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학원 안 가도 공부 잘하고, 휴대폰 없어도 기죽지 않아요”

  • 글: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5-04-22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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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업에 실패한 가장(家長)에게 돈보다 더 심각한 고민거리는 자녀 문제다.
    • 널찍한 아파트에서 반지하 셋방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는 아이들의 얼굴부터 살핀다.
    • 내 실패가 혹 아이들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안다. 그들은 ‘성공은 뜨겁고, 실패는 차갑다’는 진리를 가슴으로 깨달으며 건강한 삶을 열어간다.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수재만 모인다는 과학고에서도 은아는 두각을 나타낸다. 은아의 꿈은 유전공학자다. 실력이 뛰어나 꿈은 이뤄질 것 같다. 은아의 별명은 ‘백만 볼트’. 양 볼이 전구 불빛처럼 발그레하다고 붙은 별명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살짝 미소짓는 얼굴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다. 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나이답지 않게 당차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은아는 맑고 당당했다. 어두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4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은아의 아버지는 벤처사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아파트에서 살던 은아네는 경기도의 허름한 반지하 전세방으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주말에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늠름하던 아버지의 어깨는 늘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은아에게도 ‘사는 게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스쳐갔을 것이다. 부모나 아이들이나 모두 힘든 시기였다.

    “아빠, 힘내세요∼”

    같은 또래인 은아와 준영이, 그리고 민주(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를 서울에서 만났다. 이들은 비트컴퓨터 조현정 회장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일요일 하루 시간을 내 서울에 올라왔다. 조현정 재단은 5년 전부터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아버지가 벤처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내고 집안이 어려워진 고등학생들에게 대학 4년간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조 회장도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쪽 귀마저 들리지 않는 악조건에서 이를 악물고 공부해 자수성가한 경영자다. 그는 역경이 청소년을 부쩍 자라게 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다. 조 회장은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실패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불편한 것을 쉽게 참아내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며 “성공이 얼마나 뜨거운지, 실패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아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날은 올해 벤처기업협회장을 맡은 조 회장으로서도 가슴 뿌듯한 날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벤처 기업가 아버지들이 겪은 실패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은아는 사업을 접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두 여동생과 반지하 셋방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을 아빠의 손에 쥐어드렸다. 전날 밤, 졸려서 하품을 하는 동생들을 다독여 함께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쓴 편지였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 할 일은 알아서 잘 할게요.”

    짧은 편지였지만, 아빠의 눈은 금방 빨갛게 변했다.

    집안 살림은 어려워졌지만 자신마저 초라해져서는 안 된다고 은아는 다짐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은아는 반 친구들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갑자기 이사를 오는 바람에 친하게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져 마음속에 담아둔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낯선 친구들에겐 아무래도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려웠다.

    학원에만 갈 수 있었어도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입학한 은아는 첫 시험에서 전교 3등을 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은아에게 반장을 맡으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급 반장과 전교회장을 도맡아 할 만큼 활발한 아이였다. 그러나 은아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후에는 한번도 학급 임원을 맡지 않았다. 임원을 하면 부모가 학교에 자주 와야 하고, 돈도 써야 한다. 은아는 어머니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학원에 갈 수 있는 처지도 못 됐다. 친구들은 학원을 두세 개씩 다니며 모자라는 공부를 보충했지만 은아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동생들도 그렇게 했다. 동생들은 은아만큼 공부를 잘하진 못한다. 집안이 어려워도 밝게 커온 동생들은 요리사와 미용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안정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도 은아는 동생들이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틈틈이 동생들의 공부를 봐준다.

    은아는 딱 한 번 아버지가 야속한 적이 있다. 그렇게 원하던 과학고에 진학했지만,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못해 첫 시험을 망쳤다. 처음으로 꼴찌라는 걸 해봤다. 학원에만 갈 수 있었어도 이렇게 창피한 점수는 받지 않았을 텐데. 벤처사업을 한다고 나섰던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나 은아는 꾸준히 성적을 끌어올려 전교 10등 안팎으로 뛰어올랐다. 선행학습이 꼭 고등학교 실력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빠를 미워한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용돈이 궁한 은아는 가끔 음식점 전단지를 돌렸다. 주변 아파트를 돌고 나면 몇천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친구들처럼 휴대폰을 갖고 싶었지만, 전단지 돌리고 받는 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겉모습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갖고 싶은 가방도 있고 신고 싶은 신발도 있을 것이다. “부러웠냐?”고 묻자 은아는 “잠시 부러웠지, 그 뒤엔 별로 갖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하며 씩 웃었다.

    아버지는 연구원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정보통신 분야의 벤처기업을 설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엄마 말에 따르면 “사람을 너무 믿은 게 탈”이라고 했다.

