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줌 인

“중국에서 오라했지만 ‘봉동 이장’ 그만두기 쉽지 않아”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

  • 이영미|스포츠전문가

    입력2017-12-03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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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전북 현대의 프로축구리그 우승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지난해 불거진 심판매수 사건으로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이 박탈되는 등 내우외환을 이겨내고 얻은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최강희 감독이 있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전북 현대 최강희(58) 감독의 2017시즌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다.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2017’ 우승컵을 품에 안기까지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불거진 심판 매수 사건으로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이 박탈됐고 선수들의 동기부여가 떨어지면서 선수단은 휘청거렸다. 더욱이 사건에 연루된 스카우터의 자살은 최강희 감독에게 표현 못 할 슬픔을 안겼다. 선수단 전체가 위기에 직면했지만 리그는 계속됐고, 최 감독과 전북 현대 선수들은 경기를 하면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전북의 우승이 더욱 값진 것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우승을 확정 지은 10월 29일 제주와의 홈경기에서 이동국이 200호 골을 터트리며 3-0을 만드는 순간, 최 감독은 두 팔을 활짝 벌려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자신이 K리그 최단 기간 200승을 달성했을 때보다 이동국의 200호 골이 훨씬 행복했다고 말한다.

    2005년 전북의 지휘봉을 잡은 후 다섯 차례(2009년,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 K리그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으며 역대 최다 우승 감독이 된 최강희 감독. 한 팀에서 200승을 달성한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2012년 대표팀 사령탑에 취임했다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만 확정시키고 홍명보 감독에게 넘긴 채 전북 현대로 돌아온 그는 ‘닥공(닥치고 공격)’을 앞세운 전술로 K리그를 초토화했다. 영원한 ‘봉동 이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북 현대의 살아 있는 역사로 자리매김한 그와 11월 6일, 서울 강남의 한 공원에서 만났다. 낙엽이 가득 쌓인 공원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였다.


    우승앓이

    ▼ 먼저 우승을 축하한다. 우승 직후 앓아누웠다던데.
    “그동안 쌓인 게 한꺼번에 온 것 같다. 심한 몸살에 걸려 며칠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오늘 처음 외출한 것이다. 휴식을 취해서인지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 그만큼 올 시즌 힘든 여정을 이어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승 직후 코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까지 나한테 ‘운칠기삼’이 아닌 ‘운팔기이’가 있는 것 같다고. 우승의 운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다. 도저히 회복 불능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선수들이 날 끌고 온 것 같다.”



    ▼ 최근 부산 아이파크 조진호 감독이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큰 충격을 줬다. 그 일로 인해 승부의 세계에 놓인 지도자들의 스트레스, 건강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운동 지도자들이 일반인보다 평균수명이 짧다고 들었다. 홈경기에서 0-2로 끌려가다 상대가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면 망치로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온다. 한마디로 망연자실이다. 감독의 구상대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풀어내면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되면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90분 동안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난 어느 순간부터 그런 스트레스에선 벗어났다. 골이 들어가든, 실패하든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도 상황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전북 현대는 2009년 이후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그렇다 보니 우승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홈에서 1패라도 하게 되면 상대 팀은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세리머니를 펼치고 우린 우승을 놓친 것처럼 초상집이 된다. 팀 성적의 기대치가 높다 보니 패배 후유증도 크다. 과거엔 지는 게 익숙했던 팀이 지금은 이기는 게 익숙한 팀으로 바뀐 것이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주어졌다. 경기에서 패하면 소주로 쓰린 속을 달랬고 다음 날 숙취를 이기려 두통약을 먹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 내가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내 모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건강을 위해 두통약을 끊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집중했다.

    경기에 패했다고 선수들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순간 모든 걸 잊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고 말했다. 나 또한 숙소에 들어가면 경기 비디오를 보지 않는다. 코미디 프로그램,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켜놓고 TV에 내 정신을 맡긴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 날 다시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 정신으로 돌아온다. 지난 경기에 집착하고 선수를 탓하면 팀이 더 어려워진다는 걸 선수 시절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전북에서 팀을 이끄는 동안은 일절 탓하지 않고 지난 일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3개월 정도 지난 다음, 선수의 마음이 정리됐다고 생각했을 때 얘기한다.”

