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속에서 수도하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의병(僧義兵)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 수락산 대첩 승리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전후 강화교섭에서는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 포로 3000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공을 세웠다. 400년 전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좇아간 유적지 순례단의 보고를 통해 참된 호국정신을 되새겨 본다.
사명대사의 혁혁한 전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 왜적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앞세워 16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왜군은 현해탄을 건너 남해안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북진했다. 불과 20여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쉬지 않고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했고 선조는 서울을 떠나 의주로 몽진(蒙塵)했으며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장 가토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이와 같은 국란 속에서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육상에서는 권율 장군 등이 이끈 관군과 명나라 원군, 그리고 승의병(僧義兵)의 선봉대장인 사명대사가 결사항쟁해 끝내는 왜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승의병을 주도한 사명대사(이름 惟政, 자 離幻, 호 松雲 또는 四溟)는 임진왜란 당시 산속에서 수도하는 승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부의 강인한 체격과 뛰어난 용모, 그리고 학문과 지식에 바탕을 둔 탁월한 변론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왜적의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사명대사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중이라는 미천한 신분 탓에 사회적 대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많은 제자와 동료 승려들을 규합,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승의병을 모집해 침략군과 대결했다. 사명대사가 지휘한 승의군의 첫째 개가는 평양성 탈환이다. 왜군에게 점령당한 평양성 외곽에서 명나라 지원군과 조선 관군, 그리고 승의군이 연합해 격전 끝에 빼앗긴 성을 다시 찾는 데 성공했다. 둘째는 수락산 대첩에서의 승리다. 이어 도주하는 왜군을 뒤쫓아 호남과 영남 일대에서도 권율 장군의 관군과 합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런 와중에서도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수차례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왜장 가토와 직접 담판으로 강화교섭에 임했다. 그는 원군을 보낸 명나라와 왜적이 조선영토를 완전 분할 점거하려는 책략을 미리 알고 능숙한 기지를 발휘해 이를 저지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인질로 잡혀간 두 왕자의 신병 반환에도 성공했다. 적진 깊숙이에서 벌어진 협상 기간에는 적의 형세를 잘 관찰해 탐정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조선왕조는 두번 다시 왜적이 침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과 화평을 강구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1604년 사명대사는 어명을 받고 문하의 몇몇 승려와 당시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과 교토(京都)에 강화사절로 파견됐다.
그의 임무는 첫째, 일본 내부의 정세를 탐정하는 한편, 둘째, 대등한 관계의 화평교섭, 셋째, “선사(先師)의 뜻을 받들어 생령(生靈)을 구제한다”는 조정의 명분대로 왜적에게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백성의 송환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그때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지배하고 있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명분없는 조선침략과 달리 선린우호를 추구하려 했다. 때문에 도쿠가와는 쓰시마섬에 체류중인 사명대사를 그의 본거지인 교토로 초청했다. 도쿠가와는 네 차례에 걸쳐 사명대사와 회견한 후 양국간의 화평을 제의했다. 이 제의에 따라 사명대사는, 일본이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도쿠가와의 서약을 받아내고, 임란시 중종의 묘 정릉과 성종비의 묘 선릉에서 도굴한 범릉지적(犯陵之賊)의 반환,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의 송환교섭(제1차 송환은 1391명)에 성공했다.
사명대사가 이룩한 이같은 대일 강화 외교는 이후 1607년 여우길(呂佑吉)을 정사로 하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 兼 刷還使, 朝鮮通信使)를 시작으로 1811년까지 약 200년간 무려 12차례 선린우호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땀 흘리는’ 비석
순례단을 실은 전세버스는 아침 7시 서울을 떠났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남으로 내려가다가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일행은 다시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을 지나 사명대사의 생가지인 밀양시 무안면(武安面)으로 접어들었다.
찌푸린 하늘은 가끔씩 빗방울을 뿌렸지만 오후 2시경 ‘땀나는 비석’으로 알려진 표충비각에 도착했다. 이 비각을 관장하는 홍제사(弘濟寺) 주지 법마(法摩) 스님은 일행을 맞아 비석의 유래를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이 비석은 1742년(영조 18년) 송운대사의 5세 법손 남붕(南鵬) 스님이 경북 경산에서 캐낸 돌로 세운 것으로 높이 2.76m, 폭 97㎝, 두께 70㎝의 흑랍석(黑臘石)으로 돼 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용머리와 받침대는 화강암인데 이를 감안하면 전체 높이는 3.9m가 되는 셈이다.
이 비(碑)에는 사명대사의 영당비문과 표충사(表忠寺) 사적비문이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큰 경사나 난리가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석에서 땀이 흐른 기록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894년 갑오군란, 1910년 경술합방, 1919년 기미 3·1운동,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1945년 광복,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식, 1949년 여순반란사건,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 학생의거, 1961년 5·16쿠데타, 1979년 10·26 박대통령 사망, 1983년 8·25 KAL기 추락, 1983년 11·15 미얀마 랑군테러사건, 1996년 1·14 일본과 독도 영유권 대립, 1996년 6·28 북한 수해로 아사 탈출자 급증, 1996년 11·5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침입 등. 법마 스님은 앞으로도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땀이 흐를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또 하나 진기한 것은 비석의 땀이 사람 몸에서 나는 땀과 같이 짠맛이라는 점이다. 관련 과학자들이 모여 이 비석의 땀을 분석한 결과 특정한 계절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현상이라고 한다.
