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개혁포럼이 출범했다. 60명의 민주당 현역의원이 참여한 사실상 ‘당내 당’으로 정가의 주목을 끌고 있는 포럼을 두고 해석이 구구하다. ‘조용한 초선(初選)’, ‘말없는 중진(重鎭)’들이 모였다는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지만 이 같은 소문은 쉽사리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지난 9월1일 민주당 의원수(118명)의 절반이 넘는 현역의원 60명이 참여하는 ‘중도개혁포럼’이 결성됐다.
중도개혁포럼이 공식활동에 들어가자 민주당내 대선주자들은 이 모임의 성격과 향후 역할 등에 대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 진영은 은근히 환영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한화갑(韓和甲) 김중권(金重權) 김근태(金槿泰) 노무현(盧武鉉) 최고위원 진영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반응이 엇갈린 것은 포럼을 주도해온 인사들과의 개인적인 친소관계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같은 반응 속에는 한광옥(韓光玉) 대표, 정균환(鄭均桓) 총재특보단장, 김민석(金民錫), 박양수(朴洋洙)의원 등 포럼을 주도하고 있는 멤버들이 범동교동계로 분류할 수 있고, 이들이 민주당내 신파(新派)라고 볼 수 있는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최고위원보다는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의 동교동계 구파와 가깝다는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다. 신파 쪽에서는 권 전최고위원이 한때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도개혁포럼의 향후 활동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특히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이 현 민주당 체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그 동안 당정쇄신론을 꾸준히 들고나온 신파 쪽 인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한광옥 대표의 경우 포럼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지만 그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박광태(朴光泰), 박양수 의원 등이 포럼결성에 깊숙이 참여했고, 포럼을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균환 단장이나 김민석 의원은 당정쇄신 파문이 일었을 때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를 만류하는 입장이었고, 끝내 대통령의 면담주선을 둘러싼 ‘거짓말 시비’로 소장파들과 선을 그었던 사람들이다.
말없는 다수가 움직이다
포럼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것은 올 3월경이지만 태동배경은 지난해 말 터져나왔던 민주당내 당정쇄신 파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동영 최고위원을 주축으로 한 당내 소장파의원들이 권 전최고위원을 ‘제2의 김현철’로 공격하며 당정쇄신을 부르짖던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도적 성향의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당을 걱정하면서 삼삼오오 모임이 이뤄졌다. 이들은 “소수가 당을 주도하고 있고, 말 없는 다수는 설 자리가 없다”며 소장개혁파가 주도하는 쇄신무드에 불만을 터뜨렸다.
유용태(劉容泰) 노동부장관, 박광태 설송웅(松雄) 의원 등이 이 모임을 주도했고, 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특보단장 등 중임을 맡으면서 당내 여러 의원들과 교분을 다져온 정균환 단장이 그 핵심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그룹은 목소리가 큰 소장파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온 박병석(朴炳錫) 박주선(朴柱宣) 김덕배(金德培) 함승희(咸承熙) 의원 등 ‘조용한’ 초선의원들이다. 말없는 중진들과 생각을 공유해온 이들 초선들이 또 다른 축을 형성하면서 조직화에 탄력이 붙었다는 것.
지난 5월에 터져나온 2차 정풍(整風)파동은 중도성향의 의원들이 포럼의 조직화를 앞당기는 계기를 제공했다. 의원들의 난상 토론이 벌어진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워크숍에서 소수의 성명파 의원들의 공세에 동교동계가 앞에 나서서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쇄신도 필요하지만 당의 중심도 잡아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쇄신의 당위성에는 동의하지만 ‘누구누구를 제외시켜야 한다’는 식의 쇄신운동은 결국 권력투쟁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입장을 취했다.
중도개혁포럼의 목표는 단기적으로 내년 대선후보경선의 연착륙에 맞춰지고 있다. 우선 당내 대선주자들에 대한 줄서기를 저지, 공정하게 경선을 관리하고, 대선주자 간 경쟁이 당내 조직적인 분규로 커지는 것을 막아내겠다는 것. 또 후보가 결정된 후에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권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축을 형성하겠다는 것이 포럼의 다음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정권재창출에 성공할 경우 장기적인 목표로는 다음 정권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중도개혁’의 이념이 발현할 수 있도록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실히 설정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포럼을 이끌고 있는 정균환 특보단장은 “우리가 재집권하지 못하면 개혁도 남북간의 화해도 모두 물건너 간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동교동 구파가 많다
현재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의원들은 별표와 같다. 이들 중 범동교동계로 분류되는 인사는 김충조(金忠兆), 김태식(金台植), 박광태, 박양수, 배기운(裵奇雲), 송석찬(宋錫贊), 윤철상(尹鐵相), 이상수(李相洙), 이협(李協), 전갑길(全甲吉), 정균환, 조재환(趙在煥) 의원 등이다. 이인제 최고위원 측과 교분이 두터운 인사로는 강성구(姜成求), 김윤식(金允式), 김효석(金孝錫), 박용호(朴容琥), 설송웅, 이희규(李熙圭), 홍재형(洪在馨) 의원 등이 있다.
