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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의 기인·괴짜 10인 열전

국악에서 재즈까지 음악의 연금술사 임동창

  • 김현미

국악에서 재즈까지 음악의 연금술사 임동창

  • 96년 정광사 수행음악회. 자정 무렵 졸던 불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비나리는 호남선~” 하고 불러대니 법당 안이 난리가 났다. 신이 난 불자들이 손뼉을 치고 조명을 껐다 켰다…
“뭐 하는 사람이야?”

무료하게 TV채널을 돌리던 남편이 시선을 고정하고 묻는다. 고개를 돌리니 임동창(44)이다. 방송을 의식해서인지 원단 전라도 말투에 평소보다 약간 순화된 욕을 섞어가며 피아노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섰다 앉았다 열강을 펼친다. 교육방송 시청률 올리는 데 한몫 했다는 소문의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흐드러지게 한판 놀아보세’였다.

“그냥 음악하는 사람.”

대답해 놓고 보니 멋쩍다. 그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 마디로 설명하려니 대답이 마땅치 않다. “원래 피아노를 쳤는데 국악도 하고, 작곡도 하거든.” 아는 대로 나열해봐도 영 아니다. 남들처럼 그냥 ‘유명한 피아니스트’ ‘국악인’ ‘작곡가’ 혹은 ‘어느 학교 출신’이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임동창은 세상 사람이 정한 틀이 도무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뭐 좀 간단하게 부를 거 없어요?”라고 물었더니 실쭉 웃으며 “그냥 현대에 사는 음악가라고 혀. 그것도 길면 소리쟁이라고 혀”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그의 호가 또 ‘그냥’ 아니던가.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임동창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단어를 동원한다. 괴짜 피아니스트는 한물간 표현이고, 컬트 피아니스트는 2년 전 유행어다. 요즘은 퓨전 음악가란 말이 간간이 쓰이지만 그가 원치 않는 버터냄새를 너무 풍긴다. 차라리 빡빡머리 혹은 대머리 피아니스트라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음악계의 이단아라 하면 좀 심각해지고, 그가 조직한 젊은 음악인 모임 ‘쟁이골‘ 촌장이란 말이 제일 친근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기인(奇人)‘이라 하고 그는 ‘그냥 임동창‘으로 불러달란다.

드뷔시고 나발이고 때려치우시오

임동창 음악을 가리켜 국악이냐 양악이냐, 저 사람이 피아니스트냐 아니냐 헷갈려 하는 것은 그의 음악을 이루는 성분이 남달리 복잡하기 때문이다. 속세에서 사람 가리는 데 가장 중요한 ‘대학교 졸업장‘이나 받았는지 의문스럽고, 또 음악계에 끼는 데 필수적인 ‘누구누구 제자‘ ‘무슨 콩쿠르 출신‘이라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딴죽 걸기 어려운 달변이고, 아는 건 또 왜 그리 많은가. 도대체 어디서 굴러나온 사람인가.

195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워낙 노래를 잘해 별명이 ‘팔도강산’이었단다. 그의 음악회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연주 중간중간 불러제치는 유행가 솜씨가 심상치 않다. 그의 말대로라면 노래솜씨는 “뽕짝을 뒤집어지게 잘 불렀던 부모님 덕”이다.

그래도 그의 직업 중 제일 앞에 소개되는 것이 피아니스트다. 사실 그는 피아노를 군산남중 2학년 때 처음 봤다. 처음 듣는 순간 투명한 피아노 소리에 미쳐버려 그날로 헌책방에서 피아노 교본을 구해다 교회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했다. “한번 제대로 배워봐야 쓰겠구먼” 하고 찾아간 것이 당시 군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길환 선생 음악학원. 동창의 재능을 아껴서 먹이고 재워가며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 밑에서 5년. 그 사이 피아노 실력은 독주회를 열 정도로 일취월장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작곡에도 손을 댔다.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미친 듯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대가들의 음악을 들으며 작곡이란 걸 배웠다. 여기까지는 어린 동창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스승의 안목에 그의 천재성이 발현되면서 왕성하게 서양음악을 탐식하던 시기다.

그리고 고교 졸업 후 돌연한 입산. 그의 음악과 입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밤중에 작곡한다고 오선지 앞에서 끙끙대는데 선생님 주무시는 방에서 괘종시계가 땡땡땡 하고 세 번 치데요. 그런데 내 방 시계를 보니 자정이더란 말입니다. 참 이상하다 해서 선생님께 ‘지금 몇 시예요?’ 했더니 ‘3시다’ 하시는 거예요.”

남들 같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일이라고 곧 잊어버렸겠지만 임동창은 마치 괘종시계가 자신의 머리를 울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용화사에 들어가 보림이라는 법명으로 1년 넘게 수도생활을 했다. 군 입대 문제로 하산하기까지 그는 피아노나 음악 따위는 딱 끊고 복식호흡과 수식관을 배웠다. 당시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이 뭐꼬’라는 화두는 나중에 그의 음악(수행음악 ‘이 뭐꼬 1, 2’ 작곡)으로 되살아난다. 이 시기, 그는 아예 음악을 딱 끊고 마음공부에 열중하면서 남의 것(서양음악) 열심히 외워 연주해봤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군 제대 후 그는 절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자신의 재주가 통하는지 시험해 보기로 한다. 군악대 선배들이 신중현 밴드에 들어오라고 권했지만 음악학원 선생 쪽을 택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그의 제자들은 다양했다. 4개월쯤 지나니까 음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더니 나중에는 곡 해석을 놓고 의논할 게 있다며 전문 피아니스트가 찾아오기도 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에게 전문연주가가 음악을 한 수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니 별꼴은 별꼴이었다.