이 비석은 경상남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 제15호다. 표충비각 주변은 현재 밀양시가 주관해 정부 보조금과 지자체 예산을 들여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방문객 주차장을 비롯해 주변 일반주택의 이전 등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약 4000평 규모의 부지에 향토 문화체험장, 전통놀이마당 등이 들어서게 되며 총공사비는 약 13억원, 완공예정일은 2002년 7월이라고 한다.
순례단은 표충비각을 떠나 무안면 중산리(中山里)쪽으로 약 4∼5㎞ 지점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지 고나리(古羅里)에 이르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약 50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부선의 밀양역에서 16㎞쯤 떨어진 산간벽지며 옛 이름은 괴나루(槐津)라고 한다.
고나리 마을은 일명 삼강동(三綱洞)이라고도 한다. 이 이유는 충·효·열(忠孝烈)사가 한 시기에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사명대사를 비롯해 병조판서를 지낸 손인갑(孫仁甲)과 충효사(忠孝士)로 꼽힌 아들 손약해(孫若海), 그리고 동승지를 지낸 노개방(盧蓋邦)과 열녀인 부인 이씨(李氏)가 이 마을에서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삼강동은 중산리의 양쪽 산 안을 가리키며 사명대사가 때로 고향에 돌아올 때 고나리를 바라보며 앉아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바위 옆 절벽에는 ‘삼강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부터 50∼60년 전인 일제 말기에 누군가가 지웠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마을 뒷산은 삼국명장(三國名將)이 태어난 명산이라고 했다.
사명대사는 이곳 고나리 399번지에서 1544년(중종 39년) 10월17일에 아버지 임수성(任守成)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윗대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집안으로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해 장악원정(掌樂院正), 할아버지 종원(宗元)은 괴과(魁科)에 급제해 강계부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수성(守成)은 교생(敎生)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서씨(徐氏)가 어느날 저녁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누런 수건을 쓴 황금빛 사람이 흰구름을 타고 높은 누(樓)에 올라 늙은 신선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그 신선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고해(苦海)의 위에 있는 백세 노인이다. 어찌해 네가 와서 절을 하는가”고 말했다. 이 말이 서씨의 귀에 들리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이때부터 서씨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것 같았으며 놀라서 무서운 것 같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후 서씨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고 감히 재채기나 트림, 하품도 삼가며 기지개조차 켜지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사명대사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석장비문(石藏碑文)에도 기록돼 있다.
일행은 우선 밀양시 문화관광 담당관의 공사 계획 브리핑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사명대사의 생가지 주변 일대는 약 1만3000평이 개발돼 기념관, 임진왜란 체험공간, 중앙광장, 부도탑(浮屠塔) 등을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이 공사에는 방문객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지방도로로부터 약 500m의 2차선 포장도로를 연결하는 공사도 포함돼 있다. 2002년말 완공 예정인 이곳 관광벨트 조성공사는 정부 보조비를 포함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등 총 40억원 가량이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생가지 주변과 표충비각을 연결하는 관광벨트가 완성되면 국내외 관광객을 효율적으로 유치해 현지 주민들의 생활과 복지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하진현 무안면장은 기염을 토했다.
현장을 돌아보니 중앙광장에는 이미 기념비석과 부도탑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언덕받이에는 사명대사가 출생한 집터가 있었다. 접근해 보니 그 집터가 바로 밀양시 무안면 고나리 399번지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속설에 따르면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세우려고 했으나 모두 넘어져서 새로 지은 집은 없으며 다만 그곳에는 원장(元帳)의 자취와 주춧돌이 남아 있고 묵은 기와조각이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이 집터의 한가운데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에 한자로 ‘사명대사 생가유허비(生家遺墟碑)’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붉은 글씨로 불(佛)자를 크게 써붙여 놓았다. 이곳 사명대사 생가지는 경상남도가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했다.
생가지를 벗어나 일행을 태운 버스는 무안면 중산리에 있는 꽤 높은 영취산(靈鷲山) 기슭을 감돌아 숨가쁘게 잉잉거리며 올라갔다.
임진왜란의 괴수인 도요토미가 사망(1598년)하고 2∼3년 후 사명대사가 57세 때 고향에 내려와 마을 뒷산의 암자에 머물렀는데 그곳이 곧 백하난야다. 이 암자는 당초 신라의 고승 도선이 터를 잡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사명대사가 그런 한가한 곳에 오래 머물게 두지 않았다. 1604년 61세 때는 묘향산에서 서산대사가 열반했고 그해 이어 조정의 영을 받아 일본에 강화정사로 파견됐기 때문에 백하난야에는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사명대사가 백하난야를 떠날 때 앞마당에 은행나무와 모과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은행나무는 자취를 감추었고, 모과나무는 아직도 고목처럼 굵어져서 열매를 맺고 있다. 사명대사가 1610년 입적하자 다음해인 1611년(광해 3년)에 유생들과 제자 승려들이 그의 충성과 불법으로 남긴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절이 아닌, 사명대사를 신주(神主)로 모시는 사당을 창건해 표충사(表忠祠)라고 이름지었다.
