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운동선수의 성생활은 ‘보약’인가? 아니면 ‘독약’인가? 스포츠계의 오랜 논쟁거리인 이 주제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릴 뿐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건 체력 저하 등을 이유로 무조건 금욕을 요구했던 우리나라 스포츠계에서도 언제부턴가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묶어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쪽으로 흐름이 뒤바뀐 셈이다. 때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풀어주는 것’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외국 연구기관의 발표가 잇따라 나오면서 ‘성생활의 자유’를 부르짖는 선수도 많아졌다. 운동선수와 섹스,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조심스럽게 접근해봤다.
마라톤과 섹스 논쟁
이탈리아 라킬라대학 엠마누엘 안닌 교수는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과학 잡지인 ‘뉴사이언티스트 매거진’에 ‘운동선수의 성생활이 경기력 향상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성관계시 발생하는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선수의 심리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이것이 경기 도중 공격적인 성향을 이끌어내면서 ‘보약’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이다. 80여명을 임상 조사한 결과, 테스토스테론은 의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안닌 교수는 보고서 말미에 “적극적인 삶을 원한다면 섹스를 즐기라”는 충고까지 곁들였다.
최근 영국에서는 섹스가 마라톤 선수의 기록 단축에 도움이 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더타임스’에 따르면 1999년 런던 마라톤 마스터스대회에 참가한 일반인 2000명 중 상당수가 ‘섹스가 기록 단축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고 한다. 경기 전날 섹스를 한 선수들은 평균 3시간 51분에 완주한 반면 섹스를 하지 않은 선수들은 평균 3시간 56분에 풀코스를 주파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마스터스대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마라톤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로코 출신의 마라토너 칼리드 칸노우치와 그의 부인 겸 코치 산드라는 경기 전 최소 5일 동안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칼리드 칸노우치는 지난해 시카코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5분 32초의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다(마라톤은 코스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신기록’ 대신 ‘최고기록’이라는 용어를 쓴다).
우리나라는 운동과 성생활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은 이채로운 보고서를 제출했다. 제목은 ‘과학적 컨디션 조절을 위한 10가지 항목’이었는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이 섹스와 관련된 항목이다. 대표팀 합숙생활 동안 숙소에 여자 친구나 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 대회 기간 중 선수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몸단속’에 신경을 써달라고 코칭스태프한테 특별 주문한 내용이었다.
즉 경기 시작 48시간 전부터는 선수들이 자위 행위를 포함한 섹스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당시 월드컵지원팀장이면서 이 보고서를 담당했던 신동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기 전 성생활이 좋다, 나쁘다 판명된 과학적 이론은 없다. 단지 체력 소모가 심한 운동선수들한테는 과도한 섹스가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섹스 파트너가 아내라면 문제가 없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심한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이거나 결혼하지 않은 총각 선수들한테 있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으로 성생활을 즐기기 때문에 다음날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다.”
월드컵대표팀에 내린 금욕령
신박사가 굳이 48시간이라는 단서 조항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20대는 24시간 안에 정자가 완전히 재생되고 30대는 30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차를 뛰어넘을 수 있는 평균적 재생능력이 48시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경기 전 성생활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필자는 결혼한 선수 20명에게 경기 전날의 성생활이 다음날 운동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문 조사했다. 프로야구 10명, 프로축구 6명, 프로농구 4명 등 총 20명을 개별 인터뷰한 결과 13명(65%)의 선수들이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프로야구 선수를 포지션별로 보면 타자 쪽이 경기 전날의 섹스에 대해 더 긍정적이었다. 타자들은 경기 전날의 가벼운 성생활이 오히려 생활에 활력소가 된다는 반응. 실제로 H구단의 S선수는 98시즌까지 시즌 중 금욕을 철저히 지켰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S선수는 99시즌부터 시즌과 상관없이 아내와 ‘합방’했는데 방망이가 무섭게 폭발해 올시즌 한때 홈런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성생활의 횟수에 대해선 일주일에 2∼3회가 11명(55%)으로 가장 많았다. 일주일에 1회가 5명, 2주일에 1∼2회가 3명 등으로 나타났다. 이 대답은 시즌 기간을 단서로 한 경우다. 일반적으로 프로 선수들은 비시즌 기간에 집중적으로 성생활을 즐긴다. 이런 까닭에 프로 선수의 아내는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주로 겨울철에 자녀의 돌잔치를 치르는 것이다.
현재 J리그에서 활동중인 축구선수 Y는 경기 전날에는 절대로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90분을 풀타임으로 뛰는 축구선수한테 하체의 힘은 대단히 중요한데 성관계 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낀 다음부터 자제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부천 SK의 K선수도 경기 전날의 성생활을 반대하는 입장. 이유는 Y선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골키퍼 K선수는 운동과 성생활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결혼 초만 해도 성에 대한 통제 불능으로 운동 생활에 지장을 받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이오리듬이 안정을 찾고 부부 관계가 일종의 ‘생활’로 자리잡으면서 중요한 활력소가 되었다고 한다. K선수는 한술 더 떠 오랜 원정 경기나 합숙 훈련 때 부인과 ‘합방’하는 걸 허락해 주길 희망했다. 프로축구 대전 시티즌의 S선수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선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코칭스태프의 사고는 20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기혼자들한테 오랜 합숙생활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만약 내가 감독이 된다면 아내가 숙소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혼자들에게 미혼자들과 분리된 별도의 숙소를 제공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로야구 투수 J선수도 경기 전날의 성관계가 경기력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몸이 좋지 않을 때 무리한 성생활만 하지 않는다면 큰 지장이 없는 것 같다. 몇몇 총각 선수들이 호기심에 여자를 만나 새벽까지 놀다가 경기를 그르치는 경우를 보긴 했지만 기혼자들의 평범한 섹스라이프는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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