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경로를 통해 군부 쿠데타설을 보고받은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에게 이를 알려준다. 하지만 장총리는 “내가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말만 믿고 대통령의 경고를 무시한다.
3·15 부정선거를 겪는 과정에서 군이 보여준 작태는 참으로 암담했다. 당시 신문철을 들춰보더라도 군 내부의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던 공개투표라고 표현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이 적힌 투표용지가 사병에게 수교되면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기표를 하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집어넣는 기계적인 부정투표가 감행됐다. 도저히 말을 안 듣는 사병은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군에 근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다. 일부 영관급 정치장교들의 ‘정군운동’에 대해 사병들 사이에서는 지지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첫 내각이 구성될 때 싹트기 시작한 민주당 신파 내 ‘노장파’와 ‘소장파’의 싸움은 그들의 모체였던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을 능가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신파 내의 노장파는 주로 부총리 격인 오이영 국무원 사무처장관을 비롯해 김영성 재무장관, 현석호 국방장관 등을 지휘그룹으로 삼았던 주로 관료출신의 그룹을 지칭한 것이고 소장파는 이철승 국방위원장을 앞세운 비교적 젊은층의 초·재선 의원그룹을 가리켜 한 말이다.
불안한 싹은 처음부터 잘라야
이들이 처음 충돌한 것은 제1차 내각을 구성할 때였다. 4자회담을 장총리가 깨버린 것도 이들 노·소장파 사이의 분쟁이 기폭제가 됐다. 그후 구성된 1차 내각은 노장파의 완전무결한 승리였다. 소장파가 추천한 인물이 철저하게 노장파에 의해 배제됐다. 그들 노장·소장파는 육군참모총장의 임명을 둘러싸고 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소장파 대표인 이철승 의원은 3대 국회에 처음 진출해 계속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해왔다. 5대 국회에서 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된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이의원은 국방문제에 관한 한 당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일인자였다. 3·4대 국회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군대의 부정사건, 이를테면 각종 부정선거, 불온문서사건, 군수물자(담요) 유출사건, 장도영 장군의 수복지구 징세사건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건이 거의 없었다. 노장파 중에서, 특히 국방부장관인 현석호 의원이 적극적으로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으로 밀고 나오자 이철승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그의 과거사를 지적하고 극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장도영 중장의 장인이 현장관과 친했던 사실까지 들춰내는가 하면 장장군이 이기붕 국회의장과 가까웠다는 사실도 들먹이면서 그의 참모총장 임명에 반대했다. 그러나 노장파는 군 내부 사정에 어두웠던 탓도 있지만 현국방장관이 워낙 강하게 장장군을 추천하자 장총리가 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동조했던 것이다.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장도영 장군이 후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에 합류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모총장 인사에서 완패한 소장파는 박정희 소장의 인사를 놓고 또다시 노장파와 일전을 벌였다. 노장파측에서는 박정희 소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련해 실형을 선고받은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군 고위층의 부정을 비난했던 사실 등을 고려해 그를 군대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불안한 싹은 처음부터 잘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장총리에게 박정희 소장의 축출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박정히 소장은 건재했을 뿐 아니라 군대에 있으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장면 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을 치밀하게 진행시켰던 것이다.
박소장이 건재했던 이유가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40년이 지나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군 인사 문제를 놓고 대립을 계속했던 소장파의 이철승 국방위원장이 이번에는 박정희 소장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가 2001년 4월에 발표한 회고담 요지를 그대로 소개해 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조직 책임자였지만, 그걸 시인하고 전향했다. 그 조직을 다 공개하고 군복을 벗었던 것이다. 문관을 하다가 6·25 때 군에 복귀하며 공을 세웠고, 그래서 작전참모부장까지 왔는데 지금 와서 느닷없이 몰아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박정희는 우리 국방위원회에서 보장하겠다, 이렇게 장총리와 서너 시간 다투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예편을 모면하고 2군부사령관이 돼 대구로 내려갔고, 인근 영천에서 육군 정보학교교장을 하던 한웅진과 만나 쿠데타를 모의한 거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철승의 박정희 옹호
이철승 의원은 내가 존경하는 선배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뒷날 쿠데타 주모자가 된 박정희 소장이, 이철승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회국방위원회가 보증하겠다고 장총리를 설득함으로써 추방을 피할 수 있게 된 사실이다. 노장파의 주장을 꺾고 소장파가 승리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후일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의 주모자로 변신한 데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영관급 장교들이 ‘정군계획’을 들고 다니면서 하극상으로 비칠 수 있는 혼란상태가 장면내각 초기에 벌어지자 현석호 국방장관 등 노장파는 그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군에서 하극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들의 행동을 일종의 모반으로 간주하고 철저한 처벌을 장면 총리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도 박정희 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장파에 의해 운명적인 희극이 벌어졌다. 계속해서 당시 소장파 지도자였던 이철승 국방위원장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육사 8기생 중심으로 하극상이 일어났다. 일부 부패 또는 정치장군들을 찾아가 자진해서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등 조직적인 모반을 했거든. 김복동, 김종필 중령들이 연행돼 조사를 받고 그랬어. 그때 내가 국방위원장인데 내 원칙이 군의 희생자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었지. 8기생 석정선과 김종필 중령이 만나자고 해서 내가 회장을 겸하고 있던 대한체육회 앞 무교동 일식집 향림(아마도 향진을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에서 밥을 함께 먹은 일이 있지. 억울하니 살려달라는 거야. 그 뒤로도 석정선이가 성북동 우리 집으로 몇 번 찾아오고 내가 한 사람에게만 처벌해서 본때를 보이자고 주장해 김복동이만 징역 살았지. 김종필이가 박정희 조카사위 아니야? 그때 징역 살았으면 5·16에 가담하지 못했을 거야.”