그후 당시 불교를 비하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사회적 배경 때문에 사당의 유지가 매우 어려워 일시 퇴락했으나, 1714년(숙종 40년) 유림의 의견을 수렴해 밀양부사 김창석이 청원해 중건했다. 그후 1721년에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의 상소로 향사의 재물을 하사받았으며 1738년(영조 14년)에는 사명대사의 5세 법손 남붕(南鵬) 스님의 청원으로 왕의 윤허를 얻어 임금이 내렸다는 뜻인 사액사당(賜額祠堂)을 중건했다. 영조는 표충사당을 영취산 삼강봉에 중건하라고 분부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명대사의 선사인 서산대사와 동문인 기허(騎虛, 자는 靈圭)대사와 함께 3대사를 합형(合亨)하고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지어 홍제당(弘濟堂)이라 했다.
기허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때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금산싸움에서 전사했다. 영규대사는 대단히 용맹했던 승의군의 장수다. 그의 전사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 승려들이 고향인 계룡산 갑사에 영정을 모시고 훌륭한 호국정신을 오늘날까지 기리고 있다.
1742년에는 사명대사의 영당비문과 표충사의 사적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이 곧 ‘땀나는 비’로 이름난 표충비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홍제당을 지키던 많은 승려들이 뿔뿔이 흩어져 건물은 폐허가 됐다. 일설에는 빈대가 극성을 부려 불태웠다고도 한다. 결국 1839년(현종 5년)에는 백하난야의 표충사는 현재의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표충사로 이전하게 됐다.
사명대사가 손수 현판을 걸었던 백하난야는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폐허가 되고 사당 안에는 잡초만 무성했는데, 그후 영정사(지금의 표충사)의 스님이 당시 돈으로 백량을 받고 팔아버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존하던 사명대사의 유물과 3대사의 영정 등은 새 표충사로 옮겨지고 울창했던 노송숲과 절터 그리고 사명대사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도 함께 팔렸다고 한다. 특히 그 은행나무는 300여 년을 자란 거목으로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나무가 베어진 뒤에는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자생했으나 그것마저 일제시대 벌목꾼에 의해 도벌되고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순례단이 찾은 백하난야는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재건돼 있었다. 수년전 재건된 이곳의 절 이름은 영취산 대법사(大法寺)다. 다만 사원 언덕에 사명대사가 심었다는 모과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커다란 열매들을 맺고 있을 뿐이다. 대법사 주지인 지혜(智慧)스님은 우리 일행을 맞아 그 옛날 사명대사와 백하난야에 얽힌 갖가지 일화를 소상히 말해 주었다.
1839년(헌종 5년) 사명대사의 8대 법손 월파당 천유화상이 왕의 윤허를 얻어 영취산 백하난야에 있던 표충사당을 이곳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재약산 영정사(靈井寺)로 옮기고 왕의 사액(賜額)으로 표충서원(書院)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절은 당초 서기 653년(신라 진덕여왕 7년)에 원효대사가 나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명산을 찾던 중 천황산정에 올라 남쪽 계곡의 대나무숲에 오색 구름이 이는 것을 보고 터를 잡았다 하며 절 이름을 죽림사(竹林寺 또는 竹園精舍)라고 했다.
이후 서기 829년(신라 흥덕왕 4년)에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黃面禪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이곳에 봉안하고 머물고 있었다. 때마침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흥덕왕은 황면선사에게 치료를 부탁해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은 친히 황면선사를 찾아 공을 칭송했는데 선사가 겸손하게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맑은 물이 모두 약초요 약수”라고 하자 왕이 감탄해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켜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순례단 일행이 표충사에 당도한 것은 오후 5시가 지나서다. 흐린 날씨에 계곡이 깊고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진 탓으로 일찍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수염 기른 장수의 위풍
표충사라는 커다란 현판이 눈길을 끄는 입구를 들어서니 바로 눈앞에 사명대사의 유물관이 있고 왼쪽으로는 표충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3월과 9월)에 추모제향 행사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승려와 유생이 한자리에 모여 전통 제례의식으로 치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조에서 조선조로 이어지면서 불교 대신 유교를 숭상함으로써 승려 신분을 천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를 유생 서원에 모시고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올린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이와 같은 예외가 적용된 절로는 해남 대흥사(大興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 두 곳이 더 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에 대해 철폐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표충서원만은 온전했다. 때문에 표충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사찰 안에 유림서원이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 됐다.
표충사는 실제로 사명대사와 함께 3대사를 모시고 있다. 표충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명대사의 영정(유형문화재 268호)이 가운데 걸려 있고 그 좌편에 서산대사, 우편에 영규대사의 영정이 엄숙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안내하는 젊은 스님은 이 절의 주지인 혜오(慧悟) 스님을 대신해 잘 설명해 줬다. 보통 스님의 영정은 삭발뿐 아니라 수염도 없는 것이 정상인데 오직 사명대사의 영정만은 예외로 삭발은 했으나 수염은 길게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다. 이는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이끈 장수로서의 위풍을 나타내기 위해 평소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영정을 그릴 때 그 모습을 살린 것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이 영정에서 사명대사의 기상이 칼날같이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는 국보 제75호로 지정된 청동함 은향완(靑銅含 銀香)이 있다. 이는 고려(1177년) 때 제작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 향로일 뿐 아니라 새겨진 곡선과 문양은 고려 공예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밖에도 선조가 하사했다는 동제수저, 화엽형은도금잔, 금란가사와 장삼(중요 민속자료 제29호), 사명대사가 평소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불상, 사명집책판(유형문화재 제273호) 등 일상생활에 쓰던 유품들이 있었다. 또한 순례단 일행의 눈길을 끈 것은 선조가 하사했다는 긴칼(패도, 佩刀)과 여러가지 종류의 사령문서(司令文書)다. 즉 1594년 사명대사가 평양성 탈환 및 도원수 권율 장군과 함께 의령에서 무공을 세운 공을 치하하는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은 왕의 사령문서와 1604년 일본에 강화정사로 다녀온 공을 인정받아 희의대부행룡양위대호군(囍義大夫行龍衛大護軍)에 올라 선조로부터 어마(御馬)를 하사받은 후 내려진 사령문서의 원본이 진열돼 있다.