“악보만 딥다 판다고 음악이 되나. 몸과 마음이 하나 돼야 예술이 나오지. 피아노는 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피아노가 돼야 한당께.”

그 피아니스트는 드뷔시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인벤션부터 다시 배우라는 그의 호통에 자존심이 상해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연주자들이 차이코프스키가 어쩌고 베토벤이 어쩌고 하며 현지 여행하고 전기 읽어가며 공부한다고 하면 ‘다 사기’라고 손사래를 친다. 독산동 음악학원 선생. 그의 말대로 알량한 재주를 마음껏 부려보던 시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공부를 하나?’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겨 최동선 교수를 찾아간 것이 84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최교수의 권유로 다시 학력고사를 공부해 85년 서울시립대 작곡과 수석입학. 천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쑥스러운 스물아홉이었다. 대신 조교급 1학년생으로 최교수의 작곡발표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는 등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화려한 학창생활과 달리 졸업과 함께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다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임동창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어울려 공연을 하면서부터다. 사물놀이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김덕수패 전용무대였던 신촌 난장에서 민둥머리 피아니스트가 사물놀이에 맞춰 신나게 놀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서른 중반. 힘과 기가 넘쳐흐르는 임동창의 연주와 몸짓에 “도대체 저자가 누구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왔다.

그와 사물놀이의 인연은 89년 2월 낙원동 어느 찻집인지 술집인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 한잔 걸치고 장구를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김덕수패 사물놀이 단원인 이광수씨가 다가와 장구는 그렇게 치는 게 아니라며 채를 빼앗았다. 장구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동창은 아예 거처를 사물놀이패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김덕수씨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기억으로만 전해지던 사물놀이에 처음 채보란 걸 시작했소. 내가 그래도 서양음악이란 걸 좀 아니까 해보자 했지. 그런데 덕수형이랑 맘이 안 맞는 거야. ‘이건 해봐야 아는 거여’라고 큰소리만 치는데 그런 식으로는 일반인에게 전수가 안 되잖아요. 덕수형이 ‘이것은 큰 호흡이여’라고 하면 내가 얼른 악보로 적었죠. 사실 만날 쌈만 했어요.”

그 와중에 ‘정간보’ 1, 2집이 완성됐고 임동창은 국악의 깊은 맛에 푹 빠진다.



동창아, 동창아 뭐 하니

95년 8월29일 연강홀에서 가진 첫 독주회를 전후로 그의 무대인생이 만개한다. 그 사이 연극음악도 하고 무용음악도 하고 93년에는 첫 창작음반 ‘신아위’와 95년 74분짜리 즉흥연주음반 ‘천국인간’(영국 재즈뮤지션 토니 부르크와 협연, 덴마크 레이블로 출시)을 내기도 했지만, 임동창 음악의 진수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역시 연주회였다.

‘이 뭐꼬’(피아노 산조), ‘달아 달아’ ‘가을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전래동요 편곡) 등 자작곡도 이 무렵 선보였다. 연주하다 말고 “동창아!” 하고 객석을 향해 소리지르지를 않나, 프로그램에도 없는 즉흥연주가 그의 전공, 아무 때고 기분에 따라 등장하는 ‘칠갑산’ ‘소양강 처녀’ ‘남행열차’ ‘목포의 눈물’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그처럼 무대 위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연주자도 없었다. 피아노 치고 장구도 치고 노래 부르고 무대를 휘젓는 그에게 관객들은 넋이 나갔다.

압권은 96년 정광사 수행음악회. 자정 무렵 졸던 불자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비내리는 호남선~”하고 불러대니 법당 안이 난리가 났다. 어색한 시간도 잠시, 신이 난 불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며 조명을 껐다 켰다 하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그는 모두 편안히 눕게 하고 명상음악을 들려주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떤 음악이라도 온몸으로 듣게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96년 연강홀 연주회, 97년 장사익·이생강과 한 무대에 선 ‘공감’ 공연, 예술의 전당 독주회, 국악에서부터 행위예술가까지 국내 재주꾼들을 몽땅 모아 펼친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공연, 98년 불가식 메뉴의 호텔 디너쇼, 99년 4월 안동 수몰지구 폐가 연주 등 그는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 사이 불가 수행법 ‘수식관’을 토대로 한 일곱 번째 음반 ‘명상’(2장, 악 레이블)을 발표하며 오랜 실험과 방황 끝에 거듭 태어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지난 10월, 16일간의 TV출연을 통해 그는 일반인에게 ‘임동창 음악’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지고 국악이니 양악이니 기존 틀거리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크로스오버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냥 임동창 음악’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할 때 그는 사라졌다. 지금은 어딘가에 틀어박혀 정악 ‘수제천’을 토대로 한 새 음반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신동아 2000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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