나는 존경하는 이철승씨가 5·16 쿠데타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김종필씨를 적극적으로 구해준 사실을 밝히게 된 동기는 알 수가 없지만 그의 주장이 만일 사실이라고 한다면 박정희 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종필 구명사건도 희극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역사적 비중이 큰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나는 5·16 다음날 대통령 친서를 휴대하고 일선의 군단장들을 만나러 다닌 일이 있다. 당시 내가 목격하고 느꼈던 것은 평민도 아닌 무장한 군인들의 하극상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다. 이철승씨 말대로 박정희 소장이 군복을 벗었거나 김종필 중령이 처벌됐더라면 5·16 쿠데타 발발이 불투명했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집권당인 민주당 신파의 노장파와 소장파가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쿠데타 첫날부터 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나 장면정권 초기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에게 면죄부를 안긴 처사는 비극적 운명을 자초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정치장교들에 의해 쿠데타 모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장면정권 내부에서는 노장파와 소장파 사이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소위 ‘중석사건(重石事件)’으로 알려진 부패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소장파 리더인 이철승 의원이 중심이 된 ‘신풍회’ 소속 함종빈 의원이 중석사건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나섰다. 부정부패와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됐던 4·19혁명을 겪은 지 수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민들의 충격은 컸고 그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함의원이 폭로한 중석사건의 내용은 첫째, 중석 수출계약을 위한 입찰에 부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오이영 무임소장관과 문창준 중석사장 사이에 모종의 추문이 있다는 것이고, 셋째, 입찰 부정에는 100만달러의 ‘커미션’이 있었을 뿐 아니라 계약을 해준 대가로 통조림공장과 냉동공장 설치를 약속받았다는 등등 전형적인 정치자금 스캔들의 농도가 짙은 내용이었다.
항간의 풍설에 따르면 소장파 그룹인 신풍회가 노장파인 오이영 장관을 표적으로 삼아 폭로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내 중석사건은 국회로 비화돼 ‘중석사건 진상조사단’이 구성됐고, 김영삼 의원(후에 대통령)과 이상돈 의원이 중심이 돼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게 됐다.
국회조사단이 밝힌 내용 가운데 이목을 끈 것은 일본의 용공(容共)계 회사로 알려진 ‘동경식품’과 불리한 조건으로 중석수출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장면정권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사건의 발설이 집권당 내분의 원인이 된 만큼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의 중간역할이 주효해 민주당 신·구파의 연립내각이 성립돼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던 만큼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파란곡절 끝에 성립된 연립내각은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61년 1월에 끝장이 나고 또다시 약체의 장면내각이 출현하게 됨으로써 정국의 불안은 더욱 가중돼갔다.
나는 ‘중석사건’이 정계의 태풍으로 등장했을 때 장면정권 앞날에 대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 자유당정권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몰락한 직접적인 동기는 3·15 부정선거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 직전 자유당 정권이 보여준 작태는 그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징후를 나타냈던 것이다. 첫째가 집권당이 강경파·온건파로 갈라져 서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약점을 극비리에 폭로해 자파의 당내 위치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연계자금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당 강경파들은 이재학, 김성곤 의원 등 온건파를 타도(?)하기 위해 연계자금 사건을 터뜨렸다. 연계자금 사건이라는 것은 은행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특혜융자를 받게 한 다음 그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이용한 사건이다. 온건파도 즉각 반격을 가했다.
박정희의 포섭공작
그들은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철호, 장경근 등 강경파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위해서 세칭 ‘양담배사건’을 폭로했다. ‘양담배사건’은 자유당 중앙당이 일선 장병 위문용으로 전매청으로부터 공급받은 양담배를 시장에 팔아 착복한 사건이다. 더욱이 전매청이 보관하던 양담배는 길거리에서 어려운 서민들이 생계를 위해 팔던 양담배를 압수했던 것이어서 강경파 체면에 먹칠을 한 사건이기도 했다. 장면내각에서 벌어지는 소장파와 노장파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청와대는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장면정권이 발족한 지 한 달도 안된 1960년 9월10일 장면정권의 초대 국방부장관인 현석호씨가 정치장교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자 정치군인들은 충무장에 모여 군의 정군운동을 포기하고 아예 새로 발족한 민주당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무력혁명을 계획한 사실을 이미 기술한 바 있으나 그때 이미 그들은 거사를 위해 담당부서까지 결정했다는 것이다. 총무에 김종필, 정보에 김현욱·정문순, 인사에 오치성, 경제에 김동환, 사법에 길재호, 작전에 옥창호·신윤창 등 5·16 쿠데타 이후 쟁쟁했던 최고회의 구성원이었다.
