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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

나무사업 외길 30년에 인도네시아 합판왕 되다

  • < 소설가 이상락 >

나무사업 외길 30년에 인도네시아 합판왕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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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1만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인데다, 인구도 예전에 한 번 조사한 수치를 기준으로 매년 출산율을 곱해서 ‘2억2000만 정도’라고 어림하는 실정이라니 경제 통계자료가 제대로 갖춰져 있을 리 없다. 그냥 속 편하게, 코린도의 계열사 하나가 인도네시아의 전체 일간신문을 1주일 동안이나 나오지 못하게 만들 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승은호 회장의 부친은 목재회사 ‘동화기업’을 창업했던 승상배씨(承相培·80세)다. 평안도 정주 출신인 그는 광복 후 월남, 미군의 군납공사 등으로 돈을 벌어 1951년에 동화기업을 세웠다. 60년대에 원목수입으로 재미를 본 그는 이왕이면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원목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1970년에 ‘인니동화’라는 회사를 현지에 설립한다. 한국남방개발, 경남기업에 이어 세 번째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셈이다.

현지인으로부터 벌채권을 사들인 인니동화는 한국인 기술자들(주로 서울농대 임학과 출신)을 파견해 본격적인 벌목사업을 벌인다. 원목들은 원목 운반선을 통해 인천 저목장으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합판이나 가구의 재료로 변모했다.

1975년, 승상배 당시 동화기업 사장은 사정기관으로부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다가 결국 탈세혐의(후에 무혐의 판결)로 구속되고, 그의 회사는 부도를 맞는다. 인도네시아의 인니동화도 현지의 외환은행 관리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코린도그룹의 전사(前史)다.

그의 아들 승은호는 부사장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해보려 해도 비빌 언덕이 없었다. 이때 승은호로 하여금 새로 시작해볼 수 있도록 원군이 되어준 것은 일본 기업이었다.



승은호가 동화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근무할 당시 후세라는 한 일본인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나고야에 근거를 둔 ‘고아’라는 회사 관계자를 연결시켜준 것이다.

“고아 그룹에 목재가공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의 원목담당자에게 1원 한 푼 조달할 수 없는 회사 형편을 얘기하고, 만일 나한테 원목 생산에 필요한 장비 구입비만 빌려준다면 나무를 베어서 갚겠다고 했지요. 원목 장비를 구비하자면 10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는데 그런 거액을 담보 하나 없이, 더구나 남의 나라 사람한테 빌려달라는 건 무모한 요구였지요.”



‘망명기업’ 코린도

그런데, 그 무모한 요구가 통했다. 일본 기업이 승은호의 신용을 담보로 100만 달러의 벌채장비 구입자금을 빌려준 것이다. 물론 ‘고아’측도 빌려준 장비 구입자금을 원목으로 상환받는다면 싼값에 나무를 살 수 있다는 이점을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야 빈 손바닥뿐인 사람에게 그런 거액을 지원하겠노라고 나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니동화와는 별개 사업이므로 회사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어요. 처음엔 ‘코리아-인도네시아’라 할까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 나열하는 것 같아서 제외했고, 그 다음에 ‘인도코’가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한국에서 ‘코’는 안 좋은 얘기에 쓰이는 수가 많잖아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 코가 석 자나 나왔다. 등등. 그래서 궁리 끝에 얻어낸 이름이 코리아-인도네시아를 합성한 코린도(KORINDO)였어요.”

