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죽은 시인의 사회’

참교육을 위한 몸부림

  • 윤문원 이지딥 논술연구소장 mwyoon21@hanmail.net

    입력2006-06-12 1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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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교육 현실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대중가요 가사의 일부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이 하려던 말도 이런 게 아닐까. 교육에 있어 자유와 규율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까.
    ‘죽은 시인의 사회’
    교육의 주된 목표는 인성과 창의성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주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는 선택사항이다. 젊은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충성과 복종의 미덕, 현실 안주의 타협주의를 찬양하는 교육이어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도전하는 주체적인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할까. 다음은 어느 여고생이 쓴 글의 일부다.

    “똑같은 책에, 같은 교실에 앉아 점수로 매겨지는 우리들…딱딱 소리를 맞추어 걸어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 이 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문제아로 낙인찍혀버리는 우리들… ‘너희가 뭘 알겠니?’라고 하지만 나도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딱딱한 책보다 다른 것이 더 좋은데…우리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잣대 속에서 꿈마저 잃은 것 같다. 어른들이 짜놓은 틀 속에서 나와 날아보고 싶다. 이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저 높이 날아오르고 싶다.”

    교육과 학문에 관한 주제는 교육대학은 물론 일반대학 논술의 단골 메뉴이며, 일반대학의 사범계열 심층면접에서도 자주 출제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교육현장을 배경으로 청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교육 드라마다. 톰 슐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여러 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획일화, 정형화한 교육을 비판하며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정신과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준다. ‘열린 교육’을 실험하고자 하는 한 교사의 몸부림과 일류 대학 진학이란 틀 속에서 희망과 꿈을 접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갈등하는 학생의 삶을 그렸다. 교육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 작품에는 교육과 인생과 시(詩)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1959년 미국의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입학식.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백파이프 연주를 앞세워 교기를 든 학생들이 강당에 들어선다. 학생들은 교장으로부터 ‘전통(Tradition), 명예(Honor), 규율(Discipline), 최상(Excellence)’의 교육 방침을 듣고, 이 학교 출신으로 새로 부임한 영어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분) 을 소개받는다.



    시간은 많지 않다, “카르페 디엠!”

    키팅 선생의 첫 수업시간.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박물관으로 가서 “여러분은 나를 미스터 키팅이라고 불러도 되고,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Oh Captain! My Captain!’은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1819∼92)이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그에 대한 존경과 추모를 담아 쓴 시다.

    “여행이 끝나가고 목적도 달성하고, 항구가 가까워오는데 / 당신은 이렇게 쓰러져 차갑게 식어 대답도 못하고 /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누워 있군요 / 이 벨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 난 당신이 쓰러져 누워 있는 이 갑판을 / 슬픔이 가득 찬 발걸음으로 걷기만 할 따름입니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교재에 있는 시 한 수를 낭송시킨다.

    “모아라, 장미꽃 봉오리를 / 시간은 언제나 날아 지나가죠 / 이 꽃은 오늘은 웃고 있지만/ 내일이면 죽을 거예요.”

    이 시는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는 청소년의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꽃이 시들기 전에 다 따라’는 뜻으로 중심 사상은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즉 ‘이 날을 붙잡아라(Seize The Day)’ ‘오늘을 즐겨라(Enjoy The Present)’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라(Make Your Lives Extraordinary)’라는 뜻이다. 키팅은 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이미 고인이 된 이 학교 출신 명사들의 밀랍 인형을 가리키며 누구나 죽게 되고, 시간은 많지 않다며 ‘카르페 디엠’을 강조한다.

    키팅 선생의 본격적인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교과서 서문을 읽게 한 키팅이 내용에 맞게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충실한 설명을 하려는 듯이 보이고,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기다리는데, 그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서문 전체를 찢어버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학생들이 서문을 찢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수업에서 다른 사람이 평가한 것을 보지 말고 너희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배워라. 말과 언어를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맛보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의학이나 법이나 기술 같은 것이 우리의 삶을 유지해준다면, 시나 아름다움, 사랑 같은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 괴상한 선생에 대해 관심과 호감을 느낀 학생들은 졸업 연감에서 키팅이 재학 시절 회원으로 있던 클럽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것을 안다.

