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벨아미, 어떤 타락한 청년의 초상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9-20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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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아미, 어떤 타락한 청년의 초상

    ‘벨아미’<br>기 드 모파상, 윤진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444쪽, 1만4000원

    여기 또, 한 청년이 있다. 또, 라고 글의 운을 떼는 것은 이미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쥘리앵 소렐이라는 ‘문제적’ 청년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동아’ 2010년 8월). 나는 이 청년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 7월 프랑스 중동부 산악 도시인 그르노블과 브장송 일대를 돌아봤거니와 지난 7월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또 한 청년이 태어난 고장을 답사하기 위해 노르망디 북부 에트르타 해안 마을로 떠났다. 청년의 이름은 조르주 뒤루아, 별칭은 미남 친구라는 뜻의 ‘벨아미’, 곧 소설의 제목이다. 첫 대목을 보자.

    조르주 뒤루아는 계산대에 앉은 여자에게 100수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서 식당을 나섰다.

    타고나기도 하고 또 하사관 시절의 자세가 몸에 배어 외모가 수려한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서 익숙한 군인의 동작으로 콧수염을 꼬았다. 그리고 흡사 투망을 펼치듯, 아직 자리에서 앉아 먹고 있는 사람들 위로 미남 청년 특유의 눈길을 던졌다. -기 드 모파상, ‘벨아미’ 중에서

    스탕달이 ‘적과 흑’(1830)을 통해 출신은 비천하지만 타고난 외양이 수려해 여심(女心)을 끌고, 그 여심(사랑)을 매개로 가슴속 야망(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던 한 청년의 초상을 쥘리앵 소렐로 창조했다면,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뒤, 모파상은 ‘벨아미’(1885)를 통해 쥘리앵 소렐 이후 변화된 세계 속에, 조르주 뒤루아라는 또 다른 청년의 삶을 제시한다.

    뺨이 붉게 달아오른 쥘리앵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열여덟에서 열아홉 살 정도의 청년으로, 보기에 허약했고 매부리코에 윤곽이 고르지 않지만 섬세한 인상이었다. 조용할 때는 깊은 생각과 열정을 담고 있는 커다란 검은 눈 …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매는 힘보다는 경쾌함을 드러냈다. … 그의 준수한 용모가 처녀들로 하여금 다정한 목소리를 내게 한 것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다. … 어려서부터 그는 흥분의 순간을 맛보았다. 그럴 때면 자신이 언젠가 파리의 예쁜 여인들에게 소개되고 어떤 눈부신 행동으로 그녀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는 감미로운 공상에 빠지곤 했다. - 스탕달, ‘적과 흑’ 중에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또는 오랜 시기 한 작가의 작품을 좇아 읽다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곤 하는데, 한 작가의 완결된 작품이 주변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전이되거나 확장되는 경우와 한 작가의 오래전 작품이 이후 또 다른 작품으로 이어져 완성되는 경우를 목도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번역 출간된 모파상의 ‘벨아미’와 스탕달의 ‘적과 흑’ 간에도 모종의 연계가 이뤄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여린, 기껏해야 열여덟에서 열아홉 살의 쥘리앵 소렐의 꿈, 그러니까 ‘어느 날 어떤 눈부신 행동으로 파리의 예쁜 여인들에게 소개되는 일’이 어느 날 시골뜨기 청년 조르주 뒤루아에게 일어나는 장면은 단순히 일회적인 소설 속 흥미진진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소설 밖으로 사유의 확장을 유도한다.

    여자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까?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석 달 전부터 뒤루아는 매일 저녁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물론 잘생기기도 했고 또 여자들의 호감을 사는 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뒤루아는 지금까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왔다. 하지만 그는 늘 더 많은 만남을, 더 좋은 만남을 원했다. -모파상, 앞의 책 중에서

    소렐과 보바리 사이

    스탕달의 쥘리앵 소렐이 소설사에 빛나는 이름들의 성좌(星座)에서 욕망의 화신으로 뚜렷이 빛나는 별이라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또 다른 이름이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엠마 보바리이고, 이 두 거성 사이에 태어나기는 했으나, 그 둘을 넘어서지 못하고, 혹은 넘어서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이 모파상의 조르주 뒤루아다. 즉, 뒤루아라는 인물은 쥘리앵 소렐과 엠마 보바리의 일면들을 거느리고 있다. 신분 상승을 향한 야망은 전자와, 환상이라는 이름의 과도한 욕망(병)의 실현은 후자와 겹친다. 소설 연구자들은 스탕달의 ‘적과 흑’이 있고, 그 바탕 위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구축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플로베르의 소설적 적자(嫡子)인 모파상의 뒤루아라는 인물은 스탕달의 ‘쥘리앵 소렐’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작가의 이력에서, 인물의 창조에서, 소설 속에 그려지는 변화된 사회의 양태에서, 나아가 소설에 대한 견해(정의)에서 모파상과 그의 ‘벨아미’는 흥미로운 고찰을 이끈다.

