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世界樹)와 새숭배 신앙의 근원인 바이칼의 샤머니즘, 강강술래와 비슷한 동작에 우주의 율려를 노래하는 부랴트 샤먼의 무가(巫歌), 백야의 땅 위에서 벌어지는 굿판…. 거기엔 고구려·백제·신라의 원형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비행기가 달린다. 눈이 달린다. 마음이 달린다. 시베리아와의 첫만남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비행기는 산맥의 길이가 1000km에 달하며 최고봉인 문쿠사르디크산의 높이가 3491m나 되는 거대한 지대 위를 헤엄치듯 출렁거리며 달렸다. 러시아 여인의 흰 피부 같은 산의 살결이 구름의 깨어지고 갈라진 틈으로 드러난다. 끝이 없는 수해(樹海)의 수평선에서 초록의 물결들이 넘실거린다.
언젠가 뗏목으로 대양을 횡단하다가 태풍의 뒤끝을 만나 정처없이 표류할 때였다. 사방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그 장엄함에 기가 질리면서 “아! 바다와 산이 같을 수도 있구나”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이젠 하늘에서 산맥의 골과 마루를 채운 나무들의 물결을 보면서 다시 한번 “아! 산과 바다가 같을 수 있구나”고 중얼거린다.
6월이 이제 반을 넘어 여름의 한가운데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도 끝을 모르는 나무의 바다에는 눈덩이들이 아직도 곳곳에 쌓여 있거나 파도의 갈기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산 능선이 수십킬로미터씩 이어지는데도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사는 흔적을 발견하기가 영 쉽지 않다. 거의 길도 나 있지 않은 데다가, 때때로 사행천(蛇行川)만 풀밭 사이로 가늘게 흐르면서 햇살에 반사되고 있을 뿐이다.
놀랍게도 원시림 같은 산정의 높고 낮은 곳곳에 호수가 있고, 물이 차 있다. 대접 모양도 있고, 조롱박 모양도 있고, 옹달샘처럼 동그란 모양도 있다. 우리에겐 남과 북, 두 군데밖에 없는 천지(天池)가 여기서는 연꽃잎에 굴러다니는 물방울들처럼 산 곳곳에 있다. 늘상 천지의 신령스러움에 감동받으면서 자라온 나는 경이로움에 마음이 정결해진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몽골의 쌍발여객기가 이르쿠츠크 공항의 한적한 활주로에 착륙했다. 금발의 늘씬한 러시아 여군의 얼음 같은 미소와 더딘 통관수속이 우리를 맞았다.
시내의 분위기는 예상보다 활달하고 밝았다. 여인들의 복장이 시원하고 노출이 심하여 눈길을 끈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인상들이다. 반면에 사내들은 왠지 주눅이 들어 풀죽은 인상들이다.
백화점에는 물건이 풍성하고, 백인·몽골인·고려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물건을 사고파는 정경이 단일민족의 눈에는 매우 이채롭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선입견만 없다면 편안하고 활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도시라는 인상이다.
거리 한복판에 전차선로가 죽죽 그어져 있고, 그 위로 발그레한 색의 긴 전차가 러시아인들의 여유있는 웃음을 싣고 천천히 지나간다.
이 도시는 코사크족을 앞세운 러시아의 침략으로 그 문이 열렸고, 1661년에 몽골과 중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요새로서 출발했다.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점점 커지다가 결국 1764년에는 총독이 다스리는 행정도시가 됐다. 그런데 1825년에 성페테르스부르크에서 차르의 왕정통치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난을 일으켰다. 거사가 실패한 뒤에 많은 귀족(128명)들이 이곳에 유배됐다. 그들은 엄청나게 긴 고행의 거리를 지나 이곳에 유배돼 일부는 한을 달래다가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혔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향수를 달래면서 아름다운 건물들을 짓고 정착했다. 그래서 이 도시는 ‘유형자들의 수도’라고 불렸다. 그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이르쿠츠크를 유럽문화가 살아 숨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만들었다. 25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34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면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데카브리스트 기념관과 독특한 형식의 목조건물들을 거리에 세워놓았다. 이를테면 마르크스 거리는 환한 붉은 벽돌로 쌓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격조 높게 늘어서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귀족여인들이 활보하는 듯한 환상에 빠져본다.
앙가라강의 전설
앙가라강으로 나갔다. 강변은 더운 여름날 이르쿠츠크 시민들이 피서하는 장소다.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개척을 기념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젊은 연인들은 파라솔 안에 앉아 콜라를 마시거나 팔짱을 낀 채 환한 미소를 띠고 우아하게 거닐고 있다.
앙가라는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다. 폭이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좁지도 않고, 시원스럽고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몇 척의 배들이 떠다니고 있다.
대략 336개의 하천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그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로지 앙가라강뿐이다. 그 길이도 1779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이러한 신비로움 때문인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세계적 휴양도시인 리스트비얀카에는 호수와 앙가라강이 맞닿은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다. ‘샤먼 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부랴트 샤먼이 바이칼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인데, 때로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해가 질 무렵에 죄인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가서 다음날 아침에 돌아와 그 범죄자가 없으면 바이칼 신이 수장시킨 것이라 믿고, 만약에 살아 있으면 무죄라 여기고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강에는 또 다른 흥미있는 전설이 있다. 바이칼 할아버지는 336명의 아들과 어여쁜 외동딸 앙가라를 두고 있었다. 바이칼은 앙가라를 이르쿠트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이르쿠트는 물결이 사나운 강이다. 이르쿠츠크라는 도시 이름이 바로 이 강 이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들은 앙가라에게 멀리 북쪽에 있는 예니세이라는 용사가 더 멋있다고 자랑하였다(예니세이강은 앙가라강이 흘러 들어가 만난 다음에 멀리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그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바이칼은 딸을 감시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을 치려 했다. 바이칼은 잠에서 깨어나 놀라서 큰 바위를 집어던져 앙가라의 하얀 목을 맞혔고 그녀는 그만 죽어버렸다. 지금도 앙가라는 늘 예니세이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이는 바이칼 주변의 자연현상을 의인화하여 설명한 흥미로운 전설이다.
宇宙木 숭배 신앙
서둘러 시내를 빠져나갔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내가 싫은 게 아니라, 깊이 있는 문화와 아름다운 여인들이 싫은 게 아니라 어서 빨리 바이칼과 가까워지고 싶어서다.
큰 건물이 점점 드물어지고 검은 통나무집들이며 남루한 건물, 조그만 가게들이 가끔씩 나타나는가 싶더니 일직선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버스는 몇 시간째 내내 달리고 있지만 길은 끝이 없다.
이게 바로 타이가다. 낙엽송,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흑전나무 등이 수해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의 몸뚱이 옆으로는 백양나무와 자작나무들이 나름대로 자리를 양보하면서 숲을 이루어 멀리 끝간 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우린 영락없이 수해, 숲의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표류할 수도 있는….
자작나무의 비릿하고 야릇한 내음이 공중에 떠다닌다. 사람의 혼을 홀린다는 그 향기가 이곳에선 지천으로 흘러다니고 있다. 어디서나 숲은 아름다움보다는 생기를, 눈길보다는 마음을 더 움직이게 한다.
타이가의 주인은 숲과 나무다. 숲에서 바람이 일고, 물이 흐른다. 나무에 먹을 것이 달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서 바브츠카(하얀나비)들이 날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상태로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아래위로 곧추 서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는 수풀신앙이나 수목숭배신앙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수풀이란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장소다. 밖에 사는 인간에게는 피안의 영역이고 신들의 거주지다. 신들의 내밀한 속삭임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곳이다. 그래서 늘 역사와 신화에서 수풀은 신비로운 자태로 등장한다.
신라는 특히 수풀과 관련이 깊다. 박혁거세는 나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백마가 낳고 간 알에서 깨어나 신라의 시조가 됐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알지는 수도의 시림에서 발견된 궤짝에서 나왔다. 국호이면서 수도 이름이기도 했던 계림은 바로 이 시림의 알지신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신화가 영남지방에서는 골매기 신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수풀은 나무들로 채워져 있기에 나무는 더욱더 숭배의 대상이 된다. 특히 나무들이 그 존재를 구현하고 있는 타이가에서는 더부살이하는 모든 존재물들에게 숭배의 대상, 신령스러운 대상이 될 수 있다. 고대세계에서 끝없이 솟은 나무는 날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요, 인간이 살을 부비면서 체온을 주고받으면서 하늘과 교신할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나무는 자체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니 늘 실존에 불안한 인간이 얼마나 의지하고 싶었겠는가?
사람들은 그 나무를 세계수라고 하고 우주목이라고도 부르면서 몸과 마음을 던지고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큰 나무가 없는 몽골 같은 평원에서는 오보에라는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그 꼭대기에 마른나무를 세워놓기도 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다. 그리고 웅녀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정안수 떠놓고 빈 곳도 신단수 앞이다. 곳곳에 솟대가 서 있는 것도 역시 나무신앙의 한 변형이다. 신라고분 천마총에서 발견된, 흰말에 그려진 말다래도 신단수인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다.
달리는 차를 세우고, 숲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흙을 밟는다. ‘꾹’ 밟히는 감촉이 흙 안에 뭔가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색깔이 거무칙칙하다. 어쩜 선연한 황토색의 우리 땅과 이리도 다를까? 나무들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풀이 끝나더니 갑자기 드넓은 평원이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고, 생생한 풀이 그저 온 세상의 전부인 듯 내 갈색 눈을 채운다.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가도 집 한채 눈에 띄지 않는다. 가슴이 확 뚫린다. 머릿속에 거미줄처럼 남아 있는 너절한 관념의 찌꺼기들이, 하찮은 사건의 후유증들이 단번에 날아가버린다. 늘 막힌 공간에, 재단된 넓이에 길들여진 시야는 오히려 방향을 못 잡은 채 허둥거리는 듯하다. 몸이 몸임을 느끼지 못한다. 몸뚱이의 무게와 부피를 느낄 수 없다. 그저 한줄기 바람, 한줄기 초록의 기운이 느껴질 뿐이다.