운명의 장난은 항상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동반하는가 보다. ‘충무장 모임’이 있기 하루 전날 장면정부는 구파에서 5부 장관을 영입해 그토록 바라던 연립내각을 수립했다. 현장관이 정치군인들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것은 자신의 퇴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쿠데타 그룹의 오치성 중령은 6군단 포병단과 육군대학 등에 혁명조직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 소장의 행적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기도 하다. 민주당 신파 내 소장파에 의해 과거 행적에 대해 면죄부를 받은 박정희 소장 등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오직 쿠데타를 위해 그들의 조직을 강화해 나갔다. 박소장은 쿠데타 2년 전인 1959년 11월 중순부터 장형순 준장(후에 국회부의장)과 한웅진 준장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고 그들을 군의 핵심 요직인 CIC대장이나 9사단장에 취임시키기 위해 소위 ‘취직운동’까지 벌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집권당인 민주당의 사설기관인 ‘시국정화 운동본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집권당 소속의 민의원을 통해 극비리에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장면정권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박정희 소장 등 정치군인들에게 완전히 문호를 개방하고 있던 꼴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5·16 쿠데타 한 달 전인 1961년 4월10일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직접 찾아가 대담하게 쿠데타의 필요성과 계획의 개요까지 설명하고 참모총장의 협조를 구한 것으로 그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장군이 잘해 보시오”라는 말로 쿠데타에 대한 확답을 피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당시 청와대는 박정희 소장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물론 박소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된 사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도영 중장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임명건에 대해서도 장면 총리와 같은 이북 출신이고 그들의 고향이 같다는 점이 참모장 임명에 영향을 준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또다시 ‘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의 기록을 빌리면 박정희 소장은 1961년 3월경 제2훈련소 최홍희 소장으로 하여금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방문케 하고 ‘구체적으로 혁명후의 정부형태와 정책 등을 메모까지 써가며 설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박정희 소장 등 쿠데타 음모집단이 어떠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추진했나 하는 데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도, 그리고 관심도 없다. 다만 그들의 쿠데타 계획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도 수월하게 추진될 수 있었나 하는 데 관심이 있다.
몰락을 목전에 두었던 장면정권의 아이러니컬한 숙명적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박정희 소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원만하게 처리하도록 배후에서 건의하고, 김종필 중령 등 정치장교들의 하극상 사건을 무마시킨 것이 집권당인 민주당 소장파의 공(?)이라고 한다면, 박정희 소장 등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인지했으면서도 이를 끝까지 묵인해줬던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밀어붙인 민주당 노장파의 공로(?)는 다같이 본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5·16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몰락을 자초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점이다. 운명이라면 너무나 잔인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 계획, 장도영에 통보
장면내각의 노장·소장파가 5·16 쿠데타 드라마의 조연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야당인 신민당으로 분가해 나온 민주당 구파 역시 쿠데타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처음부터 김도연계와 유진산계 두 파벌로 나뉘어 분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으로 떨어져 나온 것은 장면내각을 결정적으로 약체 내각으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장내각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일부 무소속과 제휴하는 과정에 불미스러운 사태를 빚게 만들었다.
김도연계는 장총리가 5:5:2의 비율로 연립내각을 조직하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반대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장내각에 비협조적이었다. 반대로 유진산계는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장면정권에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장면 총리는 신민당의 분열을 적절히 이용하려 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장총리는 유진산 의원을 극비리에 반도호텔(현재의 롯데호텔)에 초청하고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곽상훈 민의원의장으로 하여금 유진산 의원을 국회부의장에 앉히도록 고도의 전략을 쓰기도 했다. 물론 유진산 의원은 이 제안들을 모두 사절했으나 장면정권과 유진산 의원의 밀착(?)설을 둘러싸고 야당 내부에서는 적지않은 불신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솔직히 4·19혁명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공민권의 제한’ ‘부정축재의 처리’ ‘부정선거 관련자의 처리’ ‘특별재판부 및 검찰부의 설치’ 등에 관한 혁명입법 처리가 지연된 이면에는 야당인 신민당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만은 없다.
야당인 신민당은 장면내각과 구 자유당 정권 관계자들의 유착관계, 그리고 부정축재자들과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폭로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했지만 일부 언론은 도리어 야당인 신민당과 구 자유당 온건파 사이의 오래된 밀착관계를 지적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장면정권이 노장과 소장으로 갈라져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면 원내 제1 야당인 신민당은 김도연계와 유진산계로 갈라져 불신관계를 조성해갔다. 그러기에 정국은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야당인 신민당이 쿠데타 책임을 전적으로 장면정권에만 지울 수 없는 것은 1960년 9월9일 자파 소속 5명을 장정권에 파견해 연립내각을 성립시켰고, 5개 부처 장관 가운데 국방부장관 자리를 자기 당 소속의 권중돈 의원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 고위 장군 인사권은 장면 총리가 직접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9개월의 짧은 집권기간 중 1961년 1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야당인 신민당에서 국방부장관 자리를 차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아닌가? 이미 기술한 바 있지만, 그 기간에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장교들이 요정에서 혹은 자택에서 그리고 군사령관실에서 반공개적으로 쿠데타를 모의했을 뿐 아니라 거리낌없이 군사전화를 통해 모든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이상 군의 총책임자인 국방부장관이 쿠데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5·16이 발생하기 약 3개월 전인 1961년 2월22일 민주당의 구파 동지회는 신민당을 결성했다. 위원장(당수)에 김도연 의원 그리고 간사장에 유진산 의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그들은 장면내각에 파견했던 5부 장관을 즉각 철수시켰다. 장면정권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사실상 장내각이 단독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끔 최악의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신민당 출현 직전인 1960년 12월29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서울시장과 도지사 선거)에서 4·19혁명 덕분(?)으로 탄생한 거대 정당 민주당이 신·구파로 갈라져 각각 별개의 공천후보를 내세워 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집안싸움의 극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 구파는 경남에서 이기주, 전남에서 민영남, 그리고 충남에서 이기세씨 등이 승리해 예상외 성적을 거두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정치군인들에게는 집권당의 분열이 다시없는 호재가 된 것이다. 야당도 쿠데타 드라마에 조연역을 담당했다고 평한다면 지나치다고 할 것인가?
9개월 단명인 장면정권이 당면한 국내외 정세는 가혹하리만큼 혼란스러웠다. 첫째, 혁신세력의 대두였다. 민주수호를 외치고 폭발했던 4·19 혁명 후에 탄생한 장면정권으로서는 모든 분야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협상론’ ‘중립론’ 그리고 ‘평화통일론’ 등이 공공연하게 대두됐다.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1961년 1월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고정훈씨를 선봉자로 한 혁신세력은 조총련계 자금으로 설립된 민족일보 등을 이용해 사회주의를 외치는 북을 두들겼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한달 전인 5월1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4·19 이후에 무려 1836회의 데모가 발생했고 데모에 동원된 인원은 95만명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데모가 끝나면 으레 난동으로 변했고 사회질서는 거의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고 봐야 했다.
