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진보 vs 이념 없는 외곬 보수
제왕적 대통령제와 승자독식 선거제도
40% 민심으로 85% 의석 가져가다니…
정치적 처방의 출발점, 제3정당
민심 왜곡 줄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Gettyimage]
그날 같은 근무조이던 경찰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체격이 다부지고 성격은 호탕한 경장이었다. 그가 내 출신 대학을 듣더니 인상을 구겼다. “하, 그 대학 놈들 때문에 이렇게 됐지” 하면서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려 보여줬다. 흉측한 수술 자국이 있었다. 1991년 여름, 우리 대학 상과대학 뒤편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복면을 쓴 대학생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쇠파이프로 구타했다는 것이다. 그때 팔이 골절됐고, 쫓겨 도망가다가 어딘가에 긁히고 찢긴 흔적이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사람 인연
순간 아찔했다. 나는 그날 경찰들을 급습한 ‘범인’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상황도 다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어 운동권 학생들은 거의 모두 상경했고, 캠퍼스는 한산했다. 몇 명만 남아 학생회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골단 복장을 한 몇몇이 상과대학 뒤편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당시 사복 차림의 경찰 진압부대를 ‘백골단’이라고 불렀다.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주로 흰색 헬맷을 쓰고 다녀 그렇게 불렸다. 복장이 간편하니 진압부대의 선봉에서 체포조로 활약했는데,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는 ‘나쁜놈들’의 대명사로 통했다. 1991년에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이들에게 쫓기다 사망하면서 혐오와 분노의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치자!” 몇몇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조용히 상과대학 뒤편으로 갔다. 골목 양쪽에서 포위해 거의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빠져나왔다고 통쾌하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무전기까지 뺏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맹세컨대 나는 그 무리에 끼지 않았는데, 그건 당시 내가 경찰 내사(內査) 단계에 있었고,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만 아니었으면 나도 분명히 그 행위에 가담했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마음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정문 근무를 함께 선 경찰은 백골단 출신이었다. 다른 부대는 모두 시위 진압차 상경했는데, 자기 부대만 대학 인근에서 상황 대기를 하고 있었고, 몇몇이 부대를 이탈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벌어진 일이었구나. 미안하고 애잔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근무시간 두 시간 내내 그는 운동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중 상당수가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가령 운동권 학생들은 집단 혼숙을 하는데 그 과정에 난잡한 성행위가 이뤄지고, 총학생회장에게 예쁜 여학생을 ‘갖다 바치고’, 사상적으로 동요하는 학생은 성적인 약점을 잡아 조직을 못 나가도록 잡아둔다는 식으로 입에 담기도 지저분한 이야기였다. 마치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너는 모를 거야”라고 연신 강조하며 말했다. ‘제가 운동권 핵심이라서 아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실제로 운동권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학생운동권도 수십, 수백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거쳐 갔으니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별의별 일이 다 있었을 것이다. 일각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권 전체를 싸잡아 ‘그런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동의할 수 없다. 보수 일각의 부패한 행위를 이유로 “보수 세력은 뇌물을 먹고 살아가는 집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말이 나왔으니, 이른바 진보 진영 사람들이 보수 진영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 또한 집요하고 황당하다. 특히 보수 성향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들을 싸잡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거나, 양심도 인정도 없는 냉혈한쯤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 그저 데스크에서 시키니까 하릴없이 기사를 쓰는 사람 정도로 안다. 역시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보수 언론사에도 별의별 기자들이 다 있지만 내가 아는 기자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당신이 순수하고 평범한 만큼 그들도 순수하고 평범하게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엇나가는 기사를 쓰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그런 풍경은 어떤 직업 세계든 마찬가지 아닌가. ‘직(職)을 내던지더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결기 또한 보수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있다. 양심은 당신들만 지닌 전매특허가 아니라는 뜻이다.