중간중간에 길 옆으로 타이가의 삼림이 자리를 잡으며 선을 이루고 있다. 수평의 면에 수직의 선을 긋는 백양나무 숲이 없다면 인간은 그 광활함에 짓눌려 정신적인 방황을 할지도 모른다.
진초록의 평원 한가운데에 까만 점들이 뭉쳐 있다. 수백 마리의 양떼가 입을 오물거리면서 풀을 뜯으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수십 마리의 말떼도 풀을 뜯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몇 마리는 겅중겅중 뛰면서 무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말의 다리가 길쭉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도 실하고, 덩치가 크다. 늘씬한 느낌이 든다. 몽골초원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사람들의 윤기있는 환호성을 싣고 차는 평원을 달린다. 갑자기 군데군데 그림자가 지며 풀밭의 곳곳이 더 짙어진다.
우리의 한국 하늘은 산의 자태에 따라 조각난 채로 늘 머리 위에서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 평원의 하늘은 너르고, 구름도 말떼처럼 덩어리를 이룬 채 달린다. 구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림자를 진하게 드리운 듯하더니 차 유리에 방울방울 무늬들이 돋아난다.
번쩍번쩍. 녹색의 평원에 날카로운 선들이 급하게 그어진다. 번갯불이 평원 저쪽을 반점처럼 훤하게 밝히더니 빗줄기가 언뜻언뜻 나신을 드러낸다. 침엽수의 가는 이파리들은 불꽃을 일으킨다. 바늘에 찔린 손마디처럼 빨간 핏방울이 솟아오른다. 우레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부딪힘이 없는, 걸림이 없는, 정제하는 관이 없는 무한 속에서 거대한 공명의 울림이 대평원을 채운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천둥소리다. 이미 인간의 소리들이 범람하다보니 인간의 귀,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소리, 창조의 소리, 법열의 소리를 멀리한 지 오래다. 옛 자연인들은 천둥소리가 들릴 때 세상이 열리는 소리로 알고, 그래서 우주가 그려진 북을 치면서 천둥소리를 흉내냈다.
구름이 걷히면서 빗줄기가 버스보다 멀리 사라지고, 물기를 머금은 평원은 새롭게 빛났다. 초원의 풀잎들은 물방울이 맺혀 수억만 개의 햇살로 빛나고, 때때로 차창을 스쳐가는 백양나무들은 더 새하얘진 몸뚱이에 이파리들이 푸르다못해 검푸른 빛을 띤다.
창밖으로 물기가 촉촉하게 배인 풀밭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연한 보랏빛 안개가 낮게 피어오르고 있다. 야생화가 밭을 이루면서, 그것도 이랑과 고랑이 있는 우리네 밭이 아니라 끝과 선이 불분명한 평원의 밭을 이루고 있다. 그 별 같은 점점의 작은 꽃들이 모여 풀의 평원이 아니라 꽃들의 초원, 꽃들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도 하얀 민들레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코리나야 슬레포타란 이름의 노란꽃들이 별들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다.
불현듯 타이가의 겨울 정경이 궁금해진다. 말 그대로, 느낌 그대로 시베리아의 추위와 음습함과 어둠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을 채우고 있었을까? 타이가의 눈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어떤 모습으로 낙하를 하고 비상할까?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사연 많은 살춤을 추는 어린 무당의 몸짓처럼 처연할까? 신들린 남자 샤먼처럼 신비롭고 의연한 모습일까?
소설 ‘유정’의 무대
시베리아는 내게 정말 각별한 곳이다. 인간의 아름다움, 숭고한 희생정신, 책임감 있는 사랑에 대해서 절절하게 느끼게 한 무대가 바로 이곳 시베리아다. 겉표지에 소박한 삽화가 그려진 톨스토이의 ‘부활’을 펼치면서 카튜샤를 쫓아가는 네플류도프(30년이 지난 세월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담겨 있다)의 마음으로 시베리아를 헤맸다. 남들보다 좀더 복잡하고, 좀더 진지한 열혈청년인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장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가보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졌을 때 시베리아는 나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는 옴스크에 유형당하면서 시베리아의 겨울과 여름 그리고 하늘과 평원 타이가를 체험하고 인간과 대자연의 섭리를 절절히 체험하였던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Some where my love’의 멜로디 속에서 라라를 태운 썰매가 질주할 때 시베리아는 비로소 아름다운 설경으로 다가왔다.
이광수도 이곳 시베리아의 바이칼을 무대로 1933년에 ‘유정’을 썼다. 최석과 남정임이 순백의 사랑을 뿜어내던 곳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으리라. 이르쿠츠크에서 멀지 않은 삼림에 두 별들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광수는 왜 최석을 바이칼로 떠나게 했으며, 그를 사모하는 정임과 딸 순임으로 하여금 최석을 쫓아 이 먼 지역까지 오게 했을까? 순백의 자연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두 주제의 어울림도 있지만 그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는 않았을까?
반도적인 현실과 조각난 삶에 넌덜머리가 난 춘원은 아마도 사람들을 멀리 더 큰 세상으로 데려가서, 거칠고 웅장한 자연과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최석의 부인으로 대변되는 봉건적이고, 잔일에 열을 올리면서 제 살을 뜯어먹는 사람들과 현실에 순수의 삶과 열정의 세상, 그것을 용납하는 대자연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반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광야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우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연인을 그 곳에 묻어두고 온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처럼 누군가가 와서 그들의 무덤을 찾아주려니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순수하기는 하나 난세를 살아가고 세파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점잖고 힘이 없다. ‘유정’의 주인공을 맡아 예명을 받은 영화배우 남정임이 유방암을 못 이겨 요절한 것은 우연일까.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그런 사랑, 그런 순수가 그립다. 사람들이 점점 짐승과 기계의 잡종이 돼가는 현실 속에서.
확실히 그 시대에 호흡했던 사람들은 경험의 폭이 크고, 훨씬 진지했으며, 삶의 무게도 요즘의 우리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의 사고, 자유로움, 순수함이 그립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대평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넓이란, 무한한 평원이란 자유 그 자체였을 테니까.
실제로 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광활한 땅을 택했다. 반도의 산골을 버리고 만주로 건너간 그들은 이 참에 아예 만주라는 옛 땅을 회복하고, 멀리 서로 북으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립군들은 독한 일본인 밀정과 비정한 중국관헌, 잔인한 마적떼를 피해가면서 시베리아까지 흘러 들어왔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들이었지만 적어도 세계를 무대로, 그리고 이러한 시베리아를 자신들의 삶 속에 진리를 추구하는 도량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잿빛 늑대의 신비로운 털빛과 울음소리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가슴을 어떻게 후벼팠을까? 바이칼의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상념에 젖어들었을까?
이 타이가와 대평원이 펼쳐지는 시베리아의 넓이와 대자연의 장엄함보다도 더욱 무겁고 너르고, 깊이 있고, 숱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이 바로 역사다.
빈 땅, 시베리아의 역사
우리는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여섯 시간째 한국제 중고버스에 실려 타이가의 대평원을 지나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왜 만나려는지, 꼭 보아야 하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만남의 필요성을 느꼈고, 한번 그 특이하고 신성한 울림이 있는 이름을 듣는 것으로, 또 그곳이 나의 볼기에 몽골반점이라는 멍자욱을 남긴 삼신할매의 손길 혹은 탯줄을 묻은 땅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심증을 믿고 이렇게 찾아와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미래학이다.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현재 역사의 무대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9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뜨겁다. 버스는 힘겨운 내색을 하면서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바이칼 주변에 오면 해발 1000m가 훨씬 넘는 거대한 산악지대가 된다. 대평원의 넓이 때문일까, 경사도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버스는 높은 길을 나름대로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우린 늘 편안하고 안온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사계절의 순환과 계절풍, 홍수와 한발 등 일정한 규칙을 가진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인간을 압도할 만한 크기나 넓이, 현상들을 가진 자연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만약 먼 조상들처럼 만주벌판과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찬바람이 휘휘 휘몰아치는 시베리아의 평원과 타이가의 수풀 속을 헤매고 다녀보았다면, 자연과 역사에 어리광을 피우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텐데. 그 어리광 때문에 결국 근대에 이르러 고난의 삶을 자초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가 한(恨)이 많다고 자처했으니 티베트의 고원 몽골초원, 만주의 대삼림지대 등에서 삶을 영위한 다른 몽골로이드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들처럼 강인한 정신과 크고 건강한 세계관을 지니면서 타고난 좋은 환경에서 땅과 역사를 잘 가꾸어왔다면, 우린 어쩌면 세계사에 남을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 초원을 달리면서 고구려인과 광개토대왕을 계속 떠올리는 걸까? 그가 왔을 가능성 때문에? 물론 그의 기마군단이 이곳에 말 발자국을 남겼을 수도 있다. 바이칼 지역의 오르혼섬을 점령했다는 전설의 고구려 장군은 대왕의 휘하군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러한 세계를 보고, 그것이 고구려정신에, 신세계 건설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때문이다.