4·19 혁명주체가 아니었던 장면정권은 자연 비혁명적 방법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4·19 혁명의 주체를 이룬 학생층, 특히 젊은층과 마찰을 빚게 됐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허약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자유만을 부르짖는 1500여 종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와 장면정권을 무비판적으로 공격하자 무정부상태가 될 정도로 사회 혼란이 심했다. 사회가 불안해지자 경제는 침체됐고, 특히 행정력과 경찰력이 약화됨으로써 신문은 매일같이 밀수를 비롯한 경제악(經濟惡)을 보도했다.
혼란상태를 틈타 1961년 1월2일에는 650대 1이던 환율을 1000대 1로 인상하더니 한달 후인 2월2일에는 1300대 1로 인상하는 최악의 상태를 초래했다. 물가는 졸지에 폭등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장면내각이 직면한 국내외 정세는 자유당 말기인 1959년 11월1일 미국의회에 제출됐던 콜론(Colon)보고서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신현확은 안 돼요”
콜론보고서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분석한 다음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더라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고 결론짓고 있다. 콜론보고서는 장면내각이 출현하기 직전 이미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국 상원에 알리고 있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콜론보고서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앞으로 미국 외교정책을 어떻게 펴나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에게 자문을 구해 만든 보고서였다.
장면정권이 안정을 못 찾고 갈팡질팡 허덕이고 사회 혼란만 가중되자 청와대는 ‘자문회의’를 구성할 것을 결정했다. 정부조직법은 청와대에 비서실 이외에 대통령 자문기구를 만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자문회의는 비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자문회의 구성원 일부를 소개하면 정치에 김상협 고려대총장(후에 국무총리), 법률에 윤세창 고려대교수, 경제에 신태환 연세대교수(후에 장관), 언론에 백광하 동아일보 편집국장, 외교에 이재항 비서실장(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그리고 간사는 내가 맡았다. 한달에 두세 번 청와대에서 회합을 갖고 현안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했다.
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워낙 낚시를 좋아해 주말이면 친구들과 자주 낚시를 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4대 국회의원이었던 김진만씨가 이재학 전 국회부의장과 낚시를 가자고 했다. 이른 아침 내 지프에 두 사람을 태워 서울을 막 떠나려고 할 때, 그들은 느닷없이 신현확(후에 국무총리)씨도 함께 데리고 가자고 했다. 그때 신씨는 4·19 당시 국무위원이었던 탓에 형무소 생활을 하고 막 출소한 상태였다. 신씨도 합류해 경기도 전곡 방향으로 낚시를 하러 갔는데 여관에서 나와 신씨가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밤이 새도록 그 분으로부터 경제문제에 대한 고견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그 분의 고견에 감복했다.
아침이 되자 이재학, 김진만씨가 신현확씨를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했다. 다음날 신현확씨에 관한 내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매우 좋아하면서 “내가 신현확이를 잘 알지. 내가 상공부장관을 할 때 그가 금속 관계 과장으로 있었는데 매우 총명하고 장래가 총망되는 사람이었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대단히 좋은데 장총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 총리 의향을 물어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계엄령 검토
나는 그 날로 장총리를 만나 대통령의 뜻을 전하면서 “총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장총리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됩니다. 안돼요. 그 사람 자유당정부에서 일한 사람이 아닙니까? 앞으로 말썽이 나면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하슈”라고 대답했다.
내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웃으면서 “아니, 자기는 이대통령 밑에서 일한 적이 없다고 하던가?”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결국 신현확씨의 자문위원 추천은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데모, 4·19혁명 발포 명령자들에 대한 판결문제(법원 판결이 기대 이하의 형량이었던 점), 4·19혁명 부상자들의 국회의사당 난립사건 등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자 대통령 자문회의는 헌법 제57조에 규정된 ‘긴급조치’ 발동과 심지어 헌법 제64조에 규정된 ‘계엄령의 선포’를 논제로 삼고 검토를 시작했다.
‘긴급조치’를 규정한 헌법 제57조의 내용은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 위기에 대해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대통령은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국무회의의 의결에 의해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전항의 처분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때에는 국무총리는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무총리가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입법·행정권을 장악하는 막중한 권한을 의미하기도 했다. 김상협 고대총장 같은 분은 데모도 문제가 되지만 그보다도 군 내부의 무정부 사태를 우려했고, 하극상 사태에 관해 대통령이 전혀 예상 못했던 중요한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군 내부에 불순세력이 형성돼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불장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백광하 국장은 장정권에 대한 언론의 보도흐름을 설명하면서 장정권을 지지하는 신문은 하나도 없다고 극언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계엄령까지는 몰라도 긴급조치 발동은 필요불가결한 조치로 판단하고 장총리에게 적극 권유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통령은 야당의 반대를 예방하기 위해 김도연 신민당 당수와 유진산 간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사전에 정지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문회의를 거듭할수록 자문회의 분위기는 차츰 장정권의 정권 담당 능력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장정권에 대해 자문회의는 첫째, 장정권은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4·19 혁명으로 붕괴된 자유당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4·19 혁명 세력도 혁명입법 지연,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한 애매한 태도 때문에 차츰 장정권에 대해 등을 돌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둘째, 원내 지지세력의 불안한 판도를 지적했다. 5부 장관을 파견해 연립정권에 참가한 신민당이 차츰 내부적으로 장면정권의 도각(倒閣)을 결정하고 장정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이철승씨를 중심으로 하는 집권당 내 소장파가 강력한 당내 투쟁을 벌임으로써 장내각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넷째,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의 반개혁적인 동향과 군 고위인사를 둘러싼 집권당 내부의 분규를 염려했으며, 다섯째, 장정권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상상 외로 크다는 것을 인정했다.
