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재극 후손의 땅 찾기 소송. 그러나 이 소송은 한마디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이 확인됐다. 소송이 제기된 땅과 이재극이 소유했던 땅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재극 소유였던 땅의 지번과 토지정리 이후 부여된 이 땅의 지번이 우연히 일치한 것일 뿐, 위치도 크기도 용도도 전혀 다른 것. ‘지번만 같으면 무조건 소송부터 걸라고 부추긴다’는 토지 브로커들이 활개치며 국가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데….
현재의 당동리 일대 지번도. 인근 땅과 비교해보면 6○○번지는 농지가 아니라 농수로임(색칠된 부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일제 강점기 언론보도에 따르면 1927년 이재극이 사망하고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유산이 완전히 탕진됐다는 사실이다. 1932년 무렵 이재극 남작의 아들 이인용과 며느리인 조중인 부부 사이에 수년에 걸쳐 송사가 이어지면서 ‘백만금 유산이 먼지가 됐다’ ‘재정정리위원회가 남은 부동산 전부를 팔아 현금으로 만들어 보관했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454쪽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기사 참조).
그렇다면 이재극의 손자며느리가 국가를 상대로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땅은 어떻게 된 것일까. 재정정리위원회가 모든 땅을 팔아치웠다는데, 이재극의 후손이 이 땅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처음 찾아간 곳은 파주등기소였다. 당동리 6○○번지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2005년 8월22일자로 ‘소유권말소예고등기’가 되어 있었다. 소유권말소예고등기는 민사소송법에 의거해 소송이 제기됐을 때 해당 지번(地番)에 대해 등기부 상으로 소송이 제기된 상태임을 알리는 것이다.
문제의 등기부에는 지목(地目)이 ‘구거(溝渠)’로 나와 있었다. 농업기반공사 지역개발과에 따르면 구거는 필요에 따라 물을 넣고 빼고 할 수 있는, 흔히 말하는 농수로다. “옛날에는 농지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일컬었다”는 것이다. 지자체 관계기관을 찾아 당동리 6○○번지 지적도를 확인한 결과, 문제의 땅은 당동리 일대를 감싸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있었던 4400여 평의 농수로가 어떻게 이재극의 개인 소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일제가 친일파에게 농수로를 하사했다는 말인가.
김씨는 소장에서 “국가가 1982년 소유권 보존등기를 마친 당동리 6○○번지 땅은 이미 일제시대 시조부(이재극 지칭)가 사정(査定)받아 소유권을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근거해 국가기록원에서 동일 지번으로 일제 강점기의 ‘토지조사부’를 발급받았다. 당시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당동리 6○○번지로 되어 있었다.
토지조사부를 확인하자 의혹은 더욱 커졌다. 김씨가 국가를 상대로 돌려달라는 땅과 토지조사부상 동일 지번의 이재극 소유 땅은 그 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또한 지목도 ‘전(田)’과 ‘구거’로 판이했다. 일제 강점기 이재극 소유의 당동리 땅은 소송을 제기해놓은 4400여 평 땅에 비해 그 크기가 10분의 1도 안됐다. 여러모로 두 땅은 도저히 동일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멸실된 등기부등본
토지조사부에는 이재극의 땅이 대정2년(1913년) 6월에 신고된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다. 1913년과 소송이 제기된 토지가 국가소유로 등기된 1982년 사이에는 70년 가까운 공백이 있다. 그 긴 시간을 메워줄 관련 기록을 찾기 위해 우선 이 땅의 관리 기관인 농림부에 연락을 취했지만, 농림부 담당자는 “소송이 제기됐는지도 알지 못하며 아직 소장을 못 받았다. 소장이 관할 지자체로 갈지 우리 부로 올지도 알 수 없다”며 취재 협조를 거절했다.
지자체 관련 기관 공무원에게 문의했지만 역시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 “일단 소장을 받아봐야지, 지금으로선 아무 답변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십 차례 전화접촉을 하는 동안 상부기관은 하부에, 하부기관은 상부에 떠넘기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반복됐다.