시베리아(Siberia)는 빈 땅이라는 의미다. 사실은 빈 땅이라기보다는 버려진 땅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50만년 전부터 인류는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바이칼지역 바트순탄(Batsuntan)산맥에 있는 동굴 안에서 9세 가량의 네안데르탈계 소년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르쿠츠크시에서 80km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말타(Malta)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또 부레(Buret)유적에서는 맘모스의 상아를 깎아서 새, 나체 여성, 임부상 등을 부조하였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짙다.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많은 유적들이 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대다수가 예니세이강 중류, 특히 일찍부터 철을 채취한 야철술이 발달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앙가라 유역의 이르쿠츠크와 브라츠크 주변지역, 레나강 상류 지역의 묘에서는 활과 화살, 토기, 마제석부, 연옥제, 돌도끼 등이 나왔다. 이들 신석기문화는 아파나시예프(Afanasiyev), 안드로노포(Andronovo), 카라수크(Karasuk)로 이어지는 청동기문화에 계승되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배웠다.
바이칼지역의 기하문 토기는 북만주의 송화강과 눈강 유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운 다음에 만주를 거쳐 한반도 서북부, 한반도 남부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이칼 유역은 연옥의 산지인데, 멀리까지 교역하였다. 그 가공기술이 발해만 유역의, 우리와 관계깊은 홍산문화(BC 4000∼BC 2300)에 전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시베리아-예니세이강 중류, 앙가라강-레나강 상류 지역은 동부유럽평원과 우랄산맥지역과 함께 시베리아 3대 예술의 중심지로서 암각화가 많다. 동심원을 주로 표현하고, 사냥장면을 그린 암각화는 연해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울주군의 암각화들에 영향을 준 듯하다. 최근에는 한국암각화회원 등 학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상호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에 살았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기점으로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골초원을 경유하여 중국 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 서북부 등지로 남하한다. 이러한 문화이동과 현상들 때문에 바이칼지역은 우리 문화의 원류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민족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을 찾는 것처럼 지난한 작업이지만,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지금 내 검은색 가죽지갑 안에는 단군영정이 들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후의 변동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땅, 얼음과 눈보라, 빼곡하게 들어찬 타이가 숲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리고 야쿠트, 부랴트, 에벤키, 퉁구스 등 몽골로이드의 여러 소수 종족들만 번갈아가며 혹은 지역을 달리하면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거주해 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다가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개척과 약탈이 시작되었고, 후에 다시 모피상들과 유형자들이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유르타에서 맞는 호수의 밤
이제 오르혼(Olkhon)섬이 가까워지고 있다. 칭기스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고,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인 신비의 섬이다. 거리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 역사의 이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차는 20호 남짓한 마을을 지나 오르혼섬으로 건너가는 메레에쓰 선착장에 닿았다. 거의 10시가 다 돼가는 시각이다. 눈빛 같은 백무지개가 호수 위에서 하늘로 오작교처럼 걸려 있다. 햇살이 축축해지고, 바이칼의 물빛에 젖은 풀들도 습기를 머금어 퍽이나 부드럽고 목가적으로 보인다. 풀을 뜯어먹는 얼룩소 한 마리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다. 바이칼의 호반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드디어 바이칼의 물을 몸에 적셨다.
생나무의 송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배를 타고 오르혼섬에 닿자마자 곧 잠이 든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황량한 언덕과 마른 고사목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햇살의 흔적에 나신을 드러내며 불안의 신화를 노래하는 듯한 곳이다. 유르타(몽골의 겔과 같은 이동식 주거) 몇 채가 하얀빛으로 썰렁하게 원형을 이루었다.
전기도 없어서 주위는 캄캄했다. 아무리 백야라만 이미 날을 넘겨 12시가 넘은 시각이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냐 하면 바로 그 아래에서 바이칼의 물이 빛나고 있는 사실도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을 정도다. 망연자실한 우리들은 어둠 속에 방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홀린 듯 넋나간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온다.
“우린 선사시대에 와 있는 거야.”
“우린 지금 쥐라기공원에 있는 거야.”
얼마나 급조한 건물인지 한 유르타에는 아예 난로도 없었다. 주먹만한 휴대용 가스버너 2대만 놓여 있었다. 거의 블랙코미디 수준에 이르는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식당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새벽 3시 반에 몽골의 초원을 출발하고, 오후 3시에 러시아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때운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은 그 유명한 러시아 흑빵조각뿐이었다. 마실 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바이칼 호반의 유르타에서 자작나무 잎으로 만든 마사지용 비를 사용하여 사우나를 하면서, 모닥불에다 양바비큐 요리를 먹는 꿈을 갖고 왔는데. 이렇게 맞이한 바이칼의 기묘한 첫밤은 유르타의 어설픈 침상 위에서 깊어갔다.
호수의 밤은 고요다. 침엽수의 끝에 별빛이 걸려 파르르 떨고 있다. 하늘의 그림자가 호수 위를 배회한다. 건너편 산이 별빛에 하얀 몸을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다. 유르타의 생나무 냄새가 터무니없이 큰 천장 구멍을 통해서 배어든 바이칼의 밤 내음과 빚어져 추위에 떠는 우리의 코를 감동케 한다.
밤이라 그런지 호수의 무게, 역사의 무게가 진중하게 감지된다. 갈색 곰이 할퀸 호수의 밤, 잿빛 늑대의 울음소리가 물결을 일으키는 바이칼 호반에서 우리는 이제 잠이 든다. 고요가 고요를 삼키는 곳. 바이칼의 고요를 안고 편안하게 잠을 이룬다.
새벽이 날 깨웠다. 백야의 북국에도 새벽은 있다. 그믐달이 처연하고, 육감적으로 흰빛을 토한다. 바이칼은 기가 꽉 차 있다. 만져지는, 가슴으로 만져지는, 머리칼로 만져지는, 콧김과 입술로 만져지는 생(生), 푸른 덩어리로 꽉 차 있다. 북국에도 샛별은 햇살을 대신해 어둠과 마주하면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바이칼은 소리 없이, 생명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환한, 발그레한 안개의 몸으로 색깔과 마음을 하늘과 수풀과 우리들에게 내보이고 있다. 환한 살결 위로 신비로움이 퐁퐁 뛰어다니고 말간 물속으로 백야가 흘린 햇살이 스며든다. 생명의 기쁨이 하늘로 솟구친다. 바이칼은 두께와 부피가 없다. 밝고 맑고 환할 뿐이다. 이 신비함은 어떻게 생겨난 건가? 독특하고 생동감 있는 이름 때문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씨앗을 뿌리고 키우며 열매를 간직해 온 역사 때문인가, 아니면 끝을 모르는 깊이 때문인가? 바이칼이 무게로, 깊이로 마음을 채워간다.
바이칼이란 독특한 울림을 지닌 이 이름은 태생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곳에 오래 전부터 살았으며, 바이칼의 주인이라 불린 사람들이 브랴트족이다. 그들은 몽골의 한 갈래다. 우리와 외모가 비슷하고 유사한 신앙과 풍속을 지닌, 우리처럼 하늘과 물의 신령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혈통적으로도 우리와 관련이 깊을 가능성이 높다. 한 부랴트 샤먼이 오르혼섬의 메마른 구릉을 달리면서 나직하게 말해 주었다.
“원이름은 ‘바이갈 달라이’다.”
그 아름다운 소리는 바이칼의 대자연을 찬미하고 신의 섭리가 담겨 있는 대서사시의 호리병 꼭지를 열라는 계시다. ‘바(베)이’는 멈추다, ‘갈’은 불, 그리고 ‘달라이’는 몽골말로 바다라는 의미다. 러시아인들이 ‘갈’ 발음이 안되니까 ‘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불이 멈춘 바다’ 그것이 바로 바이칼의 태생인 것이다. 그게 2500만년 전의 일이다.
불과 물의 만남은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는 법.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늑대와 사슴 곰들이 살았고, 물 속에는 강물을 타고 온 수달과 멀리 북극해에서 온 물개, 오물 등 각종 물고기들이 살았다. 이렇게 온갖 생명의 씨앗들이 바이칼과 주변에 뿌려지고, 그래서 바이칼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바이칼에 오면 막연하게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신비함에 몸을 떨며, 왠지 낯설지 않은 곳, 언젠가 한번은 온 듯하다는 친숙한 느낌을 지닌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바이칼의 비밀을 풀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극히 최근에 들어서서야 물결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면서 물속으로 들어가 그 내밀함의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길이가 636km, 최대너비 79km, 면적 3만1500km2. 초승달 모양으로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길쭉하게 뻗어 있다. 둘레는 2200km로 담수호로서는 가장 넓고, 최대심도가 1742m로 가장 깊은 호수다. 1990년 6월에는 미소 합동조사단이 420m의 깊이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하였다.
바이칼은 북방 땅에 삶과 문화의 둥지를 틀었던 모든 종족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연과 의미를 간직한 공간이다. 그래서 제각기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부랴트보다 먼저 살았던 야쿠트인들은 자신들을 ‘사하’라고 칭하면서, 이 호수를 ‘바이쿨’로 불렀다. 풍부한 호수라는 의미인데, 물고기와 새가 많기 때문이다.
퉁구스인들은 ‘라무’라고 불렀는데 비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흉노족(후에 훈족)들은 바이칼을 ‘텡기스’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천지(天池)인 것이다. 텡글은 알타이어의 투르크 계통에서는 하늘을 의미한다. 흉노의 왕은 그래서 하늘의 자식 즉 ‘텡리(텡그리 등)고도’라고 부른다. 육당이 단군의 또 다른 표현인 당굴의 어원을 텡그리에서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먼 곳, 서역을 지나 알타이를 넘고 초원을 수천 킬로미터 지나서 있는 아라비아인들은 바흘아하바카(먼 북동쪽의 호수)라고 불렀다. 중국인들도 베이해(北海)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야기(15세기 무렵)에는 이 곳에 중국인 포로들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장수가 오르혼섬을 정벌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는 충격적인 전설과 함께.