하지만 한화갑 최고위원 쪽으로 분류되는 인사는 김성순(金聖順), 박병윤(朴炳潤) 의원 등 소수에 불과하고, 문희상(文喜相), 설훈(薛勳), 배기선(裵基善), 조성준(趙誠俊) 의원 등 동교동계 신파 의원들은 빠져있다. 중도개혁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은 “특정후보의 캠프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인사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말하고 있다. 구파의 핵심인물인 김옥두(金玉斗) 의원은 특정후보캠프에 가담하고 있진 않지만 동교동 구파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상호 양해 아래 제외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포럼에 참여한 범동교동계 인물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신파보다는 구파에 가까운 의원들이 더 많다.
이처럼 다양한 성향의 의원들이 포진해있기 때문에 포럼의 앞날이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우선 후보가 확정된 뒤 급속하게 후보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는 속에서도 포럼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게다가 분명 김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할 게 뻔한 차기 후보에게 김대통령의 개혁이념을 전수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지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만일 포럼이 차기후보의 노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경우 김대통령과 차기 후보의 관계도 미묘해질 공산이 크다.
현재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60명의 의원들도 본격적인 경선 시기가 닥쳐올 경우 각 후보진영으로부터 ‘줄서기 공세’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실제로 9월7일 있었던 이인제 최고위원 계보모임에 참석했던 27명의 의원 중 16명이 포럼에 참여하고 있고, 9월28일 한화갑 최고위원이 주도하는 한미정책협의회 준비모임에 참석했던 20명의 의원 중 10명이 역시 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포럼의 한 인사는 “현재 60명의 회원들 중 각 후보진영의 계보로 분류되는 사람은 5∼6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다른 인사는 “포럼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가장 큰 요인은 회원들간의 인간적 관계”라며 “인간 관계를 끈끈히 다지기 위해 10여 개의 분과를 만들고, 각종 소모임을 활성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정후보에 대한 편향시비나 경선의 중립성 유지도 포럼의 장래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특히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최고위원 진영에서는 “포럼이 결국은 이인제 최고위원 쪽으로 기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최고위원 측의 한 인사는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봐라. 누구와 가까운지”라며 “만일 포럼이 특정 후보 쪽으로 기운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무현 최고위원 측은 중도개혁포럼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포럼과 관련해 “나는 세(勢)자랑은 안하려고 한다. 세 자랑을 하려면 줄줄이 끄집어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선 경쟁력이다. 누구누구와 가깝다, 누구누구 편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도 기왕의 인연을 가지고 별의별 소리를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최고위원 측이 포럼과 가깝다는 소문에 일침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럼 멤버들은 신파 쪽 최고위원들의 이 같은 거부감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포럼의 한 인사는 “우리는 100% 중립을 지킬 것”이라며 “이제 태동단계에 있는 포럼에 대해 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포럼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든 포럼이 전통적인 ‘DJ 정당’의 역학구도 변화를 내비치고 있다는 데는 당내 이견이 거의 없다. 즉 김대통령의 비서출신으로 그 동안 정권창출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했던 동교동계가 ‘신파의 독립선언’과 ‘구파의 세 약화’로 사실상 문패를 내리고, 한광옥 대표나 정균환 단장 같은 범동교동계이면서 김대통령의 확실한 신뢰를 받고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통령의 친위(親衛)그룹이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동안 ‘실세’ ‘핵심측근’ 등으로 불려 온 동교동계 구파는 소장개혁파들의 집중타를 맞아 자칫 범동교동계 내지는 신진 DJ계보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당내 60명의 의원을 규합, ‘당내 당’이라는 얘기까지 듣고 있는 중도개혁포럼이 향후 당내 경선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는 아직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 특히 후보 선출과정에서 소속의원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느냐, 아니면 특정후보에 대한 지원방침을 세우고 집단적으로 몰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포럼이 ‘태풍의 눈’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DJ의 후계자 결정 창구?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은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아직 뚜렷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정단장은 “토론을 해봐야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재집권해야 한다는 확실한 명제가 있는 만큼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고 당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인물에 대해 집단적인 투표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포럼이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할 경우 포럼의 중립성에 대해 적지 않은 논란과 함께 포럼 자체가 하나의 계보가 될 수 있다.
김대통령은 지금까지 한번도 중도개혁포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또 정 단장을 비롯한 포럼참여 인사들 역시 “포럼의 결성에 김대통령이 관여한 적이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대표나 정단장이 모두 김대통령의 직계인데다 ‘무언(無言)의 교감’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는 점에서 경선 과정에서 김대통령의 영향력이 포럼을 통해 현실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김대통령이 집권초기 “나는 후임자 선정과정에서 분명히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힘의 관계로 모든 것이 결정돼온 우리 정치현실을 감안해볼 때 김 대통령이나 중도개혁포럼의 성패 여부는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유지, 강화할 수 있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레임덕의 극복이 중요하고, 포럼의 입장에서는 결속력이 관건이 될 것이다.
만일 김대통령의 레임덕이 급속히 확산되고, 여권 중심부가 진공상태에 빠질 경우에는 그와 반비례해 경선 주자들에 대한 줄서기가 강화되고, 김대통령의 뜻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중도개혁포럼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