국민이 장정권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비례해서 컸을 뿐 아니라 어려운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후일 대통령이 장면 총리에게 용퇴를 요구하는 강한 발언을 하게 된 것도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청와대는 장내각에 낙제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갈팡질팡하면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노장, 소장파간의 세력다툼으로 세월을 낭비하던 장면정권에 뜻하지 않은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1960년 10월8일 법원은 4·19 당시 시경국장이던 유충열씨에게만 사형을 선고하고,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던 홍진기 내무부장관과 곽영주 경무대 경무관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9월과 2년을 선고했다.
장면정권은 발족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1, 2차에 걸친 개각소동과 구파 민주당의 이탈, 그리고 집권당 내의 노장·소장파간의 암투를 겪는 동안 4·19 뒤처리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4·19 혁명 세력은 허우적거리던 장면내각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법원의 판결 다음날부터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으며 환자복 차림의 ‘4·19 부상자’들은 본회의가 열리는 국회 건물로 돌진했다.
“국회는 혁명입법을 빨리 처리하라” “무능 국회는 물러가라”. 마침내 시위대는 곽상훈 의장을 밀어내고 사회석 단상에 올라섰다. 나는 제2대 국회 때부터 국회 출입기자로서 여러 차례 국회의 난동사건을 목격했지만 외부인사가 목발을 집고 의장석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광경은 처음 목격했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의사당 안의 의원들은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날 국회에 간 것은 군 장성 출신의 김응조 의원(민주당 구파 소속)이 ‘반민주역도 단죄를 위한 혁명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대정부 건의안’을 국회에 상정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김응조 의원은 성격이 특이한 점은 있었으나,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 민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군 내부에도 있다는 생각을 굳히고 4·19 혁명을 계기로 군대의 대대적인 숙청을 주장했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국회 본회의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돼버렸다. 곽상훈 의장이 “여러분의 뜻대로 국회가 밤을 새워서라도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확약한 후에야 시위대는 물러갔고 비로소 국회는 정상화될 수 있었다.
4·19 뒷처리의 어려움
나는 청와대로 돌아와 목격한 그대로를 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즉각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공한을 보낼 것을 결정했다. 장면정권에 대한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헌법 제60조에는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하여 발언하거나 또는 서한으로 의견을 표시한다’고 규정돼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국회에 공한을 보내는 행위는 헌법이 보장한 정상적인 행위에 속했다. 대통령은 국회에 보낸 공한에서 ‘헌법을 개정해서 혁명재판을 새로이 출발시킬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을 국회에 요구했다. 대통령은 솔직하게 발포 명령자에 대한 재판 결과를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개헌을 해서 혁명입법을 서두를 것을 국회에 요청할 때까지 장면정권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장면내각 노장파 가운데는 ‘원외 자유당’(이승만 대통령 시절 자유당은 원내와 원외로 갈라져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출신이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자유당에서 이적해온 의원이 적지 않았다. 재벌과 유착한 의원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집권당 내부에는 4·19 문제를 처리하는 데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해 수개월 동안 혁명사후처리를 미적거린 것도 사실이다.
상이용사들의 국회의장석 점거라는 충격적인 사건과 대통령의 헌정사상 최초의 대국회 공한 발송사건이 겹쳐 비로소 장면내각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쿠데타를 추진하던 박정희 소장 등 정치군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다시 없는 좋은 기회가 됐을지 모를 일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공한 발송, 그리고 4·19 상이용사의 과격데모는 집권당의 노장, 소장파는 말할 것도 없이 야당인 신민당과 무소속을 놀라게 했고 일종의 공포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개헌에 앞서 경과조치법으로서 ‘민주 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 처리법안’을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부정’ ‘부정축재’ ‘부정공무원’ 등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물고 민주국가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소급법’을 제정해야만 가능했다. 소급법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헌법 제23조의 개정이 전제조건이 됐다.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외치고 폭발했던 4·19 혁명, 그 4·19 혁명 덕분으로 탄생한 장면정권으로서는 소급법을 만들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정체성에 흠집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의 헌법 제23조는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에 대하여 소추를 받지 아니하며 또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두 번 처벌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특별법 제정
다시 말해 과거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사후에 법을 만들어도 안되고 한 번 처벌한 동일 죄목에 대해 다시 재판을 해서 두 번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헌법 제23조의 정신이다. 따라서 헌법 제23조를 개정하자는 것은 과거에는 죄가 안됐던 행위라도 새로 법을 만들어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일단 언도가 내려진 동일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기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4·19 혁명이 문자 그대로 혁명의 성격을 띤 거사라고 한다면 헌법 제23조를 개정하자는 것은 혁명입법으로 부를 만한 과격한 입법이었다. 그러나 장면정권과 국회는 결국 굴복했다. 윤형남 의원외 111명이 제안했던 개헌안은 민의원에서 총 투표수 200명 중 가(可) 191표로 통과됐고, 참의원에서도 52명 중 44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헌법 제23조에 대한 개헌안이 민참 양원에서 통과됨에 따라 4개의 특별법제정이 가능하게 됐다.
첫째,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
둘째, 1960년 4월26일 이전 특정 지위를 이용해 현저한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
셋째, 1960년 4월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
넷째, 이들의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의 신설을 가능케 하는 특별법의 제정 등이다.
