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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진의 최면법 VS 강초현의 명상법

윤미진의 최면법 VS 강초현의 명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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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미진과 강초현은 시드니 올림픽을 통해 깜짝스타로 떠올랐다. 그들이 어려운 집안환경을 이겨내고 메달을 따냈기에 감동의 깊이는 더했다. ‘비실이’ 윤미진과 ‘깜찍이’ 강초현. 두 선수는 오랜 정신집중 훈련으로 오늘의 영광을 안았다. 윤미진은 자기 최면과 반복훈련을 통해 자동화된 몸을 만들었고, 강초현은 명상으로 마음상태를 조절하게 됐다.
양 궁 선수 윤미진(17·경기체고2)과 사격 선수 강초현(18·유성여고3)은 여러 모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여고생이며 얼마 전 끝난 제27회 시드니올림픽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다. 윤미진은 여자 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쓸었고, 강초현은 여자 공기소총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의 인기는 시들지 않고 있다. CF가 밀려드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팬카페가 줄줄이 문을 열었다.

두 선수의 종목이 갖는 연관성도 빼놓을 수 없다. 사격과 양궁은 똑같이 도구를 활용해 목표물을 맞히는 기록 경기다. 점수로 우열을 가리지만, 내용상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기소총은 실내, 양궁은 실외 경기라는 점이다. 사격과 양궁은 선수의 집중력이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이런 까닭에 두 종목은 올림픽에서 가장 상품화가 덜 된 종목으로 꼽힌다.

■ 겁없는 10대 궁사 윤미진

9월19일 오후 시드니 올림픽파크 양궁장. 한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여궁사들이 첫 번째 금메달에 도전하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김수녕의 준결승 상대는 10대 소녀 윤미진. 잘 알려진 것처럼 김수녕은 위기에 더욱 강한 승부사다. 반면 윤미진은 도무지 속셈을 알아차릴 수 없는 ‘포커페이스의 달인’. 불꽃튀는 레이스는 김수녕의 우세로 굳어지는 듯했다. 마지막 2발을 남겨놓고 108 대 107. 김수녕이 앞섰다.

하지만 이 순간 윤미진의 11번째 화살이 골드 과녁을 꿰뚫었다. 김수녕이 움찔하면서 8점을 쏴 117 대 116으로 역전. 윤미진은 틈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화살을 10점으로 장식했다. ‘신궁’ 김수녕은 역전의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결승 문턱에서 물러섰다. 윤미진은 상승세를 몰아 김남순과의 결승에서도 1점차 리드를 끝까지 지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양궁인들은 윤미진의 포커페이스를 지적한다. 불과 1년 전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윤미진이 세계선수권보다 더 어렵다는 국내선발전을 당당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포커페이스’ 덕분이다.

양궁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필요로 한다. 양궁 경기는 야외에서 열리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잘 나가던 선수도 허공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주저앉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양궁 선수는 최후의 한 발까지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윤미진의 일과는 빈틈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자투리 시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체력훈련과 휴식, 독서와 이미지트레이닝이 계속된다. 이 가운데 이미지트레이닝은 윤미진이 가장 신경을 쓰는 훈련. 이미지트레이닝의 감이 좋으냐에 따라 그날의 컨디션이 결정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활쏘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일이 시합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해요. 그냥 상상하는 거예요. ‘나는 선수 대기석에 앉아 있다. 내 이름이 나오고 활을 들고 나간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멀리 과녁이 보인다. 노란색이 크게 보인다.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긴다. 지금이다 싶은 순간 화살을 날린다. 10점에 명중했다. 과녁을 보고 다음 화살을 준비한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눈만 감으면 경기장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와요.”

일반적으로 양궁 선수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활 시위를 당길 때는 관중들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예의로 돼 있다. 하지만 윤미진은 정반대다. TV 카메라가 비치고 전광판에 점수가 올라가고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면 더 신이 난다는 것. 그래서 관중도 없이 수개월간 펼쳐졌던 국내평가전이 올림픽보다도 힘들었다고 한다.

포커페이스가 최고의 장점

하지만 윤미진은 역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다. 처음에 쏜 몇발의 화살이 중심에서 빗나가면 바로잡기가 무척 힘들단다. 그래서 초반 분위기를 잡는 데 애를 쓴다고. 일단 사선에 서면 입을 다무는 것이 윤미진의 철칙. 말문을 닫으면 저절로 표정이 무거워지고 행동도 얌전해진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선배들을 물리친 ‘포커페이스’의 바탕이었던 모양이다.

윤미진은 자신을 지도해준 선생님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는 스타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인연을 맺은 조은신 코치와 현재 경기체고 감독을 맡고 있는 임인택 감독의 말이라면 어떻게든 지키려고 애를 쓴다. 임감독은 윤미진의 이러한 성격을 감안해 생활패턴을 조절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1주일 정도 풀어주면 마음이 틀어져버려요. 그래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평상심을 잃지 않도록 잔소리를 하게 되죠. ‘활을 잡으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고치지 마라. 외출해서 PC방에 가지 말아라’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그대로 완벽하게 따라줄 아이들이 아니지만, 감독은 그렇게라도 해서 선수들의 마음을 잡을 수밖에 없어요. 한 1주일쯤 지나버리면 평상심을 되찾기가 아주 힘들어요. 그래서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을 시키는 거죠.”

