 단계 거치면서 80%나 뛰는 것은 이곳 곡물상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에요. 현재 움직이는 따이공이 150명 정도인데, 이곳 곡물상회가 대략 50군데는 될 겁니다. 평균 한 곡물상회에 3명의 따이공이 돌아간다는 얘긴데, 이러니 안 비싸겠어요?”
따이공들이 다리 품값이라도 빼내려면 그 대책으로 연합해서 집단 구매를 하든지 아니면 현지수집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사장은 곡물상회가 아니라 무역회사 사장이지만 따이공들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지금 속초-훈춘 항로를 타는 따이공들이 배삯 맞추기에 급급한 근본 이유는, 이곳으로 들어올 때 빈 몸으로 온다는 데 있어요. 물론 한국과 중국 정부 사이의 무역마찰로 인해 한국 공산품이 일절 반입 금지가 되어 있지만, 인천 산둥성 쪽은 사정이 약간 달라요. 거기는 북경과도 가깝고. 하지만 이쪽은 중국의 변방입니다. 무얼 몰래 차고 와도 이쪽 사람들은 구매력이 없어요. 이런 불균형을 맞추려면 적어도 산둥쪽보다는 곡물을 15킬로 이상은 더 차고 나가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곡물 자체도 그래요. 산둥성 고추는 한국의 영양고추보다 좋아요. 같은 값에 사서 산둥고추는 8000원에 넘기는데, 여기 지린고추는 많이 받아야 한국 가서 7000원입니다. 이러니 안되지. 인천보다는 더 차고 나가게 해야 한다고….”
휴식은 중국에서
훈춘의 밤은 어둡다. 15만 인구의 도시에 가로등이 없다. 하지만 훈춘사람들은 ‘양걸’이 있어서 밤을 기다린다. 국제무역 가까운 네거리에서 생음악 연주 소리가 들렸다. 어둠속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나갔더니 거리엔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에선 전통악기로 중국 특유의 밝고 빠른 템포의 연주를 하고 네거리 한쪽을 차지한 춤꾼들 역시 고유의 복장을 하고 빙글빙글 유영을 했다.
“매일 밤 7시부터 9시까지 한족들은 이렇게 놀아요. ‘양걸’이라고, 한족 전통의 춤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지요.”
내게 설명을 해준 사람은 부부 중 남편이다. 한국말을 나보다 더 잘한다 싶어 물었더니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중국 와서 사십니까?”
“산다기보다는 휴식중이지요.”
억양이 경상도 말투다. 나도 그쪽이다. 고향이 구미라는 심주영(45)씨와는 이렇게 인사를 당기고 대화를 나누었다. 심주영씨는 부부 따이공이란다. 인천 배 경력만 10년이 넘고, 속초 배도 초기부터 탔다고 했다. 아내는 몸이 안 좋아 두 달 가까이 배를 안 탔고 남편은 요즘 분위기가 나빠 몇 항차 쉬는 중이란다.
“집을 여기다 얻었더니 모든 게 공짜 같아서 좋아요.”
“한국과는 비교가 안돼요.”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심주영씨 말에 따르면, 전문 따이공 몇 명은 팀이 되어 이곳에 아파트를 얻어놓고 쉬고 싶을 때는 느긋하게 쉰단다. 한국 평수로 쳐 27∼28평 아파트가 이곳에선 월세 400∼500원이면 얻는단다. 한화로는 6만∼7만원 정도다. 아파트만 얻어두면 식료품 값은 정말 공짜라는 것이다.
“여기 소들은 사료가 뭔지 몰라요. 진짜 한우지요. 그런 소 등심이 고깃집에서는 500그램에 18원, 정육점에서는 6원 정도 해요. 우리 돈으론 1000원도 못돼요. 공짜 아니에요?”
이 부부는 국제무역 사정도 잘 알았다. 내가 혼자 관광차 와 있다는 걸 알자 말 나온 김에 중국 아파트 구경도 하고 공짜 같은 고기를 구워 술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거리에선 아직도 양걸을 추고 있는데 우리는 빠져나왔다.
