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동반 진출한 극동축구 3강의 사령탑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방인. 한·중·일 3국은 숱한 시행착오 끝에 각각 세번째 '용병카드'를 선택했다. 현재 스코어는 트루시에, 밀루티노비치, 히딩크 순. 그러나 진검승부는 월드컵 본선에서 펼쳐질 것이다.
자국인 감독을 내세워 단 한번도 월드컵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한 공동 개최국 한국과 일본은 각각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55) 감독과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46) 감독을 앞세워 본선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10월7일 중국을 월드컵 도전 44년 만에 최초로 본선에 올려놓은 유고 출신의 보라 밀루티노비치(57) 감독이 가세했다. 이에 따라 한·중·일 3개국 용병 사령탑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은 벌써부터 15억 극동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이들은 98프랑스월드컵에 이어 4년 만에 이방인 감독으로서 재대결을 벌이게 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히딩크는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에 올려놓았다. 당시 트루시에는 본선에 처녀 출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이끌었다. 비록 우승팀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하는 바람에 16강진출에 실패했지만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건너왔다. 또 밀루티노비치는 월드컵에서 명성을 쌓은 명장. 1986년부터 4회연속 멕시코, 코스타리카, 미국, 나이지리아 등을 맡아 모두 16강에 올려놓아 ‘16강 제조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밀루티노비치는 중국까지 포함, 월드컵 사상 최다인 5회 연속 본선에 출전하는 명예까지 누리게 됐다.
월드컵 개막을 7개월여 앞두고 이방인 3인방의 경쟁력을 가늠해보는 것은 축구팬들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지난해 10월 레바논서 벌어진 아시안컵에서의 성적은 일본 우승, 한국 3위, 중국 4위. 당시엔 히딩크가 한국팀을 지휘하지 않았다. 히딩크가 한국대표팀을 맡은 지는 불과 9개월. 따라서 극동 3개국 감독 중 후발주자인 히딩크의 능력을 트루시에나 밀루티노비치와 직접 비교하기에는 시기상조의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지도자 경력과 현재까지 드러난 훈련내용 및 실전결과 등을 통해 경쟁력을 따져보기로 한다.
아시아로 넘어온 명감독
1983년 한국을 필두로 1993년 일본 J리그, 1994년 중국 갑A조 등 프로리그가 극동에서 출범했다. ‘탈(脫)아시아’를 위해 노력해온 극동 3개국은 세계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당당히 대응하기 위해 경쟁력있는 용병 사령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특기할 것은 이들 3명이 우연히도 한·중·일 3국의 역대 세번째 용병감독이라는 점이다.
선발주자는 트루시에. 단순히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던 경력 때문에 일본이 그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프랑스월드컵에서 오카다 다케시 감독을 내세워 선전하고도 3패를 당하자 일본축구를 잘 아는 명장을 골랐다.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프랑스 출신의 아센 웽거가 0순위. 그러나 웽거는 이미 잉글랜드의 명문클럽 아스날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는 집요한 러브콜에도 끝내 일본행을 고사했다. 대신 프랑스 감독 한 명을 추천했다. 9년 동안 축구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지도력을 키워온 트루시에다. 그런데 일종의 ‘실험카드’로 선택한 트루시에가 2년 만에 성공을 거둘 줄이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마리우스 한스 오프트(1992~93년), 브라질의 팔캉(1994년)에 이어 역대 세번째 용병 감독 트루시에가 진짜 ‘보물’이라는 사실을.
밀루티노비치는 한국에 올 뻔했다. 1999년 말 한국으로부터 기술자문을 제의받고 2000년 북중미골드컵 때부터 허정무 전임감독을 돕기로 구두합의까지 했다. 그러나 중국이 잉글랜드 출신의 로버트 후튼 감독을 앞세워 2000시드니올림픽 본선진출에 실패하자 다른 외국인 명장을 찾아나섰다. 개혁이 필요했던 중국은 ‘월드컵 16강 제조기’로 알려진 밀루티노비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중국축구계와 돈독한 우의가 있는 대한축구협회가 이를 양해해 지난해 1월 밀루티노비치는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은 94미국월드컵 때 최초의 용병감독인 독일 출신 클라우스 쉬라프너를 영입했지만 최종예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또한 2002월드컵을 겨냥해 지휘봉을 맡긴 후튼 감독마저도 올림픽 본선진출에 실패하자 “어차피 대세는 용병감독”이라며 밀루티노비치를 선택했다. 밀루티노비치는 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한때 한국의 대우 프로팀 감독을 희망했을 정도로 한국에 애착이 강했다. 1999년에도 월드컵에 자동출전하는 주최국 한국을 맡기 위해 집념을 보였으나 중국의 집요한 스카우트 공세로 진로를 바꿨다는 후문이다.