박대통령 지시로 동상건립
표충사에도 여러 차례 수난이 있었다. 조선시대 두 차례에 걸쳐 해인사측이 사명대사의 사당 이전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고, 일제 말기인 1926년 4월에는 절 전체가 불타버렸다. 당시 동아일보(4월 25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웅각, 산령각, 진영각이 소실되고 불상과 보물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표충신좌(表忠神座)와 시향축문(時享祝文), 제영(題影) 그리고 사명대사의 유물목록을 다시 조성·정비했다고 한다. 또한 1953년에는 도둑이 들어 유물을 도난당하는 등 불행이 겹쳤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물관에 사명대사의 귀한 사료와 유품이 일부나마 보관되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남루는 낙동강 지류인 남천강(南川江, 일명 밀양강) 기슭의 절벽 위에 세워진 경치 좋은 누각이다. 이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누각으로 당시 밀양부사가 다스리는 고을 원님의 객사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이었다.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됐으며 밀양의 상징이기도 한 이곳에는 아랑각(阿娘閣)이 있는데 아랑이 처녀의 순결을 지켰다는 전설이 아직도 세간에 구전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순시하다 영남루 뒷산자락에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동상을 건립하도록 명해 이곳도 사명대사의 유적지가 된 셈이다. 동상의 높이는 약 2.5m고 받침구조물의 높이가 3∼4m다. 건립 당시에는 주변의 나무들이 키가 작은데다 산중허리에 자리해 제법 커보였으나 지금은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녹이 슬고 초라한 모습이다. 한글 종서로 ‘유정 사명대사 상’이라고 쓴 동판은 박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동상 바로 옆에는 사명대사의 유물과 기타 밀양지방의 민속공예품 등을 전시하는 민속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시에서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사명대사의 친척인 임용담(任龍潭)이 1620년에 지은 문집이 보존돼 있는데 그속에 사명대사의 친필본 한 점이 들어 있었다.
순례단이 첫날 묵은 곳은 부곡온천의 가든호텔이다. 부곡의 더운 천연 온천수와 맑은 공기 때문에 전날 강행군한 데 따른 피로가 확 풀렸다. 몸과 정신을 가다듬은 일행은 부곡을 떠나 밀양 하남면 수산(下南面 守山)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 김해평야를 가로질렀다. 구포에서 다시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달려가 통도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반경이다.
때마침 통도사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에서 특별기획으로 티베트 불교전을 열고 있었다. 여러가지 이색적인 티베트 유물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특히 ‘만다라(불교성화)’는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성보박물관의 소장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중앙홀 정면에 크게 걸린 괘불탱(掛佛幀) 그림.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 있는 불교회화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통도사에서는 야단법회를 할 때 괘불탱 성화를 금강계단 법전 옆 광장에 내다건다고 한다. 그밖에도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게 이 절만이 수집해둔 조선조의 성화들이 있는데 크기가 각각 233.5×151㎝의 대형 그림이다.
통도사 승려들의 표충사 점거
일행은 성보박물관을 나와 경내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영취산(靈鷲山) 통도사란 한자 현판이 눈에 띄었다. 이 절은 서기 646년(신라 제27대 선덕여왕15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창건했다고 한다.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까지 통한다 해 통도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보사찰(三寶寺刹)로 통도사(佛寶), 해인사(法寶), 송광사(僧寶)를 꼽는다. 통도사가 법보라는 이유는 여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는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다. 신라 말기 혜린선사(慧璘禪師)가 창건한 전남 승주군에 있는 송광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 등 16국사(國師)를 배출했다는 기록 때문에 승보로 꼽힌다.
경내에 들어선 일행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다가갔다. 안내하는 젊은 스님은 “이 절을 창건한 정신이 곧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고 설명해 줬다. 통도사에는 다른 절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이 없다. 부처님의 진신인 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심으로써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신 대웅전이 없다는 것이다. 일행의 안내를 전담한 젊은 스님은 선오(禪悟)라고 새긴 명함을 건네주면서 동국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찰 중 통도사가 으뜸이라고 자랑했다.
통도사 경내에는 17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관음암, 무량암, 축서암, 반야암, 비로암, 백운암, 극락암, 금수암, 서축암, 자장암, 안양암, 수도암, 보타암, 서운암, 옥련암, 백련암 그리고 사명암이다. 사명대사가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수도하던 시절 통도사에도 여러 번 머물렀기 때문에 사명대사를 모시는 암자가 있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738년(영조 무년) 통도사의 승려 의성(義成)은 당시 사명대사를 모시고 있는 밀양 재약산의 표충사가 잘못된 것이라 보고 평소 3대사가 거주했을 뿐 아니라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인 해인사에 표충사를 두어야 한다고 소지를 올린 바 있다.