훈춘은 물 사정으로 아파트에도 세 가지 수도관이 들어와 있다. 식수용, 설거지용, 화장실용이 그것이다. 그나마 식수용은 급수 시간이 정해져 있단다. 난방이 스팀이어서 그럴까. 방바닥에 깐 타일이 아무래도 생경했다.
“따이공 처지로는… 프로라 해도 그래요. 한국서는 살기 어려워요. 하지만 중국에서 살면, 중국 입장에서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져요. 한 항차에 3만∼4만원만 벌면 여기서는 살 수 있거든요. 이건, 말을 뒤집어보면 비참한 얘깁니다.”
중국 소주는 최하가 39도란다. 등심에 술 한잔 걸치자 심주영씨는 말이 많아진다. 초기에는 따이공들이 이렇게 ‘궁짜’가 끼지 않았단다. 무게 제한이 없어서 200kg건 300kg건 힘닿는 대로 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 들어갈 때도 화장품이다 가전제품이다 잔뜩 짊어지고 갔으므로 한 항차에 60만∼70만원 벌이는 우습게 생각했단다.
“그 시절에는 사실 곡물 지고 나오는 건 신경도 안 썼어요. 몇 푼 된다고? 우리가 공산품을 500만원어치 지고 가면, 사서 나오는 곡물 값은 30만원도 안 됐거든요. 현지 사정이 이 정도 불균형했는데도 곡물을 많이 가져온다고 한국에서 먼저 브레이크를 걸자, 엿 먹어라 하고 중국에서도 일절 공산품 통관을 막아버렸어요. 그게 98년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손해입니까?”
술을 마시자 이런저런 불만들이 터져나왔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너무 단견이라는 둥 대륙 사람들의 기질에 비하면 소갈머리가 좁다는 둥 39도짜리 술 한 병을 비우면서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맞장구를 쳤다.
헤어지면서 심주영씨는 언제 귀국하느냐고 물었다. 배가 돌아오는 이번 항차에 가야 한다니까 자기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여비를 보충하려면 곡물 좀 싣고 나가는 게 좋은데 어디 언질 놓아둔 데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럼 제가 준비할 때 같이 하지요. 어느 정도 할까요?”
“심형 하는 만큼 똑같이 꾸려보세요. 나가다 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말에 심주영씨는 ‘저 친구 초보 아닌데’ 하는 표정이다.
밤새 설치다 새벽잠이 든 통에 나는 세수도 못하고 훈춘에서 택시를 탔다. 국경 출국장에 도착하니 11시30분쯤이었다. 심주영씨와 11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아, 안 나오시나 했네요.”
내 짐은 한쪽에 따로 떨어져 비를 맞고 있었다. 심주영씨가 내 몫의 영수증을 주었다. 고추 30kg, 찹쌀 31, 흑미 15, 깨 4.5… 합계 80.5kg이었다. 거기다 참기름 5ℓ한 통, 총 금액은 14만원이었다. 내 짐도 출국 화물 맨 끝에 꼬리를 달았다.
내가 늦게 도착한 바람에 막차를 타기도 했지만, 러시아쪽 입국장에서 한 관광객의 비자 문제로 우리가 탄 마지막 버스만 두 시간 동안 볼모로 잡혀 있었다.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동춘호는 자루비노에서 끈질기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 때 사무장이 말했다. 따이공은 식구라고. 이게 동포애인지도 모른다. 서둘러 승선을 마치자 러시아 시간으로 오후 7시였다.
뱃머리를 틀어 한국을 향해 바다로 나간 동춘호는 심하게 요동했다.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 오고 있다는 태풍의 영향일까. 나는 멀미로 어질어질하였지만 따이공들이 움직였다. 작업을 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엔진 열기가 후끈후끈 올라오고 있는 계단을 타고 아래층 화물실에 내려가자 이미 따이공들이 모여 있었다. 기본에 해당하는 곡물 60kg은 중국 세관의 검역을 통과해서 바로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 세관에서 내려진다. 그러나 그외에 더 차고 들어가는 물건은 스스로 들고 지고 배에 올렸다가 다시 스스로 들고 지고 배에서 내려야 하는 것이다. 동춘항운측에서는 이 부분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려고 따로 컨테이너 하나를 중국 출국장 입구에 비치하였다가 배 화물실로 옮겨준다. 그러면 따이공들은 각자의 짐을 찾아 운반하기도 수월하고 통관대를 타기도 용이하게 다시 짐을 꾸리는데, 이것을 ‘작업’이라 한다.