우리는 아득하게 생각하는 이 시베리아지역의 바이칼이 사실은 인류의 역사, 몽골로이드의 역사에서 보면 혈통이라는 인연상으로도 가깝고,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문화의 접촉 면에서도 멀지 않고, 사실 거리로도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한번의 이동거리가 몇백 킬로미터 몇천 킬로미터씩 되고, 이동시간을 한달, 1년 단위로 하는 북방 유목민에게 바이칼과 북만주 그리고 남만주는 영 만날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초원의 길로 연이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바이칼과 백두산 천지는 쌍생아
언덕에서 바라보면 시야는 온통 물이다. 바이칼은 물 그 자체다. 말간 물, 환한 파란빛이 도는 물, 연하고 부드러운 물이다. 안개조차 음습하거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호수라면 육지와 짝을 이루는 물이다. 육지의 물이 담겨 있고, 육지의 다른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바다가 호수와 다른 것은, 단순한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 완결성이다. 그래서 경외심과 위대함을 느낀다. 그런데 바이칼은 바다 같은 호수다.
사람들은 바이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고 찾아오는 경향이 많다. 특히 조그만 반도 땅에서 온 우리들에게 바이칼이란 하나의 나라다. 거기다가 시베리아라는 얼음과 유형장, 소련 등등 어둡고 슬픈 무거운 이미지가 겹쳐 바이칼은 압도적이고, 강력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믿어왔다. 일리야 레핀은 혁명이 성공한 후에 유형장에서 돌아온 혁명가들의 처참하고 허무한 몰골을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내 눈과 마음을 채우는 바이칼은 아름다운 생명의 덩어리다. 사람들과 더불어 생명을 나누고 받으며 존재하는 믿음직한 연인이다.
북국에 사는 종족에는 물(primitive water)과 관련된 신화가 많다. 바이칼은 물이고, 물은 현실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바이칼은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우나 고우나 같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바이칼은 북방세계의 모든 것이 탄생하는 자궁이다. 그래서 신성한 하늘에 있는 연못이다. 그리고 남쪽에도 있으니 그것이 백두산의 천지다. 이렇게 북방사람들에게 천지는 북과 남에 각각 하나씩 있는 쌍생아다.
다만 남천지는 바이칼보다는 관념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규모는 작지만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의 꼭대기에 물이 깊게 차 있고,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며, 화산 활동의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 있어 경외심을 한껏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대삼림과 높은 고원으로 둘러싸여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아마 북방에서 남진해온 종족들에게 백두산의 천지는 바이칼을 떠올리는 의미의 장소며, 그래서 백두산(태백산·불함산·도태산·개마산 등)이란 명칭과 아울러 천지는 이 지역에 정착한 집단에게 존재의 근원을 의탁한 신성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제 남천지의 백성인 우리들은 역으로 또 하나의 원향인 북천지를 향해서 이렇게 온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군은 이 오르혼섬을 보았을까? 바이칼의 푸른 물을 보았을까? 순례자의 발길로 이곳을 찾고 이 물에 목을 축이면서 하늘을 우러렀을까? 장수대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의 첫 구절에 따르면 주몽은 나라를 세우러 가면서 “난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물의 신인 하백의 원 터가 이곳 바이칼이 아니었을까? 동명왕의 어머니인 유화,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이곳에서 내려왔을까?
나무꾼과 선녀 설화
바이칼을 무대로 한 부랴트인의 설화에 강원도 금강산에서 전해 내려온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유사한 것이 있다.
호리도리라는 노총각이 어느날 바이칼에 가서 말없이 너른 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때 오리, 갈매기, 백조 등 물새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파란 물결 위에 유난히도 곱고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서 내려오더니 물위에 사뿐히 앉아 어여쁜 선녀로 변하였다. 그러더니 찬란한 옷을 훨훨 벗어 호숫가에 놓고, 눈부신 알몸으로 물속에서 즐겁게 헤엄을 쳤다. 호리도리 청년은 바위 뒤에 숨어서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살금살금 기어가 선녀의 옷을 훔쳐서는 풀숲의 은밀한 곳에 숨겨버렸다. 선녀는 당황하고 놀라 어쩔 줄 몰랐다. 부끄러운 몸을 감추면서 울면서 옷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이때다 싶어서 선녀에게 다가가 달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 선녀는 다름 아닌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미희인 텡그리고아(天美)가 변해서 된 선녀였다. 정을 나눈 선녀와 호리도리는 결혼해서 아들을 열하나나 낳고 잘 살았다. 그래서 호리라는 성을 가진 11지파의 선조가 되었다.
호리는 고구려의 선주 국가인 고리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아기자기하거나 감칠맛이 부족하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하늘과 물을 이어주는 모습도 없다.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두레박의 낭만과 그속에 숨어 숨을 죽인 채 하늘로 비상하는 나무꾼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하늘과 늘 이어지기를 원하는 인간의 바람은 곳곳에 천지와 하늘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바이칼은 어디든, 고개를 돌려보는 어느 곳이든, 밟고 살결을 스치는 어느 곳이든 기가 가득차 있다.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도 원시성과 야생이 살아 있다. 잔인하리만치 무성하고 격렬한 내부의 정열을 감춘 원시림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길이가 600여 km, 폭이 80km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를 둘러싸고 높고 험한 산맥이 뻗어 있다. 오르혼섬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서쪽의 호수 주변에도 거대한 산덩어리들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6월의 여름날, 백야가 지속되는데도 잔설이 남아 있는 것은 산이 깊고 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귀하고 소중한 원시성이 사라지는 곳이 늘고 있다. 마구 베어낸 탓이다. 바이칼에는 구릉이 많다. 한점의 이파리도 없이, 잔가지도 없고, 그저 드러나지 않은 뿌리와 몸통, 약간의 줄기가 공중으로 뻗은 나목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우연처럼, 정말 우연처럼 이미 생을 마감한 듯이 보이는 고목들이 흰 나목이 되어 너른 면에서 수직의 선을 긋고 있다.
그 구릉의 평면이 끝나 수평의 선이 생긴 곳에는 푸른 물이 걸려 출렁거린다. 하늘과 호수가 하나가 되어 면의 끝에서 또 하나의 너른 면, 가없는 면을 이루고 있다. 바이칼의 수면은 늘 언제나 그대로이지는 않다.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더 큰 자연의 손길을 좇아 몸과 마음의 모습을 달리한다. 안개도 찼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물빛은 파랗고 환하다.
저수량은 2만2000kℓ에다, 1700여m의 깊이니 그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생물, 크고 작은 자연의 흐름이 차 있겠는가. 2500만년 동안 생성되고 쌓인 역사의 업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겁겠는가? 그래서인지 말갛고 파란 물위에는 신비함이 늘 안개처럼 깔려 있다. 그런데도 부드럽고 편안하고, 환한 느낌을 준다.
바이칼의 백야
오르혼섬의 서쪽 건너편에는 하얀 몸을 드러낸 산맥이 호수를 따라 펼쳐져 있다. 해발고도 1500∼2000m인 바이칼 산맥이다. 화강암인 듯 산의 몸이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산 능선의 머리쯤에는 또 하나의 하얀색이 두께가 불규칙한 선을 이루고 있다. 6월 중순의 여름에도 이곳 바이칼의 산맥은 겨울의 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2월에서 5월 초순까지 얼음이 언다고 하나 6월초까지 얼음이 남아 있어서 러시아 당국은 비행기를 동원하여 폭격을 했고, 그 여파로 이르쿠츠크시에 홍수가 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저녁이다. 바이칼은 늘 해와 더불어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늘 해가 있는 듯하다.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쨍쨍 내리쬐고, 바이칼의 파란 물위에는 하얀 햇살이 일렁거린다. 저녁바람을 쐬면서 석양을 바라보고 싶었다. 파란 수면 위로 번지는 황혼의 불그레한 살결이 어떻게 변하는지 눈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손을 담가 한 움큼 떠서 이곳 사람들처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해가 지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11시가 넘어서야 어둠이 스멀스멀 젖는 줄 모르게 배어든다. 그리고 잠시 덜 익은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해가 떠 있다. 봄 여름철에 해가 길 때는 백야현상이 있고, 그 때문에 싫건 좋건 해와 같이할 수밖에 없으니 온대지방이나 열대지방 사람들이 느끼고 맞이하는 해와는 크게 다를밖에 없다.
반면에 겨울이 가까워지고 깊어지면 해는 사라지고 어둠이 세계를 채운다. 사람들은 해가 없거나 희미한 해그림자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해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더욱 절실하다. 칠흑 같은 어둠의 의미도 밝음을 맞이하기 위한, 밝음을 잉태하기 위한, 신체를 쉬게 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다. 그저 그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 세계다. 때문에 이들에게 해와 어둠은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의미, 관념이 아니라 생활과 실존의 의미, 생존과 식별의 의미다. 그래서 북국의 신화에는 백신(白神) 흑신(黑神)이 동시에 등장한다.
북방종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늘과 해를 숭배하고 있다. 흉노, 몽골, 선비, 거란, 여진 등과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우리 민족국가들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동명(東明)이라는 말 자체가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 초기의 왕들의 성이 해씨다. 그들은 국동대혈에서 해를 맞이하는 동맹의식을 거행했고 스스로를 일월의 아들, 천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백두산은 흰 산, 즉 해가 있고 빛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신라의 박혁거세, 왕의 칭호인 불거내(弗矩內) 등은 다 빛을 의미하는 말이다.
