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펀드 투자 ‘원금 보장 각서’ 받아도 무용지물

  • 입력2011-09-22 0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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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9월15일 미국의 4대 투자은행사인 리먼브러더스는 파산신청을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전세계의 주식시장은 폭락장을 연출했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전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때도 우리는 엄청난 주식 손실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을 교훈 삼아 많은 국민은 직접 투자에서 간접 투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돈을 불려주겠다는 투자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같은 일을 예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토막 펀드’가 속출한다.

    한 주부는 10년 가까이 허리띠 졸라매고 부은 적금 1억원을 찾으러 갔다가 창구 직원이 ‘아직도 적금 부으세요?’라며 권하는 펀드에 몽땅 투자한다. 어떤 중산층 신사는 보유하고 있던 땅이 수용되면서 받은 보상금 15억원을 적합한 투자처가 나타날 때까지만 맡겨두겠다며 펀드에 넣어둔다. 한 예비역 장교는 30년 군복무를 마치고 받은 퇴직금과 친지에게서 빌린 돈으로 주가지수연계증권(ELS)에 8억원을 예치한다. 이들은 이러한 한순간의 판단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목돈, 펀드로 날리지 않으려면

    중소기업은 환율변동의 위험을 분산해 조금이라도 손실을 줄이기 위해 KIKO 상품에 가입한다. 그러나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인해 수십 년 장사를 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을 날리는 막대한 피해를 겪는다. KIKO(Knock-In, Knock-Out)는 통화선물상품의 일종으로 환율이 일정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경우 기업이 미리 정한 환율로 계약금액의 외화를 은행에 팔 수 있도록 하는 상품이다. 만약 6개월 뒤 수출대금으로 100만달러를 받는 기업은 현재 환율이 1달러당 1000원이라면 10억원의 수입을 얻게 된다. 그러나 6개월 뒤 환율이 500원으로 떨어지면 수입이 10억원에서 5억원으로 줄어든다. 이럴 때 6개월 뒤 100만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지금 10억원을 달라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면 환차손을 줄일 수 있는데 이러한 상품이 KIKO였다.

    KIKO에는 무시무시한 함정이 숨어 있었다. 환율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 상승하면 계약금액의 2~3배를 은행에 물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금융상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이러한 위험을 잘 모른 채 KIKO 상품에 가입했다. 태산LCD, 심텍, SAMT와 같이 장래가 촉망되던 건실한 중소기업조차 수천억원의 키코 손실로 인해 하루아침에 부도 위기에 몰렸다.



    소중한 종자돈, 쌈짓돈을 날려버린 투자자들과 기업들은 2008년 말부터 상품을 판매한 금융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1~2년의 길고도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모든 사건에서 금융기관의 손해배상을 명한 것은 아니었다. 금융기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액수는 전체 손실액 중 일부분에 한정됐다. 그렇다면 투자자가 손실을 입을 때 어떠한 조건에서 금융기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 법원에서 판단하는 기준을 이해하면 펀드 가입 시 참고가 될 것이다.

    원고가 된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점은 펀드 구조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원금을 날릴 위험성이 큰 파생상품과 연계된 것임에도 이러한 위험을 제대로 고지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설명의무, 고객보호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일단 금융기관의 설명의무를 인정했다. 즉, “파생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은행에는 높은 수준의 고객보호의무가 요구된다. 투자신탁상품 판매자가 고객에게 투자신탁상품의 매입을 권유할 때에는 그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포함한 상품의 특성과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고객이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투자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고객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 것이다.

    법원의 펀드소송 판결 경향

    그렇다면 고객의 수준과 경험이 천차만별인데 어떤 수준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법원은 “설명의 수준은 투자 대상 상품의 특성, 위험도 수준, 고객의 투자 경험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설정돼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펀드의 구조, 가입 경위, 거래의 위험도, 투자설명서 교부 여부를 고려해 설명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는지를 판단했다.