한국축구는 지난해 성인대표는 물론 올림픽팀 청소년팀마저 줄줄이 국제무대에서 추락했다. 벼랑 끝에서 대한축구협회는 세계적인 명장이 아니고서는 한국축구를 구할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10여 명의 후보까지 정해놓았다. 대표팀 강화의 전권을 쥔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서유럽 감독을 선호했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에서 최초로 총감독을 맡은 크라머에 이어 1994년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임명한 우크라이나 출신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비쇼베츠의 사회주의식 지도방식이 한국선수들에게 절실한 창의적인 축구를 향상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판단이다.
지도자로 명성 얻은 ‘닮은꼴’
서유럽 감독이 한국축구의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이위원장의 의지가 공감을 얻었고, 기술위원회는 프랑스월드컵 우승을 이끈 에메 자케 감독을 영입 일순위로 결정했다. 축구협회의 가삼현 국제부장이 특명을 받고 지난해 11월 유럽으로 건너가 자케를 만났지만 그는 “그 나라의 선수는 그 나라 감독이 가장 잘 안다. 외국인 감독이 맡는 것은 내 축구철학과 맞지 않는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두번째 카드가 히딩크. 처음엔 한국축구는커녕 한국을 모른다는 이유로 고사했지만, 가부장은 삼고초려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세 사람 모두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게 공통점이다.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제패한 자갈로(브라질) 베켄바워(독일) 등 스타 출신 명장도 많지만 오히려 월드컵무대에서는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한을 지도력으로 풀어낸 감독이 더 많다.
세 사람 중 선수로서 제대로 명성을 얻은 쪽은 히딩크다. 그는 1967년 네덜란드 2부클럽 그라프샤프에서 21세의 나이로 뒤늦게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68~69시즌 22골, 69~70시즌 14골을 넣어 2시즌 연속 팀내 최다득점을 올렸다. 데뷔할 때 18위였던 팀이 68~69시즌에 팀 창단 이후 첫 리그우승을 일궈낸 데는 미드필더 히딩크의 공헌이 컸다.
일화 한 토막. 1970년 PSV아인트호벤으로 스카우트된 뒤 71~72시즌 전반기를 최하로 마친 그라프샤프의 서포터스는 “히딩크가 돌아와야 한다”며 10길더 모금운동을 펼쳤다. 3만길더(1650만원)라는 당시로선 거금을 마련해 1972년 히딩크를 데려오는데 성공했고, 히딩크는 동생 르네와 함께 뛸 수 있었다. 막내 동생도 1980년대 이 팀에서 형들의 명예를 지켰다. 77~78년 NEC에서 한 시즌을 보낸 히딩크는 1980년 펠레, 베켄바워 등이 개척한 미국프로축구 무대에 뛰어들었다. 영어도 이때 배웠다. 히딩크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NEC와 그라프샤프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은퇴했다.
밀루티노비치는 1956년부터 유고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4차례나 우승을 이끌었다. 대표 2진에 몇 차례 발탁됐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1969년 해외진출의 꿈을 이뤄 AS모나코, 니스, 루앙 등 프랑스의 3개 클럽과 운터투르(스위스)에서 1972년까지 활동했다. 1972년 멕시코로 진출, 1977년까지 UNAM 푸마스에서 뛰다 은퇴했다.
트루시에는 76~77년 앙그렝, 77~78년 레드스타 등 프랑스 2부클럽에서 수비수로 활약한 뒤 1부리그로 진출해 78~81년 로리앙, 81~83년 랑스에서 활동했다. 지난 6월 일본에서 벌어진 컨페더레이션스컵서 대결해 1대0으로 패한 프랑스대표팀의 르메르가 1978년 레드스타에서 감독으로 모셨던 은사.
