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창작혼 산파 시대정신 각성제

커피를 사랑한 사람들_유럽편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입력2016-08-23 10: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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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처음으로 문학 소재로 삼은 인물은 이슬람권에서 나왔다. 커피가 7세기 이슬람교 창시와 함께 음용되기 시작해 근 1000년 동안 무슬림만의 문화로 향유된 사실에 비춰보면 당연한 결과다.

    커피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10세기경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친 공물에 에티오피아산 커피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물증은 없다. 커피의 기원지라고 자부하는 에티오피아에서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초대 황제가 된 점을 들면서 커피의 기원도 이때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로는 커피의 기원 시기를 서기 6세기경으로 본다.

    커피가 왕성하게 소비된 곳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권이다. 아라비아를 벗어나 이집트나 터키로 전해진 것은 15세기쯤인 것으로 관측된다. 커피는 이슬람 포교 경로를 따라 퍼져나갔고, 이 과정에서 신비주의 수피교(Sufism)의 공은 지대했다. 수피교도인 잘랄 앗 딘 알 루미(1207~1273)가 ‘입술 없는 꽃’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문학의 소재로 삼았다. 다음은 그 일부다.

    “깨어나라, 아침이므로/ 아침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할 시간이다/ 팔을 벌리라/ 영접할 아름다운 이가 왔도다…”

    ‘아침의 포도주’는 커피를 상징한다. 커피의 어원은 아랍어로 ‘카흐와’다. 카흐와는 포도주라는 의미인 동시에 커피를 뜻한다. 유럽에선 17세기에 커피를 ‘아라비아의 와인(The wine of Arabia)’이라고 했다. 이슬람 문학과 예술에서 커피를 다룬 내용은 적지 않겠지만, 종교적 이유 등으로 인해 서방에 전해진 건 거의 없다.



    유럽 강국들은 17세기 말에 커피 값이 치솟자 앞다퉈 식민지에 커피 밭을 일구는 경쟁을 벌였다. 이 무렵부터 커피에 관한 흥미로운 목격담과 에피소드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커피 칸타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흔히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로 알려진 칸타타 BWV 211을 작곡한 것은 1732년경이다.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 13명의 자녀를 두고, 47세가 돼 맏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딸과 커피를 그만 마시라고 다그치는 아버지가 승강이를 벌이며 주고받는 풍자적인 아리아가 인상적이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여성의 출입을 금했기에 커피 칸타타에서 딸이 부르는 소프라노 대목을 남성 가수가 가성으로 불러 더욱 재미있는 요소가 됐다.  

    “오~ 이 커피는 너무나 달콤하구나.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백포도주보다 더 부드럽구나! 커피, 커피야말로 내가 마셔야 할 것이야. 나를 기쁘게 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내게 커피를 따르게 하세요….”

    커피를 끊지 않으면 약혼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버지의 최후통첩에 딸은 굴복하는 척한다. 하지만 재치덩이 딸은 혼인계약서에 ‘커피 자유섭취 보장’이라는 조항을 슬쩍 써넣으면서 결혼에 골인하고 커피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반전을 이끌어낸다.

    종교음악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바흐가 이처럼 대중을 위한 희극적 작품을 쓴 것은 ‘커피 애호가로서의 커피에 대한 헌정’이라는 견해가 있다. 바흐 자신도 “모닝커피가 없으면, 나는 그저 말린 염소고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



    ‘느리게 퍼지는 毒’

    신체의 나른함을 일깨우는 커피의 각성 효과는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낸 요인의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커피를 즐겨 마신 한두 인물의 파워보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진 계몽사상가들과 시민의 교류와 공감대가 구체제(앙시앵레짐)를 무너뜨리는 동력을 만들어냈다.

    1686년 문을 연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Le Procope)’는 이 점에서 온갖 사연이 깃든 곳이다.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총 28권짜리 ‘백과전서(Encyclopedia)’가 공동 편집장 드니 디드로(1713~1784)와 장 르 롱 달랑베르(1717~1783)에 의해 처음 기획된 장소가 이곳이고, 이후 26년 동안 백과전서가 완간될 때까지 계몽사상가들의 아지트로 활용됐다.