화물실에서는 짐을 찾은 따이공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빈 가방들을 풀어헤치고 곡물을 싼 마대자루나 비닐을 칼로 찢느라 분주했다. 접착 테이프를 떼거나 붙이는 소리도 쩍쩍거린다. 지난 항차 올 때 만났던 따이공들도 전부 흩어져 있었다. 말띠며, 최현대며, 양길수며… 그러나 내 안내를 하기로 한 친구는 안 보였다.
내 물건은 따로 차고 온 것이 찹쌀 20kg뿐이다. 마대자루를 칼로 찢자 비닐봉지 일곱 개에 나누어 포장되어 있었다. 심주영씨는 그것들을 내가 둘러멘 옷가방 속에 넣으라고 했다.
가방이 빵빵하지만 나는 그것 하나 달랑 들면 된다. 그런데 심주영씨는 사정이 달랐다. 컨테이너에서 찾아온 짐도 부피가 있었거니와 가방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크기의 헝겁 가방을 열고 속에서 등산용 배낭을 꺼냈다. 다시 등산용 배낭의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빈 가방 몇 개를 끄집어냈다.
“이래야 따이공 해먹어요. 가방 10개에 주머니는 한 100개쯤 있으면 좋지요. 60킬로 이외 곡물 반입은 원칙으로 안되는데, 이걸 머리싸움으로 밀고 나가는 거지요. 쟤네들, 가방 두 개만 올리면 20킬로까지는 봐주겠다고 했다지만 그걸 어떻게 믿어요. 원래 안되는 거니까 안된다고 뺏으면 뺏기는 거지 별수 있어요? 그래서 요렇게 올망졸망 따로 포장해서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 분산시킵니다. 이거 정말, 째째한 짓거리지요. 먹고 살자니 어떡합니까.”
작업하는 심주영씨의 물건은 부피가 달랐다. 거기다 고추도 만만찮았다. 똑같이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말이다.
“선생 것은 나가기 쉽게 하려고 고추는 더 안 실었어요. 무게도 그렇게 맞췄고. 하지만 우리는 이게 직업입니다. 오늘 찬 게 고추 25, 찹쌀 25 해서 50인데, 나가다 털리더라도 일단 이 정도는 지고 가야 해요. 이게 다 나가봐야 9만원 남는데, 항차 평균으로 쳐 절반은 털린다고 봤을 때 원가를 감안하면 한 항차에 약 3만원 됩니다. 여기에다 참기름과 면세 양주, 담배 한 보루, 이것이 3만원, 이 둘을 합치면 한 항차에 약 6만원, 이게 답니다.”
심주영씨는 작업을 마친다. 배낭은 짊어지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도록 작업한 짐이다.
저승사자는 있다
8월19일 오전 11시. 동춘호가 속초항에 닻을 내리자 따이공들은 다투어 하선한다. 이쪽 곡물상회에서 준비한 밀차를 찾아야 하고 컨테이너에서 하역해 들여보내는 기본 물건들을 챙겨 실어야 하고, 검인을 받아야 하고, 무엇보다 통관대 앞에 밀차를 먼저 대야 우선 순위로 나가므로 마음이 바쁘다.
내 짐은 중국에서 맨 끄트머리에 들어갔으므로 맨 나중에 나왔다. 거기다 누구의 참기름 통이 터졌는지 두 뭉치의 마대자루는 온통 기름 덩어리다. 여덟 군데의 세관 통관 창구 중에서 내가 받은 번호는 2번이었다. 나는 2번줄 맨 끄트머리에다 밀차를 세우고 세관원이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마대자루를 칼로 찢어두었다.