4연속 16강진출 신화
히딩크를 빼면 두 감독은 다른 대륙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집념이 돋보인다. 그중 밀루티노비치의 이력서가 가장 화려하다. 1977년 멕시코 UNAM에서 지도자생활을 시작해 우승 1회, 준우승 2회의 성과를 일궈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82년까지 96승67무55패로 승률 59.4%를 기록. 1983년 10월 멕시코 대표팀 감독에 올라 월드컵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벨기에, 이라크를 꺾고 조1위로 16강에 올라 불가리아를 2 대 0으로 완파했으나 8강에서 서독과 0 대 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1 대 4로 패했다. 그러나 월드컵 도전사상 멕시코에 가장 좋은 성적표(6위)를 바쳤다.
이미 멕시코로 귀화한 그이기에 제2의 조국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970일간 멕시코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거둔 성적은 25승14무7패. 당시 그의 형 미오드라그도 유고대표팀 감독을 맡아 화제였다. 유럽예선 4조에서 유고가 4위로 탈락하지 않고 본선에 올랐더라면 형제 감독이 나란히 출전하는 진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1987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산 로센소와 이탈리아의 우디네클럽에서 월드스타들을 지도하던 그는 월드컵에 처음 진출한 코스타리카를 대회 개막 석달을 앞두고 맡아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을 꺾고 16강에 진출해 코스타리카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밀루티노비치는 1991년 5월, 94미국월드컵을 앞두고 미국대표팀 감독으로 말을 갈아타 콜롬비아를 꺾고 조3위팀들에 주어지는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올랐다. 불행히도 16강전 상대는 브라질. 한 명씩 퇴장당하는 혈전 끝에 0 대 1로 분패했지만 미국에 축구열풍을 지핀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밀루티노비치는 1995년 6월 멕시코로 돌아왔다. 23승12무14패의 성적과 예선통과의 실적에도 그는 미국과의 홈경기에서 처음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임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98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본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스카우트됐음에도 나이지리아는 본선 1라운드에서 스페인, 불가리아를 꺾고 16강에 올랐다.
히딩크는 대표팀보다는 유럽클럽 무대에서 명성을 쌓은 게 다르다. 82~84년 친정팀 그라프샤프의 유소년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4년 PSV 아인트호벤 코치로 옮겨 1986년 감독으로 승격됐다. 그의 능력은 여기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86,87,88년 네덜란드 리그 3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1988년엔 FA(축구협회)컵 우승에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라 영광의 ‘트레블(3관왕)’ 신화를 창조했다. 1990년 터키의 페네르바체에 스카우트된 뒤 이듬해 스페인의 발렌시아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4년 동안 명성을 쌓았다.
그가 유럽의 명장으로 성공하는 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중에 94미국월드컵에서 MVP를 차지하게 되는 호마리우를 공항에서 납치(?)한 사건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귀국하는 브라질의 떠오르는 스타 호마리우를 리우데자네이루 공항까지 쫓아가서 데려온 주인공이 히딩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손을 뻗치자 도저히 놓칠 수 없어 공항에서 낚아챘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옮긴 호마리우는 발렌시아 벤치의 히딩크를 찾아와 꾸벅 절하고서야 경기에 나설 정도로 은사를 존경했다.
1995년 2월22일. 히딩크는 네덜란드 대표팀 사령탑에 발탁돼 축구인생의 절정에 올랐다. 96유럽선수권서 8강에 그쳤으나 98프랑스월드컵 16강과 8강에서 유고와 아르헨티나를 각각 2 대 1로 격파했다. 4강에서는 브라질과 1 대 1로 비긴 뒤 승부차기 석패, 3·4위전서도 크로아티아에 2 대 1로 패해 4위를 기록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오렌지전사들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흑인인 다비즈와 세도르프는 그가 백인우월주의자라고 비난하다 팀워크를 의식한 히딩크의 엄명으로 96유럽선수권 현장에서 중도에 보따리를 싸야 했다. 민주적이지만 규율의 한도를 넘기면 책임을 묻는 히딩크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 그러나 2년 뒤 그는 다비즈를 포용했고 4강진출의 전위병으로 활용해 선수관리에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히딩크는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토털사커’로 득세한 1970년대 이후 대표팀을 5차례나 맡으면서 1534일간 지휘한 ‘토털축구의 창시자’ 리누스 미셸 감독에 이어 두번째로 장수한 감독이다.
