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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핵심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

  • 최영재cyj@donga.com

YS정권 핵심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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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 이런 시점에 ‘신동아’는 고려대학교 대통령학연구실(실장: 함성득 교수)의 협조 아래 고려대학교 정경학부 수업 ‘대통령학’에서 이루어진 ‘김영삼 정부 심포지엄’을 연재한다. 이 심포지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핵심실세들이 강사로 나와 생생한 경험을 통해 문민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회고하고 있다.
이홍구

고비용 저효율구조 바꿀 정치력이 없었다

오늘 나는 김영삼 정부의 총리로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말씀드리는데, 적절하지 않은 게 뭐냐면 우리나라 장관도 그렇지만 총리도 자주 바뀌어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이 5년 동안 재임하시면서 국무총리가 6명 바뀌었습니다. 평균 1년을 못 넘겼다는 얘깁니다. 1년 이상 한 건 나하고 이수성 총리 두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몇 달씩 했습니다.

현 정부도 2년 몇개월 됐습니다만 현 총리께서도 세 번째 총리입니다.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세 분인데 평균 1년을 못 넘겼습니다. 제일 오래 한 외무장관도 세 번째 장관이기 때문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불과 2년 반 동안에 3번이나 다른 장관이 와서 외무장관 회담을 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자꾸 바뀌나 하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다고 했다는 것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5년 임기 동안 뭘 하려고 했고 그 정부의 특징은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논의하려고 생각해봤습니다. 크게 봐서 다섯 분야에서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민주화, 둘째 지방화, 셋째 세계화, 넷째 시장 개방, 다섯째 민족공동체 건설 문제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김영삼 정부가 이런 목표를 위해서 어떤 일을 어느 정도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민주화입니다. 민주화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87년 선거에서 상당한 정도 성취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에 대해서 뭔가 남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선거만 민주적으로 했다고 해서 민주화가 되는 거냐, 그렇지 않으면 이유야 어떻게 됐든 과거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밀어낸 군부에 의해서 탄생한 정부를 그대로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92년 선거를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문민정부의 출범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는 과거 선거가 비민주적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 선거를 통해서 처음으로 전두환 노태우 박정희 대통령 같은 군부 출신이 아닌 문민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문민정부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 중에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에 관한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감옥에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후에 사면복권이 됐습니다.

민주화에 연계되는 겁니다만 둘째로 지방화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이것이 국민 생활과 연계되고 가까울수록 시민의 복지와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 자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데, 1996년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이건 상당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냥 지방의회 선거를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런 제도가 과연 시민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제도화하는 데 어떻게 공헌하느냐,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그래서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지역사회 지역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어떻게 연계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세계화입니다. 세계화 문제는 저로서는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게 1994년 12월에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제가 이끈 내각을 세계화 내각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리고 세계화 추진위원회도 만들어서 정부 안에 위원회를 두고, 민간에도 만들어서 민간인들도 참여시켰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게 됐느냐 하면 제가 총리를 했던 1995년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개인소득이 1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우리가 1000억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1만 달러 소득 10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고 우리가 세계 11번째 무역국이 되고, 따라서 선진국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OECD가 우리를 초청해서 OECD에 가입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이제는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전환을 가져올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개방과 연관이 됩니다. 우리 역사나 문화를 보면 원천적으로 폐쇄성이 강합니다. 그 이유를 든다면 첫째는 지정학적인 요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변국이 다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입니다. 우리와 직접 주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러시아 일본 세 나라가 얼마나 광대한 나라입니까.



구조조정 필요성 알면서도 못했다

우리 경제가 지금 이렇게 커져서 세계에서 11번째라고 하는데 우리 옆에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입니다. 미국 다음으로 큽니다. 우리 땅이라는 게 광대한 대국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지정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서면 항상 당하게 되므로 어떻게든지 우리는 조그만 벽이라도 쌓아서라도 우리끼리 피해서 사는 이런 폐쇄성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세계는 통신 기술의 발달로 아주 좁은 하나의 세계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가지고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기에 이제는 우리가 과감하게 세계 속의 한국임을 새로이 정립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의미로 세계화를 강조하게 된 겁니다.

