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美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의 120년 비사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5-03-11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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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비브하우스는 미국이 1884년에 조선왕조로 부터 사들인 것으로 조선왕실이 외국인에게 매각한 최초의 부동산이다. 또 전세계 각국에서 미국 정부가 대사관저로 갖고 있는 부동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이다. 서울에 있는 각국 대사관저 가운데 한국 고유의 가옥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가로수와 벤치가 편안하게 배치된 덕수궁 돌담길(정동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보면,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아담한 사거리가 나온다. 곧바로 나가면 정동극장과 이화여고후문, 예원학교, 러시아공사관 옛터, 경향신문사가 나오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끼고 왼쪽길로 걸어가면 서소문길로 빠진다. 이 길에서는 현재 주한러시아대사관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문제는 오른쪽 길이다. 덕수궁 담장을 끼고 있는 이 길은 경찰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엄두를 내기 힘들다. 용기를 내서 걷다보면 왼쪽에 시선을 차단하는 육중한 갈색 철제문이 몇 개 나오는데, M16을 메고 경계하는 전투경찰의 위세가 당당하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쪽에 덕수궁 후문이 나오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곧 덕수궁의 석조전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나가면 광화문 네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인적이 드문 이 길 왼쪽의 갈색 철제문은 하루 한 차례, ‘001001’이라고 씌어진 노란색 번호판을 단 짙은 남색 캐딜락이 나타나면 미끄러지듯 열린다. 방탄유리를 끼운 이 자동차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중 하나인 주한미국대사의 관용차다. 노란색 번호판의 앞숫자 001은 미국대사관을 뜻하고, 뒤의 001은 대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대문만 통과해서 이곳에 들어서면 삼엄한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잘 손질된 녹색 잔디와 정원수, 석등, 해태상 뒤에 배치된 전통 기와집을 바라보면 쾌적한 별장에 온 듯하다.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의 주한미국대사관은 미 대사가 업무로 사용하는 곳이지만, 그가 사는 곳은 바로 이 집이다. 대사관저의 이름은 하비브하우스로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한 사람인 필립 C 하비브 대사(1971년 10월∼1974년 8월)의 이름을 따 지었다.

    하비브하우스가 있는 정동은 한국의 개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정동의 역사는 1400년대 중반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작은 궁(현재의 덕수궁)을 지으면서 시작되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중심부로 떠올랐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선조가 덕수궁을 왕실의 거처이자, 정무를 보는 곳으로 삼았던 것이다. 1600년대 초에 선조는 덕수궁 인근에 두 개의 궁을 증축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하비브하우스가 이 당시 즉, 1600년대 초에 궁의 일부로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선조가 사망한 뒤, 광해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덕수궁은 쇠퇴의 길을 걷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쇄국정책은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4년 뒤인, 1880년 일본이 첫 외교관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런데 18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도성 4대문 안에는 외국인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에 파견된 첫 외국 공관인 일본공사관의 경우도 남대문이 내려다보이는 성밖 남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4대문 안으로 들어온 최초의 외국 공관이 미국공사관이다.

    한국 개화를 상징하는 정동

    이후 모든 서방국가의 공사관은 덕수궁 근처 정동에 밀집하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의 뒤를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공사관이 이웃하여 들어섰다. 개신교의 선교사들도 역시 정동으로 모여들어 살 집과 학교, 클럽 등을 세워나갔다. 1890년에 이르자 정동 일대의 서양인 수는 80명으로 늘어났으며 모두가 덕수궁 근처에 살았다.

    당시 정동거리에는 중국인 야채상과 외국인을 위한 양복점, 러시아대사의 처형인 손탁 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또 정동거리에는 1886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왕실의 후원 아래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학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같은해에 정동거리에 이화학당을 세웠다. 한국에서 출생한 최초의 서양인은 1885년에 태어난 앨리스 아펜젤러다. 이 아이를 당시 미국 공관의 의사인 호러스 앨런 박사가 받았다고 한다.

