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 면적의 절반이 채 안되고 인구가 720만명에 불과한 스위스. 이렇다 할 부존 자원도 없는 이 나라가 1인당 GDP 3만3470달러, 국가 신인도 세계 2위, 기술 무역수지 세계 2위의 남부러울 것 없는 부국으로 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단일 민족, 단일 언어권에서 온 사람이라면 이 나라 국민이 과연 하나의 깃발 아래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법도 하다. 스위스는 나라는 작지만 무려 26개 주로 나뉘어진 연방국가다. ‘칸톤(Canton)’이라고 불리는 각 주들은 독자적인 헌법과 법률을 토대로 철저한 자치행정을 실시한다. 지방색도 뚜렷하며, 국민의 64%가 쓰는 독일어를 비롯해 프랑스어(19%), 이탈리아어(8%), 레토로망슈(1%) 등 공용어가 4개나 된다. 북부와 동부, 중부지방은 같은 독일권이지만 각양각색의 방언을 사용한다.
더욱이 스위스 인구의 20%는 다국적기업, 국제기구 등에 근무하거나 비즈니스, 혹은 유학차 스위스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스위스 국적을 가진 나머지 주민도 따지고보면 각 언어의 모국에 속하는 사람들인 만큼 민족적·언어적 의미의 스위스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지상주의 전통
그러나 스위스는 작지만 강한 나라, 즉 ‘강소국’의 전형이다. 스위스의 지난해 GDP(국내총생산)는 2412억달러로 한국의 절반 규모지만, 1인당 GDP는 3만3470달러로 한국의 3.5배에 이르며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스위스의 1인당 GDP는 EU(유럽연합) 국가 평균에 비해 60%, 유럽 최고 수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보다도 40% 이상 많다.
지난해 스위스 경제는 3.6%의 성장률을 기록, 199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미국 유럽 등 세계 경제의 침체로 올해 성장률은 1.8% 수준으로 둔화될 전망이지만 내년에는 다시 2%대를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연방경제부 데이비드 시즈 차관은 “우리에게 적정한 성장률은 2.0∼2.5%선이다. 우리는 현재 수준에서 더 이상 비약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이 수준을 유지하는 데 목표를 둔다. 스위스는 노동력 시장이 작기 때문에 경제규모가 더 커져봐야 이를 감당할 능력도 없다”며 여유를 보였다.
지난 3월 영국의 국제경제 전문지 ‘유로머니’는 스위스의 국가 신인도를 100점 만점에 96.75점으로 평가했다. 185개 조사대상국 중 2위였다. 한국은 62.53점으로 47위였다. 스위스의 국가채무는 GDP의 53.8% 규모로 유럽 국가 중 최저 수준(EU 국가 평균은 76.7%)이다.
해마다 280여 개 영역의 경쟁력 지수를 산출, 합산해 국가 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IMD(국제경영개발원)는 올해 순위에서 스위스를 10위에 올려놓았다. 지난해의 7위에서 세 계단 떨어졌지만, 올해에도 독일(12위), 영국(19위), 프랑스(25위)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을 따돌렸다. 스위스는 자본비용(2위), 노사관계 안정성(2위), 정부 효율성(6위), 금융시장 효율성(6위), 인프라(9위) 등의 영역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가 성숙한 만큼 스위스 GDP의 70%는 서비스산업 부문에서 창출되지만, 제조업은 여전히 스위스 경제와 산업을 떠받치는 대들보 노릇을 하고 있다. 스위스의 제조업은 고부가가치 기계 수출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할 만큼 과학기술 수준이 높다. 특히 정밀기계, 금속가공기계, 발전설비 및 선박용 터빈, 인쇄기기, 정밀측정기기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하이디의 나라’에서 ‘하이테크의 나라’로 거듭난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선정한 2001년 세계 500대 기업에는 노바티스(26위) 로슈(48위) 네슬레(50위) UBS(61위) 크레디트 스위스(85위) 취리히 파이낸셜 서비스(105위) ABB(172위) 등 스위스 기업이 11개나 포함됐다(한국은 삼성전자225위, SK텔레콤 270위, 한국통신 297위, 한국전력 403위 등 4개). 하지만 이들은 스위스에 본사를 뒀을 뿐 실제로는 전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 활동을 펴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예컨대 다국적 식품회사인 네슬레는 총 매출액의 2%만을 스위스에서 창출하고 있으며, 11명의 톱매니저 중 스위스인은 3명에 불과하다.
스위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주역은 회사도 작고 생산량도 적지만 우수한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내는 중소기업들이다. 스위스 기업의 99%는 정규근로자가 250명 이하인 중소기업이다. 주로 시계 제조업으로 출발한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오랜 기간 장인정신을 담은 제품을 만들며 축적해온 정밀가공기술에 전자공학을 결합, 이를 의료기기에서 우주비행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면서 각종 첨단 정밀산업기술의 선도자로 성장했다.