    ▼ 축구계에선 전북 현대만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팬들이 만든 경기장 문화가 있다. 전북 전주는 울산, 포항, 수원, 서울처럼 명문 축구 도시가 아니었다. 워낙 지는 게 익숙했던 곳이라 고정 팬도 많지 않았다. 그런 전주 월드컵경기장을 팬들이 찾기 시작했다. 많은 팬이 연간 회원권을 끊었고, 경기장에 자기 이름이 새겨진 고정석을 갖게 됐다. 우리 팀이 성적을 내면서 팬들도 신바람을 냈고, 그 팬들은 전북 현대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한국은 물론 외국까지 따라와서 응원을 펼친다. 감독으로선 그런 팬들이 눈물나게 고맙다. 팬보다는 그냥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든 전북 현대만의 문화에 선수들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이동국, 에두, 김신욱

    ▼ 올 시즌 전북 현대는 넘쳐나는 공격수들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토종 베테랑 스트라이커 이동국, 브라질 특급 에두, 장신 골게터 김신욱 등 쟁쟁한 자원이 포진했는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출전이 징계로 좌절됐고 FA컵은 32강에서 부천FC 1995에 덜미를 잡혀 K리그 클래식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 때문에 선수들에게 안정적인 출전 시간을 보장하지 못해 항상 미안해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한번은 에두가 찾아왔다. 자신은 가족들이 평생 먹고살 돈도 벌었고 올 시즌 마치면 은퇴할 예정이니 제발 경기에 좀 내보내달라고 했다. 너무 간절히 말하기에 전남 원정 때부터 에두를 선발 명단에 포함했다. 그 경기에서 2골을 넣고 3-0으로 이겼다. 이후 3게임 연속 골을 터트렸다. 다음이 FC서울 원정이다. FC서울의 천적이 김신욱이었다. 김신욱이 들어가야 하는 경기라 에두를 빼려니 머리가 아프더라. 경기 종료 15분을 남겨놓고 에두를 투입했는데 결국 경기에서 패했고, 에두의 연속 골 행진도 멈춰버렸다.

    그런 상황이 감독으로선 가장 속상하다. 시즌 중 선발 명단 발표를 앞두고 미팅할 때마다 이동국, 에두, 김신욱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저마다 뛰어야 하는 사연이 있는 선수인데 모두 한 경기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괴롭기만 했다. 광주FC와의 홈경기 전날, 코치가 헐레벌떡 뛰어와 에두가 경고 누적으로 뛸 수 없다고 하더라. 감독이라면 크게 난감했어야 할 소식인데 난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이동국, 김신욱을 뛰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행복한 고민 운운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는지….”

    감독과 선수 사이 이상

    200호 골이 걸려 있는 이동국,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김신욱, 현역 마지막 시즌을 보내는 에두를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던 감독의 고민이 그대로 전달돼왔다. 그는 선수가 골 넣었다고 두 팔 벌려 그라운드로 뛰쳐나간 건 이동국의 200호 골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출전 기회를 많이 주지 못한 최 감독의 미안한 마음이 세리머니에 담겨 있었으리라.

    최 감독과 이동국은 단순한 감독과 선수 사이 이상이다. 자신을 믿고 전북 유니폼을 입은 이동국을 위해 최 감독은 이해와 배려로 포용했고, 그런 감독을 위해 이동국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축구와 아버지로 자리를 잡아갔다. 만약 이동국이 전북 현대로 오지 않았다면 아이들과 KBS-TV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찍을 수 있었을까.


    성공한 지도자의 리더십

    10월 29일 제주 UTD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KEB하나은행 2017 K리그 클래식’ 우승을 확정 지은 전북 현대 선수들이 경기 후 시상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DB]

    10월 29일 제주 UTD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KEB하나은행 2017 K리그 클래식’ 우승을 확정 지은 전북 현대 선수들이 경기 후 시상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DB]

