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 지린성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吉 | 韓中이 함께 키워낸 사과배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2/6

권력투쟁

외부의 도전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에서는 통일제국 수·당이 등장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했다. 고구려의 권력다툼은 끝내 연개소문의 살육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은 반대파 귀족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죽이고는 시체를 토막 내 도랑에 버렸다. 당시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는 3년마다 최고의 귀족이 ‘대대로’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에 취임해서 평생 철권통치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아들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

고구려는 초강대국 수·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방어전에 성공했을 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백성의 살림은 거덜 났다. 연개소문이 죽자 억눌려왔던 모순이 폭발했다. 게다가 아들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자 고구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대조영의 대장정

그래도 700여 년 동북의 강자였던 고구려의 위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구려 부흥운동이 잇따라 일어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을 요서 영주에 끌고 와 살게 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으로, 베이징과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瀋陽)의 중간에 있는 곳이다. 당나라가 만주를 장악하며 고구려인, 말갈족, 거란족 등 여러 북방민족을 이곳에 수용했다. 영주 관리가 무거운 세금을 거두는 것에 반발해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도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말갈족과 함께 반란에 동참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정예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면 대결에서 패배한 대조영은 동쪽으로 도망쳤다. 중간에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한 후 다시 동쪽으로 피해 지린성 둔화(敦化)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영주에서 장장 2000리, 현대의 도로망으로도 800여 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했다며 부여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발해 이후 만주는 요·금·원이 돌아가며 차지하다 명나라 때는 여진족의 주무대가 됐다. 여진족의 성장에는 조선도 본의 아니게 한몫했다. 조선은 성종 때 전성기를 맞이하며 점점 사치에 빠졌다. 담비 모피를 입는 게 유행이 되자 여진족은 만주의 특산물인 담비를 팔고 대신 조선의 소, 말, 철, 농기구, 소금 등을 사들였다. 이 물품들은 생활필수품인 동시에 전략물자였다.

연산군 때 이미 “조선 양도의 소가 모두 담비 모피를 사들이는 데 사용됐고, 그 결과 조선민은 말에 멍에를 메어 경작하는 경우도 있게 됐다.” 중종 때에 이르면 소뿐만 아니라 말도 많이 유출돼 “예전에는 기병이 1000여 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겨우 사오십 명밖에 되지 않아, 변방에 사변이 생겨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방력이 약화되며 북방에서 여진족이, 남방에서 왜구가 기승을 부려 ‘변방의 일을 대비한다’는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됐는데, 처음에는 비상 조직이었지만 외부의 침략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아예 상설기구화했다.

조선이 약해지는 반면, 여진족은 강해졌다. 여진족은 조선의 소와 농기구로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고, 말과 철제 화살촉을 쓰며 군사력도 크게 강화했다.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이 만주 지역의 감시·통제에 소홀해지자,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나와 만주를 석권했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해 명나라의 뒤를 잇는 대제국이 됐다.

만주족은 만주를 신성시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했지만, 외부인들은 만주족이 만주의 보물인 인삼·모피·녹용 등을 독점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엄격한 인구통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족과 조선인이 만주로 들어갔다. 중원과 조선에 흉년이 한 번 들 때마다 만주의 인구가 부쩍 늘어났다.



대공황과 만주 침탈

만주족, 한족과 조선인들은 함께 만주를 일구며 만주의 주민이 됐다. 그러나 청나라가 망한 후 만주를 차지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발 빠른 근대화 덕분에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이 되자(脫亞入歐)’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아시아 최강이라고 뽐냈다. 1918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독일의 조계지였던 중국 산둥성 칭다오를 얻고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다. 선진국이던 미국·유럽도 큰 혼란에 빠졌으니, 기초체력이 훨씬 약한 일본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31년 일본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가난한 농촌은 딸을 팔아 ‘딸지옥’이 됐고, 전국에 온 가족의 동반 자살이 잇달았다. 일본인들은 쌀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노동쟁의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시아 최고의 인재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도쿄제국대 법학부 졸업생조차 겨우 26%만 취업할 수 있었으니 전체 실업률은 처참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 군부의 엘리트로서 ‘지략의 이시와라’로 불리던 이시와라 간지는 주장했다.

“(일본의) 국정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고, 인구·식량 등 중요한 문제는 모두 해결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광활한 영토와 자원이 있고, 중국대륙 침략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몽골 지역을 차지하는 것만이 일본이 살아날 유일한 길이다.”

1932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중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이지만 식민지 조선처럼 일본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선통제)였던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웠다. 이미 중국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화민국 천하였다. 푸이는 아무런 힘이 없으면서도 만주에서 창업한 청나라 황실의 적통이므로, 일본이 찾던 ‘바지 사장’ 노릇에 적합했다. 힘이 없으니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청나라의 천자였으니 만주국을 대표하기에 완벽했다.


2/6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목록 닫기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댓글 창 닫기

2017/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