    볼테르(1694~1778), 장 자크 루소(1712~1778), 빅토르 위고(1802~1885), 장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등이 단골이었으며, 비운의 급진주의적 혁명가 장 폴 마라를 비롯해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공화주의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르 프로코프의 터줏대감으로서 커피에 관한 어록을 남긴 인물로는 볼테르와 루소가 손꼽힌다.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철학자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볼테르의 면모는 백과전서 집필 참여뿐 아니라 모차르트(1756~1791)와의 ‘악연’에서도 드러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모차르트가 볼테르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악당의 괴수가 드디어 죽었습니다”라는 기쁨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냈다는 일화는, 역설적으로 당시 볼테르가 지닌 사회적 무게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볼테르는 르 프로코프에 앉아 건너편 극장에서 자신의 연극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곤 했다.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시던 그에게 주치의는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커피를 놓지 않았다. 그는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84세까지 장수함으로써 커피의 유익함을 몸으로 증명한 인물로도 기억된다.



    악마, 키스. 지옥, 천사

    계몽사상가 루소는 자서전 ‘고백록’에서 후견인이자 연인이던 바랑 부인과 아침 산책길에 우유를 탄 커피를 함께 마실 때 가장 행복했다고 털어놨다. 연인과 함께 커피를 마시던 곳을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진위를 확인할 순 없지만, 그는 죽는 순간 “아, 이제 더 이상 커피잔을 들 수 없구나”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루소는 관능적으로도 매우 섬세했던 것 같다. 그는 “오, 나를 즐겁게 만드는 커피의 향기. 이웃에서 커피를 볶을 때면 나는 문을 열어 그 향기를 만끽한다”라고 읊기도 했다.

    커피 맛이 주는 행복감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주교 출신의 프랑스 외교관 탈레랑(1754~1838)이다.

    “커피의 본능은 유혹이다.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이처럼 커피의 검은 외관과 그윽한 향기를 악마, 키스, 지옥, 천사 등 자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단어로 묘사한 탈레랑은 커피 인물사에서 제법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유사한 표현이 이보다 훨씬 앞서 터키 속담(‘커피는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렬하고, 사랑처럼 달콤해야 한다’)과 헝가리 격언(‘좋은 커피는 악마처럼 검어야 하고, 지옥처럼 뜨거워야 하며, 키스처럼 달콤해야 한다’)에 나온다.

    커피를 사랑한 덕분인지 탈레랑의 지성적 각성은 대단했다. 그는 바스티유 습격 1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했다가 ‘혁명의 주교’로 불리며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 그 후 탈레랑은 외교계에 입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를 정계에 진출시킨다. 나폴레옹도 계몽사상가들처럼 카페 르 프로코프를 들락거렸다. 값을 치를 형편이 못 될 땐 모자를 맡기면서까지 커피를 마셨다. 1804년 황제가 된 후 기독교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커피를 군대 보급품으로 정했다. 나폴레옹은 커피를 마셔야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마니아였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발자크(1799~1850)는 하루에 50잔씩의 커피를 마시며, 2472명이 등장하는 ‘인간희극’ 등 100여 편의 장·단편 소설을 썼다.


    ‘베토벤 넘버’

    프랑스가 혁명의 기운 속에서 커피 이야기의 꽃을 피워낼 무렵 프로이센(독일)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에서도 커피는 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를 홀렸다.

    1694년 라이프치히에서 문을 연 ‘아라비아의 커피나무’라는 이름의 카페는 괴테(1749~1832), 슈만(1810~1856), 바그너(1813~1883) 등 여러 명사의 정신적 휴식처였다.

    ‘카페바움(Kaffee baum)’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곳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커피집이라는 기록을 가졌다.

    괴테는 하루에 커피를 20~30잔 마셨다. 그는 커피 중독에 대한 주변의 걱정에 나 보라는 듯이 83세까지 장수했다.

    괴테의 시 ‘마왕’을 곡으로 만든 독일 가곡의 왕 슈베르트(1797~1828)도 소문난 커피 애호가였다. 낡은 원두 그라인더를 ‘재산목록 1호’라고 자랑하곤 했는데, 그의 가곡 ‘죽음과 소녀’는 커피를 분쇄하면서 향기를 감상하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쓴 곡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토벤(1770~1827)은 커피 역사에서 상당한 ‘지분’을 가진 인물이다. 오전에 작품 쓰기를 좋아한 그는 모닝커피용으로 손수 원두 60알을 골라낸 뒤 추출케 했다. 그래서 커피에서 ‘60’은 ‘베토벤 넘버’라고도 불린다. 원두 60알은 8~10g으로 묘하게도 오늘날 에스프레소 1잔을 뽑는 데 사용하는 양이다.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불리는 브람스(1833~1897)도 커피 애호가였다. 그는 자신이 마실 커피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추출해 마셨다고 한다. 까탈스러워 보이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행동은 커피 애호가에겐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커피를 습관처럼 마시는 게 아니라 추구하는 향미가 분명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이들은 일찍이 향미를 평가하고 묘사하는 전문가인 커피 테이스터의 면모를 갖춘 게 아닌가 싶다.  