    ▼ 우승 직후 가장 고마운 선수로 이동국 선수를 꼽았다.
    “지난 8월경 이동국을 불러 재계약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동국이가 출전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심적으로 흔들렸던 모양이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외국에서 1,2년 더 뛰고 은퇴할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넌 다른 팀 가서 은퇴하면 안 돼. 선수 생활은 전북에서 마무리해야 해. 그 마무리, 내가 해줄게’라고 말했다. 전북 유니폼이 100장 팔린다고 하면 그중 80장은 이동국 유니폼이다. 관중 중에서도 이동국 팬들이 절대 다수다. 전북 현대에서 선수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이동국을 달래면서 구단도 설득했다. 구단과는 내년 재계약까지는 합의했고, 세부 사항은 좀 더 진행돼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200호 골을 성공시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구단도 이 부분을 인정하고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 좋아하는 책 대부분이 리더십 관련 내용이더라. 프리미어리그의 퍼거슨, 뱅거, 무리뉴 감독의 자서전과 김성근 감독의 책도 읽었다고 하던데.
    “잘나가는 조직은 공통점이 있다. 내가 아닌 우리가 우선이다. 선발로 나가지 못한다고 뒤에서 욕하는 선수도 없다. 필드에 있든 벤치에 앉아 있든 팀을 먼저 생각하는 선수들이 많다면 그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다. 우리 팀이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흔히 성공한 지도자를 향해 전술과 전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축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게끔 분위기를 조성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선수의 단점을 고치려는 지도자와 장점을 극대화하는 지도자가 있는데 난 후자 쪽이다. 선수들은 1년에 한두 번 나랑 면담 하는데 지적보다는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해주는 편이다. 대신 칭찬에는 인색하다.”

    ▼ 왜 칭찬에 인색한가.
    “칭찬을 한 번 하면 두 번 해야 하고, 세 번 다음은 립서비스가 될 수밖에 없다. 성취욕이 있는 선수는 스스로 자기 몫을 만들어낸다. 처음 지도자 생활할 때는 칭찬과 채찍을 이용했지만 지도자는 선수를 믿고 뒤에서 기다려주면 선수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됐다. 지도자는 한없이 부드러워도 안 되고, 한없이 강해서도 안 된다. 적당한 선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진 않다.”

    봉동 이장

    최강희 감독은 “지도자는 한없이 부드러워도 안 되고 한없이 강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조영철 기자]

    최강희 감독은 “지도자는 한없이 부드러워도 안 되고 한없이 강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조영철 기자]

    최 감독은 경기나 훈련을 마친 선수들 생활은 최대한 자율에 맡겼다고 한다. 코치들로부터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지도 않는다. 그가 보는 건 오로지 훈련 모습이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왔어도, 설령 아침에 들어왔다고 해도 훈련할 때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는 선수에게 출전 기회를 준다. 그게 프로란 생각 때문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규칙을 지켜야 하고, 규칙을 잘 지켜야 자율이 주어진다는 걸 선수들이 깨닫게 하는 것, 최 감독의 지도 철학이다.

    ▼ 중국 슈퍼리그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걸로 알려졌다.
    “3팀에서 구체적인 제안이 왔었다.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언제까지 ‘봉동 이장’으로 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건이 맞는다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이었다.”


    심판 매수 사건

    ▼ 조건이 맞는다는 게.
    “중국으로 가는 이유는 돈 말고는 없다. 워낙 큰 금액으로 제안을 해오니까 흔들릴 수밖에 없더라. 그러다 작년 심판 매수 사건이 터졌다. 그 상황에서 중국으로 떠났다면 배신자, 도망자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가 있을 때 일어난 사고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문제다. 더욱이 날 믿고 우리 팀에 온 선수가 많은데 그들을 놓고 간다면 나중에 한국에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작년을 넘겼고, 올해는 사드 덕분에 비켜갈 수 있었다. 작년과 올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와 봉동의 인연에 대해. 난 봉동(전북 현대 클럽하우스가 있는 곳) 체질인 것 같다. 봉동과 특별한 인연이기 때문에 그 숱한 위기 속에서도 이곳에 남아 있는 것 아니겠나. 전북 현대를 처음 맡았을 때는 익산 봉동 톨게이트를 보면 너무 낯설었는데 지금은 톨게이트가 보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동네 사우나를 가면 날 보는 사람마다 ‘이장님 오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전북과 인연을 맺으면서 봉동은 또 다른 고향이 돼버렸다.”

