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인물연구

‘DJ의 리베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hans@donga.com

‘DJ의 리베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1/3
  • 두 차례의 전국구 의원 공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민주당 총재비서실장, 문화관광부 장관. ‘풍운아’ 김한길의 앞길에 거침이 없다. 배경도 없고, 정치권 ‘짬밥’으로야 이제 막 신인티를 벗었다고 할 그가 ‘거물’로 급부상한 사연은?
9 월20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한길(48) 민주당 의원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하자 한 시사주간지는 “DJ의 ‘보은형 인사’와 ‘리베로형 인사’의 복합형”이라고 비난했다. 보은형 인사란 DJ가 97년 대통령 선거 때 입은 은혜를 인사로 갚는다는 뜻이고, 리베로형 인사는 DJ가 한번 잘본 사람은 일의 성격에 관계없이 전천후로 중용한다는 의미다.

그런 인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가치 판단을 논외로 한다면 김대통령과 김장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97년 대선에서는 사상 최초로 후보들의 TV토론회가 벌어지는 등 영상 미디어 선거전이 당락에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당시 김대중 후보측의 방송대책팀을 이끈 김장관은 참신한 감각과 빼어난 순발력으로 TV 시청자들의 폐부를 꿰뚫어 DJ가 1.6% 표차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김장관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DJ의 리베로형 특급참모로 활용됐다.

DJ는 그를 대통령당선자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민주당 총재비서실장 등의 핵심요직에 잇따라 기용하며 곁에 머물게 했다. 또한 98년 6·4 지방선거 때는 수도권 미디어대책본부장을 맡겼고, 지난 4·13 총선 때는 민주당 총선기획단장에 앉히는 등 선거 때마다 그의 지략을 빌려 김장관에겐 ‘DJ의 딕 모리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김장관은 92년 대선 직전 국민당에 들어가 정주영 대표의 공보특보를 맡으며 정치권과 연을 맺었지만, 본격적인 정계 입문은 96년 국민회의에 입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5대 의회에 진출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야 이제 막 정치신인 티를 벗었다고 할 그가 동교동 30년 가신들도 꿈꾸지 못할 ‘거물’로 뛰어오른 요인은 무엇일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정치권에서의 경험은 짧지만, 김장관은 여고 교사, 소설가, 구성작가, 기자, 방송인 등 다채로운 경력이 있다. 그는 한때 ‘벗기는 소설’을 쓴 작가로 알려진데다 낭인 생활을 한 적도 있고, 약간의 ‘불량기(?)’까지 풍기는 자유분방한 언행 때문에 정계에 들어간 후에도 ‘건달’의 이미지를 쉬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껄렁껄렁한 겉모습만 보고 김한길을 판단했다간 큰코 다친다”고 경고했다. 그들이 말하는 ‘김한길의 진면목’은 ‘매우 성실하다. 의원회관에서 가장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데가 김한길 의원 방이다. 잠을 하루 평균 3∼4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화투나 포커도 못친다. 워낙 꼼꼼해서 답답할 만큼 작은 것까지 일일이 챙긴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김장관의 청소년기는 불우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부친은 한국 진보정당의 선구자인 전 통일사회당 당수 김철씨다. 군사정권 치하의 진보주의자. 신산한 삶은 부친뿐 아닌 온 가족의 몫이었다. 김장관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늘 민주화와 민족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당신이 거느린 식솔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했던 분, 세상에서는 옹고집 반골로 불리면서도 정작 당신 둘째 아들의 반항에는 속수무책이던 분, ‘통일이고 민주화고 개뿔이고 간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이었다.

71년, 김한길은 정원 20명에 21명이 응시한 건국대 국문과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한 명을 물리치고 합격한 뒤 모친이 달러빚을 얻어 마련한 등록금 덕분에 대학생이 된다(나중에 정치외교학과로 전과). 대학에서는 ‘예평회’라는 문학·예술평론 서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곧 유신시대의 막이 올랐지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기관의 감시대상이던 김한길은 시위에 나서지도 못했다.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이 서클에서 후배들을 지도했던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은 “김한길은 리더십도 있었고 모임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문학적으로 이견이 있을 때는 끝까지 따져드는 등 매우 치열하게 살던 후배라 남달리 애정을 쏟았다”고 기억한다.

대학생 김한길은 친구들에게 ‘부드러우면서도 어려운 친구’였던 듯하다. 동기생인 송영석 도서출판 해냄 대표의 회상.