    모차르트(1756~1791)도 커피 인문학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유럽에 커피가 전해진 경로는 크게 1615년 이탈리아 베니스와 1683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나뉜다.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서 오스트리아를 사수한 빈 전투는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켜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폴란드의 가세로 혼비백산한 오스만 제국은 힘들게 싣고 온 커피 생두를 챙기지 못한 채 퇴각했다. 산더미처럼 남은 이 생두들이 오스트리아로 전해져  ‘비엔나 커피’로 태어난다.



    난봉꾼, 사기꾼 집결지?

    모차르트가 커피를 얼마나 즐겼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는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을 통해 커피와 인연을 맺는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사상 처음으로 군대 음악을 도입한 오스만 제국은 빈 전투에서 큰북과 심벌즈를 두들기는 현란한 소리로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투가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의 문화와 예술은 ‘터키풍’이라는 유행을 만드는데, 음악에서 터키풍으로 연주하라는 ‘알라 투르카(Alla turca)’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모차르트가 이런 상황에서 작곡한 작품이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 일명 ‘터키 행진곡’이다. 모차르트를 일주일간 사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베토벤도 극음악 ‘아테네의 폐허’에 ‘터키 행진곡’을 만들어 넣었다. 두 거장이 오스만의 음악을 어떻게 해석해 표현했는지 비교 감상하는 건 커피 애호가에겐 크나큰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영국에선 1637년 옥스퍼드대에 재학 중이던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너새니엘 코노피오스가 처음으로 커피 문화를 들여온 것으로 기록된다. 1650년엔 유대인 야곱이 옥스퍼드에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연다. 1652년 아르메니아 출신의 청년 파스카 로제가 부유한 무역상 에드워드의 후원을 받아 런던에 카페를 열었다.

    이 시기 카페의 이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영국의 초기 커피하우스들은 천막을 치거나 창고를 개조한 수준이었다. 로제는 전단지를 제작해 최초로 커피 광고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커피 음용의 효능. 파스카 로제가 잉글랜드에서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커피를 판매. 콘힐의 세인트마이클가(街) 주인장의 얼굴을 간판으로 내건 가게에서.” 당시 카페는 주인의 얼굴이 곧 간판이었다. 1654년 옥스퍼드에 문을 연 ‘퀸즈레인 커피하우스(Queen's lane coffee house)’에서부터 카페에도 고유한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영국은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차가 커피보다 더 사랑받은 탓인지, 문학과 예술에서 커피를 다룬 명작을 찾기 힘들다.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가 1738년 이튼스쿨에 다니던 통 킹이 운영한 커피하우스를 그린 작품엔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문을 나서며 새벽에 귀가하는 여인을 조롱하는 듯 바라보는 장면이 담겼다.



    ‘페니 대학’

    비슷한 시기에 ‘난봉꾼의 행각(Rake´s Progress)’이라는 연작물에 그가 그려 넣은 ‘화이트 커피하우스의 클럽실’이란 작품에선 도박꾼과 호색한들이 득실거리는 문란함이 잔뜩 배어 있다. 성 패트릭 성당의 주임 사제이기도 했던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는 이 커피하우스를 ‘악명 높은 사기꾼과 귀족 나부랭이들의 집결지’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가 부정적 인식만을 낳은 건 아니다. 에드워드 로이드가 1688년 템스 강변에 만든 커피하우스는 상인, 해운업자, 보험 관계자들이 모여 왕성하게 경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사랑받았다. 주고받는 정보가 많아지자 주인장은 ‘로이드의 뉴스’라는 소식지를 발행했다. 해운과 교역에 관한 정보를 구하려는 사람이 몰려들면서 이곳은 훗날 세계적인 보험회사 ‘런던 로이드 회사(Lloyd's of London)’로 성장했다.

    윌, 버튼, 차일드, 그레시안 커피하우스 등엔 법률가와 철학자, 작가들이 모여 온갖 이슈를 토론하는 신사 클럽(Gentlemen's club)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커피 한 잔 값의 작은 돈(penny)으로 모든 계층의 남자들이 참여해 살아 있는 지식을 접하며 사회적 의식을 일깨워나갈 수 있었기에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이라 불리기도 했다.

    만약 영국에 커피가 부흥하던 시기에 셰익스피어(1564~1616)가 살아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커피에 관한 주옥같은, 때론 재기 넘치는 이야기가 만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커피 애호가로선 떨칠 수 없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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