    소설의 주인공 뒤루아는 모파상의 분신으로 작가의 숨길 수 없는 기질과 사생활을 반영한다. 개인의 이력, 특히 여성 편력을 그대로 풀어놓을 경우 자칫 삼류 소설로 전락할 수도 있을 여지가 있지만, 모파상은 다행히 외삼촌이나 어머니와 친분이 각별했던 플로베르로부터 일찍이 철저하게 소설 수업을 받은 덕분에 통찰력이 돋보이는 문장과 인물의 형상화로 하나의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에 번역 소개된 ‘벨아미’는 2년 먼저 발표된 ‘어떤 인생’(한국어 번역으로 소개된 바로는 ‘여자의 일생’, 1883)과 함께 모파상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주목을 요한다.

    ‘어떤 인생’이 모파상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노르망디의 해안가 마을 에트르타를 무대로 잔느라는 한 여자의 꿈과 결혼, 그리고 슬픔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갔다면, ‘벨아미’는 조르주 뒤루아라는 잘생긴 청년의 3년간에 걸친 파리 여성 편력기이자 출세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그리는 갈피마다 작가의 실제 여성 편력 경험이 유감없이 발휘돼 탄복을 자아낸다.

    더불어 이 소설에서 주목할 대목은, 부르주아 시민사회 세력의 성장과 자본력의 팽창으로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던 1880년대 신문 및 잡지 매체에 대한 모파상의 스케치다.

    두 친구(주인공 뒤루아와 그의 옛 군대 동료 포레스티에/필자 주)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의 커다란 유리문 앞에 이르렀다. 유리 뒤쪽으로 신문을 펼쳐 양면이 보이게 붙여놓았고, 세 명이 서서 읽고 있었다. 문 위쪽으로 흡사 무슨 구호를 걸어놓은 것처럼 가슴 불꽃으로 ‘라 비 프랑세즈’(프랑스의 삶)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번쩍거리는 이 세 단어가 던지는 빛을 받아 한순간 대낮처럼 환한 빛 속에 선명하고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방 안에는 편집실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냄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떠다녔다. 뒤루아는 약간 기가 죽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놀라워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 모파상, 앞의 책 중에서

    20세기 초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가 광고쟁이 주인공 레오폴트 볼름을 내세워 1904년 6월16일 더블린에서의 하루 방랑(스케치)이라는 고현학적 소설 쓰기의 획기적인 창작 방법론을 내놓기 전, 또한 조이스의 흔적을 좇아 우리의 박태원이 도쿄 유학생 출신의 고등 룸펜 구보씨를 앞세워 1930년대 식민지 수도 경성의 이모저모를 대학노트에 스케치하기 훨씬 전, 모파상은 19세기 세계의 지적(知的) 수도(首都) 파리와 유럽 각지에서 출세의 꿈을 안고 파리로 몰려든 인간 군상의 욕망과 허위의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뒤루아는 모파상이 즐겨 사용하는 카메라 포커스 기법 중에 포착된 인물로, 오직 수려한 외모 하나로 귀족 계급을 획득하는데, 처음 소설에 등장할 때의 이름은 조르주 뒤루아.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의 이름에는 프랑스에서 귀족의 칭호로 쓰이는 드(de)가 붙여져 조르주 뒤 루아가 되고(뒤 루아의 뒤는 프랑스어의 de와 la의 합성), 끝날 즈음에는 드 마렐 부인과의 재혼으로 ‘뒤 루아 드 캉텔 남작’이 된다.

    밖으로 나오니 성당 앞에도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바로 그를, 조르주 뒤 루아를 보려고 군중들이 시커멓게 몰려와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었다. 파리 사람들 모두가 그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 뒤 루아는 양쪽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싼 구경꾼들 사이로 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과거로 돌아가 있었고, 햇빛에 부신 눈에는 거울 앞에 앉아 관자놀이 위의 곱슬머리를 매만지던 드 마렐 부인의 모습만이 아른거렸다. - 모파상, 앞의 책 중에서

    모파상의 소설은 19세기 말 근대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 놓인 인간 군상을 대상으로 한다. 이 때문에 주인공은 순수가치가 자본의 교환가치에 의해 훼손되는, 곧 타락해가는 행로를 고스란히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이 한 편의 문학(예술) 작품인 이상,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의 성패야말로 지난 세기까지, 소설이 사회학을 넘어 진정한 문학 작품으로 생명력을 획득하는 관건으로 작용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운 구현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완벽한 소설로 평가받는 ‘마담 보바리’가 작품의 속성 한가운데에 통속성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 그 옆에 ‘벨아미’가 타락한 어떤 청년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유를 초가을 혼잡한 저잣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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