백야현상은 사람의 생리현상에도 여러가지 영향을 끼친다. 불과 며칠 있는 동안에도 심리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컨디션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적응이 돼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지만, 역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 생활습관도 다르고, 문화도 이색적인 것이 많다. 호흡 긴 동화와 신비한 전설, 신화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여인들의 살빛이 희고, 노출이 심한 것도 부족한 해를 그리워하는 신체적 요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묘한 환경 속에서 나타난 종교가 샤머니즘이다. 엑스터시(忘我 脫我 恍惚)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 접촉하면서 특별한 이적을 일으키는 샤먼이 중심되는 종교 현상을 말한다.
17세기에 들어서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코사크 군대와 모피 장사꾼들의 행렬이 길고 추운 평원에 이어지고, 그 행렬의 중간중간 혹은 끄트머리에 학자들이 따라 붙었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침략이나 약탈을 도우려는 애국심 때문에 그들은 원주민의 독특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에 당황하면서 연구를 하고, 이를 샤머니즘이라고 불렀다.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 부랴트, 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바이칼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이다. 그래서 곳곳에 신비롭고 기이한 신들, 상징적인 문양과 묘한 기호들, 악기들로 꽉 차 있다.
바이칼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은 불한(칸)신이다. 불한에는 천신(天神)의 의미도 있고, 부처의 의미도 있다. 불한산은 몽골의 시조와도 관련이 깊다. 볼테치노(푸른늑대)와 아내인 고아바랄(고운 사슴)은 큰 물을 건너서 오논강의 근원지인 불한산 속의 초원에서 바다치한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면 밝음, 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한 또는 칸은 칭기즈칸 계민가한(돌궐의 왕), 거서간, 마립간(신라의 왕)에서 나타나듯 왕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불한신을 찾아 호숫가의 한 마을로 접어들었다. 보쉬트에는 약 1500명 정도의 주민이 어업을 주로 하면서 살고 있다. 겨울에는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고 눈은 많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쿠후지르 마을의 중앙로인 바이칼거리의 초등학교 안에는 오르혼섬의 역사민속박물관이 있는데, 정말 다양하고 실제적인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바이칼에 서식하는 동물·식물·어패류를 비롯해 부랴트인 등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사냥도구·고기잡이도구, 그리고 종교용 의기들도 있다. 석기 유물들도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서 오르혼섬이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 뒷산으로 가니 바다 같은 호수가 보인다. 바람이 불어 시원하게 머리칼을 날리는 그곳에 조금 너른 공터가 있고, 그 끝에 벼랑과 만나는 곳에 두어 그루의 마른 나무가 서 있다. 당나무처럼 갖가지 색깔의 천조각들이 매달려 있어 신목(神木)임을 알려준다.
호수 쪽을 보니 별안간 눈이 부셔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며 시야를 고정하기가 난감해졌다. 아침에 본 바이칼의 물빛이 떠올라 워낙 맑고 푸른 물이라 햇살에 반사돼 쏘는 빛인가 했는데, 의외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아” 하는 신음과 환희가 섞인 듯한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순백! 맑고 투명하고, 작열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바람결에 바스라져 날릴 것 같고, 손바닥에, 옷깃에 묻어날 것 같은 순백의 덩어리가 파란 물위에 뜬 채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고 있다. 걸음을 옮긴다. 흰색 갈색이 바랜 듯 섞인 젖소들이 풀을 뜯으며 어슬렁거리고 있다. 바로 그 앞에는 장방형 선을 그리면서 흙의 일부가 파헤쳐져 있다. 제사유적을 발굴하던 자리란다.
위에서 보니 모래사장이 이어지다가 다시 벼랑이 솟구쳐 오르면서 좁게 오므라진 땅을 통해서 섬과 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곶(串) 같은 형태의 바위 봉우리가 돌출되어 있다. 뾰족한 봉우리와 날카로운 능선을 지닌 바위덩어리다. 주위에서 오로지 그 덩어리만 새하얗게 빛을 내뿜고 있다. 그 아래에는 양털로 짠 양탄자의 무늬 같은 잔물결들이 일렁거린다. 파랑과 연두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메마른 백색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물빛이 햇살을 받아 일렁거리고 있다. 마실 마음조차 지닐 수 없도록 곱고 투명한 물빛이다. 마음을 정화하고 맑게 하기에 이처럼 적당한 장소가 다시 있기는 힘들 것 같다.
해골이 나뒹구는 동굴
벼랑을 타고 아래로 급하게 내려간다. 경사진 곳의 한 중간에 당나무가 서 있다. 살찐 녹색의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달린 10m 높이는 족히 돼보이는 나무가 있고, 두께 4∼5cm의 눈빛 같은 자작나무 두 그루가 받쳐진 모습으로 묶여 있다. 갖가지 색깔의 천들이 묶여진 세르게라고 불리며 우리의 성황당목과 같다. 오색천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데, 유달리 파란색 계통이 많다.
파란색은 하늘을 의미한다. 어둡고 칙칙한 숲속이나 습기가 많거나 음산한 기운이 도는 곳이면 귀기가 어릴 듯한 모습이지만 너무나 밝고 명징한 분위기 때문인지 밝고 환한 신령스런 분위기가 감돌아 명랑한 느낌마저 들었다.
호반으로 내려서자 바위산이 눈에 꽉 들어찬다. 바로 미즈반도의 불칸(부랴트발음으로는 불한이다)바위다. 그 안에 13번째의 신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무당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굴이 있다. 불한이라는 낱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어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브랴트인들은 부처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바이칼 사람들은 여름에는 배를 띄워 오물 같은 맛있는 생선을 잡고, 겨울에는 얼음 위를 달리면서 구멍을 뚫고 네르파 같은 물개를 잡는 어부들이다. 그들이 신앙을 갖고 있고, 특히 신령스러운 현상을 지닌 자연을 숭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른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 분위기는 신성을 부여하기에 얼마나 완벽한 장소인가.
포개지고 굴러다니는 바위돌들이 새하얗다. 사람들이 흩어져서 하얀 바위의 이곳 저곳에 붙어 흔적을 남긴다. 찾는다는 미명으로 사실은 이곳 저곳을 밟아보고 만져보고 살결을 부벼대며 이곳 불한신의 신령스러움을 묻혀오려는 행위 같다.
우리가 접근한 쪽의 반대편, 물이 바로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벼랑의 중간쯤에 굴이 있었다. 샤먼스카비쉐가라는 이 동굴은 폭이 2m가 조금 넘고, 높이가 2.5m 로 불규칙한 형태의 입구와 내부를 가진 동굴이다. 흡사 고분 속 같은 내부에는 평평한 터가 없고 안쪽으로도 무너져내린 흔적이 역력하다. 원래는 무너지기 전에 양쪽으로 뚫려 있어서 한쪽의 좁은 구멍으로 햇빛이 비쳐들게 돼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부여족의 설화에서 흔히 나오는 햇빛(日光) 감응 모티브의 무대가 될 만한 곳이다. 유화부인은 어두운 방에 유폐되어 있다가 빛에 쬐여 임신을 하고 알을 낳았다. 그 알을 깨고 나온 인물이 바로 주몽이다.
북방종족들의 신화에서 알은 태양을 상징한다. 해와 천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들어오는 입구와 빛으로 상징되는 천신이 천강하는 입구가 달라야 한다. 때문에 신화적 굴은 한쪽뿐만 아니라 양쪽으로 뚫려 있어야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동쪽 외곽에 있는 국동대혈도 양쪽이 뚫려 있는 엄청난 크기의 동굴이다. 겔과 유르타도 천장이 뚫려 있어 신들이 해와 별빛을 타고 내려온다면 이 천장을 통할 수밖에 없다. 모든 신앙이 그렇듯이 이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이 동굴 안에 여자무당의 해골과 개 해골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그녀가 밤이 새도록 바이칼의 물소리를 어둠속에 버무려 들으며 기도를 한 후에 뚫린 구멍으로 새벽빛을 보고 나와 바라본 물 빛깔은?
이 바위로 내려오기 전에 있는 수풀은 신성한 곳이었단다. 무당이 죽으면 시신을 들고 이 숲속에 들어가 화장을 해서 재를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온다고 한다.
섬의 북쪽에서는 십수년 전에 마지막 샤먼이 죽었을 때, 알몸으로 묶여 숲속의 제단에 받쳐졌으며 화장을 했다. 브랴트인들은 땅속에 매장을 하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들을 매우 신성하게 여겨 주변의 나무와 덤불에 세멜가라는 부적을 매달았다.
환한 물결과 맑은 하늘, 약간의 건조한 안개가 남아 있는 묘한 분위기 그리고 순백의 바위산과 제의장소인 동굴, 오색천을 나부끼는 세르게. 이 미즈반도의 불칸 바위로 가는 무당들의 모습. 달빛이 비치는 밤중에도, 백야의 힘을 잃은 햇살을 어깨에 걸치면서, 아니면 늘 어둠에 잠겨있는 겨울날에도 그들은 어둠속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이 불칸바위를 찾아 발길을 옮기곤 했을 것이다.
호수 위의 고도 오르혼섬
오아시스가 사막의 한가운데 물의 섬이라면, 오르혼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흙과 바위의 섬이다. 사람들은 사막의 광대함 황량함 건조함 때문에 감동받고, 그 안에 아늑하고 푸근하고, 찰랑거리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더 진한 감동을 받는다.
이곳은 풀도 거의 자라지 않아 밋밋하다. 건조하고 메마른 먼지가 일어날 것 같아 입을 마음놓고 벌린 채 숨쉬기조차 거북한 곳이다. 오르혼이란 이름은 부랴트 언어로 메마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곳의 자연환경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오이홍섬이라고도 하는데, ‘오이’는 ‘숲’이며 ‘홍’은 ‘작은’ 이란 뜻이 있어 오이홍은 ‘작은 숲’이란 의미도 된다.
