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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한국의 괴짜들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범죄자의 글씨는 따로 있다. 글씨 오른쪽을 올려 쓰기만 해도 인생이 바뀔 것”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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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씨를 보면 사람이 보인다
  • ● 항일지사·친일파 글씨 1000여 점 수집한 까닭
  • ● 어떤 사람이 목숨 걸고 불의에 맞서는가
  • ● 부자·정치인·학자를 만드는 글씨체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항일지사와 친일파의 글씨 1000여 점을 소장한 글씨 수집가 구본진 검사.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꽂히는 일이 있다면, 나에게 그것은 글씨였다. 글씨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열쇠였다. 왜 어떤 사람은 목숨을 바쳐 불의에 맞서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좇는가. 그 해답을 글씨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구본진 저 ‘필적은 말한다’중에서)

구본진(44)씨는 검사다. 서울대 법대 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조직폭력 마약 살인 등 강력범죄를 주로 수사하며 잔뼈가 굵었다. 살인범, 강도, 거짓말쟁이 틈바구니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게 그의 일이었다. 피조사자의 말투, 행동, 표정 하나도 가볍게 넘긴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그들의 필적을 유독 주의 깊게 살피고 있음을. 자필진술서 필체, 조서 끝에 휘갈겨놓은 서명 한 줄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곤 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비뚤어진 인격을 드러냈고, 단정하고 깔끔한 필체는 진실성을 담보했다. 글씨는 곧 글쓴이 자신이었다.

항일지사와 친일파의 간찰(선인들이 주고받던 편지)을 모으며 글씨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서 극명하게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의 글씨는 그들의 삶만큼이나 확연히 달랐다. 그때부터 범인을 잡아내는 열정으로 글씨를 탐구했다. ‘글씨가 품고 있는 비밀’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수집한 간찰이 1000여 점. 항일지사 400여 명, 친일파 150여 명의 친필이 그에게 있다. 독보적인 컬렉션이다.

글씨에 미친 검사

경기 용인시 법무연수원 검사교수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무실 문을 열자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는 광암 이규현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한 획 한 획 반듯하게 내리그은 필체가 문외한이 보기에도 단정하다. “글씨는 곧 글쓴이”라는 그의 이론이 맞다면, 광암은 분명 고결하고 꼿꼿한 성품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보름 전쯤에 산 글씨지요. 새로 구입하면 눈에 익힐 겸 이렇게 사무실에 걸어둡니다. 이규현 선생은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에요.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았지요. 정사각형 모양과 각지고 힘찬 느낌이 전형적인 항일지사의 필체입니다.”

눈을 돌린다. 구한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의 유묵 소품, 의병장 곽종석의 간찰 등이 벽마다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후에 누군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김병조 선생의 글씨를 보내오기로 했단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인데 북한 쪽에서 주로 활동해 글씨를 구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친필로 확인되기만 하면 바로 구입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뜬 듯이 들렸다.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의 글씨가 이리로 오고 있다! 이 사실이 그를 설레게 만드는 듯 싶었다.

▼ 글씨가 꽤 많은데 계속 구입하시나 봅니다.

“일주일에 한두 점쯤은 삽니다. 주로 고서점이나 경매를 통해서 구하지요. 오늘처럼 글씨가 저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요.”

▼ 독립운동가들의 글씨는 이미 상당수 소장하신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건국훈장을 받은 분만 1만명이 넘습니다. 그분들의 글씨 중 10%도 채 못 모았지요. 제가 소장한 글씨 주인공 가운데 일반인이 알 만한 분은 많지 않습니다. 주로 지역 유림 출신의 항일지사들이지요.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역사 뒤편에서 잊힌 분이 많아요. 그분들의 글씨를 계속 찾고 있지요.”

글씨를 수집하면서 그는 ‘점잖은 미치광이’(gentle madness·열광적인 수집가를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가 됐다.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집에 돌아가면 컬렉션을 들춰본다. 새벽에 잠을 깼다가 글씨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날 때도 있다. 새로운 글씨를 구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감이 솟아난다. 타고난 수집가인 그에게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수집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창작’이다. 이런 희열을 느끼게 해준 건 글씨가 처음이라고 한다.

“1998년 미국 뉴욕으로 연수를 갔어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의 기증유물관을 보며 그 규모와 수준에 감탄했지요. 어릴 때부터 뭐든 모으는 걸 좋아했는데, 이왕이면 좋은 주제를 정해서 박물관에 기증할 만한 컬렉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운명적인 만남

그때 운명처럼 간찰이 다가왔다. 귀국 후 우연히 들른 고서점에서다. 수북이 쌓인 옛 글씨 속에 능성 구씨 조상들의 작품이 없나 뒤적이는데, 문득 동판으로 찍어낸 듯 반듯하고 규칙적인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곽종석이라는 분의 간찰이었어요. 집에 와서 찾아보니 구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항일지사였지요.”

일제 침략에 항의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유림 총궐기를 요구하는 격문도 돌린 이였다.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끝에 병사한 그는 1963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 저기 벽에 붙어 있는 글씨인가요?

“네. 최초로 수집한 간찰이에요. 그때는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이상하게 저 글씨에 시선이 갔지요. 보고 있으면 글씨가 글쓴이에 대해 뭔가 얘기해주는 것 같았어요.”

▼ 글씨가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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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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