그런데 헌법 제23조의 개정은 장면정권으로서는 최초의 큰 업적으로 꼽히기도 했으나 공민권을 제한하는 입법이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박정희 군사전제정권에 다시 없는 ‘교과서’가 될 줄은 당시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구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참정권을 박탈할 때 그들은 장면정권 시대의 개헌문제를 크게 들먹거리면서 자기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헌법의 개정은 공민권의 제한이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놓고 있었는데 이 조항은 한발 더 나아가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말할 것도 없이 공무원이 되는 자격까지 제한하도록 돼 있어서 격렬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결국 장면정권은 소급법 가운데 공권력의 제한 범위를 첫째, 3·15 부정선거 당시의 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은 자동으로 7년간을. 둘째, 사찰계 형사에서 읍, 면장에 이르는 심사 대상은 심사를 거쳐 5년간 각각 공민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결론을 내렸다.
결국 자동 대상은 666명, 그리고 심사 대상은 1만4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공권력 제한 대상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나라 전체가 큰 충격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소급법이 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죄라는 측면도 있었으나 정치적 보복이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약체 내각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역풍을 맞게 됐다. 공민권을 제한하는 헌법의 개정 파동은 혼란상태에 빠진 사회를 더 한층 혼란스럽게 몰아갔다.
사회 전체가 좌경화 물결을 타는 듯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데모가 일상화되자 장면정권은 마침내 ‘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을 마련해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불붙은 데 기름을 퍼붓는 꼴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하기 약 두 달 전인 3월22일 ‘횃불 데모’라는 기상천외한 과격 데모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시위대는 밤늦게까지 ‘남북회담’ ‘김일성 만세’ ‘장내각 퇴진’을 구호로 외치면서 명륜동 장면 총리 집 근처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실은 시시각각으로 데모 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저녁 9시경 대통령은 비서실장 전용인 지프를 대기하라고 했다. 대통령은 극비리에 지프를 타고 명륜동 데모 현장으로 가자고 했다. 비서실장도 나도 신변 안전을 위해 반대의견을 진언했다. 대통령은 우리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김남 비서관에게 수행하라고 했다. 단 한대의 경호차도 없이 중앙청과 안국동 한국일보를 지나 명륜동 장면 총리 집 근처에서 차를 멈추게 했다.
횃불 데모는 사실상 데모가 아니라 일종의 광란이었다. 데모를 구경하는 시민도 데모를 말리는 경찰관도 눈에 띄지 않았다. ‘미군 철수’ ‘김일성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면서 간간이 ‘2대 악법 철폐’를 외치는 데모대 광경은 여기가 서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통령은 끝까지 지프 속에서 눈앞에 벌어지는 광란의 현장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대통령의 지시도 받지 않고 운전사 보고 그만 가자고 다그쳤다. 만일 현장에서 대통령임이 발각되면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공포감마저 느꼈다.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의 표정은 전에 보지 못할 만큼 굳어 있었다.
“내일 아침 장총리와 민·참 양원의장, 그리고 각당 대표를 청와대로 부르도록 하게.”
우유부단한 지도자들
대통령은 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횃불 데모가 있고 다음날인 23일 밤, 청와대에서는 윤대통령과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 백낙준 참의원의장, 현석호 국방부장관, 야당인 신민당에서 김도연 위원장, 유진산 간사장, 양일동 총무, 조한백 총무부장 등 명실공히 ‘국가최고지도자회의’가 개최됐다. 조재천 법무부 장관만이 긴급 용무 때문에 불참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듯한 비장감이 흘렀다. 대통령은 전날 밤 자신이 직접 목격한 횃불 데모 현장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태를 조속히 수습할 것을 강조했다. 장면 총리도 좋은 수습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신문이나 풍문이 모두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방에 내려가보니 민심이 생각보다 악화돼 있었다”고 부산의 민심 동향을 소개했다. 모든 참석자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으나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방법론에 서는 입을 다물었다. 경솔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현석호 국방부장관이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으니 그런 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야당이 여당과 공동으로 법안을 제안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민감한 문제에 야당을 끌어들이려는 발언을 했다. 좋은 의미로 생각하면 중대한 시기에 여와 야가 공생공사하도록 협력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진산 간사장이 반론을 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법이라면 얼마든지 공동제안을 할 수 있지만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른 것은 기존 법으로도 얼마든지 경찰이 단속할 수 있을 것이고, 데모에 대해서도 정부가 확고하게 막아야겠다는 소신만 있으면 단독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야당도 찬성하겠다”고 응수했다. 유진산 의원의 발언은 내각책임제에서 여당이 여당답게 책임을 지고 행동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생각됐다.
지엽적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게 될 무렵 대통령은 “긴급한 사태를 수습할 방안이 없을 바에야 장면 총리는 거국내각을 만들어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단호하게 사태수습에 나서야 한다”고 문제해결의 핵심을 제안했다. 여기서 또다시 긴급조치권 발동문제가 제기됐는데 그동안 대통령은 ‘자문회의’를 통해 수차에 걸쳐 이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검토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대해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무총리는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는 헌법 제57조야말로 당시의 시국을 상정하고 만든 법률로 생각됐다.
“나보다 나은 사람 있나?”