98~99시즌 스페인의 명문클럽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취임한 뒤 1998년 유럽·남미클럽챔피언 간의 왕중왕전인 도요타컵에서 우승하며 세계클럽의 정상에 섰다. 히딩크는 이때 콧수염을 잘랐다. 경기전 기자들이 “이기면 팬들한테 뭘 보여주겠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자르겠다고 약속. 결국 브라질의 바스코다가마를 2 대 1로 꺾자 미련없이 콧수염을 잘랐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삼손의 머리’처럼 콧수염을 자른 뒤 시련이 찾아왔다. 리그에서 준우승에 그치자 트레이드의 실패와 선수와의 마찰 등이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한 시즌만에 하차했다. 이듬해 시즌 막판 2부 탈락 위기에 있던 레알 베티스의 임시감독으로 스페인 무대에 복귀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지만 “당분간 쉬고 싶다”고 사절했다. 한국의 스카우트 작업도 재충전을 고집했던 그의 의지 때문에 애를 먹었던 셈이다.
트루시에는 지난해 아시안컵 우승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선정한 ‘2000년 올해의 감독’에 뽑혔다. 1994년부터 시행된 시상에서 외국인 감독이 수상하기는 처음이다.
한마디로 트루시에는 질경이 같은 생명력과 강인한 인내로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아프리카 황무지에서 9년간 4개 대표팀을 거치며 일군 결실이다. 84~87년 프랑스 4부클럽 아랑송, 87~90년 3부클럽 레드스타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뒤 아프리카로 향했다. 90~92년 아이버리코스트의 아비장에서 아프리카 슈퍼컵 우승을 거머쥔 업적으로 1993년 아이버리코스트 대표팀을 지휘했다. 1994년 남아공화국 카이저치프로 옮기자마자 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 모로코 1부리그 CA라바트로 옮겼다. 95~97년 모로코 2부클럽 FUS라바트를 이끌고 내셔널컵 우승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밀루티노비치의 ‘즐기는 축구’
1997년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거친 뒤 부르키나파소 대표팀에 스카우트됐다. 1998년 아프리카 최고 권위의 아프리카네이션스컵에서 부르키나파소를 사상 처음 4강에 올려놓자 그에겐 ‘하얀 마법사’란 별명이 붙었다. 주술보다도 뛰어난 용병술로 4강고지에 오르자 백인의 마술에 놀란 국민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1998년 5월20일. 트루시에는 남아공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마침내 월드컵 본선무대에 입성했다.
흔히 지도자는 덕장 지장 용장으로 구분하지만 이들 3인방은 모두 이같은 자질을 고루 갖추었으면서도 맹장(猛將)의 기질을 풍긴다. 전술적인 변화보다도 팀의 사기와 단결, 그리고 자신감을 강조하는 탓이다. 다혈질적인 면도 엿보인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공격과 수비, 그리고 포지션간의 밸런스를 강조한다.
밀루티노비치는 ‘그라운드의 심리학자’라고 불릴 만큼 선수 심리파악에 정통하며 전체적으로 동기부여에 탁월하다. “축구에서 골든 룰은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정상을 유지하게 하고 팀내에서 좋은 분위기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편다. 또 “공격이다 수비다 개인기다 해서 팀을 평가하기보다는 전체로서 팀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며 팀 스피리트(Team Spirit)를 중시한다.
중국에서는 밀루티노비치가 중국대표팀에 가져온 변화로 전술이나 기술보다 선수들의 심리능력을 꼽는다. 중국은 최종예선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이것은 밀루티노비치가 선수들에게 ‘즐기는 축구’ ‘평상심을 잃지 않는 축구’를 강조한 덕분이다. 중국 언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던 마밍위, 라샤요펑, 양푸, 장진 등을 끝까지 믿고 주전으로 기용한 결과, 선수들의 자신감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선수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밀루티노비치가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방법은 비디오다. 전력을 탐색하거나 선수를 고를 때 늘 직접 캠코더를 갖고 다닌다. 비디오로 경기를 녹화해 골을 넣는 장면이나 특별히 호흡이 잘 맞은 장면들을 편집해 선수들에게 보여주면서 “봐라, 너희들도 이렇게 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실패한 장면들도 편집해 보여주지만, 잘된 것을 먼저 칭찬하는 게 그만의 독특한 심리지도다.