각 창구마다 통관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문 따이공들은 밀차를 앞에 대고도 쭈뼛거리는 눈치다. 그런 사이로 관광객들이 빠져나와 통관대를 탔다. 심주영씨가 다가와 나에게 발렌타인 한 병을 맡겼다. 네 병을 샀는데 분위기가 안 좋다는 것이다. 배에서는 승선표 하나에 두 병씩만 팔았다. 그래서 내게 두 병이 있는 것이다.
“하나 더 넣어 가봐요. 털리면 이건 다음에 찾고….”
양주 하나를 따로 가방의 옷 밑에다 끼워넣고 나자 심주영씨는 나에게 관광객이니까 줄에서 빠져나와 바로 통관대를 타보라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밀차를 밀고나왔다.
“이거, 고추 15킬로 포장 같은데?”
2번 담당자는 마대의 고추뭉치를 빼 저울에 올려볼 태세였다.
“두 뭉치 합쳐야 30인데, 기본 아니에요?”
“고추는 20킬로 미만인 거 모릅니까?”
나는 기본뿐이니까 아주 당당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가방 속의 찹쌀은 집에서 먹을 거라고 둘러댔는데,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옷 속에 ‘짱 박은’ 양주가 들통났다.
“술도 한 병만 통과됩니다. 고추 10킬로와 술 두 병은 영치시키세요.”
이렇게 돌아가면 곤란했다. 사정조로 나가볼 밖에 없었다.
“실은 술 두 병과 덩어리 곡물은 여비에 보태려 싣고 온 거고, 가방의 것은 집에서 먹고 마시려던 것인데 봐주슈.”
“관광객이세요?”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 여권의 출입국란을 살펴보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검열대 위에 올려졌던 물건들을 밀차로 들어내렸다. 담당자는 엉겁결에 내가 내리려던 짐을 움켜잡았다. ‘한번 봐주슈.’ 내 눈빛이 건너갔다. 왠지 선해 보이는 그의 눈빛도 건너왔다. 담당 세관원은 물건을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기려다가 손목에 힘을 뺐다.
“앞으로는 안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보았다. 심주영씨가 큐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지키고 있던 곡물상에게 몽땅 처분하자 25만1000원이 이익금으로 떨어졌다. 양주 한 병은 별도다. 배삯이 왕복 26만5000원이다. 내가 따이공이라면 이번 항차에서 1만4000원 적자를 본 셈이다. 심주영씨 몫의 양주 값을 건네주려고 터미널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최현대씨도 곡물을 넘기고 들어왔다.
“털렸어요?”
이 말이 이 바닥의 인사다.
“아니, 85 실었는데, 다 들여왔어요.”
“그래서는 남는 게 없을 거 아뇨?”
“우린 배삯에서 4만원 할인받거든요.”
나는 끄덕였다. 한 달에 5항차 이상 탄 사람은 22만5000원이 맞았다. 그걸로 어디 밥값이나 될까. 조금 지나자 말띠 따이공이 밀차를 끌며 나타나더니 우리 앞에다 차를 세우고는 곧바로 통관사무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손에 쪽지 한 장 펄럭이며 나왔다.
“얼마나 털렸어?”
최현대씨가 물었다.
“총 100이었는데, 고추만 30 털렸어.”
“저승사자 아직 안 죽었구먼.”
말띠 따이공은 30킬로를 뺏기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싱글거리며 밀차를 밀고 사라졌다. 속이야 얼마나 상할까. 덩칫값도 못했으니.
나는 심주영씨가 궁금했다. 그는 총 110kg을 싣고 왔다. 뺏길 때 빼앗기더라도 이만큼씩은 통과되어야 단 몇 푼이라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게 직업이라고 했다. 한국서는 못 살더라도 이만큼은 타고 나가야 중국서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기다리는 일에 약한 체질이다. 금방 몸이 비틀리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양주 값은 건네주어야 한다. 내가 몸을 꼬며 지루해하자 최현대씨가 말했다.
“심주영 그 친구 늦을 걸요? 저승사자들과 신경전 벌이느라 아마 맨 나중에사 나올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