그러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783년(정조 7년) 7월에 의성은 30여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재약산 표충사에 쳐들어가서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3대사의 영정을 탈취, 여러 날 머물며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조정에서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에 특혜를 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순례단을 태운 버스는 통도사에서 천왕산 북벽 골짜기에 새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준령을 넘었다. 다음 일정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1박하기로 돼 있다. 절에 들어갈 때 저녁에 너무 늦으면 큰 실례라고 한다. 해인사까지는 밀양에서 빨리 달려야 2시간 반이 걸리는 만만찮은 거리다.
일행이 해인사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경이다. 버스는 해인사 본당 입구에서 왼편으로 살짝 비켜 비포장의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거기에는 홍제암(弘濟庵)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1610년 8월16일 67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입적(入寂), 즉 생을 마쳤다. 석장비문과 행적 등 기록에는 사명대사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일본에서 강화사절의 의무를 마치고 귀국한 지 2년째, 64세가 되던 가을, 사명대사는 벼슬을 내놓고 치악산에 들어갔다. 그 다음해인 1608년 선조대왕이 승하해 서울에 올라가 배곡하다가 병을 얻었다. 즉위한 광해군이 사명대사에게 서쪽 변방(지금의 만주)의 군사요지를 맡아 야인의 침범을 막도록 명했으나 늙고 병들어 명에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요양했다.
왕은 심히 애석한 일이라고 말하고 어약을 여러 번 내렸다고 한다. 1610년 여름에는 왕이 염려해 서울 근처의 의원에게 치료받도록 사람을 보내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고 8월26일 주변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네 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이 지금 진(眞)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오가면서 허무한 이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지금 죽음에 들어감으로써 대화(大化, 큰 덕행과 감화)에 순응하려 한다”고 말하고 가부좌해 유연히 입적했다. 대사의 병은 풍한말질(風寒末疾), 즉 중풍이었다고 한다.
1544년 1월17일 탄생해 12년 7개월이 되던 달에 출가했으므로 승려로서는 만 53년 3개월, 그리고 만 65년 10개월의 전 생애를 이곳에서 마감했던 것이다.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어 광해군은 9월28일에 “국난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한 의승이 죽으니 심히 가련하고 슬프다”고 말하고 장례에 필요한 재물을 보냈다고 한다.
입적 3개월 뒤 11월20일에 행해진 장례에 관해 뇌묵당 처영(雷默堂 處英)은 발문(跋文)에서 ‘화장하는 날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슬프게 사모하고 기절까지 하면서 마치 부모의 초상을 당한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도 그해 12월21일에 제문을 지어 보냈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2년후인 1612년(광해군 4년) 4월16일 뇌묵당 처영이 발문을 쓴 이후 사명대사의 사리를 담은 부도를 세우고 그 앞자락에 영당(影堂)을 건립한 곳이 곧 해인사 홍제암의 시초다. 홍제암에는 사명대사가 거처했던 암자와 임종했던 방이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같은해에 제자인 혜구(惠球), 단헌(丹憲) 등이 자료를 모아 사명집(四溟集)을 간행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당대의 석학 허균(許均)은 사명집 발간 후 석장비문을 지었으며 입적한 지 30년이 되던 해(인조 18년)에 해안(海眼)이 행적(行蹟)을 지었다. 이들이 지은 비문과 문집에도 한결같이 사명대사의 최후를 애도하는 글들이 남아 있다.
사명대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중 가장 먼저 세워졌거나 가장 큰 수난을 겪은 것이 허균의 비문이 새겨진 해인사 홍제암의 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다. 우리 일행이 전날 찾아갔던 밀양 무안면의 ‘땀나는 비’인 영당비는 1742년(영조 18년)에 세워졌으므로 석장비보다 무려 130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오늘날의 홍제암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하사금으로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품으로는 향로합, 봉촉대, 귀형촉대 등이 있다.
“네 놈의 목이 우리나라의 보물”
순례단을 맞은 이곳 홍제암의 원주(院主)인 종성(宗性) 스님은 일단 일행을 법당과 영당으로 안내해 참배토록 하고 홍제암의 내력과 사명대사의 입적 등 관련된 여러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홍제암에 봉안된 3대사의 영정은 한가운데 서산, 좌편에 사명, 우편에 영규대사다. 사명대사의 영정은 표충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길게 드리운 모습이다.
이곳 사명대사의 영정과 밖에 세워두었던 ‘자통홍제존자 석장비’는 일제 때 호된 시련을 겪었다. 영정은 일본 경찰에 의해 탈취돼 약 1주일간 경찰서의 창살 감방에 보관됐고 여러 군데 예리한 칼날로 찢겨졌다. 그후 영정을 되찾아 간신히 칼자국을 없애고 다시 곱게 복원했다고 한다.
또한 석장비는 일제 경찰에 의해 네 쪽으로 파괴된 것을 간신히 복원해 제자리에 재건했다고 한다. 지금도 비석 표면에는 부서졌던 네 조각을 꿰어 맞춘 자국이 크게 열 십자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복원수리를 했지만 잘라졌던 부분에는 문자가 결락됐다.