트루시에는 지난 2월 AFC 지도자 포럼 연설에서 축구철학을 드러냈다. “팀의 전력을 100%로 볼 때 감독과 선수와의 관계가 60%, 선수들의 자질이 30%, 날씨 등 기타 환경이 10%를 차지한다.” 결국 감독과 선수의 호흡이 일치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시드니올림픽 직전 최종엔트리를 선정하는 합숙훈련 때다. 볼을 차기는커녕 잔디조차 밟지 못하게 해놓고 러닝, 스트레칭, 웨이트트레이닝 등으로만 훈련을 한 뒤 자유시간을 주었다.
승부욕 강한 히딩크
그러나 트루시에는 훈련장 외에 식사와 휴게실에서의 태도를 체크했다. 선수들의 태도, 특히 협동심을 눈여겨보았다. 트루시에의 선수관리는 철저하다. 국내합숙 때는 전화통화와 신문구독까지 금지시키고 해외원정 때는 쇼핑봉투까지 체크하는 등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규율을 중시해왔다.
트루시에는 3인방 중 가장 다혈질이다. 표정변화가 심한 데다 목소리는 크고 화도 잘 낸다. 그러나 천성은 솔직담백하다. 불같은 성질 때문에 2000아시안컵 MVP인 나나미와 충돌한 적이 있고, 모리오카는 혹독한 훈련방식에 불만을 터뜨리며 축구화를 벗어던진 일도 있다. 그러나 뒤끝이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 훈련에서는 큰소리를 쳐가며 선수들을 다독인다.
트루시에는 지난해에 이어 지난 9월 요코하마에서 J1리그 피지컬코치 및 트레이너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무려 8시간이나 이어진 이 자리에서 그는 체력과 컨디션을 중시하는 자신의 지도방식을 설명하고 선수들의 특징과 컨디션을 상세히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3년간 대표팀을 맡아보고 틈나는 대로 리그 경기를 봤기 때문에 웬만한 선수들은 꿰고 있었지만, 소속팀 코치만큼 컨디션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없기에 협회를 통해 귀중한 시간을 요청한 것이다. 지난해 첫 만남에서 선수정보를 공유하자는 약속 덕택에 지난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때 스즈키, 하토, 토다 같은 무명선수들을 내세워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히딩크는 큰 경기를 많이 치른 탓인지 승부욕이 유난히 강하다. 히딩크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돼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프랑스월드컵 때 마르세유경기장에서 규정된 시간보다 20분을 더 사용하며 줄곧 슈팅훈련만 해 한국팀이 훈련에 차질을 빚었는데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 “한국팀의 기를 죽이려 그랬다”고 대답했다. 결국 다음날 5 대 0으로 한국을 대파했으니 그의 심리전이 적중한 셈이다.
박항서 대표팀 코치의 말을 빌어보자.
“생각하는 축구를 하도록 유도한다. 가령 A라는 선수가 잘못했을 경우 감독이 먼저 나서서 지적하지 않는다. 본인이 잘못된 부분을 깨달을 때까지 내버려둔 다음 대처방안을 가르쳐준다. 또 특정 상황을 가정해서 훈련한다. 예를 들어 경기종료 2분전 1 대 0으로 이기고 있을 때와 지고 있을 때 경기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선수 스스로 생각하면서 플레이를 펼치도록 만드는 식이다.”
히딩크는 인내력을 강조한다. 컨페더레이션스컵 때 설사가 난 설기현을 끝까지 뛰게 한 것이나, 체코전 때 범실이 많았던 김남일을 중간에 빼지 않은 것이나, 1월 첫 훈련 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박재홍을 아예 퇴출시킨 것이 같은 맥락이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줄 알아야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선수 본인이 자기관리를 안했을 때 그만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책임의식을 일깨워주는 치밀한 계산도 깔려 있다.