추적을 계속할 실마리는 어렵게 얻은 정보를 통해 확인한 1950~60년대 구(舊) ‘토지대장’에서 나왔다. 이 토지대장은 정부 수립 이후 농지개혁법이 발효된 후에 새로 작성된 것이다. 토지대장의 기록에 의하면 당동리 6○○번지 땅(田)은 1964년 9월1일자로 ‘소유권’자가 ‘사정(査定) 이재극’으로 등재됐다. 앞서 김씨가 소장에서 “일제시대 시조부가 사정받아”라고 했던 부분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재극의 이름 옆에는 나중에 기록된 또 다른 소유권자로 A씨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①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당동리 6○○번지’에 대한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부. 사고(事故)란에는 ‘사정(査定)’, 소유주란에는 ‘이재극(李載克)’이라는 표기가 뚜렷하다. 지목은 전(田), 면적은 69평(1220㎡)이다.
②‘일제시대 ‘당동리 6○○번지’였던 땅의 지번을 다른 것으로 바꾼 환지계획서. 이때도 이미 이 땅의 소유주는 이재극이 아닌 다른 이였다.
③현재의 당동리 6○○번지에 대한 토지대장. 1982년 구획정리로 새로 생겨난 국가 소유의 땅이다. 지목은 구거(溝渠), 면적은 14765㎡로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부의 ‘당동리 6○○번지’와는 완전히 다른 땅임을 알 수 있다
토지대장을 보여주자 관련 공무원은 “사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은 1960년대 토지대장을 복구할 때 일제시대 토지조사부 기록을 근거로 했다는 의미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파주·문산 일대 토지대장이나 등기부등본 같은 정부기록 문서들이 거의 다 멸실됐다. 이후 토지대장을 복구하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자료인 토지조사부를 참고한 것이다. 당시 공무원이 일일이 현장을 방문해 조사하는 일도 병행했는데, A씨 이름이 있는 걸로 봐서 당동리 6○○번지 땅을 실제로 그가 점유 또는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문제의 땅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강점기의 ‘토지조사부’나 1960년대 작성한 ‘토지대장’에 나와 있는 ‘당동리 6○○번지’ 땅은 현재의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는 ‘당동리 6○○번지’ 땅과 전혀 다른 땅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땅”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982년 6월 완료된 구획정리 관련 문서다. 김씨가 소송을 낸 당동리 땅은 이때 국가 소유로 등기된 것이다. 반면 토지조사부 기록에 이재극의 것으로 돼 있던 당동리 땅은 구획정리가 완료되면서 지번이 변경된 것으로 드러났다. 구획정리를 통해 국가 소유로 등기된 당동리 6○○땅은 토지조사부상 등재돼 있던 특정 땅의 지번이 변경된 것이 아니라 이때 처음 생긴 지번인 것이다.
지자체 관련 기관 공무원은 “일제 강점기 이재극 소유의 당동리 ‘6○○’은 다른 지번으로 변경되면서 죽은 지번이 됐다. 바로 그 죽은 지번을 현 국가 소유 당동리 땅에 붙인 것”이라고 했다. 즉 이전의 당동리 6○○땅에는 새 지번을 부여하고(새 지번은 개인정보 보호상 밝히지 않기로 한다), 지번이 없던 땅에 당동리 6○○이라는 지번을 부여한 것이다.
일말의 의혹도 남기지 않기 위해 당동리 땅이 1982년 국가 소유로 등기되기 이전의 상태를 추적하기로 했다. 그러나 관련 문서를 아무리 뒤져도 이 땅이 그 전에는 땅이 아니라 수로일 뿐이었음이 거듭 확인됐다. 파주등기소 담당 공무원은 “타 지번에서 변경된 것이 아니고 새롭게 생성된 지번이니까 1982년 이전의 서류가 없는 것이다. 패쇄등기부에도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과거에 개인 소유로 등기된 적이 없는 땅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농업시설 관련 담당자는 “농지법 165조에 근거해 도로·관개용수로·배수로·구거·제방·하천 등의 시설은 국유지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설사 1950년대 법 시행 이전에 개인소유였다 할지라도 보상 등을 통해 국가에 강제편입됐을 것이다. 만일 당동리 농수로가 1950년대에 국가에 강제 편입된 땅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개인소유가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구획정리 당시 죽은 번지를 전혀 다른 땅에 갖다 붙이면서 이번 소송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실소했다.