많이 일하고 많이 받는다
데이비드 시즈 차관은 “우리는 값싼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나라도 작고 자원도 없는 우리에겐 ‘두뇌’밖엔 믿을 게 없다. 그래서 많은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그들의 비즈니스 활동을 고무해왔다. 그 결과 시계 계측기 방직기계 의료기기 등의 제조업은 물론, 제약 의학 화학 등 생명공학, 은행·보험 등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 작게는 볼펜 끝에 들어가는 좁쌀만한 볼에서 크게는 우주선에 설치하는 로봇에 이르기까지 ‘스위스 메이드(Swiss Made)’의 명성은 자타가 공인한다. 세계인이 쓰는 볼펜 10개 중 9개에는 스위스제 볼이 들어 있다. 우리는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과 서비스에는 관심이 없다.”
스위스 전통 제조업의 상징인 시계산업은 금욕정신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정착된 캘빈의 종교개혁기에 시작됐다고 하는데, 스위스 시계가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은 이런 신앙적 기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지금도 연간 약 1억 개의 시계를 생산해 그중 95%를 수출하는데, 세계 시장의 13%, 아시아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치밀하고 재주 많고 근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인구 규모가 작고 고령화 수준이 높다는 약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양질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의 총인구 대비 취업인구 비율은 54.4%(1999년)로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영국(46.5%), 독일(43.7%), 프랑스(38.4%) 등과는 커다란 격차를 보인다. 실업률에서도 EU 12개국 평균이 8.3%에 달하는 반면, 스위스는 불과 2%대로 완전고용상태에 가깝다.
스위스 근로자의 생산성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급여수준은 높지만 생산성이 높고 근로시간이 길어 임금 코스트의 경쟁력이 높다. 연평균 근로시간이 1856시간(2000년)으로 선진국 중 가장 많은 반면 결근·병가 일수는 가장 적다.
스위스와 독일 엔지니어의 임금 코스트를 비교한 사례를 보자. 연간 급여는 스위스가 4만3568마르크, 독일이 3만2772마르크다. 하지만 복리후생비 등 간접비를 포함하면 연간 총 인건비는 각각 6만5198마르크, 6만7712마르크로 독일이 다소 높아진다. 연간 근로일수는 262일로 같다. 그러나 국경일, 휴가, 병가 등을 뺀 실제 근로일수는 스위스가 226일, 독일이 206일이다. 여기에 하루 평균 근로시간인 8.50시간(스위스)과 6.42시간(독일)을 곱하면 연간 총 근로시간은 1921시간, 1322시간으로 스위스가 독일보다 1.5배나 많다. 그 결과 스위스의 시간당 실제 인건비는 33.9마르크로, 독일(51.2마르크)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노사관계도 안정적이다. 지난해 IMD는 스위스가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노사관계가 안정적인 국가라고 평가했다(한국은 46위). 노사분규로 인한 연간 노동손실 일수는 근로자 1000명당 0.38일로 한국(29.16일)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연방경제부 이레나 크로네 공보관은 “노사 모두 적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풍을 오래 전부터 견지해왔기 때문에 큰 갈등은 빚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꼼꼼한지는 그들의 일상 곳곳에서 짐작할 수 있다. 농촌에는 기계를 이용한 과학영농이 자리를 잡은 지 오래지만, 농부들의 손을 만져보면 젊은층도 하나같이 마디가 굵고 울퉁불퉁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대기 때문이다.
뒷마당에는 집집마다 장작더미들이 가지런히 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 과거에는 갑작스런 폭설로 장작을 잃어버리면 꽁꽁 얼어붙은 냉방에서 밤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겨울이 오면 장작을 정리해 쌓아두는 습관이 붙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기름으로 난방을 하고 장작은 거실 벽난로의 운치를 살리는 부분 난방용으로나 사용하는데도 옛 습관을 못 버리고 있는 것.
스위스인들은 웬만한 집 수리나 자동차 정비 정도는 자기 손으로 해결한다. 그래서 농가는 물론 도시 가정들도 손때 묻은 갖가지 공구를 다 갖춰놓고 있다. 수십 종의 연장과 공구를 창고 한쪽 벽에 빽빽히 걸어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공구가 걸린 자리마다 그 공구의 이름을 써놓고 모양까지 그려놓았다. 누가 무슨 공구를 가져다 쓰든 나중에 제 자리에 정확하게 걸어놓도록 하기 위함이다.
취리히에 거주하는 교민 김용학씨는 “스위스 사람들은 타고난 일벌레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스위스에서는 연방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다양한 현안을 내걸고 1년에도 20차례가 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민의를 반영한다. 몇 년 전에는 스위스인의 근로시간이 너무 많다는 지적에 따라 급여는 그대로 둔 채 근로시간을 축소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했는데, 예상을 깨고 부결됐다. ‘부존자원도 없는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오직 근면과 성실 덕분’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20여 년을 산 나도 깜짝 놀랄 만한 결과였다.”