    조선이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82년 5월이다. 양국은 제물포조약을 맺고 그 이듬해인 1883년 5월 루셔스 푸트(Lucius Foote) 공사가 부임했다. 당시 푸트 공사는 아내와 비서인 C.S. 스쿠더, 소므소니언협회의 P.L. 라우이 등과 통역관 사이토로 이루어진 수행단을 데리고 조선에 도착했다. 미 국무부가 부여한 푸트 공사의 직책은 특수사절 및 전권공사다. 미공사관의 인력이 워낙 적었던 시기라, 푸트 공사는 미 정부 차원의 중요 업무뿐만 아니라 공사관 사무실 및 관저로 쓸 장소를 찾는 일상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미 국무부는 연간 미화 3000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공사관의 각종 비용 및 서기와 번역관의 급여를 충당했다고 한다. 당시 푸트 공사의 연봉은 미화 5000달러였다. 푸트 공사 일행이 처음 서울에 도착해 어디에 거처를 두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당시 서울에는 서구식 집이나 호텔이 없었고, 여관만 몇 개 있었을 뿐이다.

    초대 주미공사 루셔스 푸트가 매입

    푸트 공사 일행은 도착한 뒤 왕실에서 마련한 거처에서 머물렀을 수도 있다. 당시 외국사절에게는 왕실의 수많은 왕자들과 동등한 예우를 베푸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왕실에서 공사 일행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관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은 오래 전부터 덕수궁 근처 민씨 일가 소유의 건물을 이러한 용도로 쓰고 있었다.

    1884년 8월 미대사관의 기록을 보면 민씨 가문 소유인 이웃한 부동산 두 곳을 당시 금액으로 미화 2200달러에 ‘부덕(‘푸트’라는 외국어를 한국식 한자어로 표기했을 때 가장 가까운 발음이었다) 공사’가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한 건물은 관저로 사용하고, 다른 한 건물은 공사관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푸트 공사는 당연히 미 의회가 건물을 매입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지급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미국 의회가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휴회하자 푸트 공사는 자신이 직접 돈을 지불하고 본인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했다.

    푸트 공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에 덕수궁 일대는 왕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일원이 살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고 한다. 왕실 가족은 덕수궁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경복궁에 거처하고 있었고, 고종도 경복궁에서 국사를 보고 있었다.

    미 의회는 1887년이 되어서야 부동산 매입 예산을 책정하여 지급했다. 같은해 9월, 푸트 공사는 자신이 사들인 부동산을 미화 4400달러에 미국 정부에 넘긴다는 증서를 발급했고, 1888년 3월8일 한성부(Seoul City Office)는 이 부동산이 ‘영구히’ 미국 정부에 매각되었음을 기록한 증서를 발급했다. 공사관 본 건물은 푸트 공사가 사용하기 전에는 왕실 후궁 한두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인접 건물들도 비슷한 용도로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푸트 공사가 1884년 매입한 건물은 현재 하비브하우스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후 미국 공사관은 1890년 6월에 민씨 가문 하인 소유의 야채밭이던 땅을 일괄적으로 사들여 터를 더 넓혔다. 1948년 9월20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정부로부터 미화 14만9345달러88센트에 부동산 세 군데를 더 사들였다. 관저 담 바로 밖의 땅으로 이전에 서울유니언클럽 터와 정원 담 너머인 주거지역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들 건물은 한때 왕실 여인들의 처소로 사용되다가 일제 치하 때는 일본인 주거지역으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미대사관 부대사, 정무참사관 등이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King’s road

    하비브하우스 자리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하비브하우스의 정원 뒤로 난 길을 이용하여 미국공사관 북서쪽에 있던 러시아공사관(현재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음)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당시 미국공사관 정원 뒷길은 덕수궁과 외국공사관을 잇는 통로였다. 이 길은 자연스레 만들어진 보통 길이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특별히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은 자신이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비브하우스의 정원 뒷길을 미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인상은 더욱 짙어졌다. ‘King’s road’라고 불리는 이 길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904년 아관파천 뒤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덕수궁을 정비하여 그곳으로 환궁했다.