이 석장비문은 사명대사의 출생과 출가, 승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던 공훈, 일본에 강화 정사로 건너가 성공한 업적, 그리고 입적할 때까지의 생애 전반에 관한 사항을 허균이 기록한 것이다. 특히 왜장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 들어가 열띤 토론을 했던 사실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묻기를 “당신 나라의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자 대사는 “우리나라의 보물은 일본에 있다”고 답했다. 다시 기요마사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사는 “바로 네 놈의 목이다”고 했다. 이에 기요마사는 크게 놀랐다고 기록돼 있다.
석장비는 세워진 지 311년이 되던 해인 1943년 당시 합천경찰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됐다가 광복 이후 1947년 5월 해인사 승려들의 총의로 복원했다고 한다. 일제는 이 비석의 내용을 보고 그대로 두지 않았다.
‘대동아전쟁 말기쯤 합천경찰서 순사들이 트럭으로 해인사에 들이닥쳤다. 아무런 설명조차 없이 해인사 경내의 모든 승려들을 모아 홍제암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석장비석에 노끈을 묶은 후 끌어당기라고 명령했다. 승려들이 노끈을 잡으려 했을 때 그때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계곡암벽에 크게 울려퍼졌다. 승려들은 노끈을 팽개치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아무래도 부처님이 벼락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참을 기다려 다시 승려들을 모아 결국은 비석을 쓰러뜨렸다.’
이상은 재일동포 작가 이유환(李瑜煥)의 ‘해인사 사명대사비의 수난’이라는 수필에서 발췌한 것이다. 해인사 홍제암의 불행한 과거는 그것만이 아니다. 밀양 표충사에 봉안된 사명대사의 영정을 해인사로 이전하고자 했던 두 차례에 걸친 분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1차 분쟁은 1739년 3월 해인사의 승려들이 나서서 밀양의 표충사당을 홍제암으로 옮기기 위해 비변사에 상소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주동 인물인 해인사의 승통 성오(聖悟)와 수창승 현일(玄一) 등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같은해 6월 조정의 결정으로 표충사는 밀양에 그대로 두기로 하고 해인사 홍제당을 훼찰해 버렸다. 두 번째 분쟁은 1783년(정조 7년) 통도사의 승려 의성(義成) 등이 30여 명의 중을 이끌고 밀양 표충사를 강제로 점거, 사명대사의 영정을 탈취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표충사의 수호승 돈화(頓和)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해인사측 주장을 반박했다. 특히 해인사 승려들의 본심은 사액사당을 유지함으로써 잡역의 면제 등 경제적 특혜를 바랄 뿐 3대사의 신주를 봉안하는 데 있지 않다고 상소해 조정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제2차 분규도 결국은 밀양의 표충사에 사액사당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해인사의 주장을 일축함으로써 홍제암의 슬픈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이어져갔던 것이다.
일제의 석장비 파괴
저녁식사 때 원주 종성스님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는 소탈한 성격에 격의없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술회했다. 지금 60세가 넘은 그는 22세에 출가했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얘기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그때 종성스님은 건물 준수 중 지붕 위에 올라가 일꾼들과 기와를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선글라스를 낀 무장경호원들이 홍제암에 들이닥쳐 대표스님을 찾더라는 것이다. 한창 작업중인 터라 지붕에서 내려가지 않았더니 한 사람이 권총을 빼들고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쏜다고 위협해 마지못해 마당으로 내려섰다고 한다. 그때 홍제암 입구에는 박대통령이 들어오고 있었고 미처 흙 묻은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악수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홍제암 중건을 지시했고 특별하사금이 지급돼 지금의 건물이 생겼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 일행은 가야산 우거진 숲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힘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산사의 정기를 만끽했다. 다음날 일찍 조공을 마치고 원주 종성스님의 안내로 일행은 다시 석장비와 후원(뒷산)의 부도를 답사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홍제암에 기거하는 보문(寶文) 스님도 우리 일행과 함께 부도를 답사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일행은 해인사 본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본당은 홍제암에서 뒷길로 걸어서 2∼3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다.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 사이에 우뚝 솟은 해발 1430m의 가야산 기슭에 자리한 해인사는 서기 802년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로서 법보로 꼽히는 이 절은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본산이며 수다라전(修多羅殿)과 법보전(法寶殿)에는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판(8만1258매)이 소장돼 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고려 현종(顯宗) 때의 것은 몽고 침입 당시 소실됐고 현재 해인사에서 보존중인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외적을 막기 위해 16년간 만들었다고 한다. 당초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하던 것을 서기 1398년(조선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겼다고 한다.