“얘기를 나눠보면 더없이 부드럽고 유머러스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천착과 깊이있는 사고 때문에 가끔은 경외감까지 들게 한 친구였다. 그래서 30년지기면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길에겐 막말을 못한다. 그의 흑석동 산꼭대기 집에 처음 갔을 때 방안 가득 쌓인 엄청난 책 무더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대단한 독서량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친구가 벽에다 시간계획표까지 세세하게 써붙여 놓은 것도 놀라웠다. 학과성적도 올A였다.”

구두닦이 생활을 하느라 1학년을 3년이나 다니고 택시 스페어 기사 노릇까지 하는 등 곡절 많은 대학시절을 보낸 그는 입학한 지 8년만인 79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80년에는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의 꿈을 이뤘지만, 81년에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병정일기

미국행을 단행한 데는 몇가지 계기가 있다. ‘누구의 아들’인 이상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는 애초부터 틀린 일이었다. 유일하게 기댈 기둥은 문학이었는데, 여기에도 횡액이 닥쳤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군복무 시절 얘기를 소재로 ‘문학사상’에 ‘병정일기’를 몇회 연재했는데, 참신하다는 평과 함께 출판제의가 빗발쳤다. 작가 한수산은 “우리는 6·25 이후 수십년간 이만한 병영문학을 갖지 못했다”고까지 했다. ‘병정일기’중 한 편을 읽어보자.

‘훈련병 생활이 끝났다.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다. 험상궂은 표정과 욕설과 발길질 속에, 점잖은 공갈 속에, 우리는 군대를 배웠다. 틀려도 다 똑같이 틀리기만 하면 괜찮은 군가를 배웠다. 수십 가지 기합의 체위를 배웠다. 남보다 편할 수 있는 요령을, 괜한 상소리를 배웠다. 얄팍한 거짓 웃음과 애교를 배웠다. 그리고 분노를 배웠다. 그것을 삭이는 인내를 배웠다. 지쳐 쓰러진 친구가 뺨맞는 것을 차려 자세로 지켜보면서, 영하 18도의 새벽 2시에 팬티바람으로 기어 언 땅을 녹이면서 우리는 증오와 굴종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겨우 이등병이 된 것이다. 장군이 되려면 무엇을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가.’

그러나 그의 집 앞에 맨먼저 달려온 것은 출판사에서 보낸 차가 아니라 보안사 요원들을 실은 검은색 지프였다. 지하실에서 흠씬 두들겨맞고(그는 지금도 치아가 좋지 않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쓰고 겨우 풀려나왔다. 취직도 안 되고 글도 못 쓰는 이곳에선 더 희망이 없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도 마침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여권을 얻어 결혼한 지 20여일 만에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생활도 파란만장했다. 건축현장의 막노동, 햄버거집 주방장 보조, 주유소 밤 당번을 전전하다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자리를 얻어 다시 볼펜밥을 먹게 됐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던 데다, 한국에서 전해지는 민주화 투쟁 소식을 듣고 ‘도피자’의 자괴감 때문에 더운 물 샤워를 하지 못했다. 주말에 피크닉 가는 것도 꺼렸다. 그저 게걸스럽게 일에만 매달리며 부채감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그를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무렵 가수 조영남씨는 샌프란시스코에 연주회를 하러 갔다가 취재 나온 김한길 기자를 만났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가 ‘병정일기’와 ‘미국일기’를 건네주기에 호텔에서 심심풀이로 뒤적거리다 어느새 글에 빠져들어 밤을 꼬박 새웠다. 조씨의 말.

“그때껏 산문이라고 하면 김승옥 이제하 오태석의 감수성을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김한길의 글을 읽어보니 우리말로 쓸 수 있는 또다른 영역의 산문이 있구나 싶었다. 김승옥 이제하 오태석의 글엔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배어 있는데, 그의 글은 얼마나 투명한지, 마치 어린아이의 영을 보는 듯했다. ‘얘 이거, 생텍쥐베리잖아’라는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펜끝이 예리했다.”

그후 두 사람은 아삼륙이 돼 어울렸다. 조씨의 드문 히트곡인 ‘화개장터’의 가사를 써준 사람이 바로 김장관이었다. 조씨는 87년에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1/3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hans@donga.com
목록 닫기

‘DJ의 리베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