    ▼ 지난 9월 20일 상주 상무전에서 1-2 역전패를 당한 후 ‘200승을 달성하고 (우승)윤곽이 드러난 뒤 말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올 시즌 후 내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승패에 초연한 감독은 감독 자격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승패에 초연해졌다. 나랑 가까웠던 사람이(스카우터) 목숨을 끊었고 난 계속 운동장 나와서 선수들을 가르쳐야 하고,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방황할수록 선수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계속 남아 있다간 팀도, 나도 망가질 것 같더라. 그래서 감독 통산 200승 달성하는 날, 올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하려 했었다. 상대가 상주 상무였고, 홈경기라 승리를 챙길 거라 예상했는데 역전패를 당하면서 꼬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 마음까지 감출 수가 없었다. 사퇴라는 단어만 언급하지 않았을 뿐 거의 분위기를 전한 상황이었다. 가족들, 구단과 상의한 내용이 아니었다. 상의하면 만류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혼자 결심했고 실행에 옮긴 건데 결국 뜻대로 되진 못했다. 가끔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불행할 때도 있다.”

    지난 6월 16일, 심판 매수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북 현대 스카우터 A 씨가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숨을 거두기 이틀 전 최강희 감독을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 감독도 조사를 받아야 했다. A 씨가 심판 매수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전북은 승점 9점이 삭감됐고 제재금 1억 원의 징계를 받았다. 승점 감점으로 전북은 K리그 우승 3연패 도전에 실패했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까지 박탈당했다. 최 감독이 느꼈을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되는 부분이다.



    ‘꼴통’ 최강희

    ▼ 그 일로 인해 무수한 억측이 떠돌기도 했다.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건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한 달 동안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었다. 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만두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감독직에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상주 상무전을 앞두고 결심을 굳힌 것인데, 인터뷰 후 구단에선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형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이겨내라고. 버티라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금세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가라앉는 게 인생살이라면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잘 버티고 이겨내서 유족들도 챙기고, 더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 최강희 하면 ‘비주류의 성공 신화’가 떠오른다. 고졸 출신으로 코치 생활부터 시작해 프로팀 감독, 대표팀 코치, 감독, 그리고 12년 동안 잘리지 않고 한 팀을 이끌며 K리그 5회 우승을 일궈낸 부분 등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것 같다.
    “3형제 중 막내인 난 형들과 달리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낸 문제아였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58명 중 57등 한 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내가 뒤늦게 축구에 푹 빠졌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셨다. 공부 잘하는 형들처럼 나도 공부만 하길 원하신 것이다. 아버지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그때 아버지가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축구를 허락하겠다며 한발 물러나셨다. 영어, 국어, 국사책을 달달 외웠다. 수학, 물상 등은 포기하고 체육, 미술 등 자신 있는 과목에 집중했다. 시험 결과 5등은 아니지만 7등으로 나왔다. 그 성적표를 들고 아버지께 무릎 꿇고 매달렸다. 그래서 뒤늦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경기도 양평이 고향인데 그곳에서 내 별명은 ‘꼴통’이었다. 지금은 사업하는 큰형, 대학교수인 둘째 형보다 내가 고향에서 더 인기다. 대표팀 감독이 됐을 때 마을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그때 내가 술 한잔하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한마디 했다. ‘최강희에게 꼴통이라고 말한 사람 다 나오라’고(웃음).”

    최강희 감독은 어릴 때부터 형들과 비교되는 삶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기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졸 출신이라고 열등감을 느낀 적도 없고, 누굴 부러워한 적도 없단다. 고교 졸업 후 곧장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형들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형들보다 먼저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내의를 사다드린 걸 자랑스러워한다. 자신이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상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인생의 연장전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인생을 축구 경기에 비유했을 때 지금 어느 지점을 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연장전이지. 연장전은 골든 골도 있고, 전후반 경기를 치르지 않나. 덤으로 얻은 기회인데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다. 전북 현대와 선수들, 그리고 팬들을 보고 남은 연장전을 치를 것이다. 그래서 그 연장전은 즐기고 싶다. 지금까지 승부의 세계에 나를 몰아넣고 괴롭혔다면 지금 하고 있는 연장전은 좀 더 여유롭게 풀어나갈 예정이다. 곧 봉동에 황토집 짓고 한증막도 만들어놓을 테니 그때 놀러 와라.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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