직지사 주지의 꿈
일행의 안내를 맡은 스님은 홍제암 소속 보찬(寶贊) 스님으로 젊은 나이에도 해박한 지식으로 해인사의 이모저모를 소상히 설명해줬다. 해인사 본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보이고 양옆에 수련 승려 약 150명의 학습 건물이 있다. 경내 본당과 10여 암자의 승려를 합하면 약 500명이 해인사에 기숙하는 셈이다. 대적광전 앞 광장에는 야단법회 때 대불(大佛)을 노천으로 모신다고 하며 대적광전의 건물이 정남을 향하지 않고 남서 방향으로 비켜 앉은 것은 정남쪽에 있는 매화산(梅花山 해발 1083m)의 화기(火氣)로 인해 빈번했던 화재를 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처럼 해인사는 여러 번 불이 나 건물이 소실되곤 했다. 해인(海印)이란 원래 우주의 일체를 깨달아 알고 있는 부처님의 지혜, 즉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이 바다에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데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화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물을 상징하는 바다를 절 이름으로 정했다는 설명도 있다. 대적광전 건물의 처마 밑 바깥벽에는 여러가지 불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안내 담당 보찬스님의 긴 설명이 끝난 다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거기에는 국보 제52호인 수다라전과 법보전이 있고 그속에 팔만대장경판이 소장돼 있다. 우리 선조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장경판고(板庫) 밑에 흙을 깊이 파고 숯과 소금과 황토의 층을 각각 1m씩 만들어 경판의 훼손을 방지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은 너무 길고 어려운 한자로 돼 있기 때문에 그간 일반 사람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대장경이 이제 한글로 번역해 총318권의 책으로 완성됐다. 이 한글 대장경을 만든 주역은 운허(耘虛, 1898∼1980) 스님과 동국역경원 원장 월운(月雲·73) 스님이다. 이 두 스님은 무려 36년간의 긴 세월을 바쳐 한글판을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대장경의 전산화 작업과 영문 번역도 병행하고 있어 곧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안내하는 보찬스님이 자랑했다.
해인사에서 직지사까지는 버스로 2시간 거리다. 10시경 해인사를 떠난 순례단은 88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대구 근처에서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서 김천 인터체인지에서 벗어났다. 직지사의 정확한 위치는 경북 금릉군 대항면(代項面)이다. 서기 418년(신라 19대 눌지왕 2년)에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세웠다고 하나 일설에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해인사의 말사였던 직지사는 아도스님이 이곳 황악산(黃岳山)을 둘러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절터를 잡았다는 뜻에서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직지인심(人心)이란 교리를 캐거나 계행(戒行)을 닦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 불과(佛果)를 얻게 하는 일을 말하며 따라서 직지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곧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명대사는 1557년(명종 12년) 5월 13세(만 12세 7개월) 때 생가지를 떠나 이곳 직지사에 입찰(入刹)해 선문(禪門)에 들어갔다. 당시 직지사의 주지는 신묵화상(信默和尙)이었다. 신묵화상은 사명대사가 입찰하는 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일주문(一柱門) 밖의 은행나무에서 누런 용(黃龍)이 사렸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라 깨어나, 너무 신기한 꿈이라 밖으로 나와 살펴보니 일주문 앞에 허술한 차림의 한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 있으므로 곧 그 아이를 받아들여 삭발케 하고 제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
노인은 그 아이의 할아버지며 그 아이가 바로 사명대사였다. 대사는 생가지인 밀양시 무안면 고나리에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쓴 석장비문에는 ‘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했다. 날 때부터 다른 아이보다 뛰어났고 자라면서 아이들과 놀면서도 희롱하지 아니하며 놀 때도 모래로 탑을 쌓고 돌을 세워 부처라고 했다. 그 앞에 꽃을 꺾어다 꽂고 밤을 주어다 제단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는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자라를 잡은 것을 보고 밤을 주워 모아주고 자라를 사서 못에 도로 놓아 주었다. 이를 보던 아이들이 감동해 주운 밤을 모두 사명대사에게 줬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아이들에게 밤을 똑같이 나눠주고 자기는 한몫도 갖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오니 마을사람들이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사명대사는 열세살까지 할아버지 주선으로 황간 송안정(黃澗 送雁亭)으로 가 황류촌 여헌(黃柳村 汝獻) 선생 문하에서 맹자를 공부했다. 그런데 하루저녁에는 책을 덮고 “세속의 학문은 그 됨됨이가 천하고 더러운지라 속세의 온갖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가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인가”라고 탄식하고 승려의 길을 택하고자 출가해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의 제자가 됐다고 한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분은 직지사 연수원장 이양길 법사다. 그는 승려신분이 아닌 신도로서 직지사의 내력과 사명대사의 입찰 경위를 설명해줬다.
사명대사가 출생지 근처에 많은 사찰이 있음에도 직지사에 입찰한 까닭은, 당시 직지사는 주변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신묵화상이라는 고승(高僧)이 있었으며, 다른 절에는 없는 공부방(禪院)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직지사에는 500여 승려가 기숙했고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 유물인 큰 떡시루 가마솥이 당시에는 3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직지사는 고려시대에 각광받던 큰 절이다. 태조 왕건이 백제 견훤과의 대구벌 전투에서 포위돼 부하장수 신숭겸으로 위장한 후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피한 곳이 곧 직지사다. 직지사에서는 도선대사의 제자 능여가 왕건을 도왔으며 이런 연분으로 왕건은 3국을 통일한 뒤 능여를 고려의 국사(國師)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직지사에서 처음에 전등록(傳燈錄)을 읽었는데 더 익히지 않아도 이미 오묘한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그때 절에 있던 학식이 높은 늙은 승려들마저 사명대사에게 나아가 물었다고 한다.
