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에서 인문학과 기초학문의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대대적인 지원계획을 발표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인문학과 기초학문에 대한 육성·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의 위기에 대한 논란은 잦아들지 않는 것 같다. 학생들로부터는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구자들로부터는 ‘연구비를 확보하기 어렵다’, 사회로부터는 ‘실생활에 바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불만을 들으며 설 자리가 갈수록 줄어든다고 아우성들이다. 지난 5월에는 서울대에서도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 3개 대학이 ‘기초학문의 홀대’에 반발하며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은 눈에 보이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생산하는 인간을 기르는 학문이므로 상대적으로 쇠퇴한다는 생각은 들 수 있다. 특히 기술문명 발전의 속도가 지금과 같이 빠르고 물질적, 경제적 부에 대한 의존도가 클 때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의 위기에 대한 논란은 국내에서만 빚어지는 게 아니다. 지난 4월 미국연구대학협의회(AAU)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AAU는 캐나다의 2개 대학을 포함해 61개의 연구대학들이 회원으로 소속된 단체로 미국의 주요 대학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이 행사의 한 회의석상에서 많은 참석자들이 미국 대학에서도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고민을 토로해 적잖이 놀랐다. 한 참석자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IT)의 급격한 성장으로 모든 연구가 IT와 접목되다보니 어떻게 IT와 결합할 수 있느냐가 인문학 발전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하버드대의 경우 대학이 조성한 전체 기금 191억달러 가운데 43%인 79억달러가 인문학 등 이른바 ‘Arts and Sciences(과거의 문리대학 개념)’ 분야에 배정되어 있다. 하버드대 이외에도 많은 미국 대학들이 인문학 분야에 거액의 기금을 마련해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 대학들의 인문학 및 기초학문 지원 실정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인 미국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의 위기를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학계도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표지향적 연구(Mission oriented)를 요구하는 국가적, 사회적 분위기가 강해짐에 따라 인문학이나 기초학문 분야의 상대적인 소외감이 심화되는 것도 위기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학이 없어질 수 없으며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이며, 문화는 국가경쟁력의 마지막 보루”라고 한 앤드루 카네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야말로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인문학은 다양한 콘텐츠의 기반
필자는 11년전 서울대 공대학장이 되었을 때 ‘공학교육은 발전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공학교육에 대한 백서를 발간했다. 당시 공학계에서는 자신들의 치부를 이렇게 샅샅이 드러내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하지만 필자는 공학교육의 현실을 진단, 강점과 약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공학교육의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마련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이 백서를 준비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기초학문이 현재를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기반사회인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지식발전의 속도가 빠르며 학문의 발전속도도 빠르다. 또한 다양한 학문 분야가 융합된 ‘퓨전학문’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학문분야 간의 융합은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의 토대가 튼튼하지 못하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지식기반사회를 대표하는 인터넷 역시 다양한 콘텐츠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 콘텐츠에는 인간의 창의력에 기초한 인문학적 소양이 필수적이다. 또한 수학이나 논리학 등 기초학문의 토대가 없다면 첨단 컴퓨터공학의 발전도 불가능하고, 생물학의 기반 없이는 생명공학도 발전할 수 없는 일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기초니 응용이니 하는 구분이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사회에서는 그런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모든 학문 분야는 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학문분야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형태와 이에 걸리는 시간은 다를 것이지만.
정보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하드웨어뿐 아니라 이에 필요한 콘텐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기술진보를 외면하지 않는 인문학과 기초학문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