바이칼호 안에는 25개의 섬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이 이 오르혼섬이다. 사실은 독립된 섬, 절해의 고도라기보다는 바이칼 주변의 육지와 연결돼 육지 분위기가 물씬 밴 섬이다. 서쪽에 붙어 있는데, 섬과 육지의 대안과는 20여km에 불과한 곳도 있다.
여름에는 거의 비가 안 온다. 서쪽에서 비를 머금은 구름이 다가오더라도 프리모르스키의 바람막이 지역에만 약간의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러니 섬에는 거의 비가 안 온다고 하는 편이 맞다. 대신 바람이 많이 부는데 ‘사르마’라는 바람은 시속 160km의 엄청난 속도로 섬을 휩쓸고 다닌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도 눈이 별로 많이 오지 않는다.
자연현상으로만 보면 오르혼섬은 메마르고 황량하기조차한, 바람이 불면 먼지 때문에 목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수상한 선입관을 지닌 탓인지 이 섬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뭔가 의미를 간직한 듯이 여겨진다. 뜨겁게 익어가는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 한줄기마저도 예사롭지 않고, 힘겹게 터덜거리며 달리는 차의 유리창을 스쳐 지나는 황량한 정경들도 뭔가 대단한 사연을 지닌 듯 느껴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멀리서 마주치는 살빛이 누런 부랴트인이나 마을에서 만나는 창백한 러시아인들도 왠지 우리와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현대문명의 하수구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콤플렉스 때문이리라. 이러한 분위기다보니 섬에서는 마음이 진지해지다못해, 무겁고 때로는 육체적인 피로와 함께 피곤함마저 든다.
구릉이 산처럼 이어지는데, 도로는 구릉 사이의 능선 부분을 사선으로 휘감고 돌면서 뻗어 있다. 나무는 물론이고, 커다란 바위도 큰 돌도 없다. 심지어는 자그마한 돌멩이조차 별로 없어 혹시 거대한 신이 마음먹고 이 섬을 싹 청소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말끔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때때로 사람 크기만한 바위 같은 돌들이 도로 옆이나 구릉의 한가운데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텅빈 공간에 놓여 있는 몇 개의 덩어리들, 그것은 돌이든 사람이든 나무장승이든 어쩔 수 없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섬의 돌덩어리들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르혼에서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외에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을 느낀다. 신령스러운 기운이랄까? 호수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다. 아마도 범상치 않은 이곳의 역사가 한몫을 하는 듯하다.
따지고보면 이곳의 역사는 대자연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흐름을 갖고 있다. 이 근처에서 일어나 동서로 종횡무진하면서 세계제국의 토대를 건설한 칭기즈칸의 무덤이 이 섬에 있다는 전설이 있다. 북방의 종족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직접 간접으로 이 지역을 거쳐가거나 살았다. 고구려의 조상격인 고리족의 원거주지가 이곳이라는 설(최근 강원대 주채혁 교수가 주장하고 있다)도 있다. 우리가 본 쿠르간 도시유적은 잘 쌓아진 성터며 위치로 볼 때 심상치 않은 감정을 일으킨다.
유목지대에서는 수다한 하늘의 별들만큼, 막막한 초원을 채운 풀만큼 많은 부족들이 역사 이래 생겨나고 스러졌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뭉치고 또 흩어지면서, 자신들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졌는데, 때로는 그 이름이 많은 부족들을 통합한 대표적인 이름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워낙 이동하면서 피가 섞였기 때문에 혈통을 따져볼 때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얼굴이 누렇고 형태와 골격도 유사한 몽골로이드들이다. 더구나 비슷한 자연환경에서 살아오며 사는 방식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인지 생활 풍속이나 습관, 언어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신화도 매우 흡사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공존하기가 힘들었는지, 기회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원주민인 퉁구스, 에벤키, 야쿠트, 부랴트 등은 번갈아가면서 이곳의 주인노릇을 하였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초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인들이 부단하게 이동을 하면서 만나고 부딪히고 타협하고, 때로는 종족의 운명을 걸고 싸웠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바이칼 전체를 보면 지금도 많은 부족들이 주변의 곳곳에서 살고 있다. 오르혼섬은 스탈린시대에는 수용소였으나 현재는 4000여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부랴트인들은 500여 명 정도가 양치기를 하며 살고 있다.
바이칼호에 서식하는 물개
바이칼호엔 18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며, 그중 75%가 이 호수에만 있다. 바이칼 바다표범과 해면(海綿)도 있다. 어업이 발달하여 곳곳에 어항이 있는데, 특히 리스트비앙카, 바부슈킨, 우스티마르구진 등이 비교적 큰 어항이다. 북쪽 연안에는 바이칼-아무르 간 철도(BAM)가 지나는데 겨울에는 얼음 위에 기차의 선로가 놓이기도 했다. 남쪽 연안과 남서쪽 연안에는 우리가 탄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며, 그 중심도시가 이르쿠츠크다.
바이칼에는 네르파라는 담수물개가 유명하다. 북극해와 3220km 떨어진 이곳에 어떻게 해서 물개들이 서식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이가 1.5m에 무게가 130kg인 네르파는 4개의 흰 대리석 섬들로 이루어진 우쉬카니 군도에 특히 많이 산다. 은빛 가죽이 아름다워 사냥꾼들 침을 흘리게 하는데, 약 10여 만 마리가 있지만 1년에 6000마리까지만 사냥할 수 있게 제한한다. 물개사냥꾼들은 불한을 호수의 신으로 숭배하고, 항해를 할 때는 보드카를 바치면서 안전을 기원한다. 호수 위의 카우보이인 사냥꾼들은 겨울에는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얼음낚시를 한다.
특산물인 오물이란 물고기는 20cm 정도 크기인데, 몸 성분의 40%가 지방이다. 몸을 통해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한 것도 있다. 주민들은 훈제를 해서 두고두고 겨울에도 먹는다. 민가에 들어가 살펴보니 뜰안 담쪽 구석에 벽돌창고를 지어놓고(처음에는 화장실인지 알았다) 집안의 난방시설과 땅속에 묻어놓은 토관을 통해 연결해 놓았다. 불을 때면 연기가 자동적으로 흘러나와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오물을 말렸다. 연기에 그을린 기름투성이의 오물은 그냥 씹어먹어도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 맛있는 물고기다.
또 바이칼 호수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이유를 밝혀주는 물고기들도 있다. 이곳 주민들은 모피를 생산해서 돈을 벌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초기에 이 모피 때문에 정착을 했을 정도로 질 좋은 모피가 많이 생산된다. 여우, 흑담비, 다람쥐, 곰, 범 등 아주 다양하다. 특히 담비는 이 지역뿐만 아니라 대흥안령 지역에서도 생산되어, 고구려인들은 이를 구해 중국 남방지역에 파는 중계무역을 하기도 했다.
오르혼섬을 찾은 우리는 이 섬이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이므로 당연히 샤먼을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마중하기 위해 나는 뼈에 금 간 다리를 이끌며 황량한 오르혼섬의 내부를 달렸다. 첫만남은 대낮, 햇살이 뜨거운 황량하고 메마른 구릉 위에서였다. 무릎에 닿을 정도의 작은 나무마저도 한 그루 없다. 때때로 덤불 같은 나무들이 뭉쳐 있고, 들꽃들이 질기고 강인한 눈초리로 낯선 이들을 바라보는 황량한 구릉지대다. 멀리 높아 보이는 구릉의 꼭대기에는 오로지 하늘이 있을 뿐독수리 한 마리가 지친 듯 크고 천천히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만남은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가진 본능적인 순수함과 격의없는 태도로 나를 대했지만, 나 역시 이곳에서는 바이칼의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교감이 이루어졌다.
그는 발렌타인이라는 러시아 이름과 박수라는 부랴트 이름을 지니고 있다. 부랴트인은 우리보다 더 몽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얼굴이 둥근 편이다. 그는 현재 학교 교사이고, 지역 박물관의 관장이다. 그러면서 샤먼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지만 이곳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샤먼이 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교사 역할이다. 다만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전체에게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운행, 사람이 할 도리,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니 지적으로 최고의 엘리트가 샤먼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서구식 교육과 서구식 종교만을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이다.
메마른 오르혼의 구릉 위를 스쳐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에서 뭔가 웅얼거리고 스쳐간다. 그의 두터운 입술은 바이칼의 역사와 자연 하늘과 땅의 역사에 대해서 시를 읊어대었다.
“오르혼의 하늘에 독수리가 날고 있다/ 이 새들의 집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높다란 산 위에서 그들이 세계를 살펴보고 있다/ 여러 소리들이 있는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양을 키우고 있다/ 이 땅 위에 흉노 선비 오환 퉁구스 에벤키 키르기스 등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오르혼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와 걷고 있는데 구릉의 곳곳에 하얀 돌멩이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커다란 조개껍데기들이 놓여 있는 것 같다. 다가가서 보니 모두가 해골과 뼈들이다.
바람에 쓸리고, 햇빛에 타고, 빗줄기에 인성분마저 녹아버려 허옇게 변색한 여러 동물의 해골들이 불규칙하게 나뒹굴고 있다. 부랴트인들이 하늘과 신들에게 성스러운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담긴 장소다.