이런 총명함 때문에 대사는 18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선과(禪科)에 급제했다. 조선조에 들어 중종 때 한동안 과거에 선과가 제외됐으나 명종 때 섭정한 문정왕후가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중용하면서 승과(僧科)를 다시 부활시켜 서산과 사명대사 등 큰 인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가 급제한 것은 명종 7년이었으므로 사명대사의 급제보다 10년전 일이다. 사명대사는 그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노자, 장자, 문자, 열자를 배우고 이태백의 시와 두보의 시도 배웠다. 나아가 불경 천함(千函)을 연구하게 되자 사명대사의 문하생이 되고자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고 한다.
사명당 학술대회
사명대사가 32세 되던 해에 선종(禪宗)의 주지 추천을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청허(淸虛) 서산대사의 제자가 됐으며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3년 동안 고행하고 전국의 명산과 중요 사찰을 순례하며 수도함으로써 입찰했던 직지사를 일단 떠나게 됐다.
직지사는 일제시대 때 해인사의 홍제암이 일본 경찰에 의해 수난을 당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만났다. 절의 건물은 모두 불타고 잡초만 무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1957년과 1995년 두 차례 복원해 현재의 모습대로 훌륭한 절로 변신했다고 한다. 물론 직지사에도 사명대사의 영정과 유물을 모신 사명각이 경내에 엄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명대사의 유적답사를 위한 2박3일의 일정은 결코 흡족한 것이 아니다. 좀더 시간 여유를 갖고 이모저모를 마음껏 살펴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그나마 유적지를 찾아 먼 거리를 이동했기 때문에 실제로 답사하는 시간보다는 버스 안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더 걸렸던 것도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동하는 버스 안은 귀중한 학습장이 되었다. 버스 안에서 사명당 사업회 사무국이 미리 준비한 각종 자료를 읽을 수 있었고 또한 동국대학교 사학과의 조영록(曺永綠) 교수와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극작가 노경식 선생이 번갈아가면서 유적지에 얽힌 갖가지 얘기를 여러 차례 들려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조가 불교를 경시하고 유교를 숭상했음에도 사명대사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그의 거룩한 호국정신으로 쌓은 위업은 여러 유적지에서 갖가지 형태로 빛나고 있다. 신분이 승려임에도 왕이 사액한 사당에서 영정과 더불어 신주로 모시고 유생과 불도들이 함께 제를 올리도록 한 조정의 배려를 이번 답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명대사의 유적을 찾아 낱낱이 파괴하려 했던 잔인한 처사에 다시 한번 증오와 전율을 느꼈다.
한편 사명대사의 공훈에 관한 연구가 수년 전부터 관련 학계에서 꾸준히 진척되고 있다. 사명당 사업회가 주관하는 학술대회는 국내에서 세 번 개최됐고, 국외에서는 2001년 5월에 일본 교토에서 열렸다. 학술대회에서는 국내외의 많은 석학들이 연구발표와 의견을 활발히 개진했다. 이에 따라 역사의 그늘에 가려 있던 사명대사의 생애와 업적이 더욱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명대사의 유적은 비단 영남 일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선사인 서산대사를 만나러 자주 찾았던 묘향산 보현사의 비석, 보현사에서 상원암(上院庵)으로 가는 길목의 비석, 내금강 화양군의 표훈사(表訓寺)에 소장됐던 선조의 하사품인 금룡보자(金龍補子), 백화암(白華庵)에 모셨던 영정과 사리탑 등은 애석하게도 북한땅에 있어 접근하기 어렵다. 그리고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에는 1800년(정조 24년)에 세운 대사의 영당과 부도, 그리고 자통홍제존자 사명당 기적비(紀績碑)가 있었는데 6·25 전쟁 때 포탄에 맞아 여러 조각이 났고, 사리탑은 도굴돼 일부만을 회수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이번 순례단에 참가한 고성군청의 황병구 과장이 알려줬다.
“어찌 나랏일을 생각지 않겠나”
일행은 직지사에서 뜻깊은 순례 일정을 마치고 오후 2시경 서울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각자가 이번 유적답사에서 느낀 소감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해진 버스 안에서 필자는 사업회가 준비해 배포한 자료를 뒤적거렸다. 그중 밀양 표충사의 영당비명 병서에 다음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의병을 일으켰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
―선조 25년 임진년에 왜적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침입했다. 선조께서 서도로 몽진하고 왜적의 총칼이 팔도에 꽉 차매 안팎으로 국록을 먹는 자들이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니 적이 드디어 마음대로 이 나라를 짓밟았다. 이때 사명대사 유정은 처음에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왜군을 개유해 영동 9군을 흉악무도한 비참한 지경에서 면하게 했다. 얼마 후에는 대사께서 분개해 승려들을 불러모아 “우리가 잘 지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님의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버린 중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원수 왜적이 침입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것을 어찌 앉아서 보고 구하지 아니할소냐. 내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돕고 창생을 구하려 하니 뜻 있는 자는 나와 함께 일어나라” 하고 무리를 모았더니 수백명이 몰려들어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 글을 읽고 필자는 사명대사의 충성과 백성을 구하고자 한 참뜻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필자는 이번 순례단의 유적답사를 통해 뒤늦게나마 사명대사의 훌륭한 호국정신과 인품에 크게 감동했으며 따라서 추앙심도 한층 깊어졌다. 아마도 이번 순례단 전원이 필자와 같은 감회를 공유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