지난 8월 유럽원정 때 네덜란드의 한 신문은 ‘히딩크, (싸움닭)다비즈를 그리워하다’는 타이틀로 기사를 실었다. 히딩크가 “카리스마를 가진 저돌적인 선수가 없다. 분위기를 살리는 리더가 없고 모두 순한 양이다”며 한국선수들의 수동적인 자세를 꼬집은 것을 두고 나온 보도였다.
히딩크와 밀루티노비치의 공통점이 있다. 미리 예정된 훈련표가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하오하이둥은 중국 관영 CCTV에 나와 “다롄팀(소속팀)에는 월간스케줄까지 있는데 대표팀엔 주간계획표도 없다. 밀루티노비치의 훈련방식이 즉흥적이다”며 정면으로 질타해 파문을 일으켰다. 히딩크도 한국선수들에게 낯선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 논란이 많다. 주간, 월간 훈련계획은커녕 일일계획도 없다. 코치들도 모른다. 오전훈련은 아침식사 뒤에, 오후훈련은 점심식사 뒤에 히딩크의 입에서 나온다. 긴장관리를 위한 독특한 방법으로 너그럽게 봐주는 시각도 있지만, 선수들의 자율적인 분위기를 억제하는 자충수라는 비판도 있다.
히딩크와 트루시에는 다른 점이 있다. 수읽기가 그렇다. 컨페더레이션스컵 때 FIFA(국제축구연맹)는 공동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에 경기순서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트루시에는 캐나다 카메룬 브라질 순으로 약팀부터 대결하겠다고 했지만, 히딩크는 프랑스 멕시코 호주 순으로 택했다. 결과는 일본이 2연승으로 4강진출을 가장 먼저 확정지은 반면, 한국은 프랑스에 5 대 0으로 대패하면서 뒤늦은 2연승에도 4강에 오르지 못했다. 누가 노회한지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5개국 사령탑을 맡아본 트루시에가 판정승을 거둔 것만은 사실이다.
시련을 이겨낸 승부사들
낯선 아시아에서 이방인 감독 3인방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가장 늦게 가세한 히딩크를 빼면 트루시에와 밀루티노비치는 언론은 물론 협회와도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일본은 갈수록 좋아지는 성적으로, 중국은 본선진출이라는 열매로 그간의 불협화음을 씻었다.
히딩크는 처음 한국 감독직을 수락하고 “(예방)주사 맞고 입국하느냐?”고 물을 만큼 한국을 몰랐다. 그래서 일본 J2리그에서 감독생활을 했던 핌 베어벡을 코치로 앉혀 적응력을 키우려 했지만 아직은 미흡한 면이 많다. 히딩크 사단은 그동안 극심한 유럽징크스에 시달렸다. 10월9일 6기 멤버로 훈련을 끝낼 때까지 9개월 동안 14경기를 치러 7승3무4패로 60.7%의 승률을 거뒀다. 그중 4패가 모두 노르웨이, 덴마크, 프랑스, 체코 등 유럽팀이다.