새 숭배신앙
그들은 말과 소를 잡아 하늘에 바치는 의식을 행한다. 그 다음에는 둘러앉아 고기를 같이 먹고, 해골과 뼈는 거두어 이곳에 놓아둔다고 한다. 마치 산골처(散骨處)인 것 같다. 구멍이 숭숭 뚫린 말과 소의 해골이 아래쪽 물가를 향해서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 제사에 희생물이 된 것처럼. 그런데 어떤 것들은 불규칙하게 마구 굴러다니고 있고, 뼈다귀는 함부로 내던져진 듯한 인상이 든다.
마치 이리떼에게 습격을 당한 공동묘지의 을씨년스러운 정경이다. 아마도 늑대나 독수리들이 배회하다가 먹을 것이 생겨 한바탕 휘젓고 다니면서 잔치를 벌인 흔적이리라. 풍장이나 조장도 따지고보면 이와 동일한 모습이리라. 우주와 쉽게 합일되고,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지혜이리라.
손끝을 뻗어 대보니 뼈에 힘이 없고, 푸석푸석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하다. 모든 진이 다 빠져나가 버려 칠흑 같은 밤이 된다 해도 희미한 인불조차 나올 것 같지 않다. 부랴트인에게는 신성한 장소의 의미있는 광경일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밤에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황량한 구릉, 나무 한그루 없어 모든 움직임이 드러나는 선, 백야의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한쪽에는 바이칼의 물이 어슴프레 몸과 살결을 드러낸다. 그 어둠도 밝음도 아닌 묘한 분위기 에서 해골과 뼈다구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때 구릉 저쪽 위의 긴 선에서 잿빛늑대의 실루엣이 울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다가온다면.
부랴트인의 신앙심은 우리들의 그것과 다르다. 절집이나 교회에 가서 건물과 조상들에게 의지하고, 매개자인 그들이 마치 절대자인 양 거들먹대는 권력의 인질이 돼 우주의 본질과 멀어지고 인간에게서 소외되는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늘 우리가 신령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길을 걸을 때, 양떼를 몰 때, 석양을 바라볼 때, 바이칼의 환한 물빛을 바라볼 때 하늘과 물,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의 신앙이란 별다르지 않다. 유별나지 않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틈 나는 대로, 필요한 대로, 흐르는 물길처럼, 바람결처럼 절로 마음을 보내고 손짓 몸짓을 하며, 스스로를 정화하고자 한다.
구릉과 초원을 달리다보면 길가에 서 있는 세르게가 눈에 띈다. 나무를 깎아 1개, 혹은 3개를 연이어 세워놓고, 몸통엔 천조각과 색끈을 묶어 바람에 날린다. 나무끝에는 새를 깎아 앉혀놓은 것도 있는데, 이 새는 독수리다. 이곳에서는 태양의 새인 까마귀가 지옥의 사자이기 때문에 흉조로 여기고, 대신 독수리를 길조로 여긴다. 사람의 혼령을 주기도 하고 뺏어버리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새다. 불한신의 두 아들이 독수리이고, 독수리는 제왕이다.
이러한 새숭배 신앙은 과거에는 동북아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신앙형태였다. 천둥새라고 불리운 곳도 있다. 심지어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서도 독수리 신앙의 흔적이 보인다. 특히 우리는 솟대라고 해서 마을의 입구나 성스러운 장소의 앞에 세워놓았다. 어떤 것은 몽고의 오보에와도 유사한 형태다. 돌무덤을 쌓아놓고 가운데 나무를 세운 것도 있지만, 단독으로 서 있는 것도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첫날 섬으로 들어와 밤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차를 세우는 바람에 약간 긴장을 하면서 차를 멈췄다. 그리고 부랴트인과 러시아인인 블라디미르, 세르게이가 서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어두움 속에서 잠시 대화가 이루어지고 세르게이가 동전 몇 개를 던지는 것으로 이 일은 마감되었다.
마을에 특히 외지인이 들어올 때에는 이 세르게(바리사) 앞에서 일종의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동전 몇 개도 좋고, 물 한 병도 좋고, 과자 한 개라도 좋은 것이다. 이 의식(?)을 항하면서 우린 오르혼섬이 일상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이러한 세르게는 계속 만들고 있는 듯, 어떤 것은 낡고, 오래됐을 뿐 아니라 천도 바래고 너덜너덜하지만, 어떤 곳에는 새로 깎아 격식을 차려서 잘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오히려 신비감이 떨어질 정도의 새것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종교의 침입
서부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의 대륙 곳곳을, 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점령하고, 인도양을 넘어 아시아로 탐욕의 혀를 날름거릴 때, 러시아인들은 동쪽으로 초원과 얼음땅을 가로질러 시베리아로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이곳을 빈 땅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유럽인들이 인디언의 오랜 터전을 신대륙이라고 부르면서 침략한 것과 똑같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으로 동으로 전진했다. 과거에는 동에서 서로 전진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심장부 평원을 몽골로이드가 차지했는데, 이젠 그들의 후예들이, 백인의 사주와 지도를 받아 동으로 동으로 힘을 뻗쳤다. 흑해로 흘러드는 돈강 유역의 짙푸른 초원에서, 흑해의 드넓은 주변 평원에서 말을 달리던 스키타이문화의 계승자들은 다시 이곳을 찾았다. 백인들은 그 군사력과 말잔등 뒤에 숨어서 쫓아와 이곳을 차지하였다.
러시아의 차르는 선교사들을 보냈고,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감에 불타 이 땅의 많은 종족들에게 차르에 대한 충성과 기독교를 강요하였다. 야쿠트, 브랴트, 퉁구스, 보구트, 돌칸, 축치 등 시베리아의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종족들은 일대 혼란과 붕괴에 직면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연이 있고, 그들의 우주 속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무난하게 타협하면서도 자기 것을 지켜나가는 지혜와 아량이 있었다. 그런데 타협과 공존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터의 주인인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침략자들이었다. 이러한 시베리아적인, 아니 세계사적인 운명이 바이칼 주변에 살고 있는 부랴트인들에게도 닥쳐왔다. 가혹한 시련이 그들의 역사를 뒤덮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 선교사가 바이칼에 있는 샤먼(무당) 5명을 잡아 태워 죽이려 하였다. 5명을 한데 몰아넣고 불을 질렀는데, 4명은 한명이라도 살리자고 마음먹고, 선택한 한 무당을 가운데 놓고 자신들의 몸으로 덮어버렸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샤먼들의 비명소리가 바이칼에 울려퍼졌다. 부랴트인들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불길은 소진되고, 하얀 연기가 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사위어가는 불길에 통한의 눈물을 떨어뜨리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그때 타버린 시신들 틈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4명이 품었던 한 명은 기적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살아남은 한 명이 바로 가운데 나무 하나를 상징하고 있다. 살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 속에서 부랴트의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스탈린은 집권하면서 시베리아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유형당했던 얼음의 땅을 공산주의자들이 유린했다. 스탈린은 대대적인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썼고, 부랴트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했다. 1934년 붉은군대를 동원해서 시작된 이 탄압에서 불과 2년 동안에 종교지도자를 포함하여 2만명이라는 믿기지 않을 숫자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지구상에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한때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경영했던 종족의 한 갈래가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또 스탈린은 태생적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역마살을 종족의 혈통적 숙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말이나 양조차 자유롭게 방목시키는 그들을 우리 속에 가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집집마다 모셔놓고 있는 크라스니이 우골록이라는 기도장소도 파괴하였다. 공산주의가 아니면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은 붉은 만행의 시대였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그들의 수작에 의해 만주에서 갑자기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며칠씩 이동하다가 팽개쳐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만행이 오늘날 구소련의 영토 곳곳에 카레이스키라는 고려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에 브랴트인들은 권리를 어느 정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도 존중을 받아 샤먼들은 다시 세상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1991년에 이르러 바이칼 주변의 부랴트인들은 서로 연락해 넓지는 않지만, 구릉이 있고, 그 사이로 평원과 길이 있는 불한신이 살고 있는 오르혼섬의 평원으로 몰려들었다.
부활한 불한신
약 6000여 명의 그들은 세르게를 다시 만들어 세우고 오랜만에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렸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 수 십년간 끊겼던 제사를 올렸다. 무능해서, 두려워서 의무를 게을리한 자신들을 질책하면서. 상징적 숫자인 9마리의 양이 희생물로 선택되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파란 하늘에는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그 햇살을 타고 불한의 아들인 독수리들이 비상을 하였다. 부랴트인들은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자신들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우주와 시베리아와 바이칼에 알렸던 것이다.
세르게에는 많은 공양물들이 얹혀져 있다. 과자, 물병, 천 그리고 동전과 종이돈들이 얹혀져 있다. 우리도 한국동전 몇 개를 꺼내 올려놓았다. 이 샤먼은 이곳 세르게의 사연과 부랴트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고 복합적인 표정으로 길게 말을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나의 마른 손을 진중하게 잡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당신들을 다 보호해 주시기 빕니다.”
우리랑 내내 길을 같이한 러시아여인 악센다는 이러한 사실을 알자 흥분된 어조로 “백인과 부랴트인. 도대체 어느 편이 더 문명인가요” 하고 말을 던진다. 지구는 하나다. 하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역시 하나다. 우리 모두가 결국은 같은 존재이고, 남이란 또 다른 남일 뿐이다. ‘일중다 다중일(一中多 多中一)’이란 화엄의 깊디깊은 가르침을 진리로서 깨닫지는 못해도, 생활 속에서 그리고 환경이란 공동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지구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모두가 공존하려면 이제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좀더 너그럽고, 남을 아우르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남의 생각과 생활방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좀더 나누어 갖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
시베리아의 석양은, 바이칼의 석양은 어떠할까? 일렁거리는 호수에 번지는 백야의 햇빛은 어떤 색으로 번져갈까? 지중해의 고요한 한가운데, 흑해의 거칠게 파도치는 겨울바다에서 맞이하는 석양의 번뇌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바이칼은 여명도 석양도 아름답다는 한 러시아 사내의 은근한 말을 떠올리며 10시가 다 되어가는 호수 위에 눈길을 주어본다. 시간은 애초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나눌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다. 햇살도 어둠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자락은 서서히 풀어헤치다가 호수 위의 포근한 안개결로 희미하게 스며든다. 백야의 바랜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 나무와 풀밭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해낸다. 희디 흰 석회면에서 푸르고 붉고 노란 물감들이 만나 고구려의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 듯, 자작나무의 흰 몸뚱이에서 파란 물빛과 푸른 풀빛이 백야의 바이칼에 신비함으로 번져간다.