혐오·불신·적대감
진영의 이쪽과 저쪽에 모두 몸담아 보면서 느낀 것은 양대 진영의 서로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불신, 적대감이다. 물론 외국에도 정치적 이견을 둘러싼 상호 갈등이나 불신이 있게 마련이고 적대감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양쪽으로 확연히 갈라져 마치 ‘저쪽이 없어져야 이 나라가 산다’는 식으로 적대감이 만연한 나라가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다.20년 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북한인권주간 행사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나랑 가깝게 지내던 어느 미국 변호사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였는데, 저녁 식사를 하다가 낙태가 화제에 오르자 갑자기 흥분했다. “인간 생명체를 갈가리 잘라 죽이는 행위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민주당 지지자들에 대해 몸서리치는 표정을 지었다. 총기 규제, 이민정책, 의료복지 문제 등에 대해서도 그는 전형적인 ‘공화당 주류’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음 날에는 민주당 지지자들과 함께 북한 인권 실현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선 왜 이런 풍경을 기대할 수 없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너무 낭만적 생각일까.
우리나라에 유난히 정치적 적대감이 만연한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역사적·제도적 배경이 뒤엉켜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역사 쪽을 살펴보자면, 일단 보수 쪽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이후 50년 역사는 자타공인 ‘보수의 일당독재’ 역사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야 진보 진영이 집권할 수 있게 됐다. 사실은 김대중 정권도 ‘좀 더 온건한 보수 정권’이었을 따름이고,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야 민주당의 진보 지향적 성격이 약간 뚜렷해졌다. 그때부터 신한국당 계열 정당을 ‘보수’, 민주당 계열 정당을 ‘진보’라고 부르는 구분법도 생겨났다. ‘과연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보수 50년 집권.’ 진보 쪽은 한국 현대사를 그렇게 바라본다. “보수 세력은 50년이나 해 먹고선…” 하는 논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들도 50년 정도는 ‘해 먹어야’ 균형의 원리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기 진영 내부의 잘못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다.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은 채, 나아가 비판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50년 동안이나 집권한 세력도 있는데 이쯤이야’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여긴다. 악랄한 자들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들도 조금 악랄해지고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모든 행위를 정당화한다. 민주당이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에 대해 ‘그쯤이야’ 하고 실언하는 이유, 이른바 조국 사태에서 보여준 행태는 바로 그런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진보의 이런 ‘내로남불’을 보수 진영에서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보수 쪽의 잘못”이라고 앞에서 표현했지만, 보수 진영 사람들은 또 다르게 반론한다. “우리나라의 반공 보수는 6·25의 후과로 생겨난 보수”라고 말이다. 즉 진보를 자처한 세력이 6·25전쟁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의 보수가 그렇게 강경한 보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군사 쿠데타마저 ‘구국의 결단’이라 칭송할 정도로 한국의 보수가 왜곡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원죄는 진보에게 있다는 뜻이다.
약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진영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50년 역사는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을 지나치게 외곬으로 이끌었다. 한국에 제대로 된 ‘이념 보수’가 성장하지 못한 것도 그런 탓이다. 경쟁 상대가 없으니 진화에서 도태됐다고나 할까. ‘독점’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일이 된다.
기괴한 총통형 대통령제
이러한 역사적 배경도 있지만 제도적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정치제도가 아닐 수 없다.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이고, 다른 하나는 승자독식 선거제도다.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 가운데 한국처럼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나라의 유난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나라의 것을 수입해 와서는 극단적으로 비틀어버리는 점에 있다. 대통령 제도도 그런 수입품 가운데 하나다.
알다시피 대통령 제도는 미국에서 생겨난 것으로, 왕의 속박이 싫어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다 보니 ‘왕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고민하다 만든 자리다. 따라서 초창기 미국 대통령은 결코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초창기 미국 대통령은 그저 회의를 주관하는 선임자 정도 역할이었고, 그래서 이름도 프레지던트(president)였던 것이다. 현대 미국 역사는 연방의 통솔자로서 대통령의 권한이 점차 강화돼 온 역사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미국 대통령은 오늘날 한국 대통령이 누리는 권한의 범위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미국이 워낙 강대국이다 보니 미국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해 보일 따름이다.