    “아빠는 사업가적인 꼼꼼함이 부족한 것 같아요. 냉정하질 못해요. 사업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한번 실패했으니까, 그래서 경험이 생겼으니까 다음엔 잘하실 거예요.”

    은아는 아빠가 반드시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일굴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곧 예전에 살던 곳으로 이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래도 은아는 아버지가 연구원 생활로 다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아빠가 안정적인 직장엘 다녀야 자기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실패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늦은 밤까지 뛰어다녀야 하기에 주말에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다. 또 막상 아버지를 대해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뭐든 훌훌 털어놨으면 좋겠는데 아버지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다.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유흥가 점령한 ‘실패 부모’ 아이들

    은아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아이들과 함께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보면서 채워줬다. 어머니와 딸 셋이 좁은 방에 앉아 성경책도 읽고 그날 일어난 일도 얘기했다.

    “힘들 때 엄마와 동생들이 함께 모여 얘기하면 마음이 좀 풀렸어요. 서로 대화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우리가 탈선을 하거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빠와 엄마가 더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대화하면서 알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은아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때처럼 잘살지는 못하지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게다가 가고 싶어한 과학고에 진학해 유전공학도의 꿈을 키울 수 있게 됐다.

    “어릴 때 필리핀에 선교활동을 하러 갔어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배가 볼록 튀어나왔어요. 아파서 그렇대요. 그때 불치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유전공학자로 성공하면 공익재단도 만들고 싶어요. 저처럼 한때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어요.”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한 해 폐업이나 휴업신고를 하는 벤처기업은 1700여 개에 달한다. 매월 150개의 벤처기업이 문을 닫는 셈이다. 중소기업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김대중 정부 때부터 벤처기업 지원책을 펴왔지만, 망한 기업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의 처지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특히 사회안전망이 탄탄하지 못한 한국에서 실패자가 겪어야 하는 좌절은 상상 이상이다.

    가장이 부도를 내고 식구들이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상황에선 누구보다 아이들이 큰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갈 곳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부모처럼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실제 최근 3~4년 동안 신용불량자가 급증하면서 유흥가는 신용불량자 자녀들이 드나드는 곳이 됐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범죄심리학)는 “밤 12시쯤 수원역에 가보면 술집과 유흥가를 점령한 것은 샐러리맨이 아니라 10대”라며 “대부분 부모가 빚을 지고 도망다니거나 사업에 실패해 자녀를 돌보지 못하는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성공만 찬양했지, 실패의 후유증에 대한 면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정부가 실패한 벤처기업가에게 신용불량자의 멍에를 벗겨주고, 빚 상환을 유예해주는 등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준다는 발상은 높이 살 만하다. 아쉬운 점은 사업가들에게만 재기의 기회를 주지 말고, 덩달아 고생하는 이들의 자녀에게도 관심을 갖는 ‘가족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는 무관심하지만, 아이들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낸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준영이가 그렇다. 준영이는 초등학교 때 삼풍백화점이 주저앉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것을 봤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만큼 어린 그에겐 충격적인 장면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전교 석차 5등 안에 드는 준영이의 꿈은 그래서 훌륭한 토목기사가 되는 것이다.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과도한 빚을 지거나 사업에 실패해 자녀를 돌보지 못한 집안의 아이들이 도심 유흥가를 점령하고 있다(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준영이에게 서울에 있는 회사 구경을 시켜줬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으리으리한 정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아버지가 사용하는 사무실은 넓고 멋있었지만, 준영이는 어머니의 걱정스런 눈빛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갑자기 사업 규모를 키우는 것에 못내 불안해 했다. 준영이도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벤처기업의 거품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꿈이 현실을 너무 앞섰는지, 아버지는 준영이가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무렵 사업에서 손을 뗐다. 어머니에게서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아버지는 대우그룹에서 일하셨어요. 김우중 회장님이 계시던 곳이잖아요. 대우가 힘들어지면서 아버지는 회장님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성급하게 일을 벌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의 과오는 아이들의 눈에도 여과 없이 비친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고, 재기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본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준영이도 그랬다. 아버지의 실패로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준영이의 꿈은 활짝 피기 시작했다.

    중학교에서 전교 50등을 맴돌던 그는 아버지의 실패를 보고 난 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학원비가 비싸지니까,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원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난관을 넘어서기로 결심한 덕분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반에서 1등, 전교에서 5등을 오르내리는 실력파가 됐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넓어지고 깊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나서서 반장을 맡았고, 간부 수련회에 가서는 회장 노릇을 자진해서 했다. 2학년에 올라와서는 선생님이 활달한 준영이에게 임시반장을 맡겼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숙제 공책을 걷을 때도 그는 친구들에게 걱정은 없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꼭 물어본다. 그만의 친구 사귀는 법이다.