교육 시스템 또한 내실있는 직업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스위스 청소년들은 9년 간의 의무교육을 마치면 적성과 장래희망에 따라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교원양성학교, 직업학교 등으로 진학한다.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의 4분의 3 정도가 직업학교에 진학해 3∼4년 동안 도제수업을 받는다. 이들은 직업학교에서는 이론적인 부분만 배우고, 그 외에는 자신이 선택한 직종과 관련있는 인근 기업으로 출퇴근하면서 현장실습 위주로 배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아진다.
이처럼 도제수업을 통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직업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스위스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미국, 독일, 스웨덴 같은 나라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IMD에 따르면 스위스 청소년의 과학·기술의 대한 관심도는 10점 만점에 7.43점으로, 핀란드(7.31) 프랑스(7.12) 독일(6.78) 미국(6.60) 일본(5.48) 등의 기술 선진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 스위스는 학생 1인당 교육투자액도 세계 최고이며, 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자 수와 특허건수도 단연 세계 1위다.
‘시장을 존중하는 작은 정부’
교민 김용학씨는 “스위스 청소년의 대학 진학률은 20%에도 못 미치지만 고등학교만 나오면 3개 국어 정도는 어려움없이 구사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제도교육에서 외국어 교육을 강조하는데다, 다민족·다언어·다문화 국가이고 외국인이 많이 살다보니 대부분의 스위스인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 특히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스위스인들은 이런 여건 때문에 외국어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개방성과 포용성, 조화와 협상의 전통이 몸에 뱄다고 한다. 이는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거나 다보스 포럼 같은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데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한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국제결제은행(BIS) 등의 국제기구가 스위스에 본부를 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스위스는 GDP의 약 3%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는데, 투자액의 4분의 3은 민간부문에서 나온다. 각 대학의 과학·기술분야 연구소들은 전담 사무소를 두고 이들 민간부문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한다. 정부의 R&D 예산은 기초연구에 중점적으로 지원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기술수출액을 기술수입액으로 나눈 기술 무역수지 순위에서 스위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스위스 기업의 경쟁력은 ‘시장을 존중하는 작은 정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정부의 최우선 정책목표는 ‘가장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다. 인근 강대국인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유리한 기업환경을 만들어 첨단분야의 외국인 투자와 다국적 기업 본사를 유치하는 데 주력한다.
그렇다고 파격적인 투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활동에 유리한 투자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할 따름이다. 기업 인프라, 안정된 통화정책, 낮은 세금정책, 지적재산권 보호, 행정절차 간소화, 정치 안정, 노사관계 안정, 양질의 노동력 등이 그런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스위스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연방경제부는 수도 베른 시내의 교차로 한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입주해 있다. 한 대뿐인 엘리베이터는 그나마 공간이 협소해 단체로 방문할 때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연방경제부는 국내 및 대외 경제정책 파트로 분리돼 있었으나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국내외 경제정책을 분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최근 관할부서를 일원화했다.
연방경제부는 자신의 임무영역을 거시적 차원으로 제한한다. 즉 ▲대외적으로는 상품·서비스 교역 및 해외 투자를 관할하고 스위스의 대외 경쟁력 향상과 국가간 경제협력에 주력한다 ▲대내적으로는 연방 차원의 산업·경제정책을 수립하고 각 주의 균형적 경제발전을 조정·지원한다는 것이다.
주정부의 독립성을 보장, 실질적인 경제정책은 주정부의 자율적 판단에 맡기고 연방정부의 간섭은 최소화해 경제발전을 측면에서 지원하겠다는 얘기다.
이처럼 연방정부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자율권과 자치행정권을 부여받은 26개 주정부는 서로 경쟁하면서 기업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연방경제부 이레나 크로네 공보관은 “스위스에 투자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은 ‘힘없는’ 연방정부보다는 재량권을 많이 가진 주정부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그들이 내거는 조건을 비교해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기업 스스로 살 길 찾게
스위스는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5%(한국은 61%)에 달할 만큼 소유 및 경제력 집중도가 높지만 대기업에만 적용되는 차별적인 규제는 없다고 한다.
“스위스는 인구가 적고 자원이 부족해 해외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 독점이나 카르텔도 명백한 경쟁제한 행위만 없다면 사회의 부를 증진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용인해왔다”는 게 변호사 겸 컨설턴트인 우르스 루스텐버거 박사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EU 출범 등에 대응하려고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는 등 경쟁촉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업합병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대하다는 것.