유진오 선생이 우리나라 제헌헌법 초안을 만들 때, 원래는 의원내각제를 권력구조로 삼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승만이 그것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꿨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탓이 있을 것이고, ‘선출된 임금’이 되고 싶은 이승만의 개인적 욕심 또한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총칼을 앞세워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이 거의 30년 가까이 정치를 이끌면서 더욱더 ‘제왕화’됐다. 군인 특유의 상명하복 계급 질서, 게다가 보수 일색의 이념 진영까지 결합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총통(總統)형 대통령제가 됐다.
1987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사실은 이런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체했어야 옳다. 그런데 그때는 그저 직선제를 쟁취하는 것에만 급급했고, 나중에 당선된 왕년의 민주 투사 대통령들도 권력의 달콤함은 놓칠 수 없어 제왕적 대통령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보수 진영은 50년을 해 먹었는데 우리만 얌전할 수는 없지’ 하는 생각 또한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진 총체적 비극의 씨앗이다.
제3정당 위해 물꼬 터줘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7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위성정당 방지’ 정치 관계법 개정안 발의 관련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1대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가 바뀌었으나 거대양당이 비례용 위성정당을 창당해 정치개혁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뉴시스]
혹자는 “대통령제하에서 양당 정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 유권자들의 사표(死票) 심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엔 둘 중 하나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양당 정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내버려 둬야만 하는 것일까.
미국 같은 나라라면 모르겠다. 공화당-민주당으로 갈라져 있긴 하지만, 미국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당 체제는 아니다. 우리는 어떤가. 양당 극성 지지자들의 발언과 행동을 보면 “저쪽을 몽땅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수준에 가깝다. 과연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조화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일까. 정치적 갈등, 사회적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한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안정적 발전은 더는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어떻게든 인위적으로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내야 옳지 않을까. 제3의 정당이 생겨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물꼬를 터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처방의 출발점이다.
정치제도가 승자독식이고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승자독식의 마인드가 횡행하고 양극화의 갈등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한 잠복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계발과 노력의 동인이 된 때도 있었다. 요즘처럼 SNS를 통해 서로의 삶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대에는 소외감과 허영심을 동시에 촉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정치가 승자독식이고, 경제마저 ‘이긴 사람이 다 가져가는 것이 뭐가 어때서?’라는 그릇된 능력주의와 결합하다 보니 사회 갈등은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뇌관이 됐다.
한국의 ‘갈등 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위로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라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회적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정치제도 변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럴까. 상당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승자독식의 사회 시스템, 제왕적 대통령 제도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계급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음모론일까.
더불어민주당 출신 금태섭(왼쪽) 전 의원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7월 3일 신당 준비 모임 단체 명칭을 ‘새로운 정당 준비위원회(새로운당)’로 확정했다. 4월 18일 금 전 의원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 포럼’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여론 지형과 다른 의석 배분
제3정당, 제3의 정치세력이 탄생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선거제도를 개혁하면서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고 정치적 대표성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소수 정당 정치인들에게 의원 배지 몇 개 더 달아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정치가 조화롭고 다양해야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면 우리도 제도를 그렇게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서로 계속 물어뜯고 싸우면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이 좋다면 현상을 유지하면 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변화의 기회가 있었다. 2020년 4월 실시된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랬다.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애매한 이름을 달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때의 선거제도는 정당의 비례성을 높여 소수 정당이 원내에 더욱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문호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물론, 알다시피,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이라는 세상 부끄러운 꼼수를 부리면서 물거품이 됐지만.