윤미진 선수는 사생활도 없이 훈련에만 매달리는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윤미진은 “외출하면 언니들과 옷도 고르고 액세서리도 사모은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합이 가까이 오면 그마저도 중단한다고. 임감독의 말처럼 양궁만을 생각하고 다른 것은 철저하게 잊어버린다고 한다. 실제로 윤미진은 시드니에서 귀국한 뒤 집에도 들르지 않고 전국체전 준비에 들어갔다.

시드니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호주의 언론들은 한국 양궁을 시샘하는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한국의 여자 선수들은 로봇과 같다는 비판이었다. 실제로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측면도 있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담력을 기르기 위해 공동묘지를 찾고 새벽에 일어나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무작정 걷기도 한다. 하루에 쏘는 화살만도 800발에서 1000발. 대부분 클럽에서 취미로 양궁을 즐기는 서양 사람들의 눈으로는 이상하게 보일 만도 하다.

“항상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이 쏘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최면을 걸어요. 자세가 달라지면 안 되거든요. 내 몸이 기계처럼 자동화되는 거예요. 오랫동안 꾸준히 연습하면 그렇게 돼요. 하지만 저도 아직까지 완벽하게 조절하지는 못해요. 흔들릴 때도 있거든요.”

윤미진은 목표의식이 강한 선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강한 승부욕을 보여왔다. 이미지트레이닝을 마치고 나면 “나는 할 수 있다”는 말로 최면을 건다. 윤미진은 지나간 일을 잊어버리는 속도도 대단히 빠르다. 이런 자세는 국가대표 선발전이나 올림픽 같은 큰 경기에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

“솔직히 아무런 부담이 없잖아요. 저는 대표팀에서 막내예요. 주변에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냥 내 실력대로 열심히 쏘면 됐어요.”

수원 송정초등학교 4학년때 “양궁부 친구와 함께 하교하고 싶다”며 처음 활을 잡았던 윤미진. 그는 지금껏 딱 한번 양궁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때 양궁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후배들과 팀을 떠났던 것. 그는 이때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했다고 한다.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슬럼프가 왔어요. 후보로 밀리고 보니까 만사가 다 귀찮아졌어요. 팀에 복귀해서 모든 것을 잊고 연습에만 매달리다 보니까 극복이 되더라구요. 중3때 소년체전을 우승하면서 ‘하면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어요.”

운동선수들의 영원한 고민 중의 하나가 공부와 친구에 대한 미련이다. 윤미진 역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한다. 하지만 양궁 선수로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에 학업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에서 가장 하고 싶은 공부는 영어. 멋진 옷을 입고 쇼핑을 즐기고 싶은 욕심도 그때까지 접어둘 작정이다.

윤미진은 벌써 올림픽 금메달의 환희를 잊은 듯했다. 그의 관심은 올림픽이 아니라 코앞으로 다가선 전국체전이었다. 올림픽 챔피언의 자존심보다는 모교의 우승을 위해 기여하고 싶단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여자로서 멋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없어요?”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꾹 참고 있어요. 대학에 가면 저도 꾸미고 다닐 거예요. 지금은 자제하고 있어요.” 윤미진 선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감독이 거들었다. “얼굴을 꾸미고 다니면 어디 양궁이 되나요? 생각이 많아지면 기록이 나올 수가 없어요.”

9월 16일 오전 시드니 세실파크 올림픽 사격경기장. 한국의 강초현이 예선 1위로 여자 공기소총 결승에 진출했다. 아침 일찍부터 경기장에 몰려든 교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여갑순 신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2위 낸시 존슨(미국)과는 2점차. 강초현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우승은 무난해보였다.

하지만 낸시 존슨이 무섭게 따라붙었다. 한 발을 남겨놓고 동점. 마지막 한 발로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존슨이 먼저 쐈다. 전광판에 9.9가 찍혔다. 강초현이 10점(결승은 10.9 만점으로 진행된다)만 맞히면 금메달이었다. 하지만 강초현은 흔들리는 기색이 뚜렷했다. 조준을 하다가 총을 내리고 만 것이다. 마침내 강초현이 방아쇠를 당겼다. 9.7이었다. 다 잡았던 금메달이 날아간 것이다.

사격 선수들은 대개 타이밍을 놓치거나 정조준이 안 됐을 경우 총을 거둔다. 이렇게 되면 75초 제한시간에 몰리고 호흡도 불안해진다. 강초현이 마지막에 쏜 9.7은 결승 10발 중 두 번째로 낮은 점수였다.

사격 선수에게는 정신집중력, 결단력, 담력 등이 요구된다. 전방의 표적을 응시한 채 숨을 멈추고 몸의 미세한 리듬을 느끼면서 격발 순간을 기다린다. 몸의 흐름이 완전한 상태에 이른 순간 방아쇠를 당겨야만 적중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사격을 테크닉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몸의 기운을 한곳에 집중시키지 못하면 명사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윤미진이 말하는 정신집중법]

“목표를 정하고 최면을 걸어라”

윤미진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목표가 정해져야만 최면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최면은 자신감에서 출발한다. 다른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목표에만 매달린다.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쉬는 것이 상책이다. 사우나를 하면서 몸을 추스리는 것도 좋다. 훈련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해야 한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 연습할 때는 항상 긴장하고 시합에 들어가면 푹 빠진다.

● 사선에 들어가면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

●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 꾸준한 연습으로 몸이 기계처럼 움직여야 한다.

● 일을 시작하기 전에 확실한 목표를 세운다.

● 목표가 정해지면 끊임없이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건다.

● 시합 때는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야 한다.

● 훈련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명절 날도 훈련은 계속된다.

● 시합이 끝나면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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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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