이는 관련 기관 담당 공무원 네 사람의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다. “일제시대 토지조사부에 이재극 소유로 나타난 당동리 땅은 현재 소송 대상이 된 국가소유 당동리 땅과 전혀 다른 땅이며 단지 우연히 지번만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두 땅의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현 국가 소유 당동리 땅에 일제 강점기 이재극 소유의 땅이 일부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이재극의 손자며느리 김씨는 일제 강점기 시조부가 사정받은 땅과 단지 지번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전혀 다른 땅을 대상으로 엉뚱한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이에 대한 김씨측 입장을 듣기 위해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담당 변호사 이모씨와 여러 차례에 걸쳐 통화를 시도했다. 취재내용과 질문요지를 정리한 질의요청서를 팩스로 보냈지만 기사 마감시간까지 아무런 연락이나 답변도 없었다. 변호사 사무실 직원을 통해 “오후에 들어온다는 메모를 전하라”는 이 변호사의 말을 전해 들었지만, 이후 접촉을 수차례 시도했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씨는 이번 소송 외에도 국가를 상대로 세 차례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1996년 파주시 문산읍 도로 321㎡, 1999년 포천군 임야 및 밭 2000여㎡, 같은 해 하남시 소재 임야 660여㎡와 문산읍 내포리 밭 2200여㎡를 돌려달라고 했던 것. 이 가운데 포천군과 하남시 소재 땅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김씨는 승소했다. 역시 ‘재정정리위원회가 이재극의 유산인 부동산을 모두 팔아 현금화했다’는 1930년대 당시의 언론보도와는 아귀가 맞지 않는 재판 결과다.
활개치는 토지 브로커
1999년 2월 행정자치부는 ‘조상재산찾기 즉결민원처리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각 지자체로 조상 땅을 찾기 위한 문의가 쇄도했다. 지난해에는 김모씨가 일제 강점기 민적부를 위조해 국유지 16만평을 가로챘다 검찰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취재 과정에 만난 국유 재산 관련 소송 담당 공무원은 “조상 땅 찾아주기를 하면서 일명 ‘털털이’로 불리는 전문 토지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전문 토지브로커가 변호사를 고용해 조상 땅 찾아주기 소송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김씨처럼 ‘번지수를 잘못 짚는’ 땅 소송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부와 현 등기부등본상 번지수가 일치하면 무작정 소장부터 내고 보는 식이 다반사라는 것이다. 정부 기록문서가 비교적 부실한 지역을 골라 토지조사부를 바탕으로 ‘묻지마 소송’에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 지자체 공무원들의 토로다.
한 공무원은 더욱 심한 예도 많다고 귀띔했다.
“어느 지역이 개발된다 하면 토지 브로커들이 끼어들어 아예 시, 도 단위로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부를 발급받는다. 수백 수천개의 지번을 한꺼번에 통째로 떼보는 것이다. 이를 등기부등본과 대조해보고 일제 강점기 소유자의 땅이 현재 국가 소유로 되어 있으면 후손들을 부추겨 소송을 걸게 한다. 이는 행정력은 물론 국민세금까지 낭비하는 일이다.”
또 다른 관계공무원은 “파주와 문산 일대는 최근 지역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땅값이 엄청 뛰었다. 그 바람에 너도나도 조상 땅 찾겠다며 나서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며 혀를 찼다. 공교롭게도 김씨가 소송을 제기한 당동리 6○○번지 농수로는 소장 접수 3개월 전인 지난 5월 문산·파주 첨단산업단지 개발예정지로 확정되어 국가로부터 지자체가 무상으로 넘겨받은 땅이다. 국유지는 공시지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땅은 공시지가를 확인할 수 없다.
친일파 후손이 제기한 소송으로 수년에 걸쳐 끈질긴 재판 끝에 승소한 한 국유 재산 소송담당 공무원은 “국유지나 시유지는 국민의 땅이자 시민의 땅이다. 친일파 후손이 제기한 소송에서 지면 국민의 땅을 빼앗기는 셈이다. 특별법을 만들든 뭘 하든 이미 오래 전에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소동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답답한 심경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