    닐(로버트 숀 레오나드 분), 녹스(조쉬 찰스 분), 새로 전학 온 토드(에단 호크 분) 등 7명의 학생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부활시켜 활동한다. 이들은 학교 뒷산의 동굴에 모여 자작시를 낭송하고 짓눌렸던 낭만과 정열을 발산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젊음의 특권, 반항

    키팅 선생의 독특한 수업방식은 계속된다. 키팅 선생은 수업하다 말고 때때로 책상 위로 올라가 “너희들은 곧 알게 될 거야.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여러분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때에 또 다른 관점으로 그걸 바라봐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작가가 뭘 생각하는지를 고려하지 마라. 자신만의 눈으로 작품을 보라. 획일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느껴라”고 강조한다.

    수업시간에 자작시를 발표하게 하고, 또 야외에 나가 독특한 수업을 하는 키팅. 키팅이 말한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는 학생들. 녹스는 미식축구 선수 애인이 있는 크리스에게 반해 고민하다가 학교까지 찾아가 사랑의 시를 낭독하고 결국 사랑을 얻게 된다. 닐은 연극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하면서도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하는 연극 무대에 올라 멋진 요정 연기로 갈채를 받는다.

    이를 본 닐의 아버지는 공연이 끝난 후 닐에게 “웰튼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브레이든 군사 학교로 보낸 뒤 하버드에 진학시켜 의사를 만들겠다”고 윽박지른다. 아버지에게 꿈을 포기할 것을 종용당한 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학교측은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다 키팅 선생을 희생양으로 만들기로 작정한다. 키팅 선생이 학교를 떠나는 날, 교장이 키팅을 대신해 수업을 하고 키팅은 학생들을 뒤로한 채 힘없이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 순간, 평소 수줍어하던 토드가 일어서서 “키팅 선생님, 학교에서 우리에게 사인을 강요했어요. 내 말을 믿으셔야 해요. 정말이에요. 그건 키팅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하고 울먹이며 말한다. 그러자 교장이 제지하며 “앉아라 토드. 떠나시오, 키팅! 선생. 빨리 떠나시오”라고 외친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키팅을 향해 토드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면서 책상 위에 오르자 고민하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책상 위에 오른다. 학생들은 무언으로 키팅에게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저희는 선생님 편입니다’는 마음을 전한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경고와 협박을 한다. 이 광경을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던 키팅은 웃음지으며 “Thank boys. Thank you”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현대 휴머니즘 영화의 거장인 피터 웨어 감독은 작가정신이 배어 있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참다운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코믹한 연기로 잘 알려진 로빈 윌리엄스는 오랜 인습을 깨뜨리는 교사 키팅 역을 맡아 감동적인 연기를 펼쳤다. 수줍은 토드 역할을 맡은 에단 호크의 청소년 시절 연기도 인상적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89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논술·구술 워밍업’

    ▼ ‘참교육’ ‘열린 교육’이란 어떤 교육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자.

    ‘핵심 기본 논제 1’

    ▼ ‘죽은 시인의 사회’는 참다운 교육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우리 교육의 나아갈 길’에 대한 견해를 논술하시오.

    ‘예시 답안’

    교육의 이념이나 목적, 목표 진술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해 ‘인간’이 구심점에 있었다. 한국 교육의 바탕에 깔려 있는 ‘홍익인간’ ‘전인교육’의 정신도 바로 교육의 인간화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교육과정을 만들 때 교육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상’을 먼저 설정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은 자유로운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을 일깨웠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한마디로 인간교육에 성공하지 못했다. 교육이란 무릇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인간교육’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교육에서 ‘인간’의 모습이 소멸됐다. 일찍이 라이머(E. Reimer)가 “학교는 죽었다”고 설파한 바 있지만, 한국 교육에서는 학교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학교 속에, 교실 속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표현함이 타당할 것이다.