    이후 일제식민통치, 1·2차세계대전,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이 낡은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과 우호조약 관계에 있었다. 미국은 서울에는 영사관을, 일본에는 대사관을 유지했다. 따라서 정동의 옛 공사관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던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이 집은 살아남았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 당시 스위스 정부와 특별 조치를 맺어, 정동의 대사관저에 스위스 국기를 내걸었다. 하비브하우스는 스위스의 중립성 아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 군정기에도 이 건물은 미국 관계자들의 숙소 노릇을 했다. 대한민국 군정을 이끌던 존 R 하지 장군의 정치자문관 역할을 수행한 미국무부 관계자들이 이 대사관저에서 기거했다.

    6·25전쟁 시기에는 오히려 북한인민군이 이 건물을 보호했다. 1950년 6월 북한인민군이 정동의 대사관저를 점령했고 대사관 직원들은 급하게 피란을 가야만 했다. 당시 존 J. 무치오 주한미국대사(1948∼1952)는 개인물건을 거의 챙기지 못한 채 허둥지둥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북한의 외국인 담당 경찰들이 관저를 봉쇄하고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북한군은 당시 대사관저를 봉쇄하기 전에 집안의 모든 것을 일일이 사진으로 기록에 남겼다. 심지어 대사 가족 앨범까지도 한장 한장 다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한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정동의 미국대사관에 성조기를 다시 게양한 것은 체스티 풀러 대령이 지휘한 미 제1해병연대였다. 그의 부대는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사관과 무치오 대사의 관저에 성조기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의 근세사와 함께 한 하비브하우스가 언제 처음 건축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약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건물의 원래 모습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인 오령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부분이 추가되고 변형되었다. 원래 건물은 건평 40평 정도였으나 1973년 해체 복원될 당시에는 175평에 이르렀다.

    서까래에 머리를 부딪힌 앨런공사

    하비브하우스는 처음 미국 정부가 사들인 1800년대 말기에는 천장이 지금보다 상당히 낮았다. 당시 워싱턴은 관저의 천장을 높일 수 있도록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공사가 직접 나서서 천장을 높인 얘기는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키가 180㎝가 넘었던 호러스 앨런 공사(1897∼1905)는 천장 서까래에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앨런 공사는 워싱턴 당국에 천장이 낮아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천장을 높여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실내에서는 모자를 쓰지 말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건물의 상태는 앨런 공사가 불평할 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공사관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건물은 여행객이 잠시 머물다 가기에는 좋은 건물이다. 그가 장마철에 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참으로 열악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바닥은 마름모꼴로 삐딱하게 깔려 있으며 기둥은 썩어 들어가고 있고 습하기 그지없는 벽은 옛 민씨 가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벽이 너무 습해 벽지가 젖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니스칠을 해야 하며, 바닥은 땅의 습한 기운이 그대로 올라와 썩어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는 비가 샐 뿐만 아니라 지붕의 흙이 빗물에 녹아 진흙물이 떨어진다. 천장에서 샌 빗물은 그대로 바닥으로 스며든다. … 지붕의 기왓장 위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이들의 먹잇감인 제비들은 기왓장 사이에 집을 짓고 산다. 그 결과 지붕은 더욱 더 구멍이 많아지게 된다.”

    비가 새는 공사관

    이런 상태인 터라 간간이 공사관을 새로 짓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여기저기 수선하는 선에서 1973년까지는 버텨냈다. 이 건물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6·25전쟁이다. 직접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포탄이 터지는 진동 때문에 건물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원래 낡은 건물이라 그 피해는 심각했다.

    월터 P 매커나기(1959∼1961) 대사 부부는 한밤중에 침실이나 욕실의 문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바람에 놀라 잠을 깨곤 했다고 한다. 이는 지붕이 내려앉는 조짐이었다.