데모를 방지하는 법이라든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바에야, 또 막아야 할 확고한 소신만 있다면 긴급조치발동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긴급조치와 거국내각 구성에 대해서 장총리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긴급조치가 장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내심 오해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장총리는 “좀더 시간을 달라”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 했고, 나중에는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에 있는가?”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당시 윤대통령은 장면 총리 말대로 총리를 바꾸어야 한다던가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총리 후보를 마음속에 생각한 바도 전혀 없었다.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장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어 흐트러진 난국을 돌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국내각을 하지 않고서는 집권당 단독으로 어떠한 법안도 국회에서 처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긴급조치권 발동 없이는 시각을 다투는 긴급현안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장총리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 데 대해 대통령은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대통령은 장총리에게 “다음 정국을 담당할 인물이 이보다 못할 바도 아니지만 지금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 한번 바꿔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은 “민심의 80퍼센트가 현 정부를 지지하고 있지 않으니 장면정권이 물러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고까지 말하며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통령 입에서 “장정권이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 곽상훈 민의원의장도 장내각 진퇴문제를 언급한 바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김도연 신민당 당수도 “정부가 시책을 강력히 수행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날의 ‘최고지도자회의’는 ‘현 시국이 위기’라는 점에는 의견이 같았으나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못 내리고 끝이 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회의 다음날 아침 일부 신문에는 ‘청와대는 정치 음모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그런 회의에는 다시는 안가겠다”는 장면 총리측의 반응이 실려 있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바로 50일 전의 일이다.
청와대와 장내각 사이의 ‘협의관계’는 ‘최고지도자회의’가 마지막이었다. 대통령의 충정에서 나온 구국 노력은 본의 아니게 오해만 일으켰고 별다른 소득 없이 끝이 났다. 5·16은 다가오고만 있었다. 청와대는 속수무책이었다. 무너져가는 장내각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청와대는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5·16 쿠데타가 차츰 다가오고 있을 때 청와대는 풍문으로나마 쿠데타설을 전혀 모르고 있었나? 아니다. 여러 곳에서 그것도 쿠데타 핵심세력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있었다. 그러면 왜 사전에 쿠데타를 방지하지 못했나?
청와대도 5·16 쿠데타와 관련해 드라마에 비교될 수 있을 만큼 적지않은 비화(秘話)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으로 청와대에 군대의 거사설을 전한 사람은 윤대통령과 같은 민주당 구파 소속의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의원이다.
김도연 위원장은 신중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쿠데타 발생 전해인 1960년 12월경 청와대를 방문해서 군의 ‘동요설’을 대통령에게 알렸다. 김도연 의원은 자기와 잘 알고 지내는 김대령이 집으로 찾아와 “3·15 부정선거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 미숙과 신·구파의 파벌싸움에 불만을 품은 일부 장교들 사이에서 거사 계획이 진행중”이라는 말을 했다고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연립내각을 주선했던 대통령으로서는 충격적인 정보였다. 대통령은 그날 즉시 장면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김도연 의원이 전한 얘기를 알리고 철저히 대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며칠후 장총리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랍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고 보고했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더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김대령은 그후에도 계속 김도연 위원장과 접촉한 흔적이 있으며 5·16 쿠데타 주체세력의 일원으로 군사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다음으로 군대의 거사설을 구체적으로 알려온 사람은 심명구라는 사람이다. 심씨는 윤대통령이 종로에서 민의원에 출마했을 때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심씨는 아들을 청와대 총무비서로 취직시킬 정도로 대통령과는 친한 사이기도 했다.
1961년 이른 봄 어느 토요일 오후. 대통령은 나에게 “내일 일요일인데 무슨 약속이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낚시 약속이 있어 솔직하게 “낚시를 가려고 합니다”고 대답했다. 후에 알아보니 대통령은 우이동에 있는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박사 묘소에 나와 함께 갈 생각이었다. 내가 낚시 타령을 하니까 대신 김남 비서관이 따라갔다고 한다. 몇년 후 혁명주체인 유원식 대령이 발설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윤대통령의 쿠데타 관련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남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조병옥 박사 묘소로 가던 도중 유림 선생(유원식 대령의 부친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대통령과는 지면이 있었고 해방후 귀국해 주로 농민을 위한 정당의 당수로 활약했음)의 삼우제가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잠시 들러 유림씨의 아들인 유원식 대령의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의례적으로 상주에게 “시간이 있으면 청와대에 한번 들르게”라고 인사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통령은 유대령이 쿠데타 그룹의 일원인 것도, 그가 대통령과 친분 관계에 있는 심명구씨와 가까이 지내던 것도 알 리가 만무했다.
심명구씨는 대통령과 잘 알고 지낸다는 것과 아들까지 비서실에서 일하던 관계로 비서실에서는 모두 그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태도에는 어딘가 도도한 면이 엿보이기도 했다.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유원식 대령은 심씨가 대통령 댁을 무상 출입하는 것을 알고는 군대의 거사계획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장도영 총장이 있으니…”
첫째, 거사자금을 마련해 줄 것. 둘째, 대통령을 쿠데타에 협조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담한 육군대령이기도 했다. 어쨌든 유대령의 부탁을 받은 심씨는 “대통령 문제는 나한테 맡기시오”라고까지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후일 심씨는 유대령과 약속한 대로 군대 내에서 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과 유대령이 대통령을 한번 만날 것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대통령에게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역적행위와 같은 쿠데타를 하겠다는 사람이 쿠데타의 대상자이기도 한 대통령에게 거사계획을 말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심씨에 대해 “그런 불순한 마음(쿠데타 계획)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을 내가 어떻게 여기서(청와대) 만날 수 있느냐? 그런 이야기는 두번 다시 입밖에 내지도 말고 그런 소리를 하려면 여기에 오지도 말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대통령은 심씨가 너무나 미덥지 않았기 때문에 그후 청와대 출입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심명구씨의 말을 들은 대통령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재천 법무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군 내부에서 거사설이 들린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철저히 조사할 것을 당부했다. 며칠 후 조재천 법무부장관의 보고는 너무나 안일한 것이었다. “장총리나 국방부장관도 잘 알고 있는 일인데 대수롭지 않은 역정보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통령은 도리어 심명구씨를 ‘허풍선이 같은 사람’이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김도연 당수의 경우나 심명구씨처럼 구체적으로 쿠데타 정보를 청와대에 보고한 사람이 그외는 없었지만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나 백광하 동아일보 편집국장도 “군대가 불장난을 할 것 같다”는 항간의 풍설을 대통령에게 자주 전한 바 있다. 대통령은 이상한 정보를 들을 때마다 장면 총리에게 전하고 적절히 대처하도록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장총리의 답변은 그때마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 전부였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면 국무총리가 만인(萬人)을 제쳐놓고 오직 신뢰하고 의지했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 드라마의 주연이라면 장도영 장군도 그 못지않은 배역을 맡은 인물이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5·16 쿠데타 훨씬 이전에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서신으로 또는 인편으로, 그리고 5·16 전날 밤에는 전화로 쿠데타 계획을 통고 받은 사실을 5·16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확실하게 본인의 입으로 시인했다.