    법원은 펀드에 투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는 초보인 사람에게, 자기 돈으로 투자한 사람보다는 대출을 받아 투자한 사람에게, 나이가 젊고 학력이 높은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은 사람에게, 위험등급이 낮은 상품보다는 위험등급이 높은 상품에 더 철저한 설명의무를 요구했다. 특히 고객에게 투자설명서를 교부했는지가 설명의무 이행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한 예가 많았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투자설명서를 받지 않은 것이 손해배상을 받는 데 도움이 되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판결문은 “고객에게 펀드 가입을 권유했던 직원들은 모두 상품안내서만을 제시하거나 교부했을 뿐 투자위험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투자설명서를 제시해 그 내용을 설명하거나 교부하지 않았다. 특히 원금이 100%까지 손실될 수 있는 위험한 상품이라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고객이 여러 차례 펀드상품에 투자한 적이 있거나 투자위험고지서에 자필로 “충분한 설명을 들었고 상품내용을 숙지하였다”라고 쓴 경우엔 설명의무를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사례도 있다.

    펀드 소송의 경우 일부 승소가 적지 않지만, 키코 소송의 경우 일부 승소 비율은 10% 남짓에 그친다. 법원은 키코 소송에서 은행이 기업에 키코상품을 권유하면서 그 위험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으로만 고지했고 환율이 안정적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점만 강조한 것은 위법이라고 판단하기는 했다. 그러나 회사 규모에 비해 과도한 규모의 키코 계약을 하게 했거나, 대출을 미끼로 키코 가입을 제안하고 위험성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경우 등 은행이 적극적으로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만 기업 측 손을 들어주었다.

    펀드 가입 당시 금융기관 직원이 원금을 까먹을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원금 보장 각서를 써주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 펀드에 투자했다 큰 손실을 입었다면 투자자는 각서대로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순진한 고객은 직원이 써준 각서를 믿고 안심하겠지만 나중에 법원에 가면 전혀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각서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은 확고하다. 대법원은 “위험관리에 의하여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증권시장의 본질을 훼손하고 안이한 투자판단을 초래하여 가격형성의 공정을 왜곡하는 행위로서 증권투자에 있어서의 자기책임원칙에 반하는 행위로 정당한 사유 없는 손실보전의 약속 또는 그 실행 행위 역시 사회질서에 위반되어 무효라고 할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원금보장 또는 손실보전을 해주겠다는 각서는 무효라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피해보전 책임 낮아

    그러나 각서가 무효이기는 하지만 휴지조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각서는 금융기관 직원이 펀드를 권유할 때 펀드의 위험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간접증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금보장 각서를 받는 경우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설명했음”이라는 문구를 넣는다면 설명의무 위반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통계로 집계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소송 사건에서 금융기관이 펀드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배상액수를 보면 투자자의 처지에선 한숨이 나올 수 있다.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내려진 대부분의 사건에서 은행의 책임은 많게는 손실금액의 50% 이하, 적게는 10~20% 선에 그친다.

    설명의무, 고객보호의무 위반행위가 인정됨에도 전액배상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분쟁이 주가지수가 오를 때에는 발생하지 않다가 크게 떨어질 때 나타난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설명의무 위반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어느 정도의 손실이 불가피했을 것이므로 이러한 범위에서는 위법행위와 손실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펀드 투자 ‘원금 보장 각서’ 받아도 무용지물
    또 다른 이유는 증권투자의 대원칙인 자기책임의 원칙 때문이다. 금융기관의 불완전판매가 있었다고 해서 손실액 전부를 물어주라고 한다면 주식투자의 최종적인 책임은 투자자가 져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따라 은행의 책임비율을 최대 50%로 제한하고 투자자의 책임 범위를 더 넓게 한 것이다.

    법원 판결이 주는 교훈은 “금융기관 말만 믿고 펀드에 가입하면 목돈을 날릴 수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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