1월 칼스버그컵 3위, 2월 두바이4개국대회 준우승, 4월 LG컵 이집트대회 우승 등 상승드라이브를 타다가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0 대 5로 참패하더니 8월 체코원정경기에서도 다시 0 대 5로 무너진 히딩크 사단. ‘과연 이대로 가다간 16강 진출이 가능한가’라는 우려가 국회 국정감사에서까지 나왔고 히딩크에 대한 지지도도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9월 2진급인 나이지리아와 1승1무를 기록한 뒤 히딩크는 “최종 승부는 월드컵이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히딩크가 14차례 A매치에 활용한 선수는 모두 51명. 네덜란드대표팀에서 3년 5개월 동안 모두 39차례 A매치에서 총 47명을 기용한 것과 비교하면 태극전사의 옥석가리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딩크에 대한 논란은 크게 포백(4-4-2 또는 4-3-3시스템)이냐 스리백(3-5-2 또는 3-4-3)이냐는 포메이션 문제와 휴가문제다. 언론에서는 “스리백을 썼을 때 승률이 좋았지만 4패는 모두 포백수비를 세웠을 때 당한 것”이라며 1990년 월드컵 이후 한국선수들의 몸에 밴 스리백 방어를 권고한다. 그러나 히딩크는 반대다. “월드컵에서는 어떤 팀을 만나도 다양한 전술변화로 맞서야 한다”며 포백과 스리백 라인을 혼용해 취약한 수비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가 훈련장에서 강조하는 ‘트라이앵글’을 보자. 공격할 때든 수비할 때든 동료 3명이 삼각꼴을 이뤄 패스로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또 협력프레싱으로 견제하는 부분전술이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의 엉성한 부분조직을 보고 기초적인 전술개념부터 바꿔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세계축구계를 강타했던 네덜란드 ‘토털사커’의 바탕인 복수 포지션 소화능력을 점검하는 데 10월 대구합숙훈련을 모두 투자했다. 한 선수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어야 상대에 따라 탄력적인 전술대응이 가능하며 위기관리능력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히딩크는 2월 무릎수술로 인한 네덜란드 체류에 이어 장기휴가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밀루티노비치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대표팀이 훈련하고 있는 도중 홀로 훌쩍 크리스마스 휴가를 다녀와 중국축구협회로부터 비난성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밀루티노비치는 시간 나는 대로 중국리그 경기는 물론 지난해 한국·유고전 등 해외경기도 찾아가 자신의 캠코더에 담아 공부한다. 히딩크가 국내프로리그 관전에 소홀하다는 시선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옹호론도 나오고 있지만, 휴가와 선수탐색, 세계축구의 흐름 파악 등을 슬기롭게 조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지난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 히딩크는 결승전도 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 트루시에는 자신의 별장이 있는 모로코로 휴가를 떠났다. 그냥 쉬러 간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아프리카팀들의 경기가 많이 벌어져 직접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 이후엔 유럽을 돌며 일본선수들의 근황과 플레이를 직접 살폈다. 이 사례는 3인방 감독의 실질적인 경쟁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아닐까 한다.
3인방 중 초반에 가장 적응이 힘들었던 장본인은 트루시에다. 부임 첫해 A매치 1승4무3패로 부진했다. 지난 3월 프랑스전 0 대 5의 대패까지 6차례나 언론과 협회로부터 해임설에 시달렸다. 일본 매스컴의 집요한 취재에 반발하고 협회의 행정에 서슴없이 직격탄을 퍼붓기도 했다.
지난해 한·일전에서 패한 뒤 기자들이 경질설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듣기 위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트루시에는 갑자기 1만엔짜리 지폐를 한 기자의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이럴 시간이 있으면 이 돈으로 커피나 마셔라”며 화를 냈다. 이 사건은 매스컴과 트루시에의 끝없는 마찰을 보여준 유명한 일화다. 일본의 전설적인 영웅 가마모토 일본축구협회 부회장이 그의 천적이다. 경기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트루시에를 공격해 결과적으로 트루시에의 ‘응전능력’을 키워주었다.
트루시에의 선수선발은 초반부터 논란거리였다. 그는 처음 지휘봉을 잡고 일본에 능력있는 젊은 선수자원이 30명 정도 라는 걸 확인한 뒤 세대교체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일부러 청소년대표팀까지 맡겠다고 협회에 자원했다. 1999년 나이지리아 세계청소년(20세 이하)선수권대회 준우승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 8강에 오른 것은 오노 이나모토 등 그가 발굴한 ‘젊은 피’의 결실이다.
지난해 아시안컵 우승 때 그의 세대교체는 완성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J리그 무대에서 당당히 주전으로 뛰고 있는 젊은 유망주들이 가세함으로써 공격 미드필드 수비의 콤비네이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세계적인 축구전문잡지 ‘월드사커’는 그의 세대교체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놓고 ‘트루시에 시프트(Shift)’라고 평가했다.