    실패는 혼자 남는 것

    준영이는 “집안이 어려워졌다고 움츠러들긴 싫었다”며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사귀고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했다”고 했다. 조현정 재단의 장학금 수여식에서도 그는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간 선배들과도 어울리면서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니?” 하고 묻자 준영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패는 혼자 남는 것, 성공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죠.”

    아버지는 실패한 뒤에도 의연했지만, 웬만해선 바깥출입을 삼갔다. 만나던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다”며 성격이 활달한 아들을 격려했다. 잠시 뜻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삶을 보고 준영이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실패했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인맥을 쌓아야 해요. 성공했을 땐 실패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죠. 내가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실패했을 때는 풀 죽어 있지 말고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해요. 실패한 사람들끼리 만나봤자 더 외롭기만 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는 것

    인터뷰를 마칠 무렵 준영이는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성적표를 한 번이라도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준영이가 공부를 썩 잘해서 아버지는 지금껏 한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통해 슬쩍 성적표를 봤을 것이라고 짐작하긴 한다. 하지만 아들의 성적을 보고 미래 직업이나 계획에 대해, 그리고 준영이가 꿈꾸는 토목기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한마디해줬으면 하는 것이 아들의 바람이다. 실패는 그렇게 또 다른 성공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중에 탤런트를 해도 될 만큼 예쁘게 생긴 민주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닌다.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니 “경영인이 될까. 아니, 아저씨 같은 기자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야, 외교관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며 깔깔댔다. 민주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소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민주는 태국 방콕의 인터내셔널 스쿨을 다녔다. 그곳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방콕으로 갔다.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학교에 다닌 덕분에 민주는 세상을 보는 눈이 또래보다 넓다. 외교관이 되어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보고 다양한 사람을 사귀고 싶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경영인의 꿈은 접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사업가의 꿈을 대신 이루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민주도 은아나 준영이처럼 공부엔 자신이 있다. 반에서는 1등, 전교에선 10위권에 든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학원에 갈 형편은 못 되지만 학교 공부를 워낙 열심히 한 덕분에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학원도 좋지만, 스스로 공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저는 이렇게 공부해요. 우선 교과서를 독파한 뒤, 속으로 내게 물어봐요. ‘민주야 네가 모르는 것이 뭐니?’ 그럼 모르는 것이 머리에 떠올라요. 그걸 보완하면 공부는 저절로 돼요.”

    말하는 모습에서 ‘똑’ 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이렇듯 스스로 이치를 깨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길을 찾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요즘은 부모가 아이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길을 다 가르쳐줘 문제가 된다. 이렇게 보면 살림이 조금 어려운 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울 수 있어서다.

    태국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동남아 금융위기가 몰아치자 위기를 맞았다. 민주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결국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사업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와 민주, 그리고 동생은 서울의 조그마한 오피스텔을 얻어 산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을 보러 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건 민주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가난한 것은 일시적인 거예요. 전 가난하다고 자존심 상하진 않아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면 자존심 상해요.”

    민주는 아버지의 실패 원인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은 것에서 찾는다. 미래에 대해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른들 말로는 사업은 운이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목이에요. 준비를 철저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지 않을까요?”

    나이에 맞지 않게 커버린 민주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민주는 1997년 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에 대해 잘 모른다. 아버지의 능력엔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해일처럼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금융위기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자기 노력에 운이 더해져서 일어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느냐, 주저앉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민주 아버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똑똑한 딸을 뒀기 때문이다.

    “저는 아빠를 믿어요. 다른 아빠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어요. 지금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니에요. 지금은 아빠와 내가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해요. 아빠는 일을, 나는 공부를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고 서로 믿어야 해요.”

    언뜻 보면 새침데기 같지만, 민주는 친구가 많다. 비결은 친구들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잘할 수 있다고 믿어주면 친구들이 민주를 따른다고 했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민주는 나이에 맞지 않게 훌쩍 자라버린 듯하다. 부모에겐 이런 딸의 조숙함이 가슴 아픈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것만 고집할 나이에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버지의 고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집안이 어려우면 아이들 마음에 티가 묻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사실 부모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마음을 터놓고 자녀와 대화하는 것이 아이를 보호하는 일일 것이다. 얘기할 상대가 없으면 아이는 친구를 찾아 나서고, 준영이의 말처럼 실패한 집안의 친구들만 만날 것이다. 결국 이들의 발이 닿는 곳은 술집이나 허름한 공터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어루만지며 터놓고 대한다면 아이는 밖으로 나돌지 않는다. 대학 4년 장학금을 탔다는 민주의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어주기만 했다고 한다. 민주는 그 미소에서 한없이 커다란 사랑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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