MBC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그는 “서신을 받았으나 교회에 가느라고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고 전화를 받은 바 있는데 그가 술이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알고 빨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고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둘러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은(박정희 등 정치군인) 나를 배신했다”고 고백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장도영 장군이 내뱉은 ‘배신했다’는 말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장군에게 쿠데타 이전에 무엇을 약속했기에 오늘에 와서 ‘배신했다’는 말을 원망스럽게 하는 것일까? 박정희 소장이 지금 사망하고 없으니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61년 6월3일 5·16 혁명이 성공을 거둔 다음,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주체들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 등 수많은 감투를 씌워주고 이용했던 장도영 의장을 추방하기 위한 일차적 조치로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他職)을 겸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비상조치법’을 예고 없이 개정해 버렸다. 자기를 거세하려는 것을 알게 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은 크게 반발했으나 박정희 소장 일파는 그를 반혁명 죄로 구속해 재판에 회부했다.
당시 혁명재판에서 검사가 제시한 죄목을 보면 장의장은 비상조치법이 개정된 데 격분해 “너희들이 나를 로봇으로 만드느냐. 최고회의를 열어 신임투표를 하자”는 망언(?)을 했고 “혁명을 무엇 때문에 했느냐? 나를 배신하느냐?” “서울시내가 피바다가 된다. 불바다가 된다”는 ‘반혁명적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또다시 “박정희가 나를 배신했다”고 원망의 눈물을 흘리면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서슴없이 고백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배신했나 안했나가 아니다. 그보다는 장도영 참모총장이 자기를 하늘같이 믿었던 장면 총리를 배신했나 안했나가 중요한 것이다.
장도영의 눈물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계획을 정확하게 장면 총리에 전할 때마다 장총리는 “장도영 총장에게 물어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하지 않았던가.
이제 분명해진 사실은 5·16 쿠데타와 관련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가증스럽게도 이중 플레이를 했고 장면 총리는 장도영 총장에게 끝까지 속았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 말만 믿고 있다가 불행한 5·16의 아침을 맞았던 것이다. 청와대에서 본 쿠데타 드라마를 한층 더 보완하기 위해 장면 총리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희극적인 장면이 하나둘이 아니다.
민주당 소장파에 의해 여·순반란사건과 관련한 ‘오해’를 벗게 된 박정희 소장과 하극상사건에 관련돼 처벌될 위기에 처했던 김종필 중령이 자유의 몸이 돼 장면정권 타도를 목표로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게 됐다.
장면 정부는 ‘4·19 폭동설’에 대비해 군에 대해 폭동진압훈련을 지시했다.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은 만일에 폭동이 발생하면 그것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4·19 당일 폭동이나 데모가 없자 쿠데타 계획은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쿠데타 세력은 ‘행정반’과 ‘작전반’으로 조직을 정비해 ‘D데이’에 대비했다.
그런데 이러한 군대의 움직임이 당시 시경국장인 정태섭씨에 의해 포착됐다. 정국장은 직접 장총리를 방문해 자기가 입수한 정보를 보고했다. 그러나 장총리는 “유엔군이 건재하고 장도영 총장이 건재한 이상 절대로 걱정할 것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비화는 5·16 쿠데타를 며칠 앞두고 국회 모의원으로부터 박정희 장군이 육군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면 총리는 직접 장도영 참모총장을 호출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이냐?”는 총리의 추궁에 장도영 참모총장은 “내가 참모총장으로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더욱 박정희 소장은 그런 큰일을 할 인물이 못 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장총리는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비서를 시켜 장총장이 철저하게 조사를 하는지 살펴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총장이 특별히 조사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을 느낀 장면 총리는 측근을 시켜 쿠데타 3일 전인 5월13일 저녁 서울 화신(현재 국세청 자리) 뒤 모 요정에서 장총장과 만나게 해 쿠데타 풍설을 추궁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장도영 장군은 “박정희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못 됩니다. 워낙 중상모략을 많이 받는 사람이니까 누군가가 모략을 하는 겁니다. 쿠데타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확실한 답변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장면 총리는 오로지 장도영 총장 말만 믿고 있다가 5·16을 맞게 됐다. 5·16 새벽 2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투숙중이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빨리 피하십시오”라는 장총장의 전화를 받고 부인과 같이 허둥지둥 호텔 앞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현관에서 출입이 금지돼 급하게 안국동에 있는 미대사관 직원숙소로 달려가 피신을 요청했으나 거기서도 거절당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칼멜 수녀원’에 몸을 숨긴 채 5·16의 아침을 맞게 됐다.
나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자신있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면 정권의 몰락이 완전한 ‘타살’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자살’에 가까운 ‘동반자멸’이냐 하는 의문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의문을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