트루시에는 세대교체 과정에서 3-5-2포메이션이란 팀 컬러를 확고히 다졌다. 프랑스 스페인 등 강팀과 붙어서는 5-3-1-1 등 극단적인 수비강화 시스템으로 변형하는 등 응용력도 붙었다. 트루시에는 초반 침체에도 불구하고 10월까지 A매치 19승10무9패로 63.1%의 높은 승률을 기록해 월드컵을 향한 자신의 개혁이 성공했음을 기록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컨페더레이션스컵이 끝난 뒤 일본 언론에서는 트루시에 개혁의 성공을 ‘조숙부공(早熟復攻)’이란 말로 평가했다. 스즈키같은 히든카드의 성공을 이룬 트루시에 감독의 빠른(早) 판단력, 브라질전에서 15개의 오프사이드를 이끌어낸 숙(熟)련된 스리백, 필드의 지휘관 오노의 부(復)활로 나카타에 대한 의존도 감소, 그리고 공(攻)격라인의 풍부함 등이 바로 조숙부공의 원천이다.
트루시에 시프트 완성
밀루티노비치는 10월7일 본선진출을 확정짓기까지 월드컵 예선에서 11승1무로 무패행진을 기록했지만 나머지 A매치에선 6승7무10패 승률 41.3%에 그쳐 해임설에 시달렸다. 특히 최종예선을 앞두고 상하이에서 벌어진 삼성배 4개국 대회에선 북한에 승부차기 끝에 패해 중국대륙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중국 여기자와의 염문에다 경기내용까지 좋지 않자 중국 매스컴은 ‘밀루(이름의 약칭)의 시아커(해임)’를 끊임없이 흘렸다. 한번은 국제경기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되면서 국가가 연주될 때 벤치에 나오지 않고 휴게실에 있다가 경기가 시작할 때 나와 중국인민의 분노를 산 이른바 ‘국기사건’에 혼쭐이 났다.
부임 초기에 뽑았던 선수들이 대부분 탈락하고 세대교체도 실패한 가운데 최종예선이 다가오면서 올해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선전한 선상푸 감독을 밀루티노비치의 대안으로 생각한다는 중국 관영영자지 ‘차이나 데일리’의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밀루티노비치는 노회했다. 선상푸를 수석코치로 포용했고 자신을 비난한 하오하이둥, 장언화 등과도 화해를 이끌어냈다.
전술적으로는 4-4-2포메이션을 기본틀로 하면서 공격의 세기와 탄력을 높이는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동안 중국축구는 장신 스트라이커를 문전에 박아놓고 빠른 측면 돌파에 이은 센터링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힘과 스피드는 좋지만 거칠기 짝이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근성도 부족했다. 그러나 밀루티노비치는 최종예선에서 공격 2선에서 다양한 루트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간을 파괴하는 공략법을 도입해 무패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현 시점에서 용병감독 3인방이 아직까지 아시아 축구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볼 수 없다. 축구개혁도 진행형이거나 미완성이다. 어쩌면 승부는 이제부터 누가 명장다운 지혜를 발휘해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밀루티노비치는 11월 협회와 재계약을 맺어야 한다. 중국축구계의 거두 친이밍은 “나라면 (중국을) 떠나겠다”며 중국대표팀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본다. 현재 중국팀의 전력으로는 밀루티노비치가 5번째 16강진출을 달성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물론 밀루티노비치도 이같은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밀루티노비치는 연봉을 100만달러 이상으로 올려받고 중국에 남을 것인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상황이다.
1억엔의 연봉을 받고 있는 트루시에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으로 월드컵 출전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의 성공을 다른 면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유망주 발굴프로그램 ‘토레센(트레이닝센터의 줄인말)’의 효과를 트루시에가 세대교체란 과실로 따먹었다는 냉정한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100만달러에 육박하는 연봉에다 16강 진출시 25만달러의 보너스를 보장받은 히딩크. 일부에선 “돈만 챙기고 비쇼베츠처럼 실패해서 돌아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를 제기하지만, 히딩크로선 축구 지도자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라도 한국정서와 자신의 축구철학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그는 아직도 “여론을 전부 수렴하다보면 나의 축구철학이 흔들릴 수 있다. 나의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이제 히딩크의 화두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남은 시간 동안 강한 대표팀을 만들어 팬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90년대 이후 대등한 라이벌전을 치러왔지만, 중국은 80년대 이후 한번도 한국을 이겨보지 못해 공한증(恐韓症)에 걸려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중국을 만나면 맥없이 무너진다. 이제 용병감독 3인방의 대리전이 2002년 월드컵에서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명장들의 지략싸움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