    학교교육에서 주인이어야 할 ‘사람’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지식’이 들어섰다. 지식이 교사와 학생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어 있는 지식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사도 학생도 지식의 노예가 되어, 교육의 비인간화 현상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교육에서 인간성이 상실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에서도 근본적인 원인은 학력 중심으로 편중된 우리 사회의 구조다. 학력 중심주의의 원래 취지는 출신이나 배경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 개인을 평가하는 데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학력 중심주의는 학력 자체가 출신과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취업 기회에서부터 임금, 승진, 사회적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학력이 잣대가 되고 있다. 그 결과 만성적인 입시 과열과 ‘일류병’이 우리 교육의 근저를 뿌리째 흔들어왔다. 학력 중심주의는 학교교육의 파행을 낳았다. 학교교육은 철저히 입시 위주이고 상급학교 진학률이 유일한 평가기준이 된다. 입시중심의 교육과 입시용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 현실은 전적으로 학력사회화한 사회체제 때문이다.

    한국 교육의 본질적 발전 방향의 하나는 ‘인간’을 복원시키고 내세우는 것이다. 교육의 인간화는 교육을 통해 사람을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삶을 모방과 인습적 동화(同化)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을 각기 고유한 가치와 사고, 행동체계를 스스로 세워 나갈 수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다. 교육의 인간화는 우선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을 배우는 교육행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극도의 이기적·개인적 원자화를 극복하고, 더불어 사는 상호의존적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삶의 태도를 전인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교육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학생들에게 단일가치를 주입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 교육을 비판할 때 ‘주입식 교육’을 지적한다. 주입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주입되는 것이 ‘하나의 가치’라는 데 있다. 스스로 다양한 대안을 고안하고, 정보를 창출하거나 재생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정답만이 최선의 단일가치로 인식되는 폐쇄성은 한국 교육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한국의 교육은 개방화를 지향해야 한다. 첫째, 교육내용에 있어서 학생들이 다양한 사고와 가치체계를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학생 스스로 가치를 선택하고 판별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가치체계를 세워 나갈 수 있도록 교육내용이 개방돼야 한다. 둘째, 지구촌 시대에 부응하여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 등 제(諸) 측면에서 국제적 이해의 정도를 높여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주체적 국민의식은 다른 문화, 다른 민족의 역사 및 언어와 삶의 양태 등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더욱 공고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도래한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가 생산력 및 지배관계를 결정짓는 힘의 근원이다. 한국이 문화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삶의 존재양식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정보화 시대의 변혁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창의적 인간, 자기 교육력을 가진 인간을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이 이와 같은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운영이나 교육내용, 그리고 재정투자 및 환경개선에 획기적 정책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핵심 기본 논제 2’

    ▼ 교실 붕괴의 원인에 대해 말하고, 교육 현장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말해보시오.

    ‘예시 대답’

    ‘교실 붕괴’란 교사와 학생, 학부모 사이에 서로 신뢰 관계가 무너져 학급의 일상적 생활이나 학습 기능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교실 붕괴의 근본적 이유는 학벌 위주의 사회 풍토와 거기서 비롯된 인성교육의 부재다. 학벌 위주의 사회 풍토는 입시 위주 교육의 병폐를 낳았다.

    짝궁이 어깨동무를 할 동료가 아닌, 그 등을 밟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가 되고, 선생님은 은사라기보다 시험 점수를 올리는 방법을 가르치는 강사로 전락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학업 성취도로 평가받는다. 비록 학업 성적은 우수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난 학생을 열등한 사람으로 만드는 장소가 바로 교실이다. 학벌 지상주의와 인성 교육의 양립은 이미 그 말부터 논리에 맞지 않으며, 불가능한 일이다.

    가정교육의 부재, 교사의 권위적인 태도, 열악한 교육환경 등도 교실 붕괴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 권위만을 앞세워 학생을 통제하려 드는 교사, 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가르치기엔 넘쳐나는 학생 수, 이런 여러 상황이 학벌 지상주의와 맞물려 교실 붕괴 현상을 초래했다.

    붕괴된 교실을 살리기 위해서는 학벌 지상주의가 사라져야 한다. 대학 간판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가 없어져야 중등 교육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다. 아울러 학생의 인격을 손상하지 않고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시킬 수 있는 교육 방법과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관련 기출문제

    ※다음 제시문을 읽고 아래 논점들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면서,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논술하시오. 1600±200자 (서울대 2000 정시)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이란 어떠한 인간인가?

    -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은 불가능한가?