    1961년 미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집을 검사한 결과, 안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만 해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 이 대사관저에 머무는 경우가 잦았다. 엔지니어들이 검사하기 얼마전에 방한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생명이 위험했다는 사실에 미대사관 관계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 판정이 나자 관저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되었다. 지붕을 새로 덮고 들보를 강화했다. 1965년 건물의 한 부분에서는 25톤에 이르는 마른 모래가 제거되기도 했다. 당시 대사의 부인은 어느날 아침 침실에 앉아 있다가 천장을 올려다 보고 천장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대사관의 관리팀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었고, 조사 결과 건물 상태가 너무 나빠서 그 침실 출입이 곧바로 금지되었다. 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이 1965년 새해를 맞아 방한하여 그 방에서 잠을 잔 것이 불과 며칠전의 일이다.

    하비브 대사의 고집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대사관저를 어떤 형태로든지 전면적으로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정부는 낡은 관저를 보수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지만, 그들은 문화재와 사적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대사관저가 소중한 사적이라고 생각했다.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이 시기인 1965년 방한해서 낡은 미국대사관 관저가 한국의 주요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재건축 논의가 일고 있는 서울의 대사관 관저 외관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자, 각종 벌레에 시달림을 받아온 이 건물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미국이 구입한 이래 100년 정도를 버티던 이 건물을 헐어야만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의 필립 C.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다. 그는 “새로 지어질 대사관저는 전통적인 한국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살려서 짓도록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하비브 대사는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국민들로부터 매우 높은 반대 여론에 부딪힐 것이며, 대사관의 입장도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사관저를 현대 서양식이 아닌 주재국의 전통 건축양식에 따라 짓겠다고 보고하고 이를 밀어붙였다. 국무부 해외공관 담당사무소와 치열한 공방이 일었으나, 결국 하비브 대사가 승리했다.

    하비브 대사와 미국대사관측은 한국 최고의 한옥건축가를 초빙했다. 그래서 조자영 건축사무소와 함께 널리 이름이 알려진 신영훈 선생과 당대 최고의 목공인 무형인간문화재 제74호 이광규 선생 등이 관저 건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영훈 선생은 남대문 복원 작업을 마친 직후였다. 신영훈 선생은 “한국 정부조차 전통양식으로 건물을 짓지 않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미국대사관저 건축은 매우 드물고 특별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6·25전쟁 직후 서울은 잿더미뿐인 폐허가 되었다. 서울을 재건하면서 한국 정부는 과거의 도심 구조와 옛 건물을 밀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만들었다.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통로를 끊어 세운상가를 만든다든지, 청계천을 복개한다든지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미국대사관측은 오히려 한국의 옛 전통양식을 고집했다. 조선왕조의 주요 건축물은 자연 소재의 사용을 강조했다. 하비브하우스는 건축 초기부터 기둥과 들보를 활용하는 건축 원칙을 따랐다. 이 건축양식은 천연 목재와 석재를 활용하여 주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즉, 자연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연에 동화되는 전통 한옥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비브하우스는 벽과 천장을 흙으로 발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지붕은 흙을 바른 위에 기와를 얹어 마감하였다. 집의 무게는 집안 내부에서도 보이는 들보로 지탱되고 있다.

    대사관저 공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드러난 어려움은 대들보가 드러나보이고 탁 트인 개방적 구조를 살리면서 어떻게 중앙난방, 에어컨디셔닝, 배관 및 조명 같은 현대적 필요사항을 충족시키는가 하는 문제다. 한국측 시공업체인 삼일건설의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서 미국 해외공관담당사무소에서 파견된 멜저 P. 부커는 “한국적 설계와 서양의 건축 자재를 결합시키는 데서 오는 첫번째 도전은 지붕구조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의 건축양식 가운데서도 우아하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지붕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건축자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조화로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한옥 장인들은 지붕을 만들 때 우선 대들보와 기둥을 연결하여 틀을 잡은 후 기둥에 서까래를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우아한 선을 만들고 지붕 기와를 얹는다.