당시 선거제도가 원래 취지대로 운영됐더라면, 즉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정의당·국민의당·무소속 등은 30석 정도를 확보했을 것으로 계산된다. 실제로는 원내 14석에 그쳤는데, 30석과 14석의 차이는 크다. 원내교섭단체 구성 여부가 달려 있기도 하고, 45%대 45%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치 구도에서 10% 정도의 의석은 정치적 ‘중심’을 좌우할 수 있는 소중한 의석이기 때문이다.
차제에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비례대표제도를 싫어하는 여론 또한 유난히 많은데,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속된 말로 ‘거저먹은’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인 듯하다. 그런 시각이 전혀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역 선거의 폐단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국회의원의 비례성을 높이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정상적 정치의 발전 방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알 만큼 알고 있을 정치인이 “비례대표 숫자를 축소해 국회의원 정수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포퓰리스트와 다르지 않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용어가 다소 복잡하고 생경하게 느껴지겠지만 취지는 간단하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국민의힘이 35%, 민주당이 35%, 기타 정당 및 무당층이 30% 하는 식으로 항상 결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그러한 여론 지형과는 다르게 의석이 배분돼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수정당과 민주당이 거의 95%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국민 70% 지지율을 갖고 의석은 95%를 가져가는 지극히 ‘불공정한’ 결과를 낳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를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공정하게 맞춰보자는 뜻이다.
시선을 옮겨보자.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얻은 정당 득표율은 40% 정도였다(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을 합친 득표율). 그런데 당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가져간 지역구 의석은 103석으로 수도권 전체 121석 가운데 85%에 달한다. 그러니까 40% 정도 민심으로 그 곱절인 85% 의석을 가져간 것이다. 이 또한 과연 공정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민심을 제대로 반영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도권에서 다른 정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란 60%의 마음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그러한 불공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 국민의 마음을 보상해 주자는 뜻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단순히 제3정당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뜻만은 아니다. 민심과 의석의 배분이 왜곡되는 현상을 어떻게든 보정하자는 취지이고, 세계적으로도 ‘정치의 상식’처럼 그런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만 가장 단순한 형태로 ‘이긴 자가 다 갖는’ 선거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 승자독식의 분위기가 만연하는 것이다.
또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원래 우리나라는 총선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획정하도록 돼 있다. 내년 4월 10일 총선이 열리니 올해 4월 10일까지는 결정돼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선거구 협상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국민에게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꼴이다. 아마도 그냥 어영부영 지내다가, 선거가 임박해서야 양당이 이리저리 정치적 계산을 주고받으며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기형적이고 불공평한 선거구 획정)을 할 것이다.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도 국회 전원위원회를 열어 결정하겠다고 했으면서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것도 아마 어영부영 버티다가, 선거가 임박해서야 “예전 식으로”를 외쳐댈 것이라고 예상한다. 20대 총선까지 사용했던, 과거의 병립형 비례대표 선출 방식으로 되돌아가자고 말할 확률이 높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해봤더니 위성정당이 생겨나고 안 좋았잖아”라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 않을까. 결국 여론 지지율 70%를 얻는 거대 양당이 국회 300석 전부를 사이좋게 나눠 갖는 적대적 공생과 ‘이익 카르텔’의 결과가 나타날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나라인가.
위성정당이 우려된다면 지금 300명 국회의원 전원이 ‘위성정당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면 된다. 위성정당을 설립하는 데 조금이라도 가담하거나 동조하면 의원직을 내려놓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놓으면 된다. 그것이 헌법상 보장된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괴이한 약속을 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지 않을까.
모쪼록 선거제도 개혁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정치에 다양성의 무지개가 활짝 펼쳐지길 기대한다.
※ 만 4년 9개월 동안 연재하던 ‘봉달호 편의점 칼럼’을 일신상 이유로 잠시 중단합니다. 편의점 점주에게 소중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월간 ‘신동아’, 한없이 부족한 원고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