    ‘제시문’

    이성(理性)을 갖추는 시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도덕적 존재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념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되도록 그런 관념을 나타내는 말은 아이들 앞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처음에 그런 말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게 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바로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의 머릿속에 새겨진 최초의 잘못된 관념은 오류와 악덕의 씨가 된다. 따라서 첫발을 특히 주의해서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가 감각적인 사물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동안에는 아이의 모든 관념이 감각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아이가 주위 어디를 봐도 감각적인 세계만을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는 당신 말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게 되거나 당신이 말하는 도덕적인 세계에 대해 평생 지울 수 없는 환상적인 관념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아이와 함께 토론하라.” 어떤 철학자가 제시한 준칙이다. 이 말은 오늘날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준칙을 지킨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어른과 토론을 해 온 아이처럼 어리석은 존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능력 중에서 이른바 다른 모든 능력을 종합한 능력인 이성은, 가장 까다로운 길을 통해, 그리고 가장 늦게 발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해 다른 능력을 발달시키려 하고 있다.

    훌륭한 교육이란 이성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성에 의해 아이를 교육하려 한다. 그것은 교육을 맨 마지막 단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목표를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아이가 이치를 분별한다면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아이에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말만으로 만족하는 습관을 들여주고, 또 아이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일일이 따져서 자신이 마치 선생과 똑같이 지혜로운 인간인 양 착각하게 해 논쟁을 좋아하는 반항아가 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어른이 합리적인 동기에 의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는 반드시 탐욕이나 불안, 허영심 따위가 결부돼 있다.

    사람들이 아이에 대해 행하는, 혹은 행할 수 있는 도덕 교육의 교훈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생 :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아이 : 왜 안 되죠?

    선생 : 그것은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아이 : 나쁜 짓? 어떤 것이 나쁜 거죠?

    선생 : 금지되어 있는 일을 말한다.

    아이 : 금지되어 있는 일을 하면 어째서 나쁜가요?

    선생 :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

    아이 : 그럼, 남들이 모르게 하면 되지요.

    선생 : 누군가가 네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이 : 숨어서 하겠어요.

    선생 : 네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아이 : 거짓말을 하면 되죠.

    선생 :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이 :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나요?

    선생 : 그것은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피하기 어려운 순환이다. 여기서 더 벗어나면, 아이는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는 유익한 교훈이다. 사람들은 이 대화를 어떤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이나 인간은 왜 여러 가지 의무를 지켜야 하는지 등의 문제는 아이가 이해할 영역이 아니다.

    자연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로 있기를 원한다. 이 순서를 어지럽혀 놓으면, 익지도 않고 맛도 없는 그리고 곧 썩어버리는 과일을 만드는 꼴이 된다. 우리는 어린 박사와 늙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아이에게는 아이 특유의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느끼는 법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방법 대신 어른들이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느끼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처럼 분별 없는 짓은 없다. 따라서 열 살 된 아이에게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에게 6척의 키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정도의 나이에 이성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 자크 루소, ‘에밀’ 2부

    ‘문제 해결을 위한 Tip’

    ●교육철학 관련 논제로서 ① 다음 제시문을 읽고 아래 논점들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면서, ②“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논술하라는 것이다. 아래의 논점이란 두 가지다. 첫째,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이란 어떠한 인간인가? 둘째, 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은 불가능한가?

    ●제시문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장자크 루소(J. J. Roussau·1712∼78)가 지은 ‘에밀(Emil)’(1762) 제2부의 한 부분이다. 이 책에는 에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아가 이상적인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아서 성인이 돼 결혼하기까지의 교육 방법이 소개돼 있다. 루소는 이 교육 과정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제1부에서는 1∼5세의 유아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모든 지적 교육을 피하고 신체적인 발육에만 신경 써야 하는 단계다. 제2부에서는 6∼12세의 아동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이성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단계이므로 감각 기관을 통한 감각의 훈련에 치중해야 한다. 제3부는 13∼15세의 소년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지식 교육을 시작하되 탐구학습이 되도록 해야 하는 단계다. 제4부에서는 16∼20세의 청년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바로 도덕교육과 종교교육의 시기다. 제5부는 에밀의 아내가 될 소피의 교육을 다룬 부분으로 여성교육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자유롭게 사고하고 느껴라.” 학생들은 저마다 ‘카르페 디엠’을 실천한다.