그러니까 명색만 ‘동화기업 창업주 2세’였지 승은호가 코린도를 창업할 때 종자로 삼았던 돈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이 전부였던 셈이다. 흔히 “빈손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코린도야말로 승은호가 완벽하게 빈손으로 이국땅에 세운 기업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본 기업의 지원으로 130만 달러어치의 벌목장비가 인도네시아로 들어갔고, 장비만으로 원목을 생산할 수 없어 추가로 30만 달러의 운영 자금까지 지원받았다. 당시 인니동화에 있던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원목 벌채에 나섰는데, 승은호 회장은 이 무렵의 코린도를 ‘망명기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말이 쉬워 ‘원목생산’이지 인도네시아 밀림에서의 원목 벌채작업은 장난이 아니다. 대학 임학과를 나온 한국인 기술자와 현지인 길잡이로 구성된 임상조사팀이 밀림에 들어가 어느 지점에 어떤 크기, 어떤 종류의 나무가 얼마나 있는지, 벌채를 한다면 도로를 어떻게 내면 좋은지 따위를 일일이 지도에 표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를 분석하여 채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벌채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벌채권 매매협상을 벌인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군벌(軍閥) 등 권력 실세들이 벌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벌채권을 확보하면 임상조사 보고서에 따라 도로를 내고, 본격적인 벌목에 들어간다. 벌목 생산팀은 불도저 석 대와 톱질하는 세 사람이 한 팀이 된다. 불도저는 나무를 운반할 길을 닦거나 베어낸 나무들을 도로까지 옮기는 일을 담당한다.

일정 규격으로 자른 나무는 도로로 옮겨져 수십대의 트럭에 실어 운반한다. 한국의 트럭 운전수들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로 돈벌이 가자”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이 무렵이다.

나무 중에는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앉는 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트럭에 실어 원목을 선적할 수 있는 항구나 합판공장으로 직접 운송하고, 물에 뜨는 나무는 강물에 띄워 뗏목으로 묶은 다음 모터보트가 끌고 강을 따라 내려간다.



신발사업에도 진출

코린도의 임직원 중 상당수는 이 무렵부터 산판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밀림 속 임시 숙소인 나무 캠프에 머물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기는 예사고, 사슴을 삼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뱀의 먹이가 될 뻔했던 직원도 있다. 밤중에 도로로 튀어나온 호랑이가 목재운반 트럭에 치여 죽었는데, 한국인 인부들이 호피를 벗겨 말리고 호랑이뼈를 드럼통에 고아 환(丸)으로 만들어 귀국했다는 일화는 코린도 직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승은호 회장이 코린도를 설립하면서부터 원목경기가 되살아났다. 그는 일본 회사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을 3년 만에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70년대 말부터 원목수출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나가다가 85년도에 시행에 들어갔다. 합판 등으로 가공수출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예고된 정책이었는데도 85년이 되자 수많은 원목 생산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승은호 회장은 79년도에 한국의 합판공장 기술자들을 영입하여 현지에서 합판사업을 벌였다. 국내 업체로는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합판공장이었다.

주력인 목재사업과 전혀 관계 없는 사업도 벌였다. ‘이글’ 상표의 신발 공장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와 고용증진 정책에 부응해, 1985년에 설립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신발산업이 사양길에 있었다. 승 회장은 경험 많은 부산의 신발공장 기술자 80여 명을 데려가 신발생산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나이키나 리복 등과 주문생산계약을 맺어 납품했으나, 지금은 이글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만 공급하고 있다.

코린도의 ‘역전의 용사들’은 “더위나 말라리아나 맹수보다 훨씬 무서웠던 것이 현지 일꾼들이다”고 입을 모은다. 회교도인 이들은 오른손을 신성하게 여기는데, 만일 생각없이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날에는 금세 전투자세로 돌진해오기 일쑤였다. 종교와 관련해서 초기에 겪었던 애로사항 중 하나는, 그들의 기도습관이었다.

“합판공장에서 한창 일하던 현지 직공들이 작업을 하다 말고 갑자기 알라신께 기도 올릴 시간이라면서 작업장을 빠져나가서는, 바깥 한적한 곳에서 물로 손을 씻고 엎드려버리는 겁니다. 합판공장의 경우 라인별로 작업이 분담돼 있기 때문에 갑자기 몇 명이 빠지면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거기서 외국진출 기업의 현지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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