외국 기업에 대해서도 별다른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권리는 외국인에게도 내국인과 차별없이 부여한다. 영주권자는 물론 임시 체류허가를 받은 외국인도 스위스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회사를 창업하거나 기업 지분을 매입할 수 있다. 회사를 세울 때는 정부로부터 특별히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고, 관련산업 조합에 가입하거나 상공회의소 등의 승인을 얻을 의무도 없다. 회사 지분의 일정 비율을 스위스인이 보유해야 한다는 따위의 규정도 없다.
스위스 정부는 과거부터 특정산업을 육성하거나 기업을 지원하는 등의 시장개입정책도 추구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내버려두면 결국은 살 길을 찾게 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카메라산업과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았을 때도 정부는 이들을 구하려고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기업들이 자발적인 혁신을 통해 살아 남았다. 그 결과 한 카메라 회사는 세계적인 거리측정 광학기기 전문업체로 거듭났고, 승용차산업이 자취를 감춘 대신 청소차, 스키장용 자동차 등을 만드는 특수차량업체가 활기를 띠고 있다.
스위스에는 식품, 서비스 관련산업, 정밀기계, 화학, 섬유 등 5개 ‘클러스터(Cluster)’가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우리말로는 ‘산업단지’쯤으로 번역되는 클러스터에선 대기업, 중소기업, 대학, 연구소가 상호보완 기능을 하며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는 바젤, 베른 지역을 중심으로 유전공학·나노테크놀로지·IT분야의 새로운 클러스터가 형성되고 있다.
이들 클러스터도 정부가 주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국내외 민간기업들이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혁신하고 변모하고 협력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정부는 1997년 유전공학 연구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메드테크 이니셔티브’를 출범시키고 이를 통해 유전공학 R&D 분야의 과학자와 기업체를 연결, 산학협력체제를 가동했다. 1992년 이래 생명기술 중점 육성 프로그램(Swiss Priority Program Biotechnology)을 통해 제약, 식품, 생명공학 분야의 R&D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 지원이 불가피한 분야의 ‘준비된 기업’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스위스는 선진국 중 조세 부담이 가장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스위스 기업의 법인세 및 자본소득세 납부비율은 선진국 중 가장 낮다. 자회사의 지분 매각 등에 따른 기업의 자본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기업의 의무적인 사회보장비 부담도 미국이나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낮으며, 특히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등 사회민주주의 성향 국가들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상무는 “지주회사에 대해서는 이중과세를 막기 위해 연방, 주, 지자체 모두 세금을 면제하며, 거주회사(居住會社, 본사는 특정 주에 있지만 생산·영업활동은 다른 지역에서 하는 회사)에게는 주와 지자체가 면세혜택을 주고, 신설기업에 대해서는 최장 10년 동안 법인세와 자본소득세를 면제하는 ‘조세면제기간(Tax holiday)’을 적용한다”며 “스위스는 이처럼 낮은 조세부담률을 해외로부터의 투자 유치를 위한 강력한 인센티브로 내걸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스위스는 정치적 안정, 낮은 인플레이션(지난 10년간 평균 인플레이션율이 1% 이하), 통화가치의 안정, 고객정보의 철저한 비밀유지, 선진 자산운용기법 등에 힘입어 세계 각국의 자금이 몰려들면서 국제적인 금융시장으로 입지를 다졌다. 스위스 은행산업은 근로인구의 4%를 고용하고 있으며 국가 전체 부가가치의 10% 이상을 창출한다. 세계 10대 은행 중 2개(UBS, 크레디트 스위스)가 스위스 국적이며, 127개의 외국 은행을 포함해 총 375개의 은행이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스위스 금융시장은 은행, 보험, 투자은행 등의 업종 경계가 없는 유니버설 뱅킹 체제를 도입해 자금 운용의 효율성을 높여왔다.
스위스 은행들이 운용하는 자산은 2조달러에 이르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외국에서 들어온 돈이다. 전세계의 고액 예금자와 기관투자가들이 앞다퉈 돈을 맡겨와 스위스는 세계 자산운용시장에서 35%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스위스는 런던과 뉴욕, 프랑크푸르트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역외금융센터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엄청난 자금이 몰려드는데다 저축률까지 높다보니 낮은 이자율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스위스 금융시장의 평균 대출금리는 4.29%로 미국(9.23%)의 절반 수준이며, 같은 유럽의 스웨덴(5.82%) 네덜란드(4.79) 핀란드(4.71%) 등보다 낮아 경쟁력에서 앞선다.
버블 조짐이 나타났던 1990년대 초반을 제외하고는 정부의 인위적인 금리정책 없이도 4%대 금리가 유지돼왔다. 이 때문에 스위스는 자본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은행은 장사가 잘돼 좋고, 기업은 싼 이자로 돈을 빌려 쓸 수 있으니 피차 실속을 챙기면서 조화롭게 스위스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