    ●이 다섯 단계 중에서 제시문은 제2부, 6∼12세 아동기 교육을 다룬 부분이다. 루소는 이 단계에서는 아이가 아직 교육을 받을 만큼 이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 교육을 미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급하게 도덕, 종교, 지식 등에 대해 교육하려 들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잘못된 관념이 형성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오히려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나아가 악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명령이나 권위에 의해 이뤄지는 인위적인 주입식 교육과 어른 위주의 교육, 전통을 중시하는 교육을 모두 비판했다. 그 대신 인간이 타고난 내면적인 자유의 감정과 창조성을 높일 수 있는 자율적인 교육을 내세웠다. 강제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교육이 아닌, 자연 상태를 최대한 존중하며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소극적 교육을 주장한 것이다. 이때 교사는 단지 어린아이가 타고난 소질과 능력(자연적인 본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이 같은 루소의 교육관(觀)을 자연주의 교육관이라 한다.

    이와 같이 루소가 극단적인 자연주의 교육관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전의 부패한 프랑스 사회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본성을 잃고 타락한 인간과 황폐한 사회를 개혁하고 재건하는 것이 지각 있는 어른들의 의무라 했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위해서 교육의 개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갈수록 타락하는 인위적인 문명사회보다 자연의 상태 또는 원시 상태가 더 도덕적이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善)하다는 전제가 참이 아닐 경우 무가치한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주요 논제는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하여 세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저절로 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둘째,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교육을 통해 형성된다. 셋째,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 형성’은 불가능하다.

    첫째의 견해를 취한다는 것은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관에 동조하는 것이며, 둘째의 견해를 취하는 것은 루소의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다. 셋째의 견해는 이러한 논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 형성이 불가능하다면 과연 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이 필요한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예시 답안’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다. 취학 전 아동에게까지 영어나 한글, 예체능 교육을 시키려는 부모들의 열성이 얼마나 극성스러운가. 이제 조기 교육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이런 지식 교육으로 과연 도덕적이면서 이성적인 바람직한 인간을 기를 수 있을까? 어린이 교육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전수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의 핵심에 전인적 인간을 기른다는 목표가 놓여 있는 한, 도덕성을 기르는 일 또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라 함은 참과 거짓을 따지는 능력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 이때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도덕성의 원천을 이룬다.

    인간은 이와 같이 도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옳은 일이라면 해를 입는 것을 무릅쓰면서 기어코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인간이란 사회생활을 하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인간, 그른 일은 피하고 옳은 일은 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이라고 하겠다.

    루소는 ‘에밀’에서 이성을 갖추는 시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도덕적 존재라든가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념을 나타내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아이들에게 이성에 호소하여 도덕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에 대한 도덕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

    루소는 같은 책에서 어린이를 교육함에 있어 감각적인 세계만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루소의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감각에 호소해 도덕을 가르치는 것은 가능한 셈이다. 여기서 감각에 호소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루소는 아이와 토론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린이에게 도덕에 관한 그릇된 관념을 심어주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도덕 판단과 연계된 상황과 맞닥뜨릴 때 스스로 판단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어린이는 유혹에 빠지거나 실수를 저질러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어린이의 도덕성이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린이에게도 그런 능력은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교사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주입한다고 해서 계발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때가 되면 능력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근본적으로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예민하게 귀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린이에게 자기 내면의 소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린이는 미숙한 인격체에서 성숙한 인격체로,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관련 기출문제

    다음 예시문에는 ‘글을 가르치는 일’과 ‘인간을 가르치는 일’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관련성이 시사되어 있다. 예시문이 시사하는 양자의 차이와 관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비추어 21세기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간략하게 제시하시오. 1300∼1500자 (서울교대 2000 정시)

    ‘제시문’

    資治通鑑이라는 책을 보면, 經師는 만나기 쉬워도 人師는 만나기 어렵다고 개탄한 글을 찾을 수 있다. 經師란 經書를 가르치는 교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말을 바꾸면 古典에 실린 글을 가르치는 교사는 흔해도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는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가끔 듣는다.

    확실히 오늘의 많은 교사는 글을 가르치는 직업인으로 타락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닌가 싶다. 일찍 독일의 작가 레이싱은 “書冊은 나를 博識者는 만들지만 인간은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인도 시인 타고르는, “우리는 아동에게 地理를 가르치느라고 하다가 그로부터 地球를 빼앗고, 문법을 가르치느라고 하다가 언어를 빼앗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것은 글을 가르치는 교육과 교사에게 주는 신랄한 비판이다.