샤먼은 굿판을 벌일 터를 골랐다. 전에는 자작나무의 희디흰 몸뚱이와 향으로 꽉 차 있던 수풀이 휑하니 비어 있고, 구릉과 풀밭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마음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의 눈빛은 아쉬움으로 물결치듯 흔들린다. 마음을 고쳐먹고,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더니,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듯 한 곳을 지적한다.
그는 발그레한 빛을 띤 부랴트의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고, 북을 든 채 텅 빈 구릉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빈 공간에, 애당초 비었던 허무의 공간이 아니라, 뭔가가 있었던 공(空)의 장에 몇 그루의 나무들이 온갖 인연의 껍질들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무심하게 서 있는 곳이다. 공허는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채 덜 넘어간 백야의 햇살이 그 흰 살갗에 안타깝게 머물면서 샤먼의 춤을 기다리고 있다.
장작들이 쌓인다. 낙엽송과 자작나무의 부러진 몸뚱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자그마하고 소담한 동산을 이룬다. 내 바지 뒷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수첩에서 한장을 찢어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얄궂은 문명의 쏘시개와 원시의 나뭇가지들이 만나 불꽃을 일으킨다. 불이 만개한 꽃잎처럼 활짝 일어나 석양빛으로 날름날름 거린다. 풀이 타들어간다. 불길에 풀빛이 스며든다. 백야의 햇살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깔린다. 어둠을 밝히려고 지핀 불길이 오히려 어둠의 존재를 명확하게 부각시킨다. 이 불은 바이칼의 서늘한 밤기운을 떨치려고, 스며드는 한기를 녹이려고 피운 것은 아니다.
영화(迎火)! 신들을 맞이하는 불빛이다. 청사초롱처럼 멀리 창공을 지나 이곳을 찾아 강림하는 귀한 손님들의 길을 비추려고 밝히는 등불이다. 아름다운 불, 하늘의 자식들이 어버이의 밤길을 도우려 핀 아름다운 효심의 불길이 바이칼의 밤을 은은하게 익혀가고 있다. 한결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신불이 자작나무 껍질처럼 아스라지면서 흩어지고, 발갛게 익어가는 얼굴들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모두 둘러앉았다. 가운데 신불을 모셔놓고, 샤먼과 나는 구릉과 호수과 나목을 바라보며 앉았다. 사람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다. 해의 테처럼, 샤먼의 가죽 북처럼, 인디언 전사의 머리띠처럼, 새깃을 꽂은 고구려병사의 절풍테처럼 둥글게 앉았다. 원은 모두를 하나로 묶고, 시작과 끝이 없어서 좋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신불의 경건함과 하늘의 정도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강강술래와 비슷한 巫歌
한국인·부랴트인·몽골인·러시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세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하늘의 사제가 된 사람들, 우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우주와 하나가 되고자 수행하는 도인들, 모두 하나가 되어 원을 이루고 있다. 불길 너머로 물색이 익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흔들리는 그림자들 속에서 시베리아의 그림자, 바이칼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이윽고 일어난 샤먼은 나에게 자기 옷깃을 붙들라고 한다. 그가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나 또한 걸음을 떼야 하고, 그를 따라 둥근 원을 몇 바퀴 돌았다. 이제 어둠이 제자리를 찾았다, 빛과 어둠, 해와 달의 만남을 즐기는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색과 색이 춤을 추면서 섞이는 공간도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엄숙하게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샤먼은 헤세(북)를 왼손에 들고 하늘로 치켜올렸다가 내리면서 손에 쥔 타이브르(북채)로 두들긴다. 하늘이 울린다. 바이칼이 울린다. 우리들의 마음이 울린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의 신비스러운 무가(巫歌)가 우리들이 만든 원 안을 맴돌다가, 하늘로 호수 위로 퍼져나간다. 그의 무가는 하늘을 찬양하는 신령스러운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늘과 샤먼과 인간의 탄생을 노래한 다음에 우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또 다른 무가를 불러야 했다. 모두 일어나 손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빙빙 돌았다. 샤먼이 하늘을 찬양하고, 바이칼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내용의 선창이 끝나면, 모두들 함께 잡은 손을 앞으로 쳐올리면서 ‘세’하고 후렴을 매겼다. 어쩜 강강수월래와 이리도 비슷한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로, 불길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풀밭 위로, 검푸른 몸을 드러낸 바이칼의 물로 장중한 울림이 퍼진다. ‘옴마니반메홈’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법의 소리로 모두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에밀레종의 애달픈 소리처럼 삶에 찌들고 자연을 멀리하고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애잔함을 적신다. 신이 지핀 듯 샤먼은 노래를 부른다. 그의 소리가 소지(燒紙)처럼 불붙어 하늘로 재를 날린다.
자연 속에서 샤먼은 우아하고 신성스럽고, 마음이 여여한 도인이다. 우주의 소리를 듣고, 자연의 소리로 법문을 전하면 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샤먼의 운명은 뭇 인간과 더불어 주어진 업을 소진시켜야 하는 보살의 운명과 같다. 도시의 저잣거리에서, 자질구레한 인연의 타래들을 풀어주어야 하므로 더불어 더러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종족들의 샤먼은 사회운동가의 모습마저 지녀야 한다.
만신을 모시는 진짜 무당
인연의 타래가 굵고 복잡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인지 그는 많은 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 북도 들고 있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목기도 지니고 있는데 밑바닥에는 검은 물감으로 기하학적인 문양과 상징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세상을 만들고 보호해주고 없애기도 하는 신의 모습이란다. 결국 창조주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나 예수와는 다른 창조주를 알고 있는 것이다.
허리에는 천을 꼬아서 만든 띠를 둘러 매고, 이것 저것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니히리트라고 부르는 손바닥만한 옥제 도끼, 라마승들이 지니고 다니는 놋쇠요령, 일본신사에 매달린 와니구치도 있고, 흑해에서 자란 소라로 만든 고동도 매달려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샤먼은 세상의 모든 것과 통한다고 믿고 있다. 세상의 모든 신과 교통하는 그에게는 종교의 구분이 무의미할 뿐이다. 모두가 하늘의 것, 우주의 울림으로 여긴다. 그는 잡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만신을 모시는 진짜 무당이다.
만유일체, 시유불성. 우주의 삼라만상이 결국은 하나라는 법문을 몸뚱이에 매단 물건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그는 논리와는 무관한, 우리와는 다른 논리체계를 갖춘 선승이다. 그는 표의문자나 표음문자로 중생들에게 법문을 펴지 않고 소리와 몸짓으로, 기성과 춤으로 우주와 역사를 설명한다.
샤먼이 되는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다.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인연을 맺은 인간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엄청난 일을 하려면 뼈를 깎고 살을 저며내는 고통을 참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완성된 샤먼이 되려면 9단계를 거쳐야 한다. 19대 선조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다는 그는 이미 신성성이 훼손된 불한바위 같은 장소는 사용하지 않고, 다른 샤먼들처럼 바이칼에 자기만의 장소를 만들어놓고 기도의 장소로 사용한다고 한다. 샤먼은 독특한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난 그에게 말을 건넨다.
“바이칼도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가?”
그의 답변이 바이칼의 어둠속에 흔적을 남긴다. 아, 원효의 무애행이 바이칼의 물결 위에서 한판 굿을 펼치는구나.
밤이 새까맣게 익는다. 허옇게 곰팡이 슨 깜부기 같던 하늘이 칠흑처럼 까매졌다. 샤먼의 소리가 바이칼의 물위로 스며들고, 그들의 역사가 다시 어둠으로 묻어 나와 우리가 된다.
다음날 우리는 차를 타고 오르혼섬을 빠져나왔다. 바이칼은 떠나는 나는 탈진하면서 눈물을 죽죽 빗물처럼 흘렸다. 일종의 무병이었을까? 아니면 바이칼이 내게 흠뻑 퍼준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 신비함과의 만남과 이별, 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샤먼은 내게 선물을 주었다. 40∼50m의 속까지 보이는 맑은 물에서 건져낸 자그마한 돌멩이에 그의 이름과 기원을 부랴트 글자로 써서. 동반자에 대한 우정의 표시다.
우리는 배를 타고 건너 옐렌치 마을을 지나 이르쿠츠크로 귀환한다. 바이칼은 자연과 역사의 만남이 이루어진 인류역사 초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러가지 의미로 우리에겐 잃어버린 원향이다. 코리나야 슬레포타의 노란꽃들이 들판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바브츠카(나비)의 하얀 날갯짓이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옷자락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제 머지않아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고, 곧 이 곳을 잊을지도 모른다. 자작나무 끝에 걸리던 그림자, 별빛, 수목들을, 그리고 바이칼의 투명하고 환한 물빛들을.
하지만 바이칼은 여전히 지구의 머리에서 맑은 물을 찰랑거리면서 생명의 기운과 옛날 인류의 역사를 우리 같은 순례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