넷째는 세계화와 직접 관련된 건데 시장의 개방화입니다. 시장을 닫아놓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과감하게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개방화로 간 것입니다. 이미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경제에 질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요새 얘기로 해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한 겁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부 마지막에, 1997년 12월에 이른바 IMF 위기에 직면하게 돼서 김영삼 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전혀 못 봤느냐, 정확히 봤다고 그러면 말이 안 되죠. 그러나 상당한 정도 걱정하고 진단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금융의 자율화, 노동시장의 경직성이었습니다. 임금이 생산성보다 훨씬 앞질러가는 문제와, 부동산 시장의 경직성 문제도 나왔습니다.

김영삼 정부에서도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타파하려고 노동법 개정에 들어갔는데 실패했습니다. 제가 국무총리 할 때 행정조정실장이 강봉균 실장인데 어려운 시기에 재정경제부 장관을 했죠. 그때도 이미 강봉균 장관이나 내 스태프들이 노동개혁과 재벌개혁을 동시에 밀고 나가야 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이게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는 도저히 안 된다, 그래서 조직의 개편, 기업문화의 재정립 등 다 해야 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이걸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완전히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밀고 갈 수 있는 정치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걸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새도 시중에 나가보면 우리 경제 큰일났다는 얘기를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언론에서도 매일같이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감한 구조조정부터 처방은 다 나와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많은 기업을 도산시키면서도 구조조정하는 아픔, 그걸 우리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가, 어려운 선택입니다. 지난 정부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어렵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간을 놓치지 말고 밀고 가는 정치적 지도력과 결단력이 국가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째로 통일 민족공동체 건설 문제가 남게 됩니다. 88년에 서울대에서 20년 동안 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통일원장관이 되었습니다. 내가 된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 얘기한 대로 처음으로 민주화가 됐기 때문에 88년, 89년에 모든 대학, 시민단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통일을 논의했어요.

그때 통일특위 위원장을 한 분이 통일민주당 박관용 의원이었는데 그 때 만들어낸 것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입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89년에 공식으로 우리나라 통일방안이라고 선포됩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정치 정부 국가 위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 공동체를 상정함으로써 정치뿐 아니라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한민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초점을 두고 그걸 위해서 단계적으로 노력하는 겁니다. 그래서 첫 단계를 화해 협력을 위한 단계, 둘째 남북연합, 셋째 통일로 해서 3단계를 만든 겁니다. 나는 항상 세 야당 총재,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분을 찾아가서 상의하고 그분들 의견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일 생각을 많이 했던 분이 그 당시 김대중 총재입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3단계 통일 방안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94년에 가서 국내에서 다시 통일 문제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는 얘기가 나와서 미국에서 흥분하고, 그래서 일이 복잡해졌어요. 94년 4월에 통일원 장관을 다시 하게 됐어요. 아무튼 들어가서 다시 논의를 해가지고 그 해 8·15에 김영삼 대통령께서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 우리의 통일방안이라고 재천명하게 된 겁니다. 오늘날 김대중 대통령께서 전개하고 계신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도 그 공동체 통일방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얘기한 94년에 북한 핵 문제가 나와가지고 미국에서는 상당히 심각하게 봐서 사실은 전쟁준비를 했습니다. 만일 북한이 듣지 않으면 군사적으로 핵시설을 파괴하겠다는 정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중재자 비슷하게 나온 것이 카터 대통령입니다.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카터 대통령이 와서 얘기를 해서 그 해 6월18일인가 판문점에서 나하고 북한 김용순 위원장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협상했습니다.

요새는 어려운데 그때는 간단했어요. 하루에 모든 문제를 다 합의해서 오전 10시에 만나서 오후 8시에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래서 잘 됐다고 돌아와서 갈 사람도 선정하고 짐도 싸기 시작하고 이랬는데 회담 2주일 전에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후 6년이라는 공백이 생겼습니다. 즉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 권력이 승계되는데 6년이 걸렸다고 봐야죠. 다시 금년 6월13일날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6년 동안에 가장 큰 희생을 한 것은 북한 주민들입니다. 6년 동안 북한 경제는 계속 낙후를 거듭해서 문자 그대로 기아선상을 겪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아주 아픈 시기를 경험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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