    글을 가르치는 교육의 한 가지 悲劇은 교사가 예기치도 않고 의식지도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있다. 그것은 곧 글을 싫어하는 性向을 기르는 일이다. 지식 전달을 주되는 임무로 삼는 교육은 배우는 사람의 현재 생활· 경험· 취미· 관심· 성향과는 관계없는 글을 읽고 쓰고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가르치는 글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피교육자에게 이롭다는 이론 위에서 강행된다.

    이러한 교육은 생도가 자진해서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 속으로 교사가 강제로 쑤셔 넣어주는 교육이다. 아동이 글을 미워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버나드 쇼가 어떤 때 그의 희곡의 일부를 중등학교 교과서에 넣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나의 작품을 교과서에 넣어 셰익스피어 작품 모양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지금이나 장래에 있어서나 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내 희곡은 拷問의 도구로 저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의 경우에 있어 졸업일은 동시에 책과 작별하는 날이다.

    교사가 經師가 되느냐 人師가 되느냐 하는 것은 교사 자신이 결정할 문제다. 그가 교육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견해에 따라 經師가 될 수도 있고 人師도 될 수 있다. 만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교사의 임무로 생각한다면, 그는 經師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人師가 될 것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사람은 오직 교육을 통하여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믿는다면, 교사는 經師가 됨으로써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듀이는 언젠가 한 나라의 상태를 알려면, 그 나라의 감옥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거니와, 한 나라의 상태는 그 나라의 학교에서 어떤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가를 보아 알 수 있다. 한 나라는 그가 가진 학교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학교의 교육은 그 교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교사가 현재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20, 30년 뒤에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그는 결코 經師가 됨으로써 자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룬트비히와 그의 동지들의 제자들이 뒤에 덴마크의 중흥을 이룩한 공로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만일 그가 예나에서의 참패 후 독일을 재흥시켜 다음날 프랑스를 굴복시킨 것이 피히테와 그와 사상을 같이하는 교사들의 교육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는 마땅히 經師의 임무로써 안연(晏然)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사람을 부르고 있다. 참된 일꾼을 찾고 있다. (중략)

    사람은 많다. 그러나 바른 사람은 드물다. 믿을 만한 사람이 희귀하다. 나라가 목마르게 부르는 참된 사람을 누가 기를 것인가? 우리 교사들은 옷깃을 여미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經師가 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人師가 될 것이냐? 우리 교사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그 결정이 현명할 때 우리 동방의 등불은 또 한 번 밝아질 것이다.

    -오천석의 ‘스승’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Tip’

    ●논제는 ‘글을 가르치는 일’과 ‘인간을 가르치는 일’의 차이와 관련해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논술하라는 것이다. 제시문에는 ‘글을 가르치는 일’과 ‘인간을 가르치는 일’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관련 또한 시사되어 있다. 제시문에 한자가 섞여 쓰여 있으므로 평소 한문 공부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예시 답안’

    ‘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을 ‘경사(經師)’라 하는데 ‘경사’는 지식의 전수자다. 즉 ‘글을 가르치는 일’은 지식의 전달을 의미한다. 반면 ‘인간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인사(人師)’라 하는데 ‘인사’는 참된 인간을 만드는 사람이다. 즉 ‘인간을 가르치는 일’은 참된 인간을 만드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가르치는 일’은 인류의 역사라든지, 선현들의 위대한 사상이나, 사회규범, 도덕 등을 가르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글을 가르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가르치는 일’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글을 가르치는 일’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글을 가르치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교육자가 많다.