    현재 미대사관저의 다이닝 룸을 보면 천장의 대들보와 기둥, 그리고 서까래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통풍구나 파이프, 전선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건축가들은 집안 땅 밑에 사방 90㎝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중앙난방, 에어컨디셔닝, 배관 관련 설비를 배치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대사관저를 지을 때 사용한 마른흙은 기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고, 한국 기후에도 잘 맞았다. 여름철 우기에는 지붕의 기왓장 사이로 스며든 빗물을 흙층이 빨아들였고, 건조한 겨울에는 습기가 증발하곤 했다. 흙층의 두께가 적당하면 빗물이 샐 우려도 없었다.

    그러나 새 관저를 지을 당시에는 이미 흙보다 더 좋은 건축자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붕 서까래 위에 금속판을 깔아 회반죽을 바를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합판을 깐 뒤 펠트와 아스팔트로 만든 현대식 지붕을 놓았다. 그러나 지붕의 곡선을 올바로 뽑아내기 위해서 흙은 여전히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전통 기와 제작공들이 지붕 위 플라스틱 막 위에 전통 기와를 얹었다.

    건축의 각 단계마다 한국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다양한 건축 공법상의 도전을 해결해야 했다. 관저 건축은 1975년 6월16일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식 때 불교식으로 축원법회까지 여는 등 전통양식을 고수하면서 진행되었다. 또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 수정이 가해지다 보니, 건축 예산이 초과하는 상황도 생겼으나,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기업들의 기부금을 통해 늘어난 건축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현재 하비브하우스의 리셉션 룸에는 미국 오레곤주에서 수입해온 더글라스 전나무로 만든 직각기둥과 대들보가 높다란 천장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관저의 모든 구조물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나무 기둥과 들보를 서로 깎아 이어서 만들었다. 정교한 장인들의 솜씨로 연결된 이 기둥과 들보들은 철제 빔에 콘크리트를 부어 세운 것보다 더 든든히 집을 떠받치고 있다.

    하비브하우스의 메인 리셉션룸 난로가에는 한자어로 ‘녕(寧)’자를 새긴 커다란 봉인이 있다. 한국어 인사말 ‘안녕’에서 볼 수 있는 한자어로 ‘편안하기를 기원한다’, ‘평안이 함께 하기를’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실 난로가는 그런 의미에서 오랜 전통의 인사말을 통해 한국인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붓글씨의 미를 전하면서 모든 손님들에게 ‘이곳에서 편안히 머물다 갈 것’을 당부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비브하우스는 또 복판에 아트리움과 중앙정원을 두고 유리 창문으로 그 주위를 둘러싸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형태로 건축되었다. 이 정원 공간에는 전복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수로를 내었다. 하비브하우스의 연못은 신라의 학자들이 여름밤 모여앉아 작은 배 같은 술잔을 둥둥 띄워 이사람 저사람에게 넘기는 동안 서로 시를 읊고 노닐던 경주 포석정을 응용한 것이다.

    관저는 중앙의 아트리움을 통해 공식 행사를 위한 공간과 개인생활 공간으로 나뉜다. 두 공간은 널찍한 복도로 서로 연결된다. 공식행사를 위한 공간에는 다이닝룸과 서재, 음악실, 그리고 손님용 침실 두 곳이 준비되어 있다. 대사 가족을 위한 개인 공간에는 침실 네 개와 거실 및 식당이 있어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완공을 보지 못한 하비브대사

    하지만 정작 이 멋진 관저를 고집스럽게 한국 전통양식으로 밀어붙인 하비브 대사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이임했다. 그는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애석하게도 헌신적 노력으로 만든 이 아름다운 건물에 한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새로운 관저에서 거주하게 된 첫 대사는 리처드 L. 스나이더 대사다. 1976년 5월18일 관저 개관식 기념사에서 이 복받은 대사가 한 말은 하비브하우스에서 머문 모든 이들의 심경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집은 한국 전통예술과 장인정신이 미국의 현대 건축기법과 하나가 된 현장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되었으나 서로의 서로에 대한 노력을 통해 새롭게 더욱 활기를 띤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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