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⑨]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안성기
“무채색의 여백, 그게 내 장점이자 한계”
사람들은 그를 ‘국민배우’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정도 칭호는 국보급의 대배우들, 즉 프랑스의 장 가뱅이나 일본의 야쿠쇼 코지, 미국의 존 웨인 같은 이들에게 붙는 이름일 것이다.
연륜도 연륜이거니와 소탈하면서도 바위 같은 무게중심이 없다면 감히 붙을 수 없는 상찬. 국민이 그렇게 불러줌으로써 안성기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배우’로서 안성기는 일단 안전하다. 그의 선한 미소를 보며 불 같은 질투심이나 경쟁심을 느낄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안성기는 성실하고 신뢰가 간다. 20년 되어간다는 커피 광고 이미지 그대로, 사람들은 그가 좋은 남편이며 따뜻한 아버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의 적도, 누구의 연인도 아닌 ‘우리 중의 하나’로, 어떤 잘못을 해도 어깨를 툭툭 두드려줄 것 같은 겸양의 미덕을 갖춘 ‘안전판’으로, 그는 숱한 별들이 뜨고 지는 한국 영화판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안성기라는 배우의 삶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어눌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그만큼 현명하고 처신을 잘하는 머리 좋은 배우도 드물다. 우리들의 아픔을 다 대변해줄 것 같지만 그만큼 기복이 없고 다복해 보이는 가정을 이룬 운 좋은 배우도 드물 것이다. 안성기라는 배우의 삶과 이력에서 질투를 느낄 만한 요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사람들은 늘 그를 ‘우리의 안쪽’에서 사고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안성기가 20대 후반에 성인 배우로 데뷔했을 때 그는 이미 중견이었다. 아역 배우가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깜찍한 연기로 대략 70편의 영화를 소화한 이력이 있었던 까닭이다. 실질적인 데뷔작인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그는 어눌하면서도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20여년 전 안성기론을 썼던 ‘월간 경향’의 이열규씨는 안성기를 ‘데포르마시옹’, 즉 모양의 이지러짐, 모양의 흩어짐이 곧 모양이 되는 배우라 일컬었다.

이 글에서 그는 20대의 안성기가 ‘이상하게도 흐느적거림 같은 인상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며칠씩이나 다림질하지 않은 채, 줄창 입고 문댄 바지를 벽에다 걸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했다. 아마도 초창기 ‘바람 불어 좋은 날’부터 ‘고래사냥2’에 이르기까지 전과자, 거지, 중국집 배달원, 부랑아, 건달 등을 연기했던 그의 서민적 이미지가 실생활에 투사된 평가일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안성기는 대한민국의 밑바닥 인생들과 당대의 사회비판 의식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에로영화의 가슴에서 흐느적거렸던 당시 한국 영화판에서, 할말 못할 말 모두 가슴속에 담아놓고 집어삼키는 어눌한 그의 앞모습, 혹은 능청스러운 품바 타령에 그저 세월의 한을 흘려보내는 그의 뒷모습은 ‘연기자다운 연기자의 탄생’이라는 후광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우 안성기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더욱더 다양한 역할에 몸을 던지는 성실함과 장차 한국영화계를 대표하게 될 신예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는 혜안이 자리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장애인, 물불 안 가리고 성공에 매진하는 ‘성공시대’의 세일즈맨, ‘투캅스’의 산전수전 다 겪은 능청스러운 형사, ‘퇴마록’의 신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악역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그는 천만 번 변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해내며 어떤 것을 맡겨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확고히 자리잡는다.

이를 위해 안성기는 가위를 돌리고, 디스코를 추고, 탱고스텝을 밟았으며, 빗속에서 ‘싱잉 인 더 레인’을 불렀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심지어 악역을 했을 때도 그냥 안성기 하나의 이미지였노라고 술회한다).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박광수, 장선우, 강우석, 임권택의 배우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배우이기도 한 그는, 이제 자신의 인격의 결이 만들어내는 지름으로, 날카로운 현실의 작두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은 생래적인 휴머니즘으로 한국 영화계와 관객들을 감싸 안고 있다.

촬영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

-안성기씨는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김지미씨가 출연했던 ‘황혼열차’에서 처음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해서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영화 제작자였던 부친 안화영씨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버님이 그 영화에 직접 출연하셨죠. 김기영 감독님과 대학 동창이어서 두어 편 출연하신 적이 있거든요. ‘황혼열차’의 촬영을 준비하는데 대본에 등장하는 아이 역을 맡길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에요. 당시만 해도 아역 배우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고, 진짜 고아를 데려다가 시켜봤더니 잘 못하더라는 거지요. 마침 제가 그만한 나이 또래여서 시켜봤더니 곧잘 하거든요. 그래서 김 감독님이 바로 픽업을 한 거죠.

다음 작품은 조미령, 이민 선생님이 출연하신 ‘모정’이라는 영화였어요. 그때부터 소문이 나서 계속 영화에 출연하게 됐죠. ‘초설’ ‘10대의 반항’ 같은 김기영 감독님의 초기 리얼리즘 계통 영화에 계속 참여했어요.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보면 ‘내가 이런 역할을 했나’ 싶은 것도 많아요. 다 합치면 70편이 조금 넘을 겁니다.

불광동 소년원이며 남대문 지하도 옆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장면도 있었고, 서울역 앞에서 ‘손님 놀다 가세요’ 하고 외치는 호객꾼 역할도 기억이 나요. 시민회관 공사장에서 소매치기하는 연기도 했고요. 그 영화들은 대부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데, 개인적으로 ‘10대의 반항’이 가장 보고 싶어요. 그나마 몇 장 안 되는 스틸 사진이 전부거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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