    현대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이므로 학교교육에서 교양과 인격을 함양하는 교육을 뒤로 미루기가 쉽다. 이처럼 인간중심 교육보다는 학문중심 교육에 매진한다면, 개인의 사색과 통찰력이 저하되고, 물질 만능주의 풍조와 쾌락적·향락적 생활관이 팽배하고 자기중심의 이기주의가 만연해 인간적인 윤리가 붕괴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교육의 목표를 인간을 더욱 훌륭하게 육성하고,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바람직한 교육은 생활 기능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견지하는 데서 그 바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새로운 교육은 새로운 사회 변화에 주도적으로 적응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개인들을 육성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래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지닌 인간상이 요망된다. 개방사회는 폐쇄사회와는 달리 감시 기능이 약화된다. 그 대신 이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스스로 다스리는 윤리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데 노력해야 하므로, 도덕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진다. 이를테면 도덕적 자율성을 전혀 갖추지 않은 전문가들이 범할 가공할 위험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 사회에서 각자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사회 성원 모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가치관 교육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우리 교육은 ‘인간 교육’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글을 가르치는 일’은 인간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돼야 하며, 교육의 개방화를 통해 지식정보화 시대에 맞는 창의적 인간, 자기 교육력을 가진 인간을 길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관련 기출문제

    아래 문장을 읽고 글의 요지가 무엇인지 생각하시오. (서강대 2003 수시1학기)

    A technological revolution-desktop computers and satellite transmission directly into the classroom-is engulfing our schools. It will transform the way we learn and the way we teach within a few decades. It will change the economics of education. From being almost totally labor-intensive, schools will become highly capital-intensive.

    But more drastic changes will occur in the social position and role of the school. Though long a central institution, it has been “of society” rather than “in society.” It concerned itself with the young, who were not yet citizens, not yet responsible, not yet in the workforce. In the knowledge society, the school becomes the institution of the adults as well, and especially of highly schooled adults. Above all, in the knowledge society, the school becomes accountable for performance and results.

    Technology, however important and however visible, will not be the most important feature of the transformation in education. Most important will be rethinking the role and function of schooling-its focus, its purpose, its values. The techno-logy will still be significant, but primarily because it should force us to do new things rather than because it will enable us to do old things better.

    ‘문제 해결을 위한 Tip’

    ●영문 해석

    기술 혁명이-학교 수업에 데스크 톱 컴퓨터와 위성 전송 기술을 도입-학교를 바꾸고 있다. 그러한 혁명은 몇십년 안에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한 혁명은 교육의 경제적 측면에도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노동 집약적 교육은 자본 집약적 교육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변화가 학교의 위상과 학교의 사회적인 지위에서 나타날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 사회에서 중심적인 기관이었지만 교육은 사회 속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이뤄졌다. 교육은 시민이 아닌 ,책임이 없는, 그리고 아직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젊은이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식사회에서 학교는 성인을 위한 기관일 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기관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사회에서 학교는 성인들의 실행 능력과 그 실행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갖는다.

    아무리 중요하고 눈에 보이는 측면을 갖고 있을지라도 기술은 교육 변화의 중요한 특징이 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의 기능, 그리고 교육의 초점과 목적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다. 기술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낡은 것을 하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첫째 단락은 기술 혁명이 교육의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는 내용이다. 둘째 단락은 학교의 위상과 사회적인 지위 변화를 예상하면서 학교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셋째 단락이 제일 중요한 단락으로 기술의 발달이 교육의 질적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학교 교육의 목적 자체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짧은 영어 지문의 경우에는 대개 마지막 단락에 결론적인 말이 나온다. 그러므로 첫째 단락과 마지막 단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심층 면접은 셋째 단락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면 될 것이다.

    관련 기출문제

    ※사교육의 장·단점과 공교육과 사교육의 관계를 지적하고 공교육의 지향점을 말해보라. (서울대 2001 정시)

    ‘예시 답안’

    ‘죽은 시인의 사회’
    尹文遠
    ● 1953년 부산 출생
    ●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KBS라디오사회교육방송 토론프로그램 진행, 숙명여대·장안대 강사
    ● 現 이지딥 논술연구소장, (사)100인 영상작가위원장
    ● 저서 : ‘식구생각’ ‘이지딥 논술·심층면접 골격 답안’ ‘이지딥 논술·구술 골격 제시문’ ‘영화 속 논술’ ‘애수에서 글래디에이터까지’ 등


    사교육의 장점은 수요자인 학생의 요구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단점은 사교육의 혜택이 교육비를 지급할 수 있는 자에게만 돌아간다는 것과 교육의 공공성보다 입시 위주의 기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져 공익성이나 인성 교육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사교육은 공교육을 보조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교육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측면도 있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공교육의 지향점은 공교육도 사교육과 같은 수요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공교육 투자를 